이 글은 직지 자유 문서이다. 레나 고영주님이 1999년에 입력해 주신 것을 올린다 – 직지지기 김민수 2005.8.19 10:45 PM EDT.
Contents
지은이
나혜석
출전
여자계, 1918년 9월
표지
– 태학사의 나혜석 전집을 입력본으로 했습니다.
본문
아 손녀야, 기특하다. 그렇게 몹시 앓던 병이 다 나았구나. 인제는 바로 머리도 곱게 빗고 옷도 얌전히 입고 책상 앞에 앉았구나. 할멈은 견딜 수 없이 좋았었다. 그래서 네 등을 뚜뚜 뚜드리며 그렇게 기뻐한다. 오냐, 어서 커라. 네 그 호리호리한 허리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오냐 어서 뜯어라. 네 그 꼬챙이 같은 소리로 바이올린을, 아아 내 몸이 선녀가 된 것 같다. 내 앞에 천사가 시종 드는 것 같다. 갖은 찬란한 호접이 날아드는 것 같다. 각색 향기로운 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나는 차마 애처로워 볼 수 없는 네 그 바르르 떨고 힘에 겨워 애써서 치는 것이 왜 그리 기쁘고 좋은지 모르겠다. 손녀야 기특하다. 네가 발 한 자국 옮겨 놓는 것만 보아도 할멈의 마음속에 기쁨이 끓어 나온다. 네가 이전과 같이 힘들지 않게 말 한 마디하는 것만 보아도 할멈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닫는다.
손녀야 사위스러운 말이다마는 만일 네가 그대로 죽었더라면 어찌할 뻔했을까. 지금 생각만 해도 몸이 으쓱해지고 마음이 간질간질해 온다. 참 아슬아슬하였다. 이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너만 믿고 살던 할멈은 어디다 의탁을 하고 누구를 믿고 살아가랴. 어멈 찾으며 산지사방(散地四方)으로 울고 다니는 어린 자식들을 참혹하고 눈물이 나서 어찌 보았으랴. 참 행운이었다. 네가 회생하여 오늘 나에게 이런 견딜 수 없는 기쁨을 줄 줄이야 어찌 감히 바랐으랴. 할멈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직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린다.
지금 다시 회사(回思)하니 소름이 찍찍 끼친다. 너는 금지옥엽같이 귀엽게 자라났다. 기침 한 번만 하여도 패독산을 달인다, 눈만 힘없이 떠도 인삼 녹용을 먹인다 하던 너이었다. 그렇게 자라난 네가 남의 집 위층 좁은 방에 아무도 들여다보아 주지 않고 그렇게 병이 위중하도록 약 한 모금 먹지 못하고 그렇게 핼쑥한 얼굴로 머리가 뒤범벅이 되어서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눈꺼풀이 푹 꺼져서 드러누웠었다. 도무지 몰랐던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이 형상을 처음 당하여 얼마나 놀랐으랴. 나는 뜻 없이 슬픔이 끓어 나와서 이불 속에 든 네 손을 꺼내어 잡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제서야 너는 겨우 눈을 힘없이 뜨고 “이게 웬일이오, 아이고 죽겠소.” 힘없이 겨우 이 말만 하고 도로 눈을 감았다. 나는 그때에 마치 찬물을 내 등에 들어붓는 것 같았었다. 그러더니 너는 다시 일어나서 구역질을 하고 끈적끈적한 가래침을 뱉으려고 씩씩 애를 무한히 썼다. 내 눈살은 저절로 찌푸려졌고 내 몸은 바싹 오그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금방 네 입에서 나올 침이 벌건 피면 어찌하나 하여 내 마음이 바싹바싹 조였다. 그러나 네 병은 폐병이 아니고 위병이므로 허연 침이 나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에 왜 그리 금할 수 없이 흑흑 느껴 울었었는지.
나는 네 병이 다 나은 지금이라도 차마 또 내 입에 되풀이할 용기가 아니 나왔다. 그것은 내가 전에 극히 사랑하던 친구 하나가 폐병으로 피를 뱉고 기침을 한번 시작하면 온몸이 불덩이같이 열이 일어나 숨이 차서 애를 쓰는 것을 목도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날 네가 애쓰는 형상에 우연한 자극을 받아 1년 전 일을 회사하는 동시에 그렇게 눈물이 흘렀었다. 그 사람은 그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그래서 추도회도 하고 1년제까지 지냈다. 내가 주야로 마음이 아파서 애를 쓰고 가슴을 치며 후회한 것은 ‘내가 왜 그 친구를 위하여 내 공부를 폐지하고 철야하여 간호를 못하였던구.’ 함이었었다. ‘내 정성을 다하여 그 친구에게 위안을 주었더라면 그는 결코 죽지 않았으리라.’ 함이었었다. 내가 곤히 자다가도 깜짝 놀라 깨이면 먼저 내 뇌를 때리며 내 살을 찌르는 것은 내게 이러한 유한(遺恨)이 있음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벌써 나와는 딴 세계 사람이라. 내가 아무리 안아 보고 싶어도 안을 수도 없고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도 없다. 그래서 내가 눈물을 씻고 “오냐, 걱정 마라. 내가 있다.” 할 때에는 나는 내 마음에 후회, 유한, 원애(怨哀)의 중적(重積)을 너로 인하여 풀어 보려 함이었고 내 몸에 품고 있는 정력과 성심을 네게 바쳐 보려는 열정이 끓어 나옴이었다. 네 손을 내가 만질 수 있고 네 몸을 내 가슴에 안을 때에 나는 미칠 듯이 기뻤었다. 그러므로 네 병이 낫고 아니 낫는 데 따라 내가 살고 죽는 운명의 길이 매달린 것 같았다. 불행히 네가 그 병으로 죽었더라면 나는 어젯밤과 같이 단잠도 못 이루었을 것이요, 오늘 조반을 맛있게도 못 먹었을 터이다. 나는 정신 착란이 되고 뇌빈혈이 되어 졸도하였을 터이다. 아아 행운이다. 네 병이 전쾌(全快)되고 내가 다시 살아난다. 나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음이 나오고 어깨가 떨어지도록 춤이 나온다. 나는 또다시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련다.
너는 세 살 적에 어머니를 잃었다고? 그래서 할머니가 너를 길러 내셨다고? 네가 종두(種痘)로 앓을 때, 네가 열병에 걸려 죽어 갈 때 할머니가 울기도 많이 하시고 밤도 많이 새셨다고. 그러므로 너(원문은 ‘나’)는 “우리 할머니의 은혜가 태산 같소.” 하며 네 눈에 눈물이 글썽렁글썰렁해졌다. 다시 내 손목을 쥐며 “당신은 내 할머니요, 내가 이번에 살아난 것이 전혀 할머니의 정성이오.” 하였다. 나는 이 순간에 정신이 황홀해지고 무어라 대답을 주저하였다. 나는 묵념과 정사(情思)에 빠져 자연히 아무 말이 아니 나오고 감사한 호흡은 좁은 흉곽 안에 반선(蟠旋)하여 썩썩 숨소리만 내 귀에 우레 소리와 같이 들렸다. 오냐 네가 주는 할머니의 명칭을 나는 사절 아니하고 받으련다. 그리고 어머니 없고 할머니 떨어져 있는 외로운 너를 내 손녀로 귀애하고 아껴 주려 한다.
감사하다. 정말 감사하다. 만일 네가 내게 이만한 명칭을 주지 아니하였던들 나는 말없이 드러누운 병자 옆에 장장 시일을 지키고 앉았기도 싫증이 났었을 터이다. 이것저것 심부름 다니기도 멀미도 났을 터이다. 내가 가깝지도 않은 길을 도보로 학교에서 영시 휴업(零時休業) 시간에 뛰어가서 서서 보고 회보(回步)하기를 여일(如一) 연속함도 오직 네게로 받은 ‘할머니요.’의 힘이 시킴이었다. 원근불고(遠近不顧) 중에 일대 고부(一大鼓舞)의 꿈을 이루었던 것 같다. 여하튼 네 붉은 입술에서 떨어진 이 복음이 바짝 건조한 내 영에 펌프를 대어주었고 발발 떠는 내 육(肉)에 화재와 같은 활력을 준 것이다. 아아 나는 네게로 받은 이 예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흠뻑 축여 놓으련다. 더 뜨겁게 펄펄 뛰련다. 나는 눈물이 쏟아지도록 네게 감사를 바친다.
크리미아 전역(戰役)에 나이팅게일 같은 천사가 돌현(突現)하여 수만 명 악역(惡疫: 악성 전염병)의 고병(苦病)을 구해 주었단다. 침대 상에서 신음하던 연합군들은 나이팅게일을 부르짖어 “천사여, 천사여, 당신의 지나가는 발소리만 들어도 내 몸의 아픔이 스러지오. 당신의 한 번 웃는 웃음에는 내 아픔이 잊혀지나이다.”했단다. 오냐 나는 네게서 받은 ‘할머니’로 만족하련다. 그러나 얘 손녀야, 나도 천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수만 명의 할머니가 되고 싶다. 아이고 좀 그렇게 되어 보았으면 좋겠다. 생시는 바라지 못하더라도 오늘 밤 꿈에라도 내가 그렇게 좀 되어 보았으면 좀 좋겠다……. 아아 고맙다. 네게서 받은 할머니는 꿈이 아니라 확실히 이것이 생시로구나. 아이고, 나는 기뻐서 어찌하나. 또 네게 무슨 보수(報酬)를 해야 좋을는지, 나도 너를 웃게 하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전심진력으로 준비해 보련다. 그중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네게 바치련다. 나는 생각만 해도 좋아서 이렇게 주먹을 꼭 쥐고 온몸을 흔든다. 고맙다.
깍두기 고추장을 먹고서야 너는 정신이 반짝 나며, 감구미(甘口味)를 붙였다고 했지? 글쎄 내가, 그 궂은 새우젓에 맵디매운 고춧가루를 버무려 이 손으로 주물럭주물럭해서 네게 갖다가 준 나나, 또 그 고린내가 풀풀 나는 보기만 해도 눈물이 빠질 그렇게 빨간 깍두기를 먹으며 “참 맛도 좋소.” 하는 너나 생각해 보면 우습다. 달콤하고 냄새도 좋은 오므라이스나 가기후라이(굴튀김)의 맛보다도 그 짜디짜고 맵디매운 깍두기 맛이 그다지 좋단 말이지? 그러면 번쩍번쩍하는 쟁반에 받치어 하얀 유리병 속에 각색 원소(元素)며 산(酸)을 뺀 것은 아니로구나? 역시 깍두기! 그 어두컴컴한 오지 항아리에 솜씨 없이 울쑥불쑥 담아서 할멈이 갖다가 준 그 깍두기로 네 병근이 쏙 빠졌어!? 손가락을 넣었다가 쪽쪽 빠니까 정신이 번쩍 나더란 말이지? 그러면 너는 그 깍두기 맛으로 회생한 너로구나. 오냐 너는 죽기 전에는 그 깍두기가 네 정신을 반짝하게 해 주던 인상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게 되었구나. 왜? 참 남들이 맛있다는 스프나 빵보다도 우리의 입에는 깍두기만치 맛있는 것을 못 보았다. 그리고 라이스 카레나 미소시루를 먹어도 깍두기를 마저 먹어야 속이 든든해진다. 그리고 소화도 잘 되는구나. 이제 네 뱃속에는 깍두기 짭찔한 멀국(국물)이 가득 차 있을 터이니까 소화도 잘될 터이다. 위병도 또 발생할 리가 없겠지. 오냐 할멈은 안심한다. 너는 할 수 없이 깍두기의 딸이다(원문에는 ‘딸다’). 너도 인제 꼭 그런 줄을 알았을 줄 믿는다. 깍두기로 영생하는 내 기특한 손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