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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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죽음

  • 예전에 찾아놓은 것을 이제야 올립니다. 문서 정보상에는 이 한수님이 1998년 8월에 입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교정에 참고한 책은 학원출판공사의 학원한국문학전집 4권입니다.
  • 직지에 처음 올린 때: 2009.7.1.

지은이

현진건

출전

백조 3호 <1923>

본문

‘조모주 병환 위독’

3월 그믐날 나는 이런 전보를 받았다. 이는 XX에 있는 생가(生家)에서 놓은 것이니 물론 생가 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단 말이다. 병환이 위독은 하다 해도 기실 모나게 무슨 병이 있는 게 아니다. 벌써 여든 둘이나 넘은 그 할머니는 작년 봄부터 시름시름 기운이 쇠진해서 가끔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그 동안 자손들로 하여금 한두 번 아니게 바쁜 걸음을 치게 하였다.

그 할머니의 5년 맏인 양조모(養祖母)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이승에서는 다시 못 보겠다. 동서라도 의로 말하면 친형제나 다름이 없었다. 60 년을 하루같이 어디 뜻 한 번 거슬러 보았을까—.”

연해연방 이런 넋두리를 섞어가며 양조모는 울었다. 운다하여도 눈 가장자리가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릴 뿐이었다. 워낙 연만(年滿)한 그는 제법 울음답게 울 근력조차 없었다.

“그래도 그 할머니는 팔자가 좋으시다. 자손이 늘은 듯하고— 아이고.”

끝으로 이런 말을 하며 울음이 한숨으로 변하였다. 자기가 너무 수(壽)한 까닭으로 외동자들을 앞세워 원이 되고 한이 되어 노상 자기의 생을 저주하는 그는 아들이 둘(본래 셋이더니 그 중에 중부(仲父)가 일찍이 돌아갔다), 직손자가 여덟이나 되는 그 할머니를 언제든지 부러워하였다.

“지금 돌아가시면 호상(好喪)이지. 아드님이 백발이 허연데—.”

라고, 양모(養母)도 맞방망이를 치며 눈을 멍하게 뜬다. 나도 과연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나는 그날 X차로 XX를 향하고 떠났다.

새로 석 점이 지나 기차를 내린 나는 벌써 돌아가시지나 않았나고 염려를 마지않으며 캄캄한 좁은 골목을 돌아들어 생가(生家)의 삽짝 가까이 다다를 제 곡성이 나는 듯 나는 듯하여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하건만 다행히 그 불길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삽짝은 빠끔히 열려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추녀 끝에 달린 그을음 앉은 괘등(掛燈)이 간 반밖에 아니되는 마루와 좁직한 뜰을 쓸쓸하게 비추고 있었다. 우물 둑과 장독간의 사이에 위는 거적으로 덮고 양 가는 삿자리로 두른 울막을 보고 나는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상청(喪廳)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어림의 짐작은 틀리었다. 마루에 올라선 내가 안방 아랫방에서 뛰어나온 잠 못 잔 피로한 얼굴들에게 이끌리어 할머니의 거처하는 단칸 건넌방으로 들어가니 할머니는 깔아진 듯이 아랫목에 누웠으되 오히려 숨은 붙어 있었다. 그 앞에 앉은 나를 생선의 그것 같은 흐릿한 눈자위로 의아롭게 바라본다.

“얘가 누구입니까. 어머니 얘가 누구입니까.”

예안(禮安) 이씨로, 예절 알기와 효성 있기로 집안 중에 유명한 중모(仲母)는 나를 가리키며 병자의 귀에 대고 부르짖었다.

“몰라—.”

“환자는 담이 그르렁그르렁하면서 귀찮은 듯이 대꾸하였다.

“제가 누구입니까, 할머니!”

나는 그 검버섯이 어릉어릉한 뼈만 남은 손을 만지며 물어 보았다. 나의 소리는 떨리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OO이 아닙니까.”

“응, 네가 OO이냐—.”

우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그윽하나마 내가 잡은 손에 힘들 주는 듯하였다. 그 개개풀린 눈동자 가운데도 반기는 빛이 역력(歷歷)히 움직였다.

할머니의 병환이 어젯밤에는 매우 위중해서 모두 밤새움을 한 일, 누구누구 자손을 찾던 일, 그 중에 내 이름도 부르던 일, 지금은 한결 돌린 일— 온갖 것을 중모는 나에게 알으켜 주었다.

나는 그날 밤을 누울락앉을락, 깰락졸락 할머니 곁에서 밝혔다. 모였던 자손들이 제각기 돌아간 뒤에도 중모만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불교의 독신자인 그는 잠오는 눈을 비비기도 하고 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밤새도록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는 적적한 새벽녘에 해로가(薤露歌)와 같이 처량히 들렸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 효심의 지극함과 그 정성의 놀라움에 탄복하였다.

아침저녁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방이라야 단지 셋밖에 없는데, 안방은 어머니 , 형수들이 점령하고 뜰아랫방 하나 있는 것은 아버지, 삼촌, 당숙들에게 빼앗긴 우리 젊은이 패, 사, 육촌 형제들은 밤이 되어도 단 한 시간을 눈붙일 곳이 없었다. 이웃집에 누누이 교섭한 끝에 방 한 칸을 빌려서 번차례로 조금씩 쉬기로 하였다. 이 짧은 휴식이나마 곰비임비 교란되었나니 그것은 10분들이로 집에서 불러들이는 까닭이다. 아버지와 삼촌네들의 큰 심부름 잔심부름도 적지 않았지만 할머니 곁에 혼자 앉은 중모의 꾸준한 명령일 때가 많았다. 더욱이 밤새 1시에나 2시에나 간신히 잔을 들어 꿀보다 더 단잠이 온몸에 나른하게 퍼진 새벽녘에 우리는 끄들리어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병환이 이렇듯 위중하신데 너희는 태평치고 잠을 잔단 말이냐.”

우리가 건너방에 들어서면 그는 다짜고짜로 야단을 쳤다. 그 중에도 가장 나이 어리고 만만한 내가 이 꾸중받이가 되었다. 인정사정 없는 그의 태도가 불쾌는 하였지만 도덕적 우월을 빼앗긴 우리는 대꾸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다들 뭐란 말이냐. 나는 한 달이나 밤을 새웠다. 며칠들이나 된다고.”

졸음 오는 눈을 비비는 우리를 보고 그는 자랑스럽게 또 이런 꾸중도 하였다.

‘놀라운 효성을 부리는 게 도무지 우리 야단칠 밑천을 장만하는 게로구나.’

나는 속으로 꿀꺽꿀꺽하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한 번은 또 그의 명령으로 우리는 건넌방에 모여들었다. 그 방문은 열어 젖히었는데 문지방 위에 할머니의 지팡이가 놓이고 그 밑에 또 신으시던 신이 놓여 있었다. 방안 할머니의 머리맡에는 다라니(陀羅尼)가 걸려 있다.

‘할머니가 운명을 하시나 보다!’

우리는 번개같이 이런 생각을 하며 할머니 곁으로 다가들었다. 그는 담을 그르렁그르렁거리며 혼혼히 누워 있었다. 중모는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며 그의 귀에 들이대고 울음소리로 아미타불과 지장 보살을 구슬프게 부르짖고 있었다.

한동안 엄숙한 긴장이 여기 있었다. 모두 같은 일을 기대하면서.

10분! 20십분! 환자의 신상에는 아무 별증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잠이 드신 모양입니다.”

이윽고 아버지가 이 긴장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리고 중모를 향하여 ,

“잠 주무시게스리 염불(念佛)을 고만 뫼십시오.”

하고, 나가 버렸다. 그 뒤를 따라 빽빽하게 들어섰던 자손들이 하나씩 둘씩 헤어졌다.

그래도 눈물을 섞어가며 염불을 말지 않던 중모가 얼마 뒤에 제물에 부처님 찾기를 그치었다. 그리고 끝끝내 남아 있던 나에게 할머니가 중부가 왔다고 하던 일, 자기를 데리고 교군이 왔다던 일, 중모의 손을 비틀며 어서 가자고 야단을 치던 일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다가 숨구멍에서 무엇이 꿀꺽하더니 그만 저렇게 정신을 잃으신 것을 설명해 듣기었다.

그날 저녁때에 할머니는 여상히 깨어나셨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신과 지팡이가 놓였다 치였다, 다라니가 벽에 걸리었다 떼었다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자손의 얼굴은 자꾸자꾸 축이 나 갔었다. 말하기는 안되었지만 모두 불언 중에 할머니의 하루바삐 끝장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조차 맞추어서 칠까지 먹여 놓았다. 내가 처음 오던 날 상청(喪廳)이 아닌가고 놀래던 그 울막도 이 관을 놓아두려는 의짓간이었다.

그러하건만 할머니는 연해 한 모양으로 그물그물하다가 또 정신을 차리었다. 아니 정신이 돌아오는 때가 도리어 많아 간다. 자기 앞에 들어서는 자손들을 거의 틀림없이 알아맞췄다.

그리고 가금 몸부림을 치면서 일으켜 달라고 야단을 쳤다. 이럴 때에 중모는 기북(奇癖)스럽게도 염불(念佛)을 모시었다

“어머니 어머니, 가만히 계셔요. 가만히 계셔요.“

그는 몸부림하는 할머니를 제지하면서 이렇게 타일렀다.

“저를 따라 염불을 뫼셔요.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 일어 날란다.”

“에그, 왜 그러셔요. 가만히 계셔요, 제발 덕분에. 나무 아미타불,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할머니는 마지못하여 중모를 따라 두어 번 입술을 달싹달싹하더니 또 얼굴을 찡그리며 애원하는 어조로,

“인제 고만 뫼시고 날 좀 일으켜 다고. 내 인제 고만 가련다.”

“인제 가세요! 가만히 누워 가시지요. 왜 일어나시긴. 나무 아미타불— 왕생극락— 나무 아미타불—”

할머니는 귀찮아 못 견디겠다는 듯이 팔을 내어 저으며,

“듣기 싫다, 염불 소리 듣기 싫다! 인제 고만 해라.”

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중모는 질색을 하며 더욱 비장(悲壯)하게 부처님을 찾았다.

“듣기 싫다! 듣기 싫어. 나는 고만 갈 테야.”

할머니는 또 이렇게 재우쳤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적이 의외의 감이 있었다. 할머니는 중모보다 못하지 않은 불교의 독신자이다. 몇십 년을 하루 같이 새벽마다 만수향을 켜 놓고 염불 모시기를 잊지 않은 어른이다. 정신이 혼혼된 뒤에도 염주(念珠) 담은 상자와 만수향만은 일일이 아랑곳하던 어른이다.

“…..하루에도 만수향을 세 갑 네 갑 켜시겠지. 금방 사다 드리면 세 개씩 네 개씩 당장 다 켜 버리시고 또 안 사온다고 꾸중이시구나—.”

작년 가을 내가 귀성하였을 제 계모가 웃으며 할머니의 노망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만수향 켜는 것을 그 하나로 헤아렸다.

그러하던 할머니가 왜 지금 와서 염불을 듣기 싫다는가? 그다지 할머니는 일어나고 싶으신가? 죽어 가면서도 일어나려는 이 본능 앞에는 모든 것이 권위를 잃은 것인가?

“저렇게 일어나시려니 좀 일으켜 드리지요.”

나는 보다 못해 이런 말을 했다.

“안 된다, 일으켜 드릴 수가 없다. 하도 저러시길래 한 번 일으켜 드렸더니 어떻게 아파하시는지 차마 뵈올수가 없었다.”

“어째 그래요?”

나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이 반문에 대한 중모의 설명은 더욱 놀란 것이었다.

할머니가 작년 봄부터 맑은 정신을 잃은 결과에 늙은이가 어린애 된다고, 뒤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이 두어 달 전부터 물을 자꾸 청해 잡수시고 옷에고 욧바닥에 함부로 뒤를 보았다. 그것을 얼른 빨아 드리지 못한 때문에 제물에 뭉켜지고 말라 붙은 데다가 뜨거운 불목에 데이어 궁둥이 언저리가 모두 벗겨졌다. 그러므로 일어나려면 그곳이 땅기고 박이어 아파하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을 들은 나는 할머니를 모로 누이고 그 상처를 보았다. 그 자리는 손바닥 넓이만치나 빨갛게 단 쇠로 지진 듯이 시커멓게 벗겨졌는데 그 위에는 하얀 테가 징그럽게 끼였고 그 가장자리는 독기를 품고 아른아른히 부르터 올라 있다. 나는 차마 더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양조모, 양모가 부러워하던 늘은 듯한 자손은 다 무엇을 하고 우리 할머니를 이 지경이 되게 하였는가? 왜 자주 옷을 갈아입혀 드리며 빨아 드리지 못하였는가? 이 직접 책임자인 계모가 더할 수 없이 괘씸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를 그르다고도 할 수 없다. 위에도 말하였거니와 할머니가 이리 된 지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벌써 몇 달이 흘리는 뒤를 그때 족족 빨아낼 수 없으리라. 더구나 밤에 그런 것이야, 일일이 알 수도 없으리라. 하물며 계모는 시집오던 첫날부터 골머리를 앓으리만큼 큰 병객이다. 병명은 의원을 따라 혹은 변두리머리라고도 하고 혹은 뇌진이라고도 하고 혹은 선천부족(先天不足)이라고도 하였지마는 하나도 고쳐 주지는 못하였다. 삼십이 될락말락하건만 육십이나 칠십이 다 된 노인 모양으로 주야 장천 자리 보전하고 누워 있는 터이다. 제 몸이 괴로우니 모든 것이 싫은 것이다. 그리고 나까지 아우르면 아버지 슬하에 아들만 넷이나 되건마는 지금 지금 육십 노경에 받드는 어느 아들, 어느 며느리 하나이 없다. 집안이 넉넉지 못한 탓으로 사방에 흩어져서 제 입 풀칠하기에 눈코를 못 뜨는 까닭이다.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쓴 물만 입안에 돌 뿐이다.

그후에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때 내가 할머니 곁에 갔을 적이었다. 할머니는 그 뼈만 남은 손으로 나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OO아, OO아.”

할머니는 문득 나를 불렀다.

“인제는 다시 못 보겠다, 인제는 다시 못 보겠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인제 내가 안 죽니, 그런데 너, 내 청하나 들어주겠니.”

“네? 무슨 말씀입니까.“

“나, 나 좀 일으켜 다고.”

나는 눈물이 날 듯이 감동하였다. 어찌 차마 이 청을 떼칠건가. 나는 다짜고짜로 두손을 할머니 어깨 밑으로 넣으려 하였다. 이것을 본 중모는 깜짝 놀라며 나를 말렸다.

“얘, 네가 왜 또 그러니, 일으켜 드리면 아파하신대두 그애가 그리네.”

“그때 약을 사다 드렸으니 그 자리가 인제는 아물었겠지요.”

나는 데었단 말을 듣던 그날 약 사다 드린 것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였다.

“아니야, 아직 다 낫지 않았어. 오늘 아침에도 일으켜 드렸더니 몹시 아파하시더라.”

나는 주춤하였다. 할마니의 앓는 것이 애처로왔음이다.

“어머니! 어머니! 가만히 누워 계셔요, 네? 일어나시면 아프십니다.”

중모는 또 자상히 타이르듯 말하였다. 할머니는 물끄러미 나와 중모를 번갈아 보시더니 단념한 듯이 눈을 감았다. 한참 앉아 있다가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 때에 할머니가 눈을 번쩍 뜨며 문득,

“어데를 가?”

라고 물었다. 나는 주춤 발길을 멈추었다.

할머니는 퀭한 눈으로 이윽고 나를 쳐다보더니 무엇을 잡을 듯이 손을 내어 저으며 우는 듯한 소리로,

“서방님! 제발 나를 좀 일으켜 주십시오. 서방님, 제발 나를 좀 일으켜 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었다.

“에그머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애가 OO이 아닙니까. 서방님이 무엇이야요.”

중모는 바싹 할머니에게 다가들며 애처롭게 알으켜 드렸다. 이때 마침 할머니가 잡수실 배즙을 가지고 들어오던 둘째 형수가 무슨 구경거리나 생긴 듯이 안방을 향하고 외쳤다.

“에그, 할머니 좀 보아요! 서울 아우님더러 서방님! 서방님! 하십니다.”

이 외침을 듣고 자부들은 모여들었다. 그들의 눈은 호기심에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또 할머니의 청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어떠한 나쁜 영향을 초치(招致)할지라도 아니 일으켜 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욧바닥 위로 반 자를 떠나지 못하여,

“아야야—.”

라고 외마디 소리를 쳤다. 나는 얼른 들어올리던 손을 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눕기 싫어하던 요 위에 누운 뒤에도 할머니는 앓기를 말지 않았다. 적지 아니한 꾸중을 모시었다.

이윽고 조금 진정이 되더니만 또 팔을 내저으며 기를 쓰고 가슴을 덮은 이불자락을 자꾸자꾸 밀어 내리었다. 감기나 들까 염려하는 중모는 그것을 꾸준히 도로 집어 올렸다.

할머니는 손을 내어 밀더니 이번에는 내 조끼 단추를 붙잡아 당기었다.

“왜 이리 하십니까? 단추를 빼란 말씀입니까?”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끄덕였다 하여도 끄덕이려는 의사를 보였을 뿐이었다. 나는 단추 한 개를 빼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자꾸 쪼기의 단추와 씨름을 말지 아니하였다. 나는 단추를 낱낱이 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니 그는 또 옷고름과 실랑이를 시작하였다.

“옷고름을 끄를까요?”

“응!”

나는 옷고름을 끌렀다. 끄른 뒤에 할머니는 또 소매를 잡아당기었다.

“왜 이리 하셔요?”

“버, 벗어라, 답답치 않니?”

여기저기서 물어 멈추려고 애쓰는 웃음이 키키하였다.

나는 경멸과 모욕의 시선을 그들에게 던졌다. 자기가 얼마나 답답하고 갑갑하길래 남의 단추 끼운 것과 옷고름 맨 것과 저고리 입은 것조차 답답해 보일 것이랴! 여기는 쓰디쓴 눈물과 살을 더미는 슬픔이 있어야 하겠거늘, 이 기막힌 광경을 조소로 맞아야 옳을까?

나는 곧 그들에게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하되 나의 마음을 냉정하게 살펴본 즉 슬프다! 나에게는 그들을 모욕할 권리가 없었다. 형수들 앞에서 앞가슴을 풀어 젖히라는 할머니가 민망스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였다. 환자를 가엾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의 속 어딘인지 웃음이 움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내가 젊은이 패가 모은 이웃집 방에 들어갔을 제 무슨 재미스러운 일이나 보고 온 사람 모양으로 득의양양히 이 이야기를 하고서 허리를 분질렀다—.

거기에서는 할머니의 병세에 대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그들은 하나도 한가한 이가 없었다. 혹은 변호사, 혹은 은행원, 혹은 회사원으로 다 무한년하고 있을 수 없는 형평이었다.

“나는 암만해도 내일은 좀 가 보아야 되겠는데 나는 그 전보를 보고 벌서 돌아가신 줄 알았어. 올 때에 친구들이 북포(北布)니 뭐니 부의(賻儀)를 주길래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이게 웬일이냐 하니까, 그 사람들 말이, 돌아가셔도 자손들에게 그렇게 전보를 놓으니, 하데 그려. 그래 모두 받아 왔는데— 허허허—.”

그 중에 제일 연장자로 쾌활하고 말 잘하는 백형(佰兄)은 웃음 섞어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암만해도 오늘 내일 돌아가실 것 같지는 않는데— 이거 큰일 났는걸, 가는 수도 없고—”

“딴은 곧 돌아가실 것 같지는 않아—.”

은행원으로 있는 육촌은 이렇게 맞방망이를 쳤다.

“의사를 불러서 진단을 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부산 방직 회사에 다니는 사촌이 이런 제의를 하였다.

“옳지, 참 그래 보아야 되겠군.”

아버지께 이 사연을 아뢰었다.

“시방 그물그물하시지 않나, 그러면 하여간 의원을 좀 불러 올까.”

의원은 아버지와 절친한 김 주부(金主簿)를 청해 오기로 하였다.

갓을 쓴 그 의원은 얼마 아니 되어 미륵(彌勒)같은 몸뚱이를 환자방에 나타내었다. 매우 정신을 모으는 듯이 눈을 내리감고 한나절이나 진맥을 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앉는다.

“매우 말씀하기 안되었소마는 아마 오늘밤이 아니면 내일은 못 넘길 것 같소.”

매우 말하기 어려운 듯이. 기실 조금도 말하기 어렵지 않은 듯이, 그 의원은 최후의 판결을 언도하였다.

“글쎄 그래 워낙 노쇠하여서 오래 부지를 하실 수 없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아버지는 맞방망이를 쳤다.

가려던 자손은 또 붙잡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날 저녁부터 한결 돌리었다. 가끔 잡수실 것을 찾기도 하였다. 잡숫는 건 고작해야 배즙, 국물에 만 한 술도 안되는 진지였다. 죽과 미음은 입에 대기도 싫어하였다. 그리고 전일에 발라 드린 양약(洋藥)의 효험이 나서 상처가 아물었든지 자부와 손부에게 부축되어 꽤 오래 일어나 앉게도 되었다.

그 이튿날이 무사히 지나가자 한의(韓醫)의 무지를 비소(誹笑)하고 다른 것은 몰라도 환자의 수명이 어느 때까지 계속될 시간 아는 데 들어서는 양의(洋醫)가 나으리라는 우리 젊은 패의 주장네 의하여 XX의원 원장으로 있는 천엽 의학사(千葉醫學士)를 불러오게 되었다.

그는 진찰한 결과에 다른 증세만 겹치지 않으면 이삼 주일은 무려(無慮)하리라 하였다.

“그래, 그저 그럴꺼야. 아직 괜찮으신데 백주에 서둘고 야단을 했지.”

하고, 일이 바쁜 백형(伯兄)은 그날 밤으로 떠나갔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우리가 집에 돌아오니까 할머니 곁을 떠난 적 없는 중모가 마당에서 한가롭게 할머니의 뒤 흘린 바지를 빨고 있다가 웃는 낯으로 우리를 맞으며,

“할머님이 오늘 아침에는 혼자 일어나셨다. 시방 진지를 잡수시고 계시다. 어서 들어가 뵈어라.”

나는 뛰어들어갔다. 자부와 손부의 신기해 여기는 시선을 받으면서 할머니는 정말 진지를 잡숫고 있었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할머니, 어떻게 일어나셨습니까?”

할머니는 합죽한 입을 오물오물하여 막 떠 넣은 밥 알맹이를 삼키고,

“내가 혼자 일어났지, 어떻게 일어나긴. 흉악한 놈들, 암만 일으켜 달라니 어데 일으켜 주어야지. 인제 나 혼자라도 일어난다.”

하며 자랑스럽게 대답하였다.

“어제 의원이 왔지요. 인제 할머니가 곧 나으신대요.”

“정말 낫겠다고 하든, 응?”

하고 검버섯 핀 주름을 밀며 흔연(欣然)한 웃음의 그림자가 오래간만에 그의 볼을 스쳤다. 나의 눈엔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밤차로 모였던 자손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나도 그날 밤에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말갛게 개인 하늘은 구름 한 점도 없고 아른아른한 아지랑이가 그 하늘거리는 깁 올이로 봄 비단을 짜내는 어느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나는 깨끗하게 춘복(春服)을 차리고 친구 몇몇과 우이동 앵화(櫻花)구경을 막 나가려던 때이었다. 이때에 뜻 아니한 전보 한 장이 닥치었다.

‘오전 3시 조모주 별세’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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