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직지 자유 문서이다. 국문도령 김기돈님이 2000년에 입력하고 김봉좌님이 교정해해 주신 것을 2001년 6월에 처음 올린다 – 직지지기 2005.8.28 11:40 PM EDT.
Contents
지은이
이상
출전
문장 2(1939.3)
표지
- – 한국현대대표소설선 5′.창작과 비평사.1996. 판에 실린 내용을 참조하여 인터넷에 떠도는 작품을 교정 본 내용입니다.
본문
1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2
꿈―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자는 것이 아니다. 누운 것도 아니다. 앉아서 나는 듣는다.(12월 23일)
“언더 더 워치―시계 아래서 말이예요―파이브 타운스―다섯 개의 동리란 말이지요―이 청년은 요 세상에서 담배를 제일 좋아합니다―기다랗게 꾸부러진 파이프에다가 향기가 아주 높은 담배를 피워 빽빽 연기를 풍기고 앉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낙이었답니다.”
- (나야말로 동경 와서 쓸데없이 담배만 늘었지. 울화가 푹 치밀 때 저 폐까지 쭉 연기나 들이켜지 않고 이 발광할 것 같은 심정을 억제하는 도리가 없다.)
“연애를 했어요! 고상한 취미, 우아한 성격, 이런 것이 좋았다는 여자의 유서예요―죽기는 왜 죽어―선생님―저 같으면 죽지 않겠습니다―죽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있다지요―그렇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나는 일찍이 어리석었더니라. 모르고 연(姸)이와 죽기를 약속했더니라. 죽도록 사랑했건만 면회가 끝난 뒤 대략 20분이나 30분만 지나면 연이는 내가 ‘설마’ 하고만 여기던 S의 품안에 있었다.)
“그렇지만 선생님―그 남자의 성격이 참 좋아요―담배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이 소설을 읽으면 그 남자의 음성이 꼭 웅얼웅얼 들려오는 것 같아요. 이 남자가 같이 죽자면 그때 당해서는 또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 같아서는 저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사람이 정말 죽을 수 있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 있다면 저도 그런 연애 한번 해보고 싶어요.”
- (그러나 철부지 C양이여. 연이는 약속한 지 두 주일 되는 날 죽지 말고 우리 살자고 그럽디다. 속았다. 속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나는 어리석게도 살 수 있을 것을 믿었지. 그 뿐인가. 연이는 나를 사랑하느니라고까지.)
“공과(功課)는 여기까지밖에 안했어요―청년이 마지막에는―멀리 여행을 간다나봐요.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 (여기는 동경이다. 나는 어쩔 작정으로 여기 왔나? 적빈(赤貧)이 여세(如洗)―꼭도가 그랬느니라―재주 없는 예술가야 부질없이 네 빈곤을 내세우지 말라고. 아, 내게 빈곤을 팔아먹는 재주 외에 무슨 기능이 남아 있누. 여기는 칸다꾸 짐보오쬬오(神田區 神保町), 내가 어려서 제전(帝展) 이과(二科)에 하가끼(엽서) 주문하던 바로 게가 예다. 나는 여기서 지금 앓는다.)
“선생님! 이 여자를 좋아하십니까―좋아하시지요―좋아요―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그렇게까지 사랑을 받은―남자는 행복되지요―네―선생님―선생님 선생님.”
- (선생님 이상(李箱) 턱에 입 언저리에 아 수염 숱하게도 났다. 좋게도 자랐다.)
“선생님―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네―담배가 다 탔는데―아이―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눈을 좀―뜨세요.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네―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 (아, 참 고운 목소리도 다 있지. 10리나 먼 밖에서 들려오는 값비싼 시계소리처럼 부드럽고 정확하게 윤택이 있고―피아니시모―꿈인가. 한시간 동안이나 나는 스토리보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시간―한시간같이 길었지만 10분―나는 졸았나? 아닌 나는 스토리를 다 외운다. 나는 자지 않았다. 그 흐르는 듯한 연연한 목소리가 내 감관(感官)을 얼싸안고 목소리가 잤다.)
꿈―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잔 것도 아니요 또 누웠던 것도 아니다.
3
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끄면 그만이지. 그러나 S는 껄껄―아니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타이른다.
“상(箱)! 연이와 헤어지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상이 연이와 부부? 라는 것이 내 눈에는 똑 부러 그러는 것 같아서 못 보겠네.”
“거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
이 S는, 아니 연이는 일찍이 S의 것이었다. 오늘 나는 S와 더불어 담배를 피우면서 마주 앉아 담소할 수 있다. 그러면 S와 나 두사람은 친우였던가.
“상! 자네 ‘EPIGRAM’이라는 글 내 읽었지. 한번―허허―한번. 상! 상의 서푼짜리 우월감이 내게는 우숴죽겠다는 걸세. 한번? 한번―허허―한번.”
“그러면(나는 실신할 만치 놀란다) 한번 이상―몇번. S! 몇번인가.”
“그저 한번 이상이라고만 알아두게나그려.”
꿈―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10월 23일부터 10월 24일까지 나는 자지 않았다. 꿈은 없다.
- (천사는―어디를 가도 천사는 없다. 천사들은 다 결혼해버렸기 때문이다.)
23일 밤 열시부터 나는 가지가지 재주를 다 피워가면서 연이를 고문했다.
24일 동이 훤하게 터올 때쯤에야 연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장구한 시간!
“첫번―말해라.”
“인천 어느 여관”
“그건 안다. 둘째번―말해라.”
“………”
“말해라.”
“N빌딩 S의 사무실.”
“셋째번―말해라.”
“………”
“말해라.”
“동소문(東小門) 밖 음벽정(飮碧亭).”
“넷째번―말해라.”
“………”
“말해라.”
“………”
“말해라.”
머리맡 책상서랍 속에는 서슬이 퍼런 내 면도칼이 있다. 경동맥을 따면, 요물은 선혈이 댓줄기 뻗치듯 하면서 급사하리라. 그러나―
나는 일찌감치 면도를 하고 손톱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그리고 예년 10월 24일경에는 사체가 며칠 만이면 썩기 시작하는지 곰곰 생각하면서 모자를 쓰고 인사하듯 다시 벗어들고 그리고 방―연이와 반년 침식을 같이 하던 냄새나는 방을 휘 둘러 살피자니까 하나 사다놓네 놓네 하고 기어이 뜻을 이루지 못한 금붕어도―이 방에는 가을이 이렇게 짙었건만 국화 한송이 장식이 없다.
4
그러나 C양의 방에는 지금―고향에서는 스케이트를 지친다는데―국화 두송이가 참 싱싱하다.
이 방에는 C군과 C양이 산다. 나는 C양더러 ‘부인’이라고 그랬더니 C양은 성을 냈다. 그러나 C군에게 물어보면 C양은 ‘아내’란다. 나는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라고 정하지 않고 내 동경 생활이 하도 적막해서 지금 이 방에 놀러 왔다.
언더 더 워치―시계 아래서의 렉처(강의)는 끝났는데 C군은 조선 곰방대를 피우고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C양의 목소리는 꿈 같다. 인토네이션(억양)이 없다. 흐르는 것 같이 끊임없으면서 아주 조용하다.
나는 그만 가야겠다.
“선생님(이것은 실로 이상 옹을 지적하는 참담한 인칭대명사다) 왜 그러세요―이 방이 기분이 나쁘세요? (기분? 기분이란 말은 필시 조선말은 아니리라) 더 놀다 가세요―아직 주무실 시간도 멀었는데 가서 뭐 하세요? 네? 얘기나 하세요.”
나는 잠시 그 계간유수(溪間流水) 같은 목소리의 주인 C양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C군이 범과 같이 건강하니까 C양은 혈색이 없이 입술조차 파르스레하다. 이 오사게(땋아서 늘어뜨린 머리)라는 머리를 한 소녀는 내일 학교에 간다. 가서 언더 더 워치의 계속을 배운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강사는 C양의 입술이 C양이 좀 횟배를 앓는다는 이유 외에 또 무슨 이유로 조렇게 파르스레한가를 아마 모르리라.
강사는 맹랑한 질문 때문에 잠깐 얼굴을 붉혔다가 다시 제 지위의 현격히 높은 것을 느끼고 그리고 외쳤다.
“쪼꾸만 것들이 무얼 안다고―”
그러나 연이는 히힝하고 코웃음을 쳤다. 모르기는 왜 몰라―연이는 지금 방년이 이십, 열여섯살 때 즉 연이가 여고 때 수신과 체조를 배우는 여가에 간단한 속옷을 찢었다. 그리고 나서 수신과 체조는 여가에 가끔 하였다.
여섯―일곱―여덟―아홉―열―
다섯 해―개꼬리도 삼년만 묻어두면 황모(黃毛)가 된다던가 안된다던가 원―
수신 시간에는 학감 선생님, 할팽(割烹) 시간에는 올드미스 선생님, 국문시간에는 곰보딱지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이 귀염성스럽게 생긴 연이가 엊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면 용하지.”
흑판 위에는 ‘요조숙녀(窈窕淑女)’라는 액(額)의 흑색이 임리(淋漓)하다.
“선생님 선생님―제 입술이 왜 요렇게 파르스레한지 알아맞히신다면 참 용하지.”
연이는 음벽정에 가던 날도 R영문과에 재학중이다. 전날 밤에는 나와 만나서 사랑과 장래를 맹세하고 그 이튿날 낮에는 기씽과 호쏜을 배우고 밤에는 S와 같이 음벽정에 가서 옷을 벗었고 그 이튿날은 월요일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같은 동소문 밖으로 놀러가서 베제(키스)했다. S도 K교수도 나도 연이가 엊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S도 K교수도 나도 바보요, 연이만이 홀로 눈 가리고 아옹하는 데 희대의 천재다.
연이는 N빌딩에서 나오기 전에 WC라는 데를 잠깐 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오면 남대문통 십오간 대로 GO STOP의 인파.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 연이가 조 이층 바른편에서부터 둘째 S씨의 사무실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나왔는지 알아맞히면 용하지.”
그때에도 연이의 살결에서는 능금과 같은 신선한 생광(生光)이 나는 법이다. 그러나 불쌍한 이상 선생님에게는 이 복잡한 교통을 향하여 빈정거릴 아무런 비밀의 재료도 없으니 내가 재산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고 싱겁다.
“C양! 내일도 학교에 가셔야 할 테니까 일찍 주무셔야지요.”
나는 부득부득 가야겠다고 우긴다. C양은 그럼 이 꽃 한송이 가져다가 방에다 꽂아놓으란다.
“선생님 방은 아주 살풍경이라지요?”
내 방에는 화병도 없다. 그러나 나는 두 송이 가운데 흰 것을 달래서 왼편 깃에다 꽂았다. 꽂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5
국화 한송이도 없는 방안을 휘 한번 둘러보았다. 잘하면 나는 이 추악한 방을 다시 보지 않아도 좋을 수도 있을까 싶었기 때문에 내 눈에는 눈물도 고일밖에―
나는 썼다 벗은 모자를 다시 쓰고 나니까 그만하면 내 연이에게 대한 인사도 별로 유루(遺漏) 없이 다 된 것 같았다.
연이는 내 뒤를 서너 발자국 따라왔던가 싶다. 그러나 나는 예년 10월 24일경에는 사체가 며칠 만이면 상하기 시작하는지 그것이 더 급했다.
“상! 어디 가세요?”
나는 얼떨결에 되는 대로
“동경”
물론 이것은 허담(虛談)이다. 그러나 연이는 나를 만류하지 않는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나왔으니, 자, 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해야 하누.
해가 서산에 지기 전에 나는 이삼일 내로는 반드시 썩기 시작해야 할 한 개 ‘사체’가 되어야 하겠는데, 도리는?
도리는 막연하다. 나는 10년 긴 세월을 두고 세수할 때마다 자살을 생각하여왔다. 그러나 나는 결심하는 방법도 결행하는 방법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다.
나는 온갖 유행약을 암송하여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인도교, 변전소, 화신상회 옥상, 경원선, 이런 것들도 생각해보았다.
나는 그렇다고―정말 이 온갖 명사의 나열은 가소롭다―아직 웃을 수는 없다.
웃을 수는 없다. 해가 저물었다. 급하다. 나는 어딘지도 모를 교외에 있다. 나는 어쨌든 시내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시내―사람들은 여전히 그 알아볼 수 없는 낯짝들을 쳐들고 와글와글 야단이다. 가등이 안개 속에서 축축해한다. 영경(英京) 윤돈(倫敦:런던―편자)이 이렇다지―
6
NAUKA사가 있는 짐보오쬬오 스즈란도오(神保町 鈴蘭洞)에는 고본(古本) 야시가 선다. 섣달 대목―이 스즈란도오도 곱게 장식되었다. 이슬비에 젖은 아슬팔트를 이리 디디고 저리 디디고 저녁 안 먹은 내 발길은 자못 창량(蹌踉)하였다. 그러나 나는 최후의 20전을 던져 타임스판 상용영어 4천자라는 서적을 샀다. 4천자―
4천자면 참 많은 수효다. 이 해양만한 외국어를 겨드랑에 낀 나는 섣불리 배고파할 수도 없다. 아, 나는 배부르다.
진따(옛날 활동 사진 상설관에서 사용하던 취주악대), 진동야의 진따가 슬프다.
진따는 전원 네 사람으로 조직되었다. 대목의 한몫을 보려는 소백화점의 번영을 위하여 이 네 사람은 클라리넷과 코넷과 북과 소고(小鼓)를 가지고 선조 유신(維新) 당초에 부르던 유행가를 연주한다. 그것은 슬프다 못해 기가 막히는 가각풍경(街角風景)이다. 왜? 이 네 사람은 네 사람이 다 묘령의 여성들이더니라. 그들은 똑같이 진홍색 군복과 군모와 ‘꼬꼬마’를 장식하였더니라.
아스팔트는 젖었다. 스즈란도오 좌우에 매달린 그 스즈란(은방울)꽃 모양 가등(街燈)도 젖었다. 클라리넷 소리도―눈물에―젖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안개가 자욱이 끼었다.
영경 윤돈이 이렇다지?
“이상! 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내 어깨를 쳤다. 호오세이(法政)대학 Y군, 인생보다는 연극이 더 재미있다는 이다. 왜? 인생은 귀찮고 연극은 실없으니까.
“집에 갔더니 안 계시길래!”
“죄송합니다.”
“엠프레스에 가십시다.”
“좋지요.”
ADVENTURE IN MANHATTAN(영화 제목-편자)에서 진 아서(미국의 여배우―편자)가 커피 한잔 맛있게 먹더라. 크림을 타 먹으면, 소설가 구보씨(仇甫氏)가 그랬다―쥐 오줌내가 난다고. 그러나 나는 조엘 마크리(미국의 영화배우, ‘Adventure in Manhattan’에서 주연―편자)만큼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으니―
MOZART의 41번은 「목성(木星)」이다. 나는 몰래 모차르트의 환술(幻術)을 투시하려고 애를 쓰지만 공복으로 하여 저으기 어지럽다.
“신쥬꾸(新宿) 가십시다.”
“신쥬꾸라?”
“NOVA에 가십시다.”
“가십시다 가십시다.”
마담은 루바슈카. 노바는 에스페란토. 헌팅을 얹은 놈의 심장을 아까부터 벌레가 연해 파먹어 들어간다. 그러면 시인 지용(芝溶)이여! 이상은 물론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겠습니다그려!
12월의 맥주는 선뜩선뜩하다. 밤이나 낮이나 감방은 어둡다는 이것은 고리끼의 「나그네」구슬픈 노래, 이 노래를 나는 모른다.
7
밤이나 낮이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우리라. 그러나 유정(兪政)아! 너무 슬퍼 마라. 너에는 따로 할 일이 있느니라.
이런 지비(紙碑)가 붙어 있는 책상 앞이 유정에게 있어서는 생사의 기로다. 이 칼날같이 선 한 지점에 그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면서 오직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울고 있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안개 속을 헤매던 내가 불현듯이 나를 위하여는 마코 두갑, 그를 위하여는 배 십전어치를 사가지고 여기 유정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령 같은 풍모를 도회(韜晦)하기 위하여 장식된 무성한 화병에서까지 석탄산 냄새가 나는 것을 지각하였을 때는 나는 내가 무엇하러 여기 왔나를 추억해볼 기력조차 없어진 뒤였다.
“신념을 빼앗긴 것은 건강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경우더군요.”
“이상형! 형은 오늘이야 그것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겨우―오늘이야―겨우―인제.”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밤으로 치러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의 일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과 이상―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情死)―이 너무나 엄청난 거짓을 어떻게 다 주체를 할 작정인지.
“그렇지만 나는 임종할 때 유언까지도 거짓말을 해줄 결심입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하고 풀어헤치는 유정의 젖가슴은 초롱(草籠)보다도 앙상하다.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구겼다 하면서 단말마의 호흡이 서글프다.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끊습니다.”
유정은 운다. 울 수 있는 외의 그는 표정이 다 망각하여버렸기 때문이다.
“유형! 저는 내일 아침차로 동경 가겠습니다.”
“………”
“또 뵈옵기 어려울걸요.”
“………”
그를 찾은 것을 몇번이고 후회하면서 나는 유정을 하직하였다. 거리는 늦었다. 방에서는 연이가 나 대신 내 밥상을 지키고 앉아서 아직도 수없이 지니고 있는 비밀을 만지작만지작하고 있었다. 내 손은 연이 빰을 때리지는 않고 내일 아침을 위하여 짐을 꾸렸다.
“연이! 연이는 야웅의 천재요. 나는 오늘 불우의 천재라는 것이 되려다가 그나마도 못 되고 도루 돌아왔소. 이렇게 이렇게! 응?”
8
나는 버티다 못해 조그만 종잇조각에다 이렇게 적어 그놈에게 주었다.
“자네도 야웅의 천잰가? 암만해도 천잰가 싶으이. 나는 졌네. 이렇게 내가 먼저 지껄였다는 것부터가 패배를 의미하지.”
일고휘장(一高徽章)이다. HANDSOME BOY―해협 오전 2시의 망또를 두르고 내 곁에 가 버티고 앉아서 동(動)치 않기를 한시간(以上?)
나는 그 동안 풍선처럼 잠자코 있었다. 온갖 재주를 다 피워서 이 미목수려(眉目秀麗)한 천재로 하여금 먼저 입을 열도록 갈팡질팡했건만 급기야 나는 졌다. 지고 말았다.
“당신의 텁석부리는 말(馬)을 연상시키는구려. 그러면 말아! 다락같은 말아! 귀하는 점잖기도 하다마는 또 귀하는 왜 그리 슬퍼 보이오? 네?” (이놈은 무례한 놈이다.)
“슬퍼? 응, 슬플밖에―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 슬퍼야지―만일 슬프지 않다면―나는 억지로라도 슬퍼해야지―슬픈 포즈라도 해 보여야지―왜 안죽느냐고? 헤헹! 내게는 남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버릇밖에 없다. 나는 안 죽지. 이따가 죽을 것만같이 그렇게 중속(衆俗)을 속여주기만 하는 거야. 아, 그러나 인제는 다 틀렸다. 봐라. 내 팔. 피골이 상접. 아야아야. 웃어야 할 터인데 근육이 없다. 울려야 근육이 없다. 나는 형해(形骸)다. 나라는 정체는 누가 잉크 짓는 약으로 지워버렸다. 나는 오직 내 흔적일 따름이다.”
NOVA의 웨이트리스 나미꼬는 아부라에(유화)라는 재주를 가진 노라의 따님 코론타이의 누이동생이시다. 미술가 나미꼬씨와 극작가 Y군은 4차원세계의 테마를 불란서 말로 회화한다.
불란서 말의 리듬은 C양의 언더 더 워치 강의처럼 애매하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그만 울어버리기로 했다. 눈물이 좔좔 쏟아진다. 나미꼬가 나를 달랜다.
“너는 뭐냐? 나미꼬? 너는 엊저녁에 어떤 마찌아이(요정)에서 방석을 베고 15분 동안―아니 아니 어떤 빌딩에서 아까 너는 걸상에 포개 앉았었느냐. 말해라―헤헤―음벽정? N빌딩 바른편에서부터 둘째 S의 사무실? (아, 주책없는 이상아 동경에는 그런 것은 없습네.) 계집의 얼굴이란 다마네기(양파)다. 암만 벗겨보려무나. 마즈막에 아주 없어질지언정 정체는 안 내놓으니.”
신쥬꾸의 오전 1시―나는 연애보다도 위선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9
12월 23일 아침 나는 짐보오쬬오 누옥(陋屋) 속에서 공복으로 하여 발열하였다. 발열로 하여 기침하면서 두 벌 편지는 받았다.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거든 오늘로라도 돌아와주십시오. 밤에도 자지 않고 저는 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정.
이 편지를 받는 대로 곧 돌아오세요. 서울에서는 따뜻한 방과 당신의 사랑하는 연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 서(書).
이날 저녁에 부질없는 향수를 꾸짖는 것처럼 C양은 나에게 백국(白菊) 한 송이를 주었느니라. 그러나 오전 1시 신쥬꾸역 폼에서 비칠거리는 이상의 옷깃에 백국은 간데없다. 어느 장화가 짓밟았을까? 그러나―검정 외투에 또 무슨 방석과 걸상의 비밀을 그 농화장(濃化粧) 그늘에 지니고 계시나이까?
사람이―비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재산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외다그려! 나를 좀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