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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역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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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수 (한양대 교수 / 국어학), 8930107230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즐어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직히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긔계니, 긔계를 몬저 닦은 뒤에야 말이 잘 닦아 지나니라”(주 시경).1
머리말
한글은 참으로 팔자도 사납게 태어났다. 대궐에서 태어났어도 별로 호사를 누려 보지 못했다. 한자라는 거물에게 눌려서 처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살다가 아주 쫓겨 나 거지 왕자처럼 여염집 아낙네의 치마 폭에 싸여 보호를 받으며 겨우 오백 년 가까이 살았다. 어쩌다가 좋은 주인을 만나 출세 길에 오른 것이 오늘의 한글이다. 그러나 빛을 좀 보자 마자 또 다시 로마글이라는 세계의 정복자를 만나 작은 판도나마 지키기 위한 싸움을 힘겹게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애써 지키고 발전시키며 현대 문명에 적응시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고려와 조선의 활자 문화처럼 한 시대의 자랑 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사라져서 후손의 안타까운 탄식이나 자아 낼 염려가 있다. 이것이 한글의 역사와 현재와 미래다. 이것을 열화당의 기획에 맞추어 풀어 쓰고 그림으로 돕고 한 것이 이 책이다.
여기서는 괴롭지만 문교부의 <한글 맞춤법>을 따르지 않는다. 이 맞춤법은 이미 60 년 가까이 표준화한 한글 학회의 <한글 맞춤법>을 더 낫게 고친 것이 아니라, 어문학 분야의 학자들 대개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국어 연구소의 편파적인 학자들이 제5 공화국의 무리한 힘을 입고 오로지 저급한 방향으로 뒷걸음질시킨 것이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때에 목숨을 바쳐 가며 겨레의 말과 글을 지키고 다듬어 온 한글 학회를 짐짓 소외시키고도 마치 한글 학회가 참여한 것인 양, 한글 학회의 맞춤법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인 양, 똑 같은 이름을 달고 나와서 구별해 말하기도 힘들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한글 학회의 <한글 맞춤법>은 없던 것처럼 되어 가기를 바란다는 듯이. 과연 그렇게 되어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어미의 떡도 맛이 있어야 사 먹는다는 말이 있다. 나쁜 법도 법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드센 권력자들에게 오래도록 주눅든 사람들을 위해서 남용되고, 그저 조용하게만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핑곗거리로 이용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한겨레의 얼을 담는 그릇이오 닦는 틀인 한국말, 그 말을 담는 그릇이오 닦는 틀인 한글, 그 글의 법을 앞으로 어떻게 바로잡고 또 더 낫게 다듬어 가야 하는지, 우리는 우리 자신과 후손들의 말과 얼을 위해서 연구하고 힘써야 한다.
부록으로 붙인 ‘한글 연표’는 열화당 주인의 제안을 받아 만들어 보았다. 한글을 주제로 삼은 책이면 으례 붙이는 <훈민 정음> 책의 영인을 여기서도 굳이 붙인 이유를 밝혀 둘 필요가 있다. 1940년에 이 책이 발견되자 온 나라가 흥분하고 세계가 놀라게 된 것은 당연하다. 이 책이 오백 년 동안 숨겨 지기 위해서 겉장과 앞의 두 장 곧 네 쪽을 잃고 잘못 베껴 진 것이 드러났는데, 게다가 조선어 학회에서도 이 책을 원형 대로 보급하려고 복제할 때 손질이 지나쳐서 소릿점의 일부가 손상되었다. 많은 한글 전문가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조선어 학회 영인본을 대본 삼아 한글에 관한 책에 여기 저기 영인해 붙이고 있다. 이 상백의 <한글의 기원 -훈민 정음 해설->에 붙인 영인이 가장 충실하고 종이도 좋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온 지 오래라 구하기 어려우므로, 그리고 열화당 책의 좋은 종이에 올리고 싶어서 여기 붙이게 했다.
좋은 책을 꾸미느라고 늘 즐거운 얘기가 오가는 집 열화당(悅話堂)의 주인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원고를 제 때에 넘겨 드리지 못해서 한 달씩 보름씩 이레씩 미루기를 한 해 반이나 하도록 참고 또 참으며 기다려 준 열화당의 일꾼 김 금희 님과 김 수옥 님에게 미안했음과 고마움을 밝힌다.
- 7. 31. 씀.
흙이 묻은 보배
한겨레에게는 둘도 없이 큰 자랑거리요, 세계 사람들은 알면 알수록 놀라는 문화재가 한글이다. 금수강산에 아무리 난리가 많이 나도 불에 타지 않아서, 아무리 탐스러워도 다른 겨레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라 다 훔치고 빼앗아 간 자리에 남은 보배가 한글이다. 우리끼리는 처음에는 낯설어서 배척했고, 조금 알고 보니까 우습도록 쉬워서 멸시했고, 나중에는 굳은 버릇을 못 고쳐서 아녀자나 쓰라고 던져 버렸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글자를 통한 지식의 대량 전달과 처리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그 참된 값어치를 인정하게 된 문화의 고속 도로가 한글이다.
이런 보배를 우리는 얼마 만큼이나 바로 알고 있는가? 그 내력과 실상을 알고 나면, 그 가치를 한결 확실하게 알게도 되고, 그 값을 지나치게 치는 잘못도 고칠 수 있다. 우리들 가운데는 한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아주 잘 아노라 하는데 실은 치우치게 알고 지나치게 값을 매겨서 혼자 떠드는 한글장이도 적지 않다. 한글의 빼어난 매력을 무슨 손 댈 수 없는 마력으로 잘못 아는 어려운 병이 들어 있는 사람이 많다.
한글은 아직 완전한 글자가 아니다. 천하의 보배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흙이 묻은 보배요, 더 닦아 빛낼 여지가 있는 보석과 같은 것일 뿐이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한글을 잘 아노라 하는 사람들도 더 연구해야 하고 일을 갈라 맡아서 함께 다듬어야 한다. 이것이 한글을 물려 받은 겨레의 과업이오, 한글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이 모 저 모로 따져 새롭게 생각하면서 보게 하고 아울러 한글의 모자람을 밝혀 더욱 발전시키자는 데에 이 글의 중심이 있다.
한국말의 역사 시대
가. 한국말의 선사 시대
ㄱ. 한자의 기원
우리 조상들은 이른 바 한자 문화권에서 살아 왔다. 흔히 알기로는 문화가 앞선 큰 나라 중국에서 한자를 빌어다가 어렵게 배우고 맞지 않는 한국말에 한자를 맞추느라고 이리저리 변통하며 힘겹게 살아 왔다. ‘내 말에 남의 글’을 맞추자니 그 일이 잘 될 리가 없었다. 과연 그랬음직 하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짐작이 들도록 여러 가지 새로운 자료와 연구 결과가 고고학을 비롯한 역사학 분야에서 나오고 있다.
중국의 한자 연구가인 이 경재2는 한자의 기원과 중국 태고 시대의 민족 성분에 대해서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도 다르게 말하고 있다. 곧 한자 ‘人’(인)은 본디 ‘夷’(이)의 옛 글자로서 ‘夏’(하)와 구별되는 한 종족의 이름이었다. 이 두 종족은 동서에 나뉘어 살았다. 서녘의 ‘하’ 종족들이 무력으로는 우세했지만 ‘인’ 곧 동녘의 ‘이’ 종족이 문화적으로 앞섰기 때문에, ‘하’ 종족들이 ‘이’ 종족에 동화되고 그 구별이 없어 지기에 이르러 ‘인’이라는 이름만으로 통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종족의 이름인 ‘이’ 곧 ‘인’이 두 종족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두루이름씨(보통명사)로 변했다는 것이다. 홀이름씨(고유명사)가 두루이름씨로 바뀌는 일은 어떤 언어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夷의 뜻을 한국의 옥편에서는 모두 ‘오랑캐’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일본의 제교 철차(諸橋 轍次)가 지은 ‘대 한화 사전’(大 漢和 辭典)에서는 그 첫째 뜻으로 ‘동방 군자 나라의 사람’을 들고 있다. 또 일본 북쪽에 사는 한 종족의 이름 ‘아이누’도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함께 견주어 연구할 만 한 사실이다.
이 경재는 이어서 ‘이’ 종족 곧 동이(東夷) 사람과 그 문화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이 사람들은 무력보다는 문화와 예술을 숭상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은 요(堯) 임금으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은 순(舜) 임금이며, 순 임금의 신하인 설(契)은 한자를 창제했다고 알려 져 있는 창힐(蒼頡)과 동일한 사람으로서 나라의 교육과 문화를 맡았다. 개인이 그 많은 글자를 지었을 리야 없지만, 이것은 동이 사람들이 한자를 많이 만들었으며, 설 곧 창힐이라는 사람이 널리 가르치고 보급한 공로자이며, 따라서 한자를 만든 공로는 동이 사람들에게 있음을 뜻한다. 동녘과 서녘의 옛 글자를 대강 비교해 보아도 동이 사람들의 글자 만드는 재주가 서하(西夏) 사람들보다 낫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월한 문화로 교육권을 장악하고 서하의 종족들을 가르치며 동화시킨 동이 사람들 가운데 법치주의자인 고도(皐陶), 상나라의 탕(湯) 임금, 너무 어질기만 해서 나라를 망친 서언왕(徐偃王)과 송양공(宋襄公) 같은 이들이 나서 모두 동이 민족의 특성을 충분히 나타내었다. 또한 상나라 사람 창힐과 탕 임금의 후손인 공자(孔子)와, 묵자(墨子), 맹자(孟子) 등이 모두 동이 문화의 일관된 흐름으로 중국을 철저하게 동이처럼 만들어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자를 만들어 펴며 동양의 문화를 일으킨 사람들이 동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동녘 오랑캐’라고만 알고 있던 ‘동이’가 ‘동방 문화의 주인공’이라니, 이 무슨 기막힌 말인가? 이것은 일본 사전의 ‘夷’에 대한 풀이와도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려면 아마 앞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쟁과 마찰을 거쳐야 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너무도 오랜 동안 이와는 다른 지식으로 교육 받고 길들여 져 왔기 때문에 설령 남의 나라 사람의 객관성 있는 이론일지라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러한 우리네 형편을 드러내는 다음의 논의를 들어 보라.
이 기문 교수3는 순수한 한국말인 줄로만 아는 ‘먹’이 중국말의 ‘묵’(墨)에서, ‘붓’이 중국말의 ‘필’(筆)에서 온 것이라는 일본 사람 하야 육랑(河野 六郞) 등의 가설을 의문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사실로 치고, 이에 더해서 ‘글’도 중국말의 ‘계’(契)에서 온 것으로 본다는 가설을 보태었다. 이를 위해서 두 낱말의 말밑[語源]이 같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들 세 쌍의 낱말들의 말밑이 과연 서로 같으냐 그렇지 않으냐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말과 한국말의 말밑이 같은 낱말은 어느 것이든 모두 중국에서 온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아예 아무런 논증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들 낱말들이 오고 가고 했을 언제인지도 모르는 그 아득한 옛날에도 중국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크고 앞선 나라요 한국은 작고 뒤진 나라였더란 말인가? 이것이 우리네 상식일 뿐만 아니라 논증을 일삼아 사는 학자들에게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이치 곧 공리인 것처럼 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맹점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윤 내현 교수4가 서술하는 역사는 이 경재5의 논설과 함께 ‘글’이 ‘계’(契)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힘과 동시에 그 민족적인 뿌리가 동이 계통임을 말하고 있다. 순 임금의 신하로서 상나라 곧 은나라의 시조가 된 동이족인 사람의 이름이 ‘설’(契)인 점, 그 이름이 바로 그가 창제하거나 주도적으로 보급했다는 한자의 기원이 된 바 갑골에 칼끝으로 ‘긁’어6 ‘글’을 새기고 점치는 일을 뜻한다는 점, 이 글자가 실제로 ‘계/글/결/설’로 읽히면서 한국말의 ‘글’과 뿌리가 같다면 그 이중 삼중의 일치는 우연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한국말의 ‘글’과 한자의 ‘契’이 뜻도 같고 소리도 같은 데다가 이것이 한자의 창제 또는 보급에 관련된 인물의 이름과도 같고 그 인물의 혈통이 동이족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한자의 기원을 우리 민족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알아 온 우리네 상식을 의심하게 하기에 족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한자는 남에게서 빌어 온 글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것은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의 우리네 글자 생활을 거슬러 올라갈 때 드러나는 사실들과 잘 연결된다는 점에서 미리 언급해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ㄴ. 한자의 한계
한글이 나오기 전에 우리 조상들이 한국말을 한자로 적는 방식은 크게 변천해 왔다. 우리 조상들이 오래도록 써서 남겨 온 그 많은 한문 문헌은 물론 한국말을 적은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의 생각을 중국말로 적은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특이하게 자연스러운 한국말을 한자로 적은 꽤 오래 된 본보기로서 신라의 빗돌7이 남아 있다. 거기 새겨 진 글의 앞머리는 다음과 같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서원하며 적되,
하늘 앞에 맹세하니, 이제부터 세 해 뒤로는
충성의 도리를 잡아 지키고, 잘못 잃음이 없도록 서약했다…)
한 자 한 자를 뜻으로 뜯어 읽으니까 그 대로 순연한 한국말이 되었다. 한자로 적힌 글 가운데 이런 사례는 희귀한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임신년은 서기 552년(또는 612년)으로 추정되어 있다.8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이맘때까지는 뜻글자인 한자의 뜻만을 이용해서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한국말을 적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뜻은 특정한 언어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연 언어의 개성은 그것을 표현하는 소리로 비로소 반영되고 확인된다. 그러므로 한자의 뜻만 이용된 것을 보고 그것과 중국말과의 필연적인 관계를 입증할 재주는 아무에게도 없다. 이 사실은 한자가 중국말이라는 특정한 언어의 글자가 아니라 당대 이 동북 아시아 지역의 공용 글자였을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아뭏든 이런 방식의 한자 쓰기에서는 한국말의 다양한 토씨(조사)나 씨끝(어미) 따위를 적어 낼 수가 없다. 토씨나 씨끝 따위를 분명하게 적기 위해서는 한자 쓰기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 이두라고 부르는 한자 쓰기가 나타나게 되었다.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 위의 보기를 이두 방식으로 바꾸어 적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다.
壬申年六月十六日矣(의) 二人是(이) 幷誓記爲白乎矣() 天前矣(의) 誓爲白乎尼(니) 今自三年以後隱(는) 忠道乙() 執持爲古(고) 過失是(이) 无爲所只(로개) 誓爲有如(얫다). |
여기 보충된 부분들 가운데 ‘爲’(/야), ‘白’(/ㅸ), ‘有’(잇) 등은 그 뜻을 그 대로 살려 적은 것이고, ‘是’(이), ‘所’(/로), ‘如’(닿/다) 등은 그 뜻을 나타내는 한국말의 뜻은 죽이고 소리만 살려 적은 것이며, ‘矣, 乎, 尼, 隱, 乙, 古, 只’ 등은 그 한자가 나타내는 중국말의 뜻은 죽이고 소리만 이용해 적은 것이다. 중국말의 소리를 이용하는 일은 위의 빗돌에서는 볼 수 없다. 이두 쓰기는 그 만큼 중국말의 직접적인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은 뒤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본래 뜻글자인 한자로 토씨 따위를 표현하기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여기서 잘 드러난다. 게다가 이런 표현을 위해서 어떤 한자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일정한 규범이나 원칙은 미리 정해 져 있지 않았고, 그저 은연중에 퍼지고 굳어 져서 생기는 관습이 유일한 틀이 될 뿐이었다. 토씨 따위의 문법적인 형태소가 세밀하게 발달한 한국말을 한자만으로 적어 내는 일은, 이두에서 그것도 아주 불완전하게 극도로 혼란스러운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뜻글자의 한계인 것이다. 또 애초부터 한문으로 된 글 속에 마디를 끊어 가며 한국말의 토씨나 씨끝 따위를 적어 넣는 구결은 경전 따위의 한문을 쉽게 읽기 위한 보조 수단이지 한국말을 적는 표기 수단이 아니므로, 여기서 다룰 것이 못 된다.
뜻글자는 어차피 중국말 같은 홑소리마디[單音節] 언어에서 말고는 성공할 수 없다. 뭇소리마디[多音節] 언어인 일본말에서는 한자가 가나 같은 소리마디[音節] 글자로 변천할 수 밖에 없고, 한국말에서는 음소(音素) 글자로까지 발전할 수 없어서 새로운 유형의 글자로 대체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같은 종류의 뜻글자가 이집트말에서 살아 남지 못하고 소리마디 글자로 변하고 마침내 오늘날의 로마글과 같은 음소 글자로 변천하기에 이른 것은 아마 그 문화권 안에 중국말 같은 홑소리마디 언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의 뜻글자라도 적당한 때에 중국말을 만났더라면 중국의 글자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강조할 것은 한자가 중국의 글자가 된 것은 중국말을 쓰는 사람의 손으로 발명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중국말이 홑소리마디 언어인 덕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한자의 기원이 중국 또는 중국말에 있는 것으로 아는 통념은 사실과 전혀 다를 수 있다. 중국말과는 다른 유형의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도 인류 문명의 초기에는 한자나 이집트 글자 같은 그림글자 또는 뜻글자를 만드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 뜻에서 한자 만들기와 쓰기를 나누는 이른 바 ‘육서’(六書) 가운데 상형(象形)과 지사(指事)는 한자의 기원으로부터 생긴 것이고, 회의(會意)와 전주(轉注)는 글자를 불리고 융통하는 방법인데, 이들 네 가지는 중국말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자의 기원에 대한 일부 학자의 가설과 같이, 동이족이 한자와 같은 뜻글자를 만들었다 해도 끝내 동이족의 글자로 남을 수 없는 까닭은, 그 언어의 유형이 뜻글자로 만족스럽게 기록될 수 없다는 데 있고, 인접한 민족의 언어인 중국말의 글자로 남게 된 연유는, 중국말이 우연하게도 그 뜻글자로 적히기에 가장 적합한 유형의 언어라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자의 육서 가운데 중국말과 밀착된 것이 형성(形聲)과 가차(假借) 방법인데, 특히 형성으로 만들어 진 것이 한자의 팔 할 이상을 차지하게끔 된 것은 바로 그러한 연유의 반영인 것이다. 위에 본 신라 빗돌의 글은 적어도 가차의 예가 보이지 않는 만큼 신라 사람이 중국의 글자를 빌어다가 억지로 쓴 글이라고 보게 할 적극적인 증거가 없다. 한자는 무조건 중국의 글자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통념 밖에는 말이다.
아뭏든 한자는 한국말을 적기에 모자란 글자라는 사실이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명백해 졌다. 이제 앞으로 갈 길은 한자를 일본의 가나처럼 소리마디 글자로 변혁하든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글자를 발명하든지 하는 수 밖에 없다. 일본말은 쉰 개 남짓한 소리마디 글자로 적기에 큰 불편이 없을 만큼 그 소리마디의 유형이 단순하기 때문에 그런 대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말의 소리마디 유형은 비할 데 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수십 또는 수백의 소리마디 글자로는 도저히 적어 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소리마디를 만들어 낸다. 세종 임금은 한국말의 이러한 언어 사실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수백 개가 있어도 모자랄 소리마디 글자에서 한 단계 더 발전된 서른 개 미만으로 족한 음소 글자를 만들어 내는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나. 한글 창제의 역사적인 의의
ㄱ. 한글의 기원
그림 1. 세종 큰 임금의 모습을 상상한 그림 |
조선의 네째 임금 세종(1397-1450)9은 워낙 슬기롭고 능한 임금이라, 나라 안팎을 지키고 백성을 위하는 일을 많이 벌이면서, 무엇보다도 국민 교육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세종 임금은 즉위한 뒤 4(1422)년부터 책을 박는 데 기초가 되는 활자의 글씨 개량을 직접 지휘할 만큼 글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많은 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성과 뛰어난 자질은 세종 25(1443)년 음력 12월에 몸소 훈민 정음 곧 한글을 만들어 냄으로써 유감 없이 빛을 내었다.
세종 임금은 왕립 연구소라 할 집현전에 모아 기른 인재들 가운데 일부10를 궁중의 언문청 또는 정음청에 따로 모아 보좌를 받으면서 한글 만들기를 주도했다. 눈병이 나서 청주의 초정에 요양하러 갈 때 나랏일은 다 신하들에게 맡기면서도 한글을 만드는 일거리만은 그 대로 가지고 가서 골똘히 연구했다. 세종 임금은 한글을 반대하는 일부 신하들에게 “너희들이 언어학과 언어를 얼마나 아느냐? 백성을 위해 하는 이 일을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라는 뜻의 말로 이 일에 대한 자신감과 사명감을 보이며 설득했다. 이 말이 임금의 권위 의식만으로 아랫사람을 억누르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그 일의 결과인 한글 자체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 때 집현전의 신하인 최 만리가 대표가 되어 신 석조, 김 문, 정 창손, 하 위지, 송 처검, 조 근 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새 글자 만들기를 반대하는 상소(1444)를 했다.
- 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 두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 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 세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 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 네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 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 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에 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해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종 임금은 이에 대해서 조조이 답변하지는 않고, 설 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먼저 밝히고, 다만 네째 의견에 대해서 사리를 모르는 속된 선비의 생각이라고 비판하고, 여섯째 의견에 대해서 한글의 중요함에 비추어 동궁이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변했다.
한글이 한자를 이기기까지는 오백 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만 비추어 보더라도 다섯째 의견은 아무도 반대할 수 없이 지당한 것이다. 첫째와 두째와 세째 의견은 옛 선비의 고루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실로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글자와 문화에 대해서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온 관념의 표현일 따름이다.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반포된 한글이 훗날 우리들에게 교육과 생활을 위해서 어떤 무기가 되어 주었으며 한겨레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바지를 해 오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만 써도 될 자리에 굳이 한자를 박아 넣으며 한자를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계승되어 위세를 부리는 이 문화 사대주의란 것은 얼마나 깊이 박힌 고질인지 모른다.
세종 임금은 당신 나름으로 신중하게 다듬기를 계속하고 신하들과 함께 몇 가지 문헌을 한글로 만드는 실용의 시험을 거쳐 세 해가 지나서야 <훈민 정음>(1446)을 통해 한글을 반포했다. 이 책의 머리에 실린 짧은 글을 통해서 세종 임금은 중국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곧은 줏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벗겨 주고자 하는 어진 마음과 단지 삶의 편의를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실용주의 정신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또한 그 동안 신하들로부터 들은 모든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충분한 답변이 되었을 것이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들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잘 나타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나는 이것이 딱해서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누구나 쉽게 배워서 일상 생활에 편히 쓰기 바랄 뿐이다”(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余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11
ㄴ. 한글 만들기
한글 만들기는 우선 여덟 개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닿소리 글자 다섯( ㄱ ㄴ ㅁ ㅅ ㅇ)과 홀소리 글자 셋(ㆍ ㅡ ㅣ )이다. 글자 만들기에서 닿소리와 홀소리를 구별한 것은 이 두 가지 소리가 소리마디를 이룰 때 그 구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홀소리는 이름 그 대로 ‘홀로’ 소리마디를 이룰 수 있는 독립적인 소리인데, 닿소리는 홀소리와 ‘닿아야’ 내기가 쉬운 의존적인 소리이다.
‘ㄱ’(기역)이란 글자는 이 글자가 나타내는 소리를 낼 때 혀의 뒤쪽 곧 어금니에 닿는 혀의 부분이 곱사등처럼 굽어 목젖 가까이 붙는 옆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 글자의 소리와 같은 입 모양으로 나는 소리가 ‘ㅋ(키읔), ㄲ(쌍기역)’ 글자의 소리들이라, 그 글자 모양도 서로 비슷하게 만들어 졌다. ‘ㅋ’에 금이 하나 덧붙은 것은 그 소리가 ㄱ[그]12 소리에는 없는 ㅎ[흐] 소리가 함께 나서 아주 거세어 지기 때문이다. ‘ㄱ’을 겹쳐 ‘ㄲ’을 만든 것은 ㄲ[끄] 소리가 ㄱ[그] 소리보다 목과 입 전체에 힘을 많이 주어 내는 센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소리들을 모두 어금닛소리[牙音] 또는 뒤혓소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앞에 말한 대로 이런 소리들을 낼 때는 언제나 어금니에 닿는 뒤혀 부분이 굽어 오르기 때문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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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ㄱ 글자의 뿌리: 혀의 뒤가 목젖에 붙은 옆 모습.
‘ㄴ’(니은)이란 글자는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 혀의 앞쪽이 우묵하게 구부러지고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옆 모양을 본뜬 것이다. 이 글자의 소리와 같은 입 모양으로 나는 소리가 ‘ㄷ(디귿), ㅌ(티읕), ㄸ(쌍디귿), ㅥ(쌍니은)’ 글자의 소리들이라, 그 글자 모양도 서로 비슷하게 만들어 졌다. 이 소리들을 모두 혓소리[舌音] 또는 앞혓소리라고 부른다. ㄴ[느]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이고 ㄷ[드]는 그보다 굳은 소리이기 때문에 ‘ㄴ’에 금을 하나 더해서 ‘ㄷ’을 만들었다. ‘ㄷ’에서 ‘ㅌ, ㄸ’이 나온 이치는 앞의 ‘ㄱ’에서 ‘ㅋ, ㄲ’이 나온 이치와 같다. 역시 ‘ㄴ’에서 번져 나온 것이 ‘ㄹ’(리을) 글자인데, 그 소리가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금이 많이 덧붙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 소리는 혀끝이 ㄴ와 비슷한 자리에 닿되 혀의 모양이 많이 구부러지거나 떨게 되는 반혓소리[半舌音]이다. 이 글자도 혀의 옆 모습을 본떴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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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ㄴ 글자의 뿌리: 혀의 끝이 잇몸에 붙은 옆 모습.
‘ㅁ’(미음)이란 글자는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 아래위의 두 입술이 붙기 때문에 입의 모양을 본뜨고 모나게 다듬은 것이다.14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와 마찬가지로 두 입술을 붙이고 내는 소리가 ‘ㅂ(비읍), ㅍ(피읖), ㅃ(쌍비읍)’ 글자의 소리들이라, 이들도 ‘ㅁ’ 한 글자에서 번져 나간 것이다. ㅁ[므]는 아주 부드러운 소리이고 ㅂ[브]는 그보다 굳은 소리이기 때문에 ‘ㅁ’에 두 뿔을 더해서 ‘ㅂ’을 만들었다. ‘ㅂ’ 글자에 아래로 두 발을 붙이고 옆으로 눕힌 것이 ‘ㅍ’ 글자이고, ‘ㅂ’ 글자를 두 개 겹친 것이 ‘ㅃ’ 글자이다. 이처럼 ‘ㅂ’에서 ‘ㅍ, ㅃ’이 나온 이치는 ‘ㄱ’에서 ‘ㅋ, ㄲ’이 나온 이치와 같다. 이 글자들의 소리를 모두 입술소리[脣音]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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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ㅁ 글자의 뿌리: 모난 입.
‘ㅅ’(시옷)이란 글자는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 혀끝과 윗니 사이를 좁히고 그 사이로 바람을 스쳐 내게 되기 때문에 이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15 이 글자의 소리보다 더 되게 나는 소리를 적기 위해서 겹쳐 만든 것이 ‘ㅆ’(쌍시옷) 글자이다. 또 이 글자의 소리보다 더 굳게 나는 소리를 적기 위해서 금을 더해 만든 것이 ‘ㅈ’(지읒)이고, 이 ‘ㅈ’보다 더 되게 나는 소리를 적기 위해서 다시 겹쳐 만든 것이 ‘ㅉ’(쌍지읒)이다. 이런 소리들을 묶어서 잇소리[齒音]라고 부른다. 역시 ‘ㅅ’에서 번져 나온 것이 ‘ㅿ’(반시옷)인데, 그 소리가 더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금이 더해 졌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그 소리는 혀끝이 ㅅ[스]와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혀끝을 울려 내는 반잇소리[半齒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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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ㅅ 글자의 뿌리: 뾰족한 이.
‘ㅇ’(이응)이란 글자는 목청이 울리는 소리16를 나타내기 위해서 목구멍의 동그란 단면을 본뜬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청에서 나되 그보다 더 굳은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글자에 금을 얹어 ‘ㆆ’(된이응)을 만들었다. 이 ‘ㆆ’의 소리는 이를테면 “앗! 안 됏!’라고 말할 때 ‘ㅅ’ 받침으로 적히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 말을 정확히 적자면 실은 “ ! !”로 적어야 된다는 말이다. 이 소리보다 더 거센 목청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금을 하나 더 그어 ‘ㅎ’(히읗)을 만들었다. 또 ‘ㅇ”의 소리보다 더 된 소리를 적기 위해서 ‘ㆀ’(쌍이응)을 만들었고, ‘ㅎ’의 소리보다 더 된 소리를 적기 위해서 ‘ㆅ’(쌍히읗)을 만들었다. 역시 ‘ㅇ’에서 번져 나온 것이 ‘ㆁ’(옛이응)이다. 이 글자의 소리를 낼 때 혀의 모양이 ‘ㄱ’ 따위의 소리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ㄱ’을 본받지 않고 ‘ㅇ’을 본받아 만든 것은 또한 예외적인 일인데, 그것은 ‘ㆁ’의 소리가 ‘ㅇ’의 소리처럼 목청 울림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소리의 느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고, 또 ‘ㅇ’보다는 더 굳은 맛이 있기 때문에 금을 하나 더 그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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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ㅇ 글자의 뿌리: 동그란 목구멍.
이제 닿소리 글자들이 번져 나온 관계를 통틀어 보면, 밑 글자(기본 글자) 다섯이 적어도 서른 아홉으로 번진 셈이다. 이러한 닿소리 홑글자들을 둘씩 셋씩 겹쳐 적은 세종 당대의 닿소리 겹글자들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번진 수효는 예순 일곱으로 늘어난다.
- 초성(11): ㄴㄴ, ㅂㄷ, ㅂㅅ, ㅂㅅㄱ, ㅂㅅㄷ, ㅂㅈ, ㅂㅌ, ㅅㄱ, ㅅㄴ, ㅅㄷ, ㅅㅂ;
- 종성(17): ㄴㄷ, ㄴㅅ, ㄴㅿ, ㄹㄱ, ㄹㄱㅅ, ㄹㄷ, ㄹㅁ, ㄹㅂ, ㄹㅂㅅ, ㄹㅅ, ㄹㅿ, ㄹㆆ, ㅁㅂ, ㅁㅅ, ㅁㅿ, ㅂㅅ, ㆁㅅ.
다음으로 홀소리는 닿소리와 그 성격이 다른 만큼, 그 글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 점 ‘ㆍ’(아래 아)와 직선 둘 ‘ㅡ, ㅣ’ 이들이 홀소리 글자의 밑 글자다. 점은 하늘[天]의 둥근 모습을 본뜨노라 한 것이고, 수평선은 땅[地]을 본뜨노라 한 것이고, 수직선은 사람[人]을 본뜨노라 한 것이다. 이 세 글자가 나타내는 소리는 세 가지 종류의 홀소리들 가운데 각각 그 대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홀소리 글자들의 밑 글자가 된 것이다. 세 가지 종류의 홀소리란, 첫째가 밝은홀소리[陽性母音]이고, 두째가 어두운홀소리[陰性母音]이며, 세째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중간홀소리[中性母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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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ㆍ ㅡ ㅣ 글자의 뿌리: 둥근 하늘, 평평한 땅, 곧추 선 사람.
이 세 글자가 다음과 같이 먼저 일곱 개로, 나중에는 다음과 같이 모두 서른 한 개나 되는 홀소리 글자로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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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홀소리 글자: 셋에서 서른 하나로 번짐.
밝은홀소리 가운데 가장 중립적이며 대표적인 소리는 점 ‘ㆍ’(아래 아)로 나타내는 소리이다. 이와 같은 밝은홀소리로 우선 ‘ㅗ’와 ‘ㅏ’로 나타내는 소리가 있다. ‘ㅗ’는 그 소리가 밝은 소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래 아 ‘ㆍ’를 ‘ㅡ’의 ‘위에’ 올려 놓은 것이고, ‘ㅏ’는 역시 그 소리가 밝은 소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래 아 ‘ㆍ’를 ‘ㅣ’의 ‘밖에’ 내어 놓은 것이다. ‘ㅗ’ 소리는 ‘ㆍ’ 소리보다 입술을 오무려 내는 소리이고, ‘ㅏ’ 소리는 ‘ㆍ’ 소리보다 입술을 펴서 내는 소리이다.
이들 세 글자 ‘ㅏ, ㅗ, ㆍ’의 소리에 ‘ㅣ’ 중간홀소리가 앞에 포개어 져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ㅑ, ㅛ, ㅣ’ 들이다. 이 가운데 다섯 글자 ‘ㅏ, ㅑ, ㅗ, ㅛ, ㆍ’의 소리에 ‘ㅣ’ 중간홀소리가 뒤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ㅐ, ㅒ, ㅚ, ㆉ, ㆎ’ 들이다. 이 가운데 다시 두 글자 ‘ㅏ, ㅐ’의 소리에 ‘ㅗ’ 소리가 앞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ㅘ, ㅙ’ 들이며, 또한 이와 비슷하게 두 글자 ‘ㅑ, ㅒ’의 소리에 ‘ㅛ’ 소리가 앞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ㆇ, ㆈ’ 들이다. 다만 이들 전체 가운데 세 글자 ‘ㆇ, ㆈ, ㅣ’ 들은 실제로 쓰인 일이 없는 만큼 이론적인 가능성을 보인 데 지나지 않는다. 아뭏든 이들 밝은홀소리 글자를 모두 합하면 열 다섯 자이다.
어두운홀소리 가운데 가장 중립적이며 대표적인 소리는 ‘ㅡ’로 나타내는 소리이다. 이와 같은 어두운홀소리로 우선 ‘ㅜ’와 ‘ㅓ’로 나타내는 소리가 있다. ‘ㅜ’는 그 소리가 어두운 소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ㅡ’의 ‘아래에’ ‘ㆍ’를 내려 놓은 것이고, ‘ㅓ’는 역시 그 소리가 어두운 소리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ㅣ’의 ‘안에’ ‘ㆍ’를 들여 놓은 것이다. ‘ㅜ’ 소리는 ‘ㅡ’ 소리보다 입술을 오무려 내는 소리이고, ‘ㅓ’ 소리는 ‘ㅡ’ 소리보다 입술을 펴서 내는 소리이다.
이들 세 글자 ‘ㅓ, ㅜ, ㅡ’의 소리에 ‘ㅣ’ 중간홀소리가 앞에 포개어 져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ㅕ, ㅠ, ㅣ’ 들이다. 이 가운데 다섯 글자 ‘ㅓ, ㅕ, ㅜ, ㅠ, ㅡ’의 소리에 ‘ㅣ’ 중간홀소리가 뒤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ㅔ, ㅖ, ㅟ, ㆌ, ㅢ’ 들이다. 이 가운데 다시 두 글자 ‘ㅓ, ㅔ’의 소리에 ‘ㅜ’ 소리가 앞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ㅝ, ㅞ’ 들이며, 또한 이와 비슷하게 두 글자 ‘ㅕ, ㅖ’의 소리에 ‘ㅠ’ 소리가 앞에 붙어 한 소리마디가 된 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ㆊ, ㆋ’ 들이다. 이들 가운데 한 글자 ‘ㅣ’도 이론적인 가능성을 보인 데 지나지 않지만, 아뭏든 어두운홀소리 글자들은 모두 열 다섯 자이다.
이와 같이 한글이 만들어 진 경위를 훑어 보면, 닿소리 글자 다섯이 예순 일곱으로, 홀소리 글자 셋이 서른 하나로, 다시 말하면 밑 글자 여덟이 모두 아흔 여덟으로 곧 열두 곱 넘게 불어 난 셈이다. 그것도 치밀한 연결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글 만들기의 이처럼 독창적이고도 정연한 조직성에 대해서 미국의 한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예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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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가장 특이하고 흥미로운 요소는 시각적인 모양과 시각적인 기능 사이에 치밀한 대응이 나타나 있는 점이다. 닿소리 글자의 모양은 홀소리 글자의 모양과 아예 유형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이 두 큰 갈래 안에서조차 세종 임금은 낱 글자의 모양을 통해서 또 다른 중요한 여러 관계가 드러나도록 했다. 닿소리 글자에서는 글자 모양이 닿소리의 종류와 관련되어 있고, 홀소리 글자에서는 뒤홀소리와 가운데홀소리 부류가 조직적으로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다. 이처럼 멋과 뜻을 갖추어 합리적인 낱소리글자는 세상에 다시 없다…. 모양과 기능의 관계라는 생각과 그 생각을 구현한 방식에 대해서는 참으로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글자의 오래고 다양다기한 역사를 통틀어 볼 때 그와 같은 것은 없다. 소리 종류를 따라 글자 모양을 체계적으로 한다는 것만으로도 족히 그렇다 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 모양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발음 기관을 본떠 꾸민 것이라니 — 이것은 정녕 언어학적인 호사의 극치다! 조선의 음운학자들은 참으로 솜씨가 많았거니와, 창조적인 상상력도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One of the most unique and interesting features of the Korean alphabet is the strict correspondence it shows between graphic shape and graphic function. Not only are the shapes of the consonants of a pattern different from those of the vowels, but even within these two main groups the shapes decided upon by Sejong clarify other important relationships. In the consonants there is a correlation between letter shape and consonant classes, and in the vowels the back and mid groups are strictly and systematically separated. No other alphabet in the world is so beautifully, and sensibly, rational…. It is really impossible to withhold admiration for this conception of a shape-function relationship and for the way it was carried out. There is nothing like it in all the long and varied history of writing. It would be quite enough merely to have the systematic shapes within classes. But for those shapes themselves to be rationalized on the basis of the speech organs associated with their sounds — that is unparralleled grammatological luxury! The Korean phonologists were skillful indeed, but they were not lacking in creative imagination either).17
ㄷ. 현대 한글 맞춤법의 뿌리
오늘날 우리가 지키며 따르고 있는 한글 맞춤법은 왜정 때인 1933년에 만들어 지고 공표된 것이지만, 형태소를 밝혀 적도록 하는 그 틀은 세종 때에 이미 어느 정도 잡혀 있었다. 그 틀은 다름 아닌 세종 임금 자신의 언어학적인 통찰력과 의지력으로 발견되고 관철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 임금이 몸소 짓거나 관여한 것이 분명한 <훈민 정음>(1446)의 본문과 <월인천강지곡> 및 <용비어천가>에 나타난 맞춤법과 그 신하들과 아들 수양 대군의 손으로 이루어 진 <훈민 정음>의 해례와 석보 상절 등의 한글 문헌에 나타난 맞춤법이 서로 다름을 대조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월곡’으로 줄임)의 다음 보기들을 보자.
그림 8. 월인천강지곡: 한글만 쓰기와 현대적인 형태소 중심의 맞춤법을 향한 세종 임금의 희망과 통찰력을 보임. |
믈와 남기 이시며 곶과 여름이 다 초 잇더니(월곡 160.)
셰존(世尊) 맞나며 즘게남기 들여늘(월곡 179.)
각시 노라 고 빗여 드라 리화만(末利花_) 몸애 나(월곡 49.)
제 간 뎌리 모 둘희 쏜 살이 세 낱 붚 ㅂ여 디니(월곡 40.)
남기 높고도 불휘 바히면 여름을 다 먹니(월곡 99.)
여기 우선 ‘곶, 맞, , 낱, 붚, 높’ 등의 받침 ㅈ, ㅊ, ㅌ, ㅍ 들은 석보 상절 등에서라면 받침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들이라, ㅈ, ㅊ은 ㅅ으로, ㅌ은 ㄷ으로, ㅍ은 ㅂ으로 바뀌어 적혔을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의 이러한 받침들은
“종성으로는 초성을 다시 쓴다”
(終聲復用初聲)
하는 <훈민 정음>(1446) 본문의 원칙과
“ㆁ ㄴ ㅁ ㅇ ㄹ ㅿ 여섯 글자는 평성, 상성, 거성의 종성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입성의 종성이 된다”
(ㆁㄴㅁㅇㄹㅿ 六字爲平上去聲之終, 而餘皆爲入聲之終也)
하는 <훈민 정음> 해례의 해설에 맞게 적힌 것이다. 그러나 <훈민 정음> 해례의 같은 자리에서 종성으로는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 여덟 글자만 써도 된다”
(ㄱㆁㄷㄴㅂㅁㅅㄹ 八字可足用也)
하는 허용 규정을 세웠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 (梨花) (狐皮)’으로 써야 하지만, 이처럼 형태소를 밝혀 가며 받침을 다양하게 쓰는 것이 어려우니 ‘ , ’으로 받침의 종류를 줄여 써도 된다고 허용한 것이다. 이러한 편의주의적인 허용 규정을 따라 이들 여덟 글자 아닌 것은 받침으로 쓰지 않은 것이 석보 상절 등으로 비롯해서 1933년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한글 문헌이다.
다음 ‘여름이, 몸애, 간, 살이’ 등은 석보 상절 등에서라면 또한 ‘여르미, 모매, 가, 사리’ 등으로 적혔을 것이 분명하다.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에서 이처럼 토씨 따위를 그 앞 말과 구별해서 적는 일은 비록 철저하게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의 맞춤법과 동질적인 것이며, 글을 쓰는 사람에게 언어학적인 분석력을 요구하는 비교적 어려운 맞춤법임에 틀림이 없다.
위의 받침 쓰기와 함께 토씨 따위를 구별해 적기가 두 가지 종류의 문헌에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형태소를 밝혀 적는 오늘날의 한글 맞춤법과 같은 이상적인 맞춤법이 세종 임금이 몸소 지었거나 관여한 것으로 알려 진 두 문헌에서만 실현되고 그 나머지 문헌에서는 편의주의적인 맞춤법이 적용된 사실은 맞춤법에 관해서 세종 임금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크게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임금과 신하의 서로 다른 주장이 충돌했으면서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지 않고 조화롭게 양립했음을 뜻하며, 세종 임금의 어진 성품을 잘 느끼게 하는 사실이다.
ㄹ. 한국말 역사 시대의 출발
세종 임금은 무엇보다 먼저 백성들을 위해서 만든 이 글자가 얼마나 잘 된 것인지를 시범하기 위해서 신하들에게 두 가지 책을 짓게 했다. 첫째는 <용비어천가>(1445)로서 나라의 뿌리를 자세히 밝히면서 그 장래를 든든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도리를 특히 왕실 후손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째는 <석보 상절>(1447)로서 부처의 생애를 서술해서 백성을 교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림 9. 동전 ‘효뎨례의’: 한글을 널리 일상적으로 쓰게 하고자 한 세종 임금의 뜻을 보임. |
그 다음에 세종 임금은 신하들과 함께 <훈민 정음>(1446)이라는 책을 지어 ‘훈민 정음’이라는 글자를 공포했다. 이 책 앞머리의 짤막한 본문은 세종 임금이 몸소 지었고, 뒤의 해설 부분은 정 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지었다. 그리고 세종 임금은 또한 수양 대군의 손으로 <석보 상절>이 다 된 것을 받아 보고 나서 그 줄거리를 따라 가며 부처를 예찬하는 내용으로 몸소 방대한 분량의 <월인천강지곡>(1447)을 지었다. 끝으로 세종 임금은 신 숙주 등과 함께 당시 한자의 소릿값을 교정하기 위해서 <동국 정운>(東國 正韻, 1448)을 지어 음성 기호로서의 한글의 표음 능력을 유감 없이 활용하고 과시했다. 세종 임금은 또 한글을 보급하는 방편으로 ‘효뎨례의’(孝悌禮義)라는 한글을 새긴 동전을 만들기도 했고, 과거 시험에 한글 쓰기를 필수 과목으로 넣기도 했고, 신하들에게 문서를 한글로 짓게 하기도 했다.18
세종 임금이 떠난 뒤로 당대에 손으로 쓴 한글 문서 가운데 일부가 귀하게 남아 지금 오대산 월정사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1464)으로서 수양 대군과 신미라는 스님이 왕실의 도움을 받아 상원사를 고쳐 지은 기념으로 주고 받은 글이다. 또 <능엄경>(1462), <법화경>(1463), <금강경>(1464), 아미타경(1464) 등의 많은 불경, 한방 책인 <구급방>(1466), 부녀자를 가르치는 <내훈>(1475), 당나라 시인 두 보의 시집 <분류 두 공부 시>(1481), 국악의 집대성인 <악학 궤범>(1493) 등의 각종 고전이 한글로 번역되어 간행됨으로써 국민 문화의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림 10.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 손으로 쓴 글로서 소릿점까지 갖추고 가장 오랜 것. |
한글이 창제된 직후 쉰 해도 채 안 되는 동안 폭발적으로 간행된 이 한글 문헌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끼쳐 준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말의 역사 시대를 열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한글이 나오기 전에 이두 방식으로 기록된 문헌에서 한국말의 모습을 밝힌다는 것은 고고학자들이 단편적인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선사 시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이리 저리 추정해 내는 것과 같이 어렵고도 불완전한 노릇이다. 그러나 한글로 기록된 문헌들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한국말의 소리, 낱말, 말본 등을 전면적으로 쉽고도 정확하게 밝혀 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글의 창제가 ‘한국말의 역사 시대’를 단번에 전면적으로 열어 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ㅁ. 참다운 한국 문학의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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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나오기 전의 문학 작품은 한문이나 이두로 적힌 한자 문학이나 향가 따위 밖에 없다. 이들도 우리 조상들의 문학 유산으로서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살가운 표현 효과에 있어서는 한글로 적힌 단 한 편의 시조나 가사와 견줄 수 없다. 김 만중(1637-92)의 비유와 같이 아무리 능란한 앵무새의 사람 말일지라도 어린아이가 지절거리는 말 마디보다 나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언문’이니 ‘암클’이니 하는 천대나 받으면서도 한글은 16세기로부터 참다운 한국말 문학의 싹을 틔우고 줄기찬 생명력으로 열매를 맺으며 아담한 동산을 이루기 시작했다.
16세기의 한글 문학은 <악장 가사>, <시용 향악보> 등과 정 철(1536-93)의 작품집에 시조와 가사의 모습으로 실려 전해 지고 있다. 17세기에는 윤 선도(1587-1671)와 박 인로(1561-1642) 등의 시가 문학, 허 균(1569-1618)의 <홍 길동 전>과 김 만중(1637-92)의 <사 씨 남정기> 및 <구운몽> 등과 이름 모를 이들의 <춘향 전>과 <심 청 전> 등의 소설, <계축 일기>(1613)와 <산성 일기> 등의 수필로 발전해서 다양한 문학 양식을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다. 18세기 이후로는 이러한 흐름이 더욱 깊어 지고 넓어 진 결과 다채롭고 풍부한 한글 문학의 숲을 이루게 되었다.
다. 한글만 쓰는 누리
ㄱ. 갑오 경장과 서양의 영향
어두운 그늘 아래 밟히면서도 죽지 않고 민중의 품에 안겨 살아 온 한글이 햇빛을 받는 날이 마침내 오고 말았다. 밖으로 청나라에 대한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 안으로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의 제도를 민주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한 이른 바 ‘갑오 경장’(1894)은 특별히 한글의 지위가 높아 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 “법률 칙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함” (法律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이라는 고종 31(1894)년의 칙령은 당시의 시대적인 개화 분위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겠거니와, 여기 표현된 대로 ‘국문’ 곧 ‘나랏글’이라는 이름은 언문, 암클, 반절 따위와는 비길 수 없이 높은 이름이 한글에 붙여 진 사실을 말해 주며, 법률과 명령이라는 공문서들에 감히 끼이지도 못했던 한글이 섞이는 정도가 아니라 본이 되어 쓰이도록 일시에 공식적으로 격상되었음을 뜻한다. 이 칙령이 얼마나 충실하게 준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관보들이 적어도 한글과 한자를 함께 쓸 수 있게 한 것이고, 민간에서도 한글을 한결 떳떳하게 쓸 수 있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은 해에 유 길준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서유 견문>(1895)을 펴냈다. 이 책은 소설이나 수필 같은 문학적인 글이 아닌 만큼 당시의 통념으로 보면 무게 있게 한문으로 지었어야 되는데 한글과 한자를 함께 섞어 썼다 해서 아주 심한 비난을 받았으나, 유 길준은 조금도 굽힘이 없이
- 첫째: 한문만으로는 자기 생각을 다 나타내기 어렵고
- 두째: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쉽고 친근한 말로 새로운 지식을 보급해야 하며
- 세째: 한자를 버리고 아예 한글만으로 쓰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유감스럽고
- 네째: 국한 혼용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맡긴다
그림 12. 독립 신문 창간호: 한글만 쓰기와 띄어쓰기까지 선구적으로 실천한 최초의 신문. 이 신문의 창간 날짜가 오늘날의 ‘신문의 날’이 될 만큼 이 신문은 여러 모로 현대적인 신문의 본보기가 되었건만, 아직도 이 신문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거나 본받은 신문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
고 반박했다 한다.19 그 이듬해 4월 7일에는 최초로 한글만 쓰는 신문 <독립 신문>이 민간 단체인 독립 협회에서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독립 협회의 중심 인물인 서 재필과 주 시경 등의 선구적인 주장으로 한자를 아주 안 쓸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한글 띄어쓰기까지 처음으로 시행함으로써 한글 맞춤법을 한 단계 높이는 커다란 이바지를 했다.
갑오 경장을 전후해서 한국 사회의 개화 운동을 일으킨 주역들은 대개 직접이나 간접으로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특히 독립 신문에서 시작된 띄어쓰기는 독립 협회를 만든 사람들이 대개 미국에 유학했거나 서양식의 교육을 받은 사실에 비추어 영어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세기의 한글 문헌에서 더러 구둣점을 찍어 띄어쓰기와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널리 퍼지거나 본격적으로 계승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한글이 갑오 경장을 거치면서 나랏글로 공인되고 대중 계몽에 유리한 글자로 떠올라 점점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서양 특히 미국의 문물에 접한 인재들의 선견지명과 투철한 실천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ㄴ. 주 시경의 깨달음
그림 13-1. 주 시경: 현대적인 국어학을 개척하고 국어 운동의 기초를 닦는 일에 짧고도 충실한 삶을 알뜰히 바친 한겨레의 은인. |
한힌샘 주 시경(1876~1914)은 전통적인 한문 교육을 받는 동안에 제 말과 글을 두고 남의 말과 글로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낭비적인 일인가를 직관했다.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모두 한문이 아니면 글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 한문의 해독과 한글의 값어치를 알아차린 사람은 여간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서당 공부를 중단하고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배재 학당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비로소 세계의 어떤 민족이든지 저마다 제 말과 글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문명하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더욱 확고하게 말과 글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념을 세우고, 뚜렷한 스승도 선배도 없이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의 분야를 참으로 씩씩하게 혼자서 개척하면서 좋은 제자들을 많이 길러 내었다.
오늘날 국어학 분야에는 서너 갈래의 이질적인 학문 경향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말의 사실을 한 가지라도 더 깊이 캐어 내고 정리하는 일에 치중하는 학문의 계통이 튼튼하게 서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한힌샘의 연구 태도와 업적이 잘 계승된 결과이다. 그는 아직도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정도로 독특한 술어를 만들어 가며 극도로 분석적인 방법을 써서 한국말의 소리와 말본을 연구하고, <국어 문법>(1898, 1910 수정판), <국어 문전 음학>(1908), <말의 소리>(1914) 등의 책을 펴 내었다. 한힌샘의 언어학 이론은 앞으로 한층 더 정밀하게 연구되어야 하고, 그의 분석주의적인 국어 연구는 무엇보다 한국말의 바람직 한 장래를 위해서 충실히 계승할 만 한 가치가 있는데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다.
그는 독립 신문사에서 편집 일을 보는 동안 서 재필을 도와 한글만 쓰기 운동을 폈고, ‘국문 동식회’(1896. 5~1898? 1905?)를 조직해서 한글을 동식으로 곧 같은 방식으로 통일해서 쓰자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그야말로 앉은 자리가 더워 질 새도 없이 바쁘게 서울 시내의 여러 정규 학교와 일요 강습회에서 자기 나름으로 깨달은 국어의 이치를 지성껏 가르쳤고, 대한 제국 학부에 속한 국문 연구소에서는 가장 젊고 적극적인 위원(1907. 7. 12~1910. 8)으로서 <훈민 정음>과 <용비어천가> 등을 통해 현대적인 한글 맞춤법의 근본 원리를 혼자 발견하고 주창했다. 또한 처음으로 한글 풀어쓰기의 필요성을 깨닫고 시범적인 실천을 했으며, 이러한 가르침과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모아 ‘국어 연구 학회’(1908. 8. 31~ )를 창립해서 일본의 침략(1910)과 모진 총독 정치를 겪으며 국어 운동을 계속하다가 1914년 7월 20일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별세하고 말았다.
한힌샘은 ‘한글’이란 이름을 지어 ‘언문, 암클, 아침글’ 등으로 천대만 받던 ‘훈민 정음’의 권위와 영광을 완전히 되찾아 주었다. 그이는 한글과 한국말이 한국 사람의 삶의 바탕이오 나라의 기틀이라 믿고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을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방편으로 삼아 삶의 모든 것을 기울여 바쳤다. 그이의 통찰력이 없었더라면 세종 임금에게 잠깐 번득였다 사라진 우리의 훌륭한 한글 맞춤법이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었을까? 한힌샘의 정성과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그토록 튼튼하게 현대적인 국어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을까? 한힌샘은 누군가 부른 것처럼 세종 임금 다음으로 한글의 중간 시조가 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분이다. 그이는 아우가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수행하려 할 때 그것이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술책임을 알아차리고 불의한 길에 편승해서 영화를 누리려 하지 말라고 한사코 막은 고결한 인격자였다. 그이는 참으로 한겨레의 은인이며 스승으로서 그 짧은 삶에 안락이라고는 별로 누릴 새도 없이 일만 하다 갔기에 더욱 애틋한 그리움을 자아 낸다.
ㄷ. 한글 학회의 이바지
그림 14-1. 한글 마춤법 통일안: 오래도록 혼란스럽기만 했던 한국 사람들의 글자 생활을 단번에 아주 높은 수준으로 뛰어 오르게 한 법전으로서 거족적인 환영과 호응을 받아 반포됨과 동시에 정착되는 놀라운 언어 혁명을 이룩했다. |
한힌샘의 주도 아래 ‘국어 연구 학회’(1908. 8. 31~ )에 모였던 그 제자들은 일본 총독의 잔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흩어 졌다가 정세가 다소 누그러진 틈을 타서 다시 모여 ‘조선어 연구회’(1921. 12. 3~ )를 재건했고, ‘조선어 학회’(1931. 1. 10~ )로, ‘한글 학회’(1949. 9. 5~ )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한국의 가장 오래 된 학술 단체로, 한국말의 학술적인 연구, 한국말의 순화, 한글만 쓰기 및 한글의 기계화를 선도적으로 촉진함으로써 한힌샘의 정신과 사업을 그 대로 계승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학회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1933년 한글 반포 사백 여든 일곱 돌을 기념하며 반포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통해서 한글 창제 이후 오백 해 가까이 이르는 동안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 글자 생활을 청산하고, 지나치다는 이가 적지 않을 만큼 단번에 아주 합리적인 언어 규범이 되어 문화 발전의 기틀을 다진 일이다. 이것은 분명히 한국의 문화사에서 한글의 창제에 버금가는 위업이오, 세계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언어 혁명이었다. 이 학회에서 또한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함으로써 한국은 정상적인 국민 국어 교육의 기초를 최소한으로나마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ㄹ. 성경과 한글
앞서 밝힌 대로 한글이 창제되자마자 석보 상절, 능엄경 언해를 비롯한 많은 불교 서적이 한글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한글로 된 불교 서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간행되어 오지 못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불교인들은 아직도 한문으로 된 불교 서적을 읽어야 하고 한문이나 범어로 된 불경을 암송해야 하는가? 반야심경이 15세기에 이미 한글로 번역되었건만 이 한글 반야심경이 왜 전수되어 오지 못하는가? 유교 서적도 마찬가지이다. 사서삼경은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걸쳐 모두 번역되고 간행되었다. 이 중세기의 한글로 된 유교 경전들이 그 대로 계승되어 있지 못한 사실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사실들은 적어도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한글’의 효능이 불교나 유교에서 잘 발휘되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두 종교가 아마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토착화한 까닭에 한문의 텃세가 너무도 굳었다는 데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림 15. 반야 심경 언해: 불교인에게 가장 친숙한 경전이 15세기에 이미 쉬운 한글로 번역되었건만 오늘날까지 원문도 아닌 한문 번역으로만 어렵게 암송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반야 심경 언해본 사진) Internet에서 단번에 구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교 성경의 번역과 보급은 한글의 역사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불교나 유교에서와 달리 예수교는 애초부터 한글만으로 번역된 성경을 통해서 들어왔다. 중국에서 중국말로 된 한문 성경이 먼저 간행되어 있기는 했지만, 한국을 맡은 선교사들은 중국 땅을 거쳐 오면서도 한문 성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아예 한글 성경을 만들어 가지고 한국 땅에 들어왔다.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로스(John Ross) 목사가 만주에서 한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해 낸 <예수 셩교 젼셔>(1887)는 최초의 순전한 한글 신약 성경으로서 한글의 효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 글이 진서가 못 되는 언문이라 해서 손해를 본 점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었다.
그림 16. 예수 셩교 젼셔: 쉬운 한글을 100 퍼센트 활용한 신약 성경. 선교 100 년 만에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이 성경을 펴는 일로 출발했고, 이 성경을 읽고 새로운 종교를 알기 위해서 배운 한글이 한국 사람들의 밑천이 되어 서구 문명을 향한 개화와 근대적인 발전을 촉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
김 양선 박사20는 이 한글 성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Ross Version의 한글의 재생과 그 부흥에 미친 영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문의 본고장에서 한문 성서를 가지고 번역하는 저들로서는 국한문 성서를 만들 법 한데도 순수한 한글 성경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의 높은 뜻은 만고에 빛날 것이다. 그 원고는 정확한 한글체로 만들기 위하여 저 멀리 서울에까지 보내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로 하였다. Ross Version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한문이 아니고 한글인 데서 더욱 친근감과 통쾌감을 느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을 배웠다. Ross Version은 한글로써 넉넉히 어렵고 고상한 사상을 표시할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래의 선교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성경, 찬송가, 교리서,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글로 만들었다. 이 때로부터 한글은 완전히 재생되었고 또한 부흥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한글의 보급을 도왔고, 한글은 성경의 ‘어렵고 고상한 사상’이 유무식과 남녀노소를 차별함이 없이 널리 보급되어 한국 문화의 새로운 개화를 이끌게 해 준 것이다.
한글의 특성
가. 한국말에 꼭 맞춘 글자
ㄱ. 한글의 특수성
한글이 한국말을 넘어서 주변의 다른 언어를 적는 데도 매우 강력한 표음 능력을 가지도록 만들어 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중심이 한국말에 있다는 것은 더욱 명백한 사실이다. 이 점은 무엇보다도 <세종 어제 훈민 정음> 곧 <훈민 정음> 언해문의 뒤에 보탠 부분에서 중국말의 두 가지 잇소리가 한국말의 잇소리 ㅅ ㅈ ㅊ 등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중국말의 잇소리를 적을 때는 ; 등으로 획을 변경해서 적도록 하고, 나머지 소리는 한국말의 소리와 대체로 같기 때문에 이미 만든 한글을 고치지 않고 융통해 쓰도록 한다고 규정한 사실로 잘 드러나 있다. 말하자면 한글은 우선적으로 한국말을 적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 주변의 다른 언어들을 적을 때는 어지간하면 그 대로 쓰되 정 맞지 않을 경우에는 획을 부분적으로 고쳐 가며 쓰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외국말 적기를 위한 변형의 원칙은 15세기로부터 17-1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말 뿐만 아니라 만주말, 몽고말, 일본말, 인도말 등의 모든 외국말에 대해서 한결같이 적용되어 갔다. 그러나 한글의 참된 특수성은 이보다 더 깊은 곳에 배어 있다.
첫째로, 한글에서 소리마디를 초성-중성-종성의 셋으로 나누는 삼분법은 중국말에서 소리마디를 성모-운모의 둘로 나누는 이분법 곧 반절법과 대비된다. 이를테면 중국말에서 ‘東’은 성모 /ㄷ/와 운모 /ㅗ ㆁ/으로만 나뉜다. 그러나 세종 임금은 이 경우의 운모를 /ㅗ/와 /ㆁ/으로 한 번 더 나눔으로써 결국 /ㄷ-ㅗ-ㆁ/의 세 조각을 내었다. 중국말의 성모는 초성과 같은 것이지만, 운모는 중성과 종성으로 갈린 셈이다. 그리고 종성은 초성과 동질적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훈민 정음> 본문에서 종성을 초성 글자로 융통한다고 규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종 임금의 독창적인 관찰력이 발휘된 것이다.
만일 중성과 종성을 갈라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 등을 저마다 다른 글자로 적게 되었을 것이고, 또 // 등도 저마다 다른 글자로 적게 되었을 것이고, 또 / / 등도 저마다 다른 글자로 적게 되었을 것이고, 또 ……. 여기 보기로 든 것만 가지고라도 셈을 쳐 보자. 모두 서른 글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성과 종성을 갈라 보고 따로 적도록 한 결과 필요한 것은 몇 글자인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를 적을 글자 열 개와 /ㄱ ㄴ ㄷ/을 적을 글자 세 개, 그러니 모두 열 세 개만 있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경우를 다 찾아 셈을 친다면 그 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세종 당대의 한글 문헌에 쓰인 중성 글자는 줄잡아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ㆉ ㅜ ㅝ ㅞ ㅟ ㅠ ㆌ ㅡ ㅢ ㅣ ㆍ ㆎ’의 스물 다섯 개 정도이고, 종성 글자도 크게 줄잡아 ‘ㄱ ㄴ ㄷ ㄹ ㄹㄱ ㄹㅁ ㄹㅂ ㄹㆆ ㅁ ㅂ ㅅ ㅿ ㆁ ㅈ ㅊ ㅌ ㅍ’의 열 일곱 개 정도이다. 중성과 종성을 갈라 본다면 25+17=42 개의 글자로 충분하지만, 그렇게 보는 눈이 없이 글자를 만든다면, 25×17=425 개의 글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 필요한 글자가 기하급수로 불어 나는 셈이다. 이러한 셈이 나오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국말의 중성과 종성이 모두 중국말의 것과 비길 수 없을 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 이처럼 한국말이 중국말과 다르다는 사실을 세종 임금이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중성과 종성을 가르고 그럼으로써 한국말에 꼭 맞는 합리적이고도 경제적인 글자 체계를 구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째로, 홀소리 글자에 나타난 밝은홀소리, 어두운홀소리, 중간홀소리의 구별은 중국말에는 없는 홀소리 어울림(모음 조화) 현상의 반영이다. 이를테면 “놓어 두아’라 하지 않고 “놓아 두어”라고 말해야 하는 것처럼 ‘ㅗ’와 ‘ㅏ,’ ‘ㅜ’와 ‘ㅓ’ 등의 일정한 홀소리의 짝끼리 어울리기 잘 하는 일은 한국말, 만주말, 몽고말, 터키말 등의 이른바 알타이말 겨레에 공통되며, 이들 언어와 계통이 전혀 다른 중국말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위의 보기를 줄여 말하면 “놔 둬”가 되어 ‘ㅘ’와 ‘ㅝ’라는 소리마디가 나온다. 앞서 글자 만들기에서 보았듯이 ‘ㅗ’와 ‘ㅏ’를 같은 부류로, ‘ㅜ’와 ‘ㅓ’를 같은 부류로 갈라 풀이하고, 이에 따라서 겹글자도 ‘ㅘ’와 ‘ㅝ’ 따위를 만들지언정 ‘ㅗㅓ’와 ‘ㅜㅏ’ 따위를 만들지 않은 것은 이러한 홀소리 어울림 현상을 먼저 꿰뚫어 알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종 임금은 이처럼 한국말에 특유한 현상을 발견하고 이에 맞추어 홀소리 글자를 조직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고려는 홀소리 어울림 현상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언어들의 글자 만들기에서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세째로, 소리마디의 높낮이를 나타내기 위해 글자 옆에 소릿점을 찍은 일 자체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일이거니와, 이 소릿점 두 가지를 써서 구별한 세 가지 성조 곧 평성, 상성, 거성은 중국말의 네 가지 성조 곧 평성, 상성, 거성, 입성과 꼭 같지는 않은 것이다. 한국말에도 중국말의 입성과 같은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훈민 정음> 종성 풀이에서 설명한 것처럼 /ㄴ ㄹ ㅁ ㅿ ㆁ/ 이외의 소리 곧 /ㄱ ㄷ ㅂ ㅅ/ 등이 종성에 갈 때는 그 소리마디가 무조건 입성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구태여 글자로 구별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입성은 무시하고, 평성, 상성, 거성의 셋을 구별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두 가지 소릿점이 필요해서 한 점으로는 거성을 나타내고 두 점으로는 상성을 나타냄으로써 저절로 평성도 구별되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한국말의 입성이 한국말 안에서 중국말의 입성과는 상대적으로 다른 조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한 일이다.
세종 임금은 이처럼 특히 중국말과 다른 한국말의 언어학적인 특성을 이 모 저 모로 놀랍도록 깊고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여러 특성을 애초부터 고려해서 한글을 만들어 내었다. 한글을 자유자재로 변형해 가며 이웃한 나라들의 다른 언어들을 적어 왔고, 더욱 다양하게 융통해서 어떤 언어든 다 적어 줄 수 있고, 또 그야말로 <훈민 정음> 발문의 표현 대로 ‘닭 소리며 개 짖는 소리까지’ 다 적을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음성 기호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심을 한국말에 두어야 하는 까닭은 이처럼 한국말의 깊은 특성들이 치밀하게 배도록 만들어 진 글자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이처럼 세계의 보편적인 글자가 될 만큼 막강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한국말이라는 특정한 자연 언어를 적기에 다시 없이 알맞은 글자로서 한국말과 밀착된 바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유능한 언어학자의 손으로 치밀한 연구와 과학적인 창의가 결집되어 만들어 진 글자이기에 한글은 글자 일반의 요건을 골고루 갖춤으로써 이상적인 글자에 가깝게 된 것이다.
ㄴ. 한글의 대중성
그러면 한글은 이처럼 구름 같이 높기만 한 글자인가? 아니다. 한글은 그 쉽고 친근함에 있어서도 견줄 바가 없다.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것은, 참으로 너무 쉬워서 ‘아침글’이라 하고, 학문 없는 여자들이나 배워 쓸 ‘암클’이라고 천대를 받아 온 오백 여 해의 역사가 증언하며, 오늘날 한국을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두려운 나라로 만든 것이 바로 한글이라는 점으로 증명된다. 최근에 알려 지고 있는 대로 공산권의 다양한 민족들 가운데 소수 민족 치고는 사회적으로 우세하게 살고 있는 동포 사회에서도 한글은 이와 같은 이바지를 해 왔을 것이다. 많은 어린이가 학교에 가서야 배울 글자를 미리 다 깨쳐 가는 나라가 한국 말고 몇이나 있으며 혹 있기나 할까?
나. 넘치는 생성력
ㄱ. 살아 있는 글자
한글의 밑 글자 여덟이 아흔 여덟으로 곧 열두 곱 넘게 불어나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그러나 여기 들어 보인 낱 글자들은 창제 당시의 문헌에 나타난 것일 따름이다. 이 뒤로부터 근세에 이르도록 한국말 뿐만 아니라 불경의 범어나 중국말, 만주말, 몽고말, 일본말, 그 밖의 서양말 등의 외국말을 한글로 옮겨 적은 여러 문헌에 나타난 겹글자들을 모두 찾아 포함시킨다면, 그 증식률은 훨씬 더 높아 질 것이 분명하다. 다음의 몇 가지 보기를 보라.
- 중국말: (dao) (gyao) (shyao) (lyao)
- 만주말: (Caohiyan) (leolen) (jeo) (isinjimbio) (moo) (yooni)
- 일본말: (mousu) (mousi) (go) (gyo) (degi) (bu) (ban) (pon)
<-4>그림 17. 해동 제국기/첩해신어 등: 한글로 외국말을 적기 위해서 다양하게 조합하며 변통한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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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노걸대 이 책 그림은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
한글은 이와 같이 필요한 대로 새로운 홑글자 또는 겹글자를 조직적으로 무제한에 가깝게 생성해 내는 힘을 가진 만큼,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글자들과 견주어 볼 때 ‘살아 있는 글자’라고 불러도 틀림이 없다.
ㄴ. 한글을 죽이는 정보화 사회
1933년 이래로 한글 맞춤법은 옛글에서 오히려 무한히 자유로왔던 한글의 조합을 일만 일천 일백 일흔 두 가지로 제한했고, 1987년 3월에 정부에서 전산기를 위해 제정한 정보 교환용 한글의 표준 부호 체계21는 이것을 다시 이천 삼백 쉰 가지로 제한함으로써 한글의 조합 능력을 완전히 죽이다싶이 하고 말았다.22 다음은 본보기로 현행 맞춤법의 틀 안에서 ㄱ을 초성으로 가지는 음절 가운데 이 표준 부호 체계로 살아 남은 음절만 보이는 표이다. 빈 자리(△)는 전부 한글의 무덤이다. 이와 비슷하게 생긴 표가 초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들로 열 여덟 개가 더 만들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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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한글의 무덤들: 한글을 음절 단위로 고정시켜 다루는 전산 부호의 정부 표준은 현행 맞춤법의 테두리 안에서나마 조합할 수 있는 음절의 8할을 아예 쓸 수 없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남겨 놓은 2할도 초성, 중성, 종성의 낱 글자로 풀어 낼 수 없는 전신불수의 상태로 굳히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결과로 우리는 일상적인 글자 생활에서
- (1) ‘늧(먼저 보이는 빌미), 닁큼, 맟다(마치다), 볌(헐거운 틈을 메우는 물건), 뺜죽거리다, 뉘웇다(뉘우치다), 쫒다(상투 따위를 죄어 매다), 문칮거리다’ 등의 적지 않은 낱말을 쓸 수 없게 되었고,
- (2) ‘긓지(그렇지), 붴(부엌), 아뢔(아뢰어), 궨(궤는), 뼌(뼈는), 궬(궤를), 뼐(뼈를), 걥니다(걔입니다), 징훕니다(징후입니다), 괐다(고았다), 왰다(외었다)’ 등의 많은 준말을 쓸 수 없게 되었고,
- (3) ‘둥긂(둥글다), 서툶(서툴다), 폠(폐다)’ 등의 어형을 쓸 수 없게 되었고,
- (4) ‘장아찟감, 쾟돈’ 등의 사이시옷이 있는 많은 낱말을 쓸 수 없게 되었고,
- (5) “어서 내놧! 우로 봣! 엎드려 쐇!” 등의 외치는 소리, 구령 등에 나타나는 강조의 ㅅ 받침을 자유로이 쓸 수 없게 되었고,
- (6) ‘솰솰’보다 센 ‘쏼쏼,’ ‘뿅’보다 거센 ‘푱’ 등의 시늉말을 자유로이 쓸 수 없게 되었고,
- (7) ‘펲시 콜라, 킾스’ 등의 새로 생겨 나게 마련인 외국말식 홀이름씨들을 자유로이 적을 수 없게 되었다.
또 말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분야에서
- (8) ‘겱에(겨울에), 갱깄다(감겼다), 껚인다(꺾인다), 뚧어라(뚫어라), 웂어요(없어요), 쬧긴다(쫓긴다)’ 같은 무수한 사투리나 개개인의 예측할 수 없는 언어 습관 등을 글로 적을 수 없게 되었고,
- (9) ‘식용유[시굥뉴], 옷[옫], 물엿[물렫]’ 등으로 발음 실태를 글로 적어 보이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
앞서 밝힌 것처럼 세종 당대에 양립했던 두 가지 종류의 맞춤법은 오늘날까지도 계속적으로 대립하며 싸우면서 우리에게 이를 조화롭게 병행시키는 노력과 슬기를 요구하고 있다. 세종 임금이 발견하고 시범한 맞춤법은 ‘ , ’ 처럼 형태소의 원형을 밝혀 적음으로써 쓰기는 좀 어렵더라도 읽기에 유리하게 하는 것인 데 반해서, 세종 임금이 신하들에게 허용한 맞춤법은 ‘ , ’ 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음으로써 읽기에는 좀 불리해 지더라도 쓰기에 쉽게 하는 것이다. 앞것을 편의상 ‘읽기 (좋은) 맞춤법’이라 하고, 뒷것을 ‘쓰기 (쉬운) 맞춤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읽기 맞춤법은 세종 당대에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두 글에 밖에는 적용되지 못했으니, 바꾸어 말하면 실험실을 벗어나 보지 못한 맞춤법이었다. 그 밖의 모든 문헌에서는 쓰기 맞춤법만이 적용되었다. 그 때로부터 1933년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나올 때까지 오백 년 동안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지키고 따른 언어 규범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이 쓰기 맞춤법 뿐이다. 이 편의주의적인 쓰기 맞춤법은 근본적으로 한글의 표음 기능을 무법하게 이용할 따름이기 때문에 실상은 ‘법’이 아니었다. 우리 조상들의 한글 쓰기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혼란과 무질서의 외길로만 치달아 온 사실을 볼 때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녀자나 쓰는 글에 무슨 이치를 따지며 법을 세우려 했겠는가? 필경 한글 자체에 대한 선비 사회의 무관심과 천대도 한글 맞춤법이 가없이 타락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글 쓰기의 이러한 형편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종래의 쓰기 맞춤법을 읽기 맞춤법으로 돌이키기 위한 연구와 운동에 헌신한 분이 한힌샘이다. 그는 한국말을 자기 나름으로 정밀하게 분석한 바탕 위에서 일찍이 세종 임금이 발견했던 것과 똑 같은 읽기 맞춤법의 원리를 다시 발견해서 이를 널리 가르치고 저술을 통해 시범하며 계몽했다. 이 원리의 핵심은 <훈민 정음> 해례로 비롯해서 오백 년 동안 종성으로 여덟 가지만 써 오던 관습을 벗어나 모든 초성을 제한 없이 종성에 쓸 수 있고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힌샘의 이러한 주장은 유능한 제자들에게 전수되고 사회의 전폭적인 호응을 받음으로써 1933년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으로 실현되어 그 대로 오늘날 우리들의 한글 맞춤법이 되었다.
이 맞춤법은 본질적으로 배우고 쓰기가 어려운 반면에 눈으로 읽기에는 아주 유리한 맞춤법이다. 그래서 실은 제 대로 배우기 전에는 따르기가 어려운 언어 규범이다. 대학 교육까지 받고 나서도 한글 맞춤법에 자신 있는 사람이 적은 까 닭이 여기 있다. 맞춤법을 모르고 스스로 발음하는 대로 적어도 얼마든지 정밀하게 뜻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한글인데, 무엇 때문에 그처럼 어려운 맞춤법을 배우고 지켜야 하는가? 저명한 국어학자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의혹과 갈등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1933년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나왔을 때 국어학자 박 승빈(1880~1943)이 이 통일안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벌인 반대 운동은 여간 맹렬한 것이 아니었다. 1950년대에 이 승만 대통령도 한글 맞춤법이 너무 어려우니 쉬운 맞춤법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가 학계 등의 반발이 심해서 여러 해 동안 이른 바 ‘한글 간소화 파동’만 일으키고 도로 거두어 들인 일이 있었다.
이것은 다 읽기 위주의 어려운 맞춤법을 쓰기 위주의 쉬운 맞춤법으로 바꾸어 보려 하는 움직임인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7년에 국어 연구소에서 낸 ‘한글 맞춤법 개정 시안’을 통해서 또 다시 적극적인 모습으로 표면화했다. 이것은 ‘종래의 맞춤법이 어딘가 불합리하니 합리적으로 개선하자’ 하는 개혁안이라기보다는 ‘너무 고답적이고 어려우니 무슨 이유를 붙여서든 쉽게만 바꾸면 좋겠다’ 하는 퇴행안이었다. 한글 맞춤법의 간소화 운동이 서른 해 만에 되살아 난 셈이다. 이 시안은 여론과 토론의 여과 과정을 거쳐 보수적인 방향으로 다소 수정되기는 했지만 마침내 그 간소화 목표만은 꺾임이 없이 문교부 고시의 <한글 맞춤법>(1988)으로 정착되었다.
한글 맞춤법의 역사는 이처럼 읽기 맞춤법의 이상주의와 쓰기 맞춤법의 현실주의라는 두 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는 흔들이의 움직임이다. 단순히 쓰기 쉬운 맞춤법이라면 있을 필요가 없다. 소리 나는 대로 쓰면 가장 쉬울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태여 사회의 약속인 규범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글은 한 번 쓰면 혼자서라도 두고 두고 수도 없이 읽게 되는 것이오, 한 사람이 써서 많은 사람이 읽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쓰기보다 읽기가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뜻에서 쓰기에 쉬운 맞춤법보다 읽기에 좋은 맞춤법이 더 가치 있는 맞춤법이다.
“소리나는 대로 정는 마춤뻐븐”
“읽기에 좋은 맞춤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맞춤법은 상극이다. 아무래도 어느 한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치우치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사람들의 의견이 갈려서 그 끊임없는 다툼이 일어난다.
세종 임금의 때나 한힌샘의 때나 오늘날이나 변함 없는 것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우선 먹기는 고욤이 달다는 셈으로, 글을 읽을 일보다 당장 쓸 일을 더 크게 생각하고 쓰기 쉬운 맞춤법을 원한다는 점이다. 읽기가 더 중요하다, 읽기에 좋은 맞춤법이 더 가치 있다, 하면서 쓰기에 어려운 맞춤법을 구상하고 내세우는 고답적인 사람은 언제나 적고 세력이 약하다. 이런 점에서 한글 맞춤법의 역사는 그레샴 법칙의 실증이기도 하다. 무릇 규범은 단지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변경되어 갈 때 허물어 지고 타락하게 마련이다.
이 책의 머리에 들어 둔 바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일 뿐만 아니라 말을 닦는 기계 곧 틀이라’는 한힌샘의 말은 여기서 깊이 새길 만 한 잠언이다. 글에 공을 들이면 들인 만큼 그 글은 말을 가다듬게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정신까지 가다듬고 계발되게 한다. 쉽게 쓴 글보다는 이치를 밝혀 까다롭게 쓴 글에서 은연중에 얻는 것이 많은 법이다. 말 또한 정신 곧 얼을 담는 그릇일 뿐만 아니라 얼을 닦는 틀이기에, 우리는 얼을 위해서 말을 가다듬어야 하고, 말을 위해서 글을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그저 쉽게 심고 좋은 열매를 거두기는 어렵다.
한글 맞춤법이 이와 같이 두 극단을 오가게 되는 깊은 요인은 한글이 음소 글자이면서 또한 소리마디 글자인 데 있다. 우리들이 오래도록 소리마디를 따라 형태소의 경계가 나누이게 쓰고 읽도록 길을 들여 왔기 때문에 읽기에 좋은 맞춤법은 바로 형태소의 경계가 소리마디의 경계와 일치하도록 적는 맞춤법이다. 또 한국말에서는 하나의 형태소가 음운적인 조건에 따라 워낙 다양하게 변동하기 때문에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놓으면 같은 형태소가 이렇게 저렇게 다른 모습으로 적히게 되어 읽기가 어려워 진다. 그래서 같은 형태소는 소리가 다르게 나더라도 같은 모습을 띠도록 적는 맞춤법이 읽기에 좋은 맞춤법이 된다.
이런 맞춤법을 가르치고 배워 지킨다는 것은 실로 힘 안 들이고 되는 일이 아님에 틀림이 없다. 이런 맞춤법은 상당한 수준의 언어 의식과 분석 능력을 요구하는 맞춤법이다. 그러나 이런 맞춤법에 일단 익숙해 진 다음에는 무의식 중에 언어 의식을 한층 세련되게 하고 분석 능력을 강화해 주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맞춤법은 무조건 기억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이치를 따라 이해하기만 하면 저절로 따라 갈 수 있도록 된 것인 만큼 어떤 점에서는 쉬운 것이기도 하다. 아무러면 수백 해 전의 철자를 소리 내기와는 상관 없이 지켜야 하는 영어, 프랑스말 등의 맞춤법보다 어렵겠는가? 아무러면 말의 이치는커녕 물건의 모양 따위를 본뜨기 시작해서 한 낱말에 한 자씩 만들어 낸 수천 수만의 한자를 규칙도 없이 낱낱으로 배우고 그 복잡다단한 획을 기억해야 하는 일보다 어렵겠는가? 그러므로 한글 맞춤법의 이러한 특성과 장점에 대해서 일반 언중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수준에 따라 맞춤법의 중심은 읽기에 좋은 이상적인 쪽으로 올라가거나 쓰기에 쉬운 현실적인 쪽으로 미끄러지기를 되풀이할 것이다.
라. 로마글을 압도하는 표음 능력
도로 표지판이나 외국 사람이 보라고 만드는 각종 문헌에서 우리는 한국의 땅이름이나 사람 이름 따위를 한글 대신 로마글로 적고 있다. 이럴 때 한글을 로마글로 바꾸어 적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그 가운데 다른 것보다 크게 나은 것도 없고 해서 아주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 원인은 한글 낱자로 적어 낼 수 있는 소리의 수에 비해서 로마글 낱자로 적어 낼 수 있는 소리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글 닿소리 ㄱ ㄲ ㅋ를 로마글로 옮겨 적는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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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ㄲ ㅋ (1) g k k' (2) g k kh (3) g gg k (4) k kk kh
보통의 여느 외국 사람치고 이 가운데 어느 것을 골라서 보이더라도 한글 ㄱ ㄲ ㅋ와 비슷하게나마 읽어 낼 사람이 없다. 한글 ㄱ는 로마글 g로 어느 정도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ㄲ와 ㅋ는 도저히 구별해 줄 수가 없다. 로마글을 쓰는 외국의 어느 언어에서도 특히 이 두 가지 곧 된소리와 거센소리를 구별해 쓰는 경우가 없고, 따라서 그 외국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소리를 구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 어느 방법도 된소리와 거센소리를 구별하는 효과는 외국 사람들의 실정에 비추어 영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사정은 ㄷ ㄸ ㅌ, ㅂ ㅃ ㅍ, ㅈ ㅉ ㅊ, ㅅ ㅆ 등에서도 꼭 같다.
다음으로, 한글 홀소리 ㅓ와 ㅡ를 정확히 옮겨 적을 방법이 도무지 없다. 홀소리를 적는 로마글 낱자는 a i u e o의 다섯 개 뿐인데, 이것으로는 한글 ㅏ ㅣ ㅜ ㅔ ㅗ를 옮겨 적을 수 있을 뿐이다. ㅓ가 대개의 외국 사람들에게 ㅗ와 비슷한 소리로 들린다는 점을 이용해서 ㅗ는 o로, ㅓ는 eo 또는 로 옮겨 보고 있지만, 외국 사람들의 실정에 비추어 실제로는 구별 효과가 없다는 점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또 ㅡ가 외국 사람들에게 ㅜ와 비슷한 소리로 들린다는 점을 이용해서 ㅜ는 u로, ㅡ는 eu 또는 로 옮겨 보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군색한 노릇이다. 이런 사정은 ㅝ와 ㅢ로 연장된다.
이와 같이 로마글 스물 여섯 자는 한글 스물 넉 자의 표음 능력을 감당할 수 없다. 누가 어떤 기발한 방법을 찾아 보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한글이 가짓수가 워낙 많은 한국말 소리에 맞추어 조직적으로 교묘하게 만들어 진 글인 데 반해서, 로마글은 이집트의 그림글자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언어들을 거쳐 음소 글자로까지 변천하는 동안에 특정한 언어의 소리 체계에 매이지 않고 여러 언어에 공통된 소리를 적을 수 있는 글자들만 우연히 살아 남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로마글은 세계의 글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 잠재적인 표음 능력에서는 도저히 한글에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라. 세계 글자의 꽃봉오리
ㄱ. 글자의 발전 단계
인류의 글자는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사물을 직접 본뜨는 그림글자로 시작됐다. 고대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에 적힌 원시적인 글자나 동양에서 고대로부터 지금껏 쓰이는 한자의 밑바탕은 다 그림글자다. 이집트에서나 한자에서나 ‘해’라는 낱말을 애초에 ‘⊙’로 나타낸 것은 그것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보는 해의 모양을 그린 글자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 만큼 사람이 눈을 감고도 생각할 수 있는 추상적인 뜻은 단순한 그림글자만으로 나타낼 수는 없다. 이를테면 ‘밝다’는 뜻은 특정한 물건의 그림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밝은 물건의 대표라 할 해와 달의 그림글자를 겹쳐 ‘明’으로 나타냈다. 글자마다 반드시 어떤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글자를 뜻글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겉 모양은 사물의 간략한 그림이면서 그 그림을 통해서 나타내는 내용은 대개 어떤 낱말이기 때문에 이런 글자를 낱말글자라고도 부른다. 또 다른 보기를 들면 한자 ‘加’는 ‘더하다’라는 뜻을 시각화한 뜻글자요 낱말글자이다.
무릇 글은 말을 보이게 하는 것이오, 말은 마음을 들리게 하는 것이거니와, 또한 마음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말로 이루 나타낼 수 없을 만큼 크고 복잡하고 또 끊임 없이 변하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의 전부를 글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꿔 말하면 글은 말에 대해서 언제나 모자라며, 말도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말의 단위인 낱말이 계속적으로 갱신되고 늘어나는 대로 낱말글자도 계속적으로 갱신되고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의 한자가 기원전 200년 쯤의 삼천 자, 서기 100년 쯤의 구천 삼백 쉰 세 자에서23 오늘날의 육만 자에 가깝도록 불어 온 역사는 바로 낱말글자의 이러한 필요에 따른 것이다. 한자가 낱말글자로서 머물러 있는 한 이와 같은 양의 팽창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어 갈 것이다.
표 3. 중국말의 주음부호. |
그러나 사람의 기억 능력에 비추어 낱말글자의 단순하고도 무제한적인 팽창은 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인류는 새로운 글자의 창작을 중단하고 이미 만들어 진 글자를 다양하게 융통하거나 그 본질을 바꾸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그 해결책은 다름 아니라 낱말글자의 모양과 뜻의 인연을 끊고 소리와의 인연만 유지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加減’(더하고 빼기)이나 ‘加工’(손질을 더함)이라 할 때는 ‘加’라는 낱말글자의 성격을 온전히 살려 쓴 것이지만, ‘加特力’(가톨릭), ‘加里’(칼리)라 할 때는 ‘加’의 뜻은 무시하고 중국말의 소리만을 따다가 비슷하게 변통한 것이고, 우리네 이두에서 ‘加’(더), ‘加于’(더욱), ‘爲加尼’(더니)라 할 때는 ‘더하다’라는 낱말의 ‘더-’만을 따다가 변통한 것이다. 여기서 그림글자 또는 뜻글자로부터 소리글자로의 중대한 혁명이 일어난다.
이 글자가 일본에서는 획을 덜어 내고 아무 뜻이 없는 글자 ‘カ’(가)로 발전함으로써 뜻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아무 낱말에서나 쓰일 수 있는 글자가 된다. 이렇게 뜻글자가 소리글자로 바뀌는 것만으로 중국말을 위해서는 육만 자나 필요하던 글자가 일본말을 위해서는 쉰 자만 있어도 충분하게 되는 엄청난 경제 효과를 얻게 되는 셈이다. 일본 글자는 쉰 자가 각각 다른 소리마디를 나타내기 때문에 소리마디 글자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한자의 소릿값을 적기 위한 방편으로 한자로부터 변형해 만든 주음부호(注音符號)들도 소리마디 글자이다. 뜻글자인 한자가 소리글자로 발전하는 일은 이와 같이 소리마디 글자의 단계에서 끝나 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그림글자에서는 이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되 일본 글자와 같은 소리마디 글자의 단계를 거쳐 음소 글자인 로마글 스물 넉 자로까지 발전했다. 이집트의 그림글자가 칠백 자인 때 소리마디 글자는 그 가운데 백 자나 되었다고 한다.24 이 그림글자는 주변의 여러 언어들에 이용되는 동안 부대끼고 깎인 결과 마침내 소리마디 글자의 단계를 지나 음소 글자로 바뀌어 갔다. 보기를 들면, 암소의 머리를 그린 이집트의 그림글자는 암소란 뜻의 ‘aleph’라는 낱말에서 ‘a-’의 소릿값만이 남은 로마글 ‘A’로, 집을 그린 이집트의 그림글자는 집이란 뜻의 ‘bet’라는 낱말에서 ‘b-’의 소릿값만이 남은 로마글 ‘B’로 발전한 것이다. 이 두 낱말이 들러붙어서 ‘알파베트’(alphabet)라는 로마글의 이름이 나왔다. 이 로마글을 밑절미 삼아 극도로 정밀한 낱소리[音聲] 글자로 만들어 지고 계속 다듬어 져 가는 것이 국제 음성학 협회(International Phonetic Association)의 국제 음성 기호(I. P. A. = 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이다.
표 4. 국제 음성 기호: 이집트의 그림글자로부터 변천한 소리글자의 극단.
그림 출처: http://ko.wikipedia.org/, GFDL
ㄴ. 소리바탕 글자
한글도 이와 같은 음소 글자의 단계에서 발명된 것으로 아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한글은 음소 글자의 단계를 한 번 더 넘은 특이한 소리글자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ㄱ’은 ‘ㄲ, ㅋ’과 더불어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은 모양을 본뜬 글자로서 이들이 나타내는 소리들이 혀의 모양을 같이 해서 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ㄱ’은 ㄱ라는 음소만이 아니라 이 음소가 날 때 갖추어 지는 혀의 모양까지 나타내고 있고, ‘ㄲ’은 ㄱ이 겹쳐 진 소리 또는 더 된 소리를 나타내기 때문에 글자 모양도 겹쳐 진 것이고, ‘ㅋ’은 ㄱ보다 더 거센 소리를 나타내기 때문에 획이 더해 진 것이다. 한글의 닿소리 글자 전체가 저마다 음소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음소의 음성학적인 요인 곧 소리바탕[音韻資質]까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 ‘ㅏ’는 ‘ㅗ’와 더불어 그 짧은 금이 긴 금의 ‘밖과 위’에 붙어 있음으로써 이 두 글자의 소리가 밝은홀소리 곧 ‘밝고 작은 느낌을 주는 소리임’을 나타내고 있고, ‘ㅓ’와 ‘ㅜ’는 그 짧은 금이 긴 금의 ‘안과 아래’에 붙어 있음으로써 이 두 글자의 소리가 어두운홀소리 곧 ‘어둡고 큰 느낌을 주는 소리임’을 나타내고 있다. 홀소리의 이러한 음성학적인 요인도 모든 홀소리 글자에 조직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영국의 언어학자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한글의 이러한 특성들을 지적하면서 한글이 음소 글자가 아니라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소리바탕 글자’라고 처음으로 격상시켜 불러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25 소리바탕 글자는 인류의 글자 가운데 아직까지는 더 나아갈 데 없이 발전한 글자이다. 겔브26 는 서기 전 3100년 쯤 수메르말의 그림글자가 이집트말의 그림글자를 거쳐 서기 전 1700년 쯤 셈말의 소리마디 글자로 발전했고, 이것이 다시 기원전 900년 쯤 그리스말의 음소 글자로 발전했고, 이것이 기원전 600년 쯤 라틴말의 로마글로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림글자가 소리마디 글자로 바뀌는 데에 일천 사백 해가 걸렸고, 소리마디 글자가 음소 글자로 바뀌는 데에 팔백 해가 걸린 셈이다. 그러나 한글은 한자 문화의 바탕 위에서나마 원시적인 그림글자가 이천 이백 해 년 걸려 오른 음소 글자의 수준을 한층 더 넘는 소리바탕 글자로 단숨에 뛰어 올랐으니, 한글은 단연코 세계 글자 역사의 눈부신 돌연변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한글 문화권의 꿈
한글이 세계의 많은 글자들 가운데 꽃봉오리처럼 솟아 올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손댈 여지가 없이 완벽한 글자는 결코 아니다. 한국말을 좀 더 정확히 표기하고 한국 사람의 언어 의식을 한층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특히 전산기 문명의 시대에 적응하고 나아가 능동적으로 한글의 잠재적인 특성들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한글의 모자란 점들을 밝히고 그 개선의 길을 찾아 보고자 한다.
사회의 관습과 개인적인 버릇은 본래 바꾸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수백 해 동안 굳어 진 글자 생활의 관습은 철벽과도 같은 것이다. 관습이나 버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안목도 굳어 있기 쉽기 때문에 여기 지적하는 한글의 모자람들과 개선 방안 가운데 더러는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려울 줄 안다. 어떤 어림없는 지적이나 엉뚱한 제안일지라도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는 정도로 마음을 열고 가볍게 읽어 주기 바란다.
가. 한글 표음 능력의 강화
한글은 무엇보다도 한국말을 적기 위해서 만들어 진 글자이다. 한국말에서 분명히 중요하게 쓰이고 있는 말소리가 글로 적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한글의 모자란 점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목청 터짐소리 [ ]가 한국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말에 힘을 주기 위해서 아주 활발하게 쓰이는 말소리인데도27 글로 적히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소리를 적을 글자가 세종 임금 때 이미 만들어 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테면, ‘一[일]’ 같이 ㄹ 소리로 끝나는 한자 소리마디는 그 뒤에 오는 한자 소리마디가 ㄱ, ㄷ, ㅂ, ㅅ, ㅈ 소리로 시작할 경우에 ‘一等[일뜽], 一生[일쌩], 一種[일쫑]’ 같이 그 소리들을 된소리로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세종 당시에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표시하기 위해서 이런 경우를 한글로는 ‘등, 생, 종’ 같이 된이응 ‘ㆆ’ 글자를 받쳐 적는 규칙 곧 ‘ㆆ으로 ㄹ을 보태기’[以影補來]라는 규칙을 세웠었다. 이런 현상은 한자말만이 아니라 다른 낱말을 꾸미는 씨끝 ‘-을/ㄹ’ 밑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이 씨끝도 ‘입 사람[싸람], 집[찝]’ 등과 같이 ‘-/ㄹㆆ’로 적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규칙은 된이응으로 나타내는 목청 터짐소리가 ㄱ, ㄷ, ㅂ 등의 다른 터짐소리와 마찬가지로 ㄱ, ㄷ, ㅂ, ㅅ, ㅈ 소리 앞에 올 때 ‘학교[학꾜], 곧다[곧따], 입술[입쑬]’ 등에서처럼 그들을 된소리로 만드는 힘이 있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와 똑 같은 현상이 ‘안다[안따], 신고[신꼬]; 곪지[곰찌], 젊게[점께]; 담도록[담또록], 삼던[삼떤]’ 들처럼 줄기(어간)가 ㄴ, ㄹㅁ, ㅁ으로 끝나는 풀이씨(용언)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은 옛말에서는 없던 일이며 오늘날 일부 사투리에서도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에 위에서처럼 된이응으로 ㄴ, ㄹㅁ, ㅁ을 보태어서 ‘안ㆆ다, 신ㆆ고, 곪ㆆ지, 젊ㆆ게, 담ㆆ도록, 삼ㆆ던’ 식으로 적으면 매우 정확한 표기가 이루어 진다. 이와 거의 같은 현상이 이른 바 사잇소리 현상이다. ‘콧등, 손등, 발등’에서 ‘등’이 ‘뜽’으로 발음되는 것은 이 모든 경우에 목청 터짐소리가 끼어들기 때문인데, 그 소리를 ‘콧등’에서는 ㅅ 받침으로 적은 것이고, 나머지 경우에는 무시하고 적지 않은 것이다. 이 경우들을 정확하게 나타내려면 된이응을 써서 ‘코ㆆ등, 손ㆆ등, 발ㆆ등’으로 적어야 마땅하다.
이 목청 터짐소리가 실은 홀소리로 시작하는 낱말을 힘주어 발음할 때 완전하게 나타난다. 보기를 들면 “아니, 이런 우스운 노릇이 있나?”라고 말할 때는 ‘아니’와 ‘이런’ 사이를 뚝 끊고 목에 힘을 주면서 ‘이런’을 발음하기가 쉽다. 이런 식으로 힘주어 발음한 ‘이런’을 정확하게 적으면 ‘런’이 된다. “그런 물건은 거저 줘도 안 사요!”라고 말할 때도 ‘안 사요!’ 부분을 무뚝뚝하게 힘주어 발음하면 ‘ 사요!’가 된다. 이처럼 목청 터짐소리를 홀소리로 시작하는 낱말의 머리에 붙여 발음하는 일은 경상도 사람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 목청 터짐소리는 홀소리로 끝나는 낱말을 급하게 힘주어 발음할 때도 완전하게 나타난다. 보기를 들면 “여보, 안 돼!”라는 말을 한층 급하게 힘주어 발음한 것을 “여봇, 안 됏!”라고 적는 일이 흔히 있다. 이 때 ㅅ 받침은 이런 발음을 정확하게 적은 것이 아니다. 이 ㅅ 받침을 ‘옷, 빗, 낫’ 등을 발음할 때처럼 글자 대로 발음해 보라! 필경 자연스럽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을 정확히 적으려면 역시 된이응을 받침으로 써서 “ , !”라고 해야 한다. 목청 터짐소리를 이렇게 쓰는 일은 군인들이 “열 중 쉬엇! 차렷!” 등의 힘찬 구령을 발음할 때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런 구령도 정확히 적자면 “ ! ”로 해야 한다.
이런 모든 경우가 목청 터짐소리를 낱말의 앞이나 뒤나 사이에 덧붙여서 표현력을 강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이들을 일관성 있게 합리적으로 표기하려면 된이응 ‘ㆆ’을 되살려 써야 한다.
나. 한글의 전산화
현대 문명에서 전산기는 사람의 두뇌에 버금가는 기능을 발휘하며 부분적으로는 사람의 손과 발을 대신하고 있다. 전산기가 이러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 속에서 쓰는 기초 도구는 아라비아 숫자 열 개와 영어에서 쓰는 로마글 스물 여섯 개 곧 서른 여섯 개의 글자에 ‘+, -, *, /’ 등의 셈표를 비롯한 특수 기호 스물 여덟 개, 모두 예순 네 개에 불과한 기호 체계이다. 전산기가 미국에서 발명되게 한 밑바탕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적은 수의 글자만으로 족히 글자 생활을 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전산기의 기호 체계는 영어 사회를 떠나 어떤 다른 언어 사회에 들어가더라도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같은 로마글에 딴 글자 몇 가지씩을 보태거나 빼어 가며 쓰는 프랑스말이나 독일말을 쓰는 곳에 들어가더라도 전산기의 예순 네 개의 기호 체계는 바뀌지 않는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프랑스 사람들도 독일 사람들도 이 스물 여섯 개의 영어식 로마글을 자기네 말에 맞추어 고치지 못하고 영어로 된 전산 언어 를 그냥 쓰고 있다. 프랑스말이나 독일말은 그래도 그 글자나 언어의 유형이 영어와 가장 가까운 만큼 미국식 전산기를 자기네 말로 동화시키기가 비교적 쉬울 것이다. 그러나 로마자도 아닌 것을 쓰는 인구어족 이외의 언어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정은 현대인의 운명이라고 밖에 여겨 지지 않는다. 이제 설령 영어가 그 세력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영어의 적은 글자 덕분에 발명될 수 있었던 전산기의 세계적인 패권은 조만간 어떤 다른 언어 사회의 도전도 받게 될 것 같지 않다. 영어 언중 이외의 인류가 이 미국식 전산기의 편의를 내던지게 할 만큼 더 나은 기계를 신속히 발명해 낼 수만 있다면 모르지만. 전산기에 맞추어 제 글을 변형하는 것은 신에 발을 맞추는 일이라고 아무리 비판해 보았자, 그것은 허공을 치는 소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남의 신이나마 신을 고쳐서든 발을 졸여서든 신고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 형편이 아닌가?
전산기에서 한글을 다루는 주요 과정은 자료의 입력과 내부적인 저장 및 처리와 외부적인 출력의 셋이다. 이에 따라 전산기의 밖에서 입력하는 글자의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글쇠판(keyboard)의 문제, 안에 저장되는 글자의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전산 부호(code)의 문제, 밖으로 출력되는 글자의 체계와 모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글씨체(font)의 문제 등이 서로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 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이 세 가지 문제가 특정한 사람들의 의견이나 이익과 얽혀 한꺼번에 시비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를 빚고 있다.
ㄱ. 글쇠판의 문제
우리가 지금 널리 쓰고 있는 표준 글쇠판의 두벌식이라는 입력 방식은 초성과 종성의 구별이 없는 풀어쓰기의 방식을 택함으로써 닿소리 글자 열 아홉과 홀소리 글자 열 곧 모두 스물 아홉 개의 글쇠만으로 지금말을 입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공 병우 식 글쇠판의 세벌식이라는 입력 방식은 초성과 종성을 구별하는 모아쓰기의 방식을 택함으로써 초성 열 넷, 중성 열, 종성 열 넷, 모두 서른 여덟 개의 글쇠로 지금말을 입력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세벌식은 한글 모아쓰기를 유지한 채 가장 단순하게 기계화할 수 있는 글쇠판이라는 점에 독보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제는 전자 장치에 맡겨도 될 음절의 분석 곧 초성과 종성의 구별을 기계 장치와 사람의 손으로 하게 하는 데 따른 부담이 세벌식의 결점이다. 그래도 글자의 잦기와 기억의 편의 등을 고려해서 글쇠를 합리적으로 배열하기만 하면, 한글의 전산화를 위해서 결점을 덮고도 남을 가치가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두벌식은 글쇠를 아홉 개나 적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세벌식보다 훨씬 경제적인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글 모아쓰기와 풀어쓰기를 병행시킬 수 있다는 점에 두벌식의 독보적인 장점이 있다. 다만 글자의 배열에서 현행의 표준 글쇠판은 미국에서도 밀려 나고 있는 재래식 영문(QWERTY) 글쇠판에 매여 있는 것이 과연 한글의 실정에 맞느냐 하는 점과, 홀소리보다 빈도가 놓은 닿소리 글자를 왼손이 부담하게 한 점과, 겹글자 일곱을 윗글쇠로 다루게 함으로써 입력이 더디고 힘들게 한 점에 인간 공학적인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두벌식과 세벌식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일단 상보적인 방식으로 인정해서 병행시키면서 각각 글쇠의 배열에 나타난 그 결점들을 최소화하도록 하되, 되도록이면 어떤 일관된 원칙을 적용해서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동시에 쓸 수 있게 하거나 서로 옮아 다니기 쉽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ㄴ. 전산 부호의 문제
전산기 안에서 한글을 다루는 방식은 두벌식과 세벌식, 그리고 조합형과 완성형의 네 가지가 있다. 완성형이나 조합형은 사람들의 눈에 익은 활자 인쇄체에 가까운 글씨체를 얻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중요한 특기가 있다. 그러나 완성형은 한글을 한자나 가나와 같은 소리마디 글자로만 다루게 함으로써 한글의 자유로운 표현 능력을 죽여 버렸다는 비난을 두고 두고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조합형은 지금말의 기계적인 소리마디 구조를 이용함으로써 한글 모아쓰기의 관습에 비교적 충실하고 한글의 무제한에 가까운 표현 능력을 보전하는 방식은 되었으나, 완성형과 마찬가지로 소리마디 분석 장치(automata)를 반드시 지고 다녀야 하는 부담이 있다. 세벌식이나 두벌식은 사람들의 눈에 다소 익지 못한 글자를 강요한다는 결점이 있으나, 전산기에는 아무 특별한 짐을 지우지 않고 한글의 표현도 아주 자유롭다는 점에서 가장 간편하고 경제적인 부호 체계인 것이다.
ㄷ. 한글 글씨체의 문제
글씨체는 예로부터 필기 도구와 인쇄 방법의 산물이다. 기계식 타자기가 오래도록 새로운 글씨체를 강요하고 우리의 눈을 길들여 왔듯이 오늘날의 전산기는 전산기에 적합한 글씨체를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사람처럼 말소리를 ‘알아듣는 전산기’와 함께 글자를 ‘읽는 전산기’의 편의를 누리기 위해서 첨단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거니와, 사람의 눈이 양보하면 하는 만큼 그 실현은 더욱 앞당겨 질 것이며, 더욱 값싸게 이루어 질 것이다. 이것이 글씨체 변천의 순리이다. 훈민 정음의 창제 당시에 세 가지 글씨체가 거의 동시에 나타났지만, 그 뒤로 오래도록 남은 것은 붓으로 쓰기에 적합한 글씨체 하나 뿐인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멋은 그 다음에 찾게 되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도구의 편의가 사람의 미학적인 요구를 앞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글씨체의 역사는 필기 도구와 인쇄 방법을 따라 가고 마는 것이다.
(1) 자로 그린 글씨체: 한글의 <훈민 정음>과 <동국 정운>이라는 책에 나타난 글씨체는 한글의 원형 또는 기본형으로서 만들어 진 것으로 믿어 진다. 이 글씨체는 함께 섞인 한자의 글씨체와 판이하게 다른 점이 눈에 두드러진다. 한자를 쓰는 도구와 솜씨를 그 대로 가지고는 이런 한글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쓴다기보다는 그리지 않으면 안 될 기하학적인 도형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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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 동국 정운: 한글 글씨체의 원형
그림 19. 석보 상절: 한글 활자체의 효시.
그림 출처: http://kang.chungbuk.ac.kr/
그림 출처: http://kang.chungbuk.ac.kr/
여기서 아래 아(ㆍ)와 방점(. :)을 제외한 모든 점을 직선으로 바꾸어 변형한 것이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 상절>의 글씨체이다. 기하학적인 도형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조금이라도 쓰기 쉽게 바꾼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두 글씨체는 세종 임금의 생전에 펴낸 문헌에서만 볼 수 있고, 그 뒤로 다시는 볼 수 없는 글씨체가 되었다.28
(2) 붓으로 쓴 글씨체: 세종이 돌아간 뒤에 얼마 되지 않아서 간행된 <월인 석보>를 비롯한 이후의 모든 문헌에서는 기하학적인 도형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서 붓으로 쓰기에 적합한 글씨체로 변하고 말았다. 이것은 비로소 다른 어떤 도구로 그린 것이 아니라 정녕 붓으로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글씨체가 되었다. 이 글씨체는 지난 수 백 년 동안 인쇄를 위한 목판이나 활자 글씨체의 모형이 되어 왔고, 심지어 붓을 던져 버린 오늘날의 철필이나 연필로 쓰는 글씨체에까지 관습과 교육을 통해서 오래도록 보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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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0. 월인 석보: 필기 도구를 따라가는 글씨체의 변화.
그림 출처: http://kang.chungbuk.ac.kr/
(3) 타자기로 친 글씨체: 한글 타자기가 발명되면서 우리 눈에 길들이게 된 새로운 글씨체는 타자기의 기계적인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낱글자의 조합이 본래 엉성하고 볼품이 없었다. 붓 글씨체에 바탕을 둔 활자 글씨체에 접근시켜 보려고 김 동훈의 이른 바 ‘다섯벌식’으로 타자기를 만들어도 그 거리감은 별로 줄일 수 없었다.
이것과 경쟁 관계에 있던 공 병우의 ‘세벌식’29은 아예 활자 글씨체와의 비교를 거부하고 모아쓰기의 범위 안에서는 가장 빠르고 쉬운 타자 방식임을 자랑해 왔다. 여기서 세벌식이란 말은 초성 한 벌, 중성 한 벌, 종성 한 벌, 모두 세 벌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타자기의 장단점을 보완하노라 하면서 등장한 정부 표준의 ‘네벌식’은 세벌식에 중성을 한 벌 더한 것으로서, 정부의 힘으로 민간의 다섯벌식과 세벌식을 억압하면서 오래도록 타자기 문화를 지배해 왔다.
그림 21. 김 동훈 타자기의 모양 위주의 다섯벌식 글씨체. |
그림 22. 공 병우 타자기의 편의 위주의 세벌식 글씨체. |
그림 23. 표준 타자기의 모양과 편의를 절충한 네벌식 글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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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글 타자기의 역사는 타자의 편의 또는 속도와 글씨체의 멋의 싸움으로 이어 졌다. 바꾸어 말하면 손과 눈의 싸움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눈은 손에 많이 양보하며 길들어 질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멋 없는 글씨체일지라도 타자기를 통한 글자 생활의 편의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활자 글씨체 만은 못해도 손으로 직접 쓴 글씨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일정한 모습으로 정제되어 있기 때문에 몇 벌 식이 되었든 타자기로 생산된 글씨체는 우리의 눈에 점점 익숙해 지면서 한 시대의 글씨체 문화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4) 전산기로 찍은 글씨체: 전산기는 애당초 로마글 스물 여섯 자에 맞추어 발명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전산계가 전산기의 수입 초기부터 오늘까지 매달려 온 일은 전산기로 하여금 한글을 다루며 쓰게 하되 어떻게 하면 한글을 좀 더 자유롭게 다루고 한글을 좀 더 보기 좋게 쓰도록 손질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글의 전산화를 놓고 여전히 기계와 눈의 싸움이 벌어 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눈에 익은 글씨체보다는 기계에 유리한 글씨체가 앞질러 가게 되었다.
전산기로 실용화한 최초의 글씨체는 이미 세벌식 타자기로 보급된 세벌식 글씨체이다. 모아쓰기를 벗어나지 않는 한 세벌식은 기계에 가장 유리한 글씨체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다. 전산기는 아무쪼록 글자의 수효가 적기를 요구하는데, 세벌식은 모아쓰기치고는 가장 적은 수효의 글자를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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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4. 세벌식 전산기 글씨체: 대형 전산기의 인쇄기(라인 프린터)에서 정보 처리의 경제성 때문에 아직도 벗어날 수 없는 글씨체. 이것은 이 대로 정착됨으로써 우리의 눈을 세벌식 글씨체에 길들이는 결과를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
(세벌식 전산기 글씨체 사진) Internet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의 요구도 끊임이 없어서 전산기나 전산 기술자가 무슨 골병을 앓아도 개의하지 않는다. 만능의 전산기라는데 왜 보기 좋은 글씨체를 못 만들어 준다는 말이냐? 사용자의 요구를 무시하고는 전산업이 성립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어떻게든 부응하기 위해서 세 벌이나 다섯 벌 정도가 아니라 일곱 벌, 아홉 벌, 또는 그 이상으로 얼마든지 낱 글자의 수효를 불려 가며 전산기 본래의 특성과 편의를 희생시켜 온 것이 요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전자식 타자기가 전적으로 그런 요구에 맞추어 나왔고,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로 된 글틀이 다 그런 요구에 맞추어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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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5. 전자식 타자기의 여러벌식 글씨체: 전자식 타자기의 특성을 이용해서 모양 위주의 글씨체를 한껏 발전시킨 것.
(금성 전자식 타자기 글씨체 사진) Internet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모아쓰는 한글의 멋을 가장 만족시키기 위해 극단에 이른 것이 정부에서 제정한 완성형 한글 부호 체계이다. 전산기로 이 이상의 멋을 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한글 벌 수의 경쟁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글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한자나 일본의 가나와 동질화시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화와 문명과 전산업의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고자 하는 바깥 나라의 간여와 내응이 있었다는 소문과 의구심이 기우에서 나온 것이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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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6. 완성형 글씨체: 조합과 분해가 자유로운 한글을 전연 그렇지 못한 한자나 일본 글자와 같은 유형의 글로 변질시킨 것.
(완성형 글씨체 사진) Internet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완성형 한글은 비록 국가 표준이라 하지만 어차피 전산기 문화를 독점하지도 주도하지도 못할 것이다. 세벌식 한글이 대형 전산기에서 여전히 활용되고 있고, 최근에는 미술계와 전산계의 협동으로 한층 다듬어 진 세벌식 글씨체가 전산기로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권력이나 돈의 힘이 아니라 전산기 자체의 제약과 한글의 본질적인 특성에 눈의 미학적인 요구를 따라 나오는 글씨체인 만큼 그 뿌리가 더 깊고 튼튼한 것이다. 우리가 한복이나 한옥의 멋을 일찍이 버리고 양복이나 양옥의 새로운 멋에 취한지 이미 오래이듯이, 한글의 특성과 보수적인 외형을 유지하면서 과학적인 타당성과 함께 기계적인 편의와 멋까지 갖춘 세벌식 한글은 아직은 미약하지만 결국은 미래의 한글 문화를 이끌어 갈 것으로 믿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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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7. 미술가가 다듬은 세벌식 글씨체: 세벌식 글씨체의 미래지향적인 가치와 가능성을 보인 본보기.
(세벌식 전산기 글씨체 사진) Internet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ㄹ. 국가 표준의 문제
언어는 변하되 알게 모르게 장구한 세월에 걸쳐 변하기 때문에 실은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보숫성을 지니고 있다. 언어 정책도 이처럼 지둔한 언어 변천의 흐름을 타야 실효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급히 결정해야 할 경우는 거의 없는 법이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우선 시행해 보자 한 라이샤워식 로마글 적기는 졸속 중의 졸속이다. 전산기에 관련된 글쇠판의 표준화나 전산 부호의 표준화가 모두 급하게 결정되었다. 이 뿐 아니라 한글 맞춤법으로 비롯한 언어 규범들도 졸속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제5 공화국 때에 된 국가 표준들이 거의 다 비슷한 절차와 속도로 확정되었고 모두 비슷한 성격과 수준을 가지고 있다.
현행의 여러 가지 국가 표준들이 가진 공통점은 모두 단수 표준이라는 점이다. 흠 없이 완전하다면 그 표준은 단수인 것이 마땅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시빗 거리 없는 진선진미의 국가 표준이 지금 하나나 있는가? 국가 표준을 한시적인 정부가 서둘러 확정할 것이 아니라 복수의 표준안이나 세워 두고 국민에게 장기적으로 맡기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시행되고 있는 단수 표준의 불합리함을 고집할 수 없어서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단수 표준으로 옮아 갈 때 겪는 부담과 손해는 개인에게나 정부에게나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복수 표준은 개혁되더라도 부분적인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수 표준의 단절적인 개혁에 따르는 부담과 손해를 덜 수 있다.
말하자면, 글쇠판은 적어도 두 가지 곧 현행의 두벌식과 함께 세벌식을 공존시킬 필요가 있다. 세벌식도 분명히 독보적인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전산 부호의 체계로서 완성형과 함께 조합형도 허용할 정도가 적극적으로 장려할 가치가 있다. 한글의 거의 무제한한 표음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조합형인 만큼 문학적인 표현과 학술 및 교육의 필요에 응하고 외래어와 외국 홀이름씨 등을 수용할 바탕으로 삼아 두면, 완성형보다 더 미래지향적이오 영구적인 표준이 될 수 있다. 조합형의 지위를 지금보다 높여 주지 않는다면, 이에 대한 요구는 결코 끊임이 없이 나올 것이다.
국가 표준의 권위는 그것을 시행시키는 힘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자발적으로 공감하는 타당성의 정도에 있다. 그러므로 국가 표준이라도 얼마든지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는 자세로 지속적으로 여론을 모으며 소수의 전문가 집단보다는 전문학계 정도의 큰 집단에 맡겨 더 낫게 고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한 번 정한 것은 폐기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묵수할 것이 아니라 지켜 가면서도 수정하면 그런 대로 공들여 만든 국가 표준을 버려야 하는 크나 큰 낭비를 피할 수 있다.
단수든 복수든 국가 표준 이외의 것은 도무지 살아 남을 수 없도록 정부에서 힘을 쓰는 것은 단연코 단견의 탓이다. 그냥 두어도 살 가치가 없는 것은 절로 죽을 것이오, 억눌러도 살 가치가 있는 것은 살아 남게 마련이다. 국가 표준이든 개인의 방식이든 국민이 다양하게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방임해 두는 것이 국민의 판단력을 존중하는 민주 정부의 마땅한 도리이다. 나아가 국가 표준이 아닌 것일지라도 장려할 만 한 것을 찾아 장려하는 것이 국가 표준 자체의 수준을 향상시킬 계기를 마련하는 슬기이다.
ㅁ. 전산기의 한국화
영어를 알아야 하고 전산 전문가가 되어야 전산기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고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우리네 형편이다. 한국말 밖에 모르는 어린이나 비전문가라도 전산기를 쉽게 만지고 깊게 들어갈 수 있도록 우선 전산기 운영 체제(DOS)만이라도 한글화시키고, 또한 나아가 각종의 전산 언어들을 전면적으로 한글화시켜야 한다.
궁극적으로 전산기의 하드웨어 자체를 통째로 한국말과 한글에 맞도록 개발하는 것 곧 한국형 전산기의 발명은 현재 하나의 몽상으로 여길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선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이질적인 언엇권에서 발명된 미국식 전산기이기에 우리 말과 글에 맞는 전산기의 존재가 절실하고, 오래도록 원시적인 한자 문화에 중독되다싶이 되어 살면서도 인류 문화사의 기적과 같은 한글을 발명해 낸 한겨레의 잠재력이 있기에, ‘가장 한국적인 전산기’의 발명은 적어도 우리들의 줄기찬 분발을 촉구하는 최고의 목표로서 걸어 둘 만 한 것이다.
다. 한글 풀어쓰기
한힌샘이 현행의 모아쓰는 한글이 로마글에 비해서 특히 인쇄하기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글을 풀어써야 한다는 주장30을 편 뒤로 여든 해 남짓한 동안 여러 사람의 손으로 수십 가지의 한글 풀어쓰기 방안이 나와 있다. 그 가운데 어떤 방안도 실용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풀어쓰는 글자의 모양에도 문제가 있지만, 실은 어느 나라에서나 글자 생활이 워낙 보수적인 데다가 한글 모아쓰기의 폐단과 풀어쓰기의 쓸모에 대한 언중 일반의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풀어쓰기 운동의 선각자들31이 내세운 바 모아쓰기의 주요한 장애들 가운데 대개는 전산 기술의 발달 덕분에 해소되었다. 기계식 타자기는 개인용 전산기의 글틀(word processor)과 전자식 타자기에 밀려 이미 생산이 중단돼서 고물 시장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형편이고, 재래식의 활자 인쇄소도 전산 사식기에 밀려 하나씩 둘씩 문을 닫을 지경이니까, 글자 생활의 기계화라는 단순한 명분으로는 풀어쓰기를 내세우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 사실은 언중의 일상적인 글자 생활에서는 풀어쓰기가 쓸모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니 이제는 풀어쓰기 운동을 그만둘 때가 된 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ㄱ. 풀어쓰기의 쓸모
(1) 언어 의식의 계발을 위해서: 한글은 오늘날 소리마디 단위로 모아쓰기만 하기 때문에 소리마디의 경계를 알아 보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테면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줄 끝에서 낱말을 다 쓸 수 없어서 토막을 내고 붙임표 ‘-’를 붙일 때 어디서 끊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거나 서툴게 잘못 끊는 일이 많은 것을 보면, 이런 어려움이 전혀 없는 한글 모아쓰기의 장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애당초 소리마디 단위로 모아쓰도록만 규정된 것이 아니다. 아주 융통성 있게 모아쓰기와 풀어쓰기를 병행하도록 규정되었고, 이 대로 오래도록 실행되다가 차츰차츰 모아쓰기로 치우쳐 왔을 따름이다. <훈민 정음>(1446) 해례 합자해의 “孔子ㅣ 魯ㅅ 사”이란 예문이 그러한 규정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사’은 모아쓰기요, ‘ㅣ, ㅅ’은 영락없는 풀어쓰기인 것이다. 이와 같은 표깃법은 당초에는 비록 한자 뒤에서 불가피하게 허용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비ㅅ발, ㅅ모로, 하ㅅ’ 등에서처럼 한글 사이에도 흔히 실행될 만큼 보편화했고, 조선어 학회가 <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을 제정하기까지는 아무런 제약 없이 혼란스러울 만큼 자유롭게 실행되었었다. 이처럼 부분적인 풀어쓰기의 관습이 ‘뒤ㅅ간, 들ㅅ것, 채ㅅ열’ 등의 사이시옷과 ‘다정ㅎ다, 부지런ㅎ다’ 등의 사이히읗으로 남아서 맞춤법 개정의 시비가 있을 적마다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심한 논란을 빚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들 한글 모아쓰기의 준거로 여기고 있는 <훈민 정음> 머리의 “凡字必合而成音”이란 서술은 통념처럼 소리마디 단위로 모아쓰라는 표깃법 규정32 이라기보다는 “믈읫 字ㅣ 모로매 어우러 소리 이니”라는 언해문의 표현 그 대로 소리마디가 구성되는 음운학의 이치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껏 물러서서 설령 통념이 옳다고 치더라도, 이것이 예외 없이 모아쓰기만을 인정하고 풀어쓰기를 금지하는 규정은 결코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모아쓰기를 주로 하는 글 가운데 쌀의 뉘처럼 풀어쓰인 글자를 기피하는 방향으로 흘러 온 것이 단순하고 쉬운 것만 따르는 변천의 추세였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사잇소리는 예나 이제나 변함 없이 실존하는 것인데, 이를 표깃법에서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그 실존에 대한 인식마저 흐리게 한 것은 분명히 소리마디의 알맹이인 중성 중심의 모아쓰기였다는 말이다. 한글이 당초부터 전면적으로 풀어쓰였다면, 이런 요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모아쓰기라는 표깃법이 언중의 언어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또한 풀어쓰기를 삼킴으로써 한글의 표현 기능을 위축시켜 왔음을 뜻한다.
옛글에서는 소리마디의 경계가 표깃법에서 고정되지 않았다. ‘업스례다’(월인석보 2:5)와 ‘어섀라, 어라’(시용향악보, 사모곡), ‘’(석보 상절 6:34)과 ‘’(내훈, 초간본 1:6), ‘닷가’(월인 석보 2:25)와 ‘다’(석보 상절 13:20) 등에서 같은 형태소에 속한 ㅂ과 ㅅ이 종성으로 쓰였다가 초성으로 쓰였다가 하는 것은 모아쓰기로 굳어 진 우리들의 눈에나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이지, 당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였을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풀어쓰기를 섞어 쓰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표깃법의 융통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좁쌀’로 적는 낱말은 옛말 ‘조+’에서 온 것이고, 이 ‘’이 ‘좁쌀’의 ‘ㅂ쌀’로 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좁쌀’의 ㅂ은 ‘조’가 아니라 ‘쌀’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낱말을 말밑에 충실하게 적는다면 ‘조ㅂ쌀’로 적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모아쓰기의 획일적인 관습에 고착된 탓이다. ‘맵쌀, 멥쌀, 볍쌀, 웁쌀, 찹쌀, 핍쌀, 햅쌀’ 따위도 마찬가지이다.
또 ‘깊이, 높이, 넓이’의 ‘-이’가 낱말을 만드는 힘이 있는 형태소임을 알면서도 ‘키’(신장)에 들어 있는 똑같은 형태소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이’는 뜻이 있는 말 같지만, ‘-ㅣ’는 뜻이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크다, 크지’ 등에서는 형태소 ‘크-’를 분석할 줄 알면서 ‘키, 커서, 커야’ 등에서는 같은 형태소 ‘ㅋ-’를 분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언어학을 배운 사람 가운데도 적지 않다. ‘크-’는 크다는 뜻이 있는 것 같지만 ‘ㅋ-’야 음소에 불과한 것이지 어째 뜻 있는 형태소일 수 있느냐고들 반문한다. 이들은 다 영어 ‘books, pens, boxes’ 등의 ‘-s, -es’를 복수 접미사인 줄 알 만 한 사람들이다. ‘-이’나 ‘-ㅣ’를 국제 음성 기호로 바꾼다면 둘 다 ‘-i’가 될 뿐이오 서로 달리 될 것이 없다. 실질적으로는 똑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는 뜻 있는 말로, 하나는 뜻 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구별할 수 있는가? ‘ㅋ-’의 표현 기능이 ‘-s’ 만 못해서 형태소로 없는가?
한국 사람들의 언어 의식이 이렇게 좁은 틀에 갇히고 왜곡된 원인은 바로 모아쓰기에 있다. 모아쓰기에 눈과 의식이 굳어 버렸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형태소의 경계와 소리마디의 경계를 서로 다른 차원에서 분석해 볼 수 없게 되었고, 말의 단위가 적어도 시각적으로나마 소리마디의 모양을 갖추어야 되는 줄로 아는 착각에 빠지게 된 것 같다. 바꿔 말하면, 현행 국가 표준 전산 부호의 소리마디 완성형처럼 우리들의 언어 의식도 소리마디 완성형으로 꽤 굳어 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기문 교수가 이른 대로 한글이 음소와 소리마디에 이중적인 대응 관계를 맺은 데 따는 교착 상태요 그 필연의 귀결인 만큼, ‘언어의 선조성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문자’33 곧 풀어쓰기의 우월성을 확인하게 하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모아쓰기의 굴레에서 한국 사람들의 언어 의식을 해방하고 소리마디 이하의 언어 사실을 있는 그 대로 순조로이 보게 하기 위해서만이라도 풀어쓰기는 필요하다. 모아쓰기를 풀어쓰기로 전면적으로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모아쓰기 때문에 잘못 보던 언어 현실을 바로 보게 하고, 모아쓰기라는 표깃법 때문에 언어 의식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교육적인 수단으로라도 풀어쓰기는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2) 한국말의 자율적인 발달을 위해서: 한글 모아쓰기의 뚜렷한 장점은 소리마디 글자이기도 한 한자와 섞어 쓰기에 시각적으로 편리하고 잘 어울린다는 점일 것이다. 순전한 소리마디 글자인 일본의 가나는 한문 또는 한자의 보조 글자처럼 쓰여서 한자와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을 정도인데, 한자말의 영향을 한국말 못지 않게 받았을 만주말이나 몽고말의 풀어쓰기만 하는 낱소리 글자는 한자와 섞여 쓰이는 일이 전혀 없는 사실이 이 점을 방증한다.
그러나 한글을 한자와 섞어 쓰기에 편리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글을 한자에 종속시키고, 따라서 한자말이 한국말을 전면적으로 침식하도록 넓은 길을 닦아 주고, 한겨레의 언어 의식이 중국말의 소리마디 유형과 한자말에 정복되기 쉽도록 만든 틀이 바로 한글의 모아쓰기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물론 글자의 문제에 앞서서 정치적-문화적인 열세와 독립 자존의 의지가 박약했던 민족 정기의 문제가 더 크고 깊은 요인이었을 터이지만, 홑소리마디 언어인 중국말을 들여 오기에 다른 주변 민족의 풀어쓰기 글자보다 모아쓰기 한글이 특히 유리하게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바꿔 말해서 한국말의 순숫성과 자율성은 한글 모아쓰기를 통해서 한자말에 크게 희생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글과 한국말을 한자와 한자말에 종속시켜 그 막중한 힘에 눌리고 찌들게 한 한 가지 요인이 한글 모아쓰기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한글과 한국말의 자율적인 발달 곧 언어적인 독립을 바라볼진대, 한글 풀어쓰기는 조만간 실현할 수는 없을지라도 언제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민족적인 숙원 사업으로 삼아 추구해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3) 미국식 전산기의 백분 활용을 위해서: 스물 여섯 개에 불과한 로마글로 못 할 일이 없다싶이 되어 있는 미국식 전산기와 그에 맞게 개발된 각종의 소프트웨어를 백분 활용하려면, 여기서 다루어 지는 다른 자연 언어34의 글자 체계는 그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유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아쓰는 한글은 로마글과 가깝기는커녕 그지없이 이질적일 뿐이다. 그래서 로마글만 쓰는 전산기와 그 소프트웨어는 로케트와 같이 우주 공간을 날아 갈 때, 한글 모아쓰기의 짐을 진 전산기와 그 소프트웨어는 아마 짐을 잔뜩 실은 화물차와 같이 땅을 기어 가야 하는 것으로나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대비적인 상황은 기술의 발전으로 개선되거나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숙명이다.
한글 풀어쓰기는 이런 숙명적인 짐을 간단하게 벗겨 주는 유일한 지름길이다. 로마글 전산기의 내부로 깊이 파고들어 그 모든 기능을 남김 없이 활용하기 위해서는 로마글의 수효에 가까운 수효로 한글 낱자의 수효가 줄어 들수록 좋다. 이 점에서 로마글보다도 더 적은 스물 넉 자까지 줄어 들 수 있는 한글 풀어쓰기는 절대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오백 여 해 전에 나온 한글일지라도 풀어쓰이기만 하면 그 비할 데 없는 잠재력을 초현대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4) 한국말의 정밀한 연구를 위해서: 전산기의 편의로운 기능들을 조금 알고 나면 전산기로 편지나 쓰고 원고나 적어 주고 받는 데 만족할 수가 없게 된다. 글자로 된 자료를 전산기로 처리할 때 발휘되는 기본 기능은 기억하기, 찾아내기, 배열하기 등이다. 이 가운데서도 찾아내기와 배열하기가 전산기의 특기인데, 이 두 기능이 한글 모아쓰기의 체제에서는 소리마디의 한계를 넘기가 어렵다. 특히 소리마디 이하 곧 초성 중성 종성과 개별 음소까지 분해되어 따로 다루어 지지 않으면 언어의 정밀한 분석은 하기 어렵다. 언어의 정밀 분석은 자동 번역이나 말소리를 알아듣는 전산기를 만들기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일 것이다. 또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 한글이라도 다루어야 하는 학술 연구의 분야는 더욱 곤란해 진다.
이처럼 갑갑한 한글 모아쓰기의 굴레를 벗어나 언어의 정밀 분석이나 옛말 연구 등을 손쉽게 해 주는 길이 바로 풀어쓰기이다. (1) 한글은 마침 스물 여섯 개의 로마글보다도 더 적은 스물 넉 자(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또는 (2) 홑홀소리 겹글자 둘(ㅐ ㅔ)을 더한 스물 여섯 자만 풀어씀으로써 전산기의 모든 기능들을 유감 없이 발휘하게 할 수 있다.35 언어학적인 분석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우선 순위를 따라 (3) 홑닿소리 글자 다섯(ㄲ ㄸ ㅃ ㅆ ㅉ)을 보태면 서른 한 자가 된다. 이 다섯 글자가 보태어 지면 지금글의 모든 초성 글자가 단일하게 되기 때문에 소리마디의 기계적인 분석이 가능해 져서 초-종성을 구별시키는 장치 곧 소리마디 자동 분석 장치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대적인 제약을 받지 않기 위해서 (4) 지금글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스물 네 개의 홑글자(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와 일곱 개의 겹글자(ㄲ ㄸ ㅃ ㅆ ㅉ; ㅐ ㅔ)에 옛글에 쓰인 홑글자 여섯 개(ㅱ ㅸ ㅿ ㆆ ㆁ ㆍ , 모두 서른 일곱 개만 있으면, 전산기의 모든 기능을 이용해서 모든 한글 자료를 전산기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다.
(5) 글씨체의 다채로운 개발을 위해서: 미술계에서는 지금 세상이 언어 전달의 시대에서 영상 전달의 시대로 옮아 가고 있다고 말한다. 글자 문제에 국한한다면, 글자의 구실이 사전적인 뜻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다채로운 글씨체를 통해서 복합적인 상징성과 훨씬 섬세하고 정서적인 묘미까지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체의 상표나 선전문들이 일정한 유형의 글씨체로 통일되어 일정한 느낌을 전하려 하는 일은 글자를 이와 같이 복합적인 상징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로마글은 오랜 세월을 두고 지성스럽게 닦이고 다듬어 진 결과 오천 가지가 넘는 글씨체가 있어서 경우에 맞추어 반드시 골라 써야 된다고 한다. 이것은 나가는 장소에 따라 일정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사회의 관습과 비슷하다. 글씨체가 이처럼 다양하게 개발된 것은 물론 글자의 수가 쉰 두 개에 불과하고 낱자의 모양도 간결하게 생긴 덕분이다.
그림 28. 로마글의 다채로운 글씨체.
(로마글 글씨체 견본 사진) Internet에서 쉽게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글의 사정은 어떠한가? 모아쓰는 한글의 갯수는 적어도 이천 자 이상이고 낱자의 모양도 로마글에 비기면 훨씬 복잡한 것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주로 보게 되는 글자의 크기는 팔 또는 구 포인트 정도의 활자 크기인데, 이런 크기로 모아쓰는 한글 낱자 이천 개 이상을 다양하게 멋내는 일은 아예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보는 명조체와 고딕체 두 가지 글씨체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다. 그나마 획이 복잡한 것은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되기 쉽고, 그 많은 글자를 새로운 유형으로 멋을 내고 통일시켜 다듬으려니 힘에 겹다는 것이다. 어느 광고 미술 전문가는 앞으로 쉰 해 안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글 풀어쓰기는 미술계의 이런 고민36을 근본적으로 해소해 줄 수 있다. 풀어쓰기에 충분한 겨우 수십 개의 글자만 가지고도 글씨체 개발을 할 수 있다면, 그 조건은 로마글의 경우와 비겨서 조금도 불리할 것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ㄴ. 한글 기울여 풀어쓰기
풀어쓰기의 방안이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그 가운데 그나마 실용성이 있는 것이 다음 보기와 같이 한글의 낱글자들을 풀어쓰되 왼쪽으로 사십 오 도씩 기울여 쓰는 방안이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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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9. 기울여 풀어쓰기: 첫눈에 읽을 수 있고 모아쓰기의 규범을 그 대로 따르는 풀어쓰기 방안.
! ( , 12:1).
이렇게 하면 읽는 사람의 고개를 왼쪽으로 다소 기울이게 만든다는 결점이 따르지만, 이런 결점 말고는 전산기와 타자기 등을 위해서 가장 유리한 풀어쓰기가 되면서 사람에게도 비교적 쉽게 읽어 지고 맞춤법에도 변동이 없다는 독보적인 장점이 있다. 다른 풀어쓰기는 이것만큼 쉽게 읽어 지지 않거나, 아니면 완전한 풀어쓰기가 되지 못하는 것들이다.
라. 국제 음성 기호의 가능성
한글은 물론 당초부터 한국말의 소리 체계에 맞는 특수한 글자로 발명된 것이긴 하지만, 워낙 풍부한 한국말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인 덕분에 약간의 잉여적인 글자를 보태어 가지고 창제 직후부터 <동국 정운>(1448) 등의 각종 운서와 불경 언해 등에서 한자음의 정밀 표기, 중국말, 몽고말, 만주말, 일본말 등의 외국말 교본과 불경의 범어 등에서 외국말을 한글로 적기 등으로 광범하게 응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한글의 음성 표기 능력은 우선 한국말을 비롯한 같은 계통의 언어들을 서술하는 일이나, 외국말의 소리를 한국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 등을 위해서 되살려 볼 만 한 것이다. 국제 음성 기호는 애당초 영국과 프랑스의 음성학자들이 영어와 프랑스말을 적기에 유리하도록 만든 것이라, 언어의 계통이 다른 경우에는 아무래도 잘 맞지 않아서 불편한 점이 적지 않다. 또 표현할 소리의 음성적인 차이를 따라 획이 더해 지거나 덜어 지거나 하는 한글의 조직적인 제자 원리는 국제 음성 기호의 정밀 표깃법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것인 만큼, 본질적으로 한글은 국제 음성 기호보다 우수한 바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38
표 5. 한글 음성 기호: 한글의 잠재력.
(이 현복 한글 음성 문자 사진) Internet에서 쉽게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한글의 현실
서양의 글자 전문가들은 로마글의 세계 정복을 자랑하며 노래하고 있다. 로마 제국은 오래 전에 무너졌지만, 로마글은 서양 문명의 위세를 따라 온 누리로 퍼져 왔다. 미국의 예수교 선교사들은 세계의 후미진 곳을 샅샅이 찾아 다니면서 글자가 없는 종족을 만나면 로마글로 글자를 개발해 주고 이 글자로 성경을 간행해서 전도의 도구를 삼고 있다. 중국은 한자라는 버거운 짐을 덜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로마글을 나랏글로 삼기 위한 정책을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일본에도 역시 오래 전부터 한자와 가나를 로마글 하나로 완전히 갈아 쓰자는 운동을 꾸준히 펼치는 단체가 있다. 이처럼 로마글은 알게 또는 모르게 인류의 언어 생활을 거의 전면적으로 점령해 들어가고 있다. 오늘날은 특히 로마글 스물 여섯 개로 움직이는 미국식 전산기 때문에 동서양의 모든 문명 사회가 말 그 대로 로마글 그것도 영어식 로마글 한 가지에 매여 살고 있다. 이 로마글은 이미 서양 또는 영어의 글자가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 열 개와 더불어 세계의 글자로 여길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로마글은 마침내 한글의 외진 터전마저 드세게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 한글은 아무래도 이처럼 온 세계를 남김 없이 삼키러 드는 로마글을 갋을 길이 없어 보인다. 한자의 오랜 지배를 겨우 벗어난 줄만 알았는데 어느 새 로마글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는 형국이다. 한국 사람들은 예전 수백 해 동안은 한자만 참 글[眞書]로 알고 숭상하며 살더니, 지금은 로마글에까지 홀려 살고 있다. 그 뜻을 알거나 모르거나 바르게 적혔거나 그르게 적혔거나, 로마글로 적힌 것은 다 아름답고 좋게 보이도록 변태적으로 서구화한 것이 우리들의 눈이다. 그래서 수출하다가 남아서 나온 것도 아닌 상품의 포장, 외국 사람이 드나드는 것도 아닌 동네 이발소나 구멍가게 같은 영업소의 간판, 한국 사람들끼리나 보고 지낼 각급 학교 같은 기관이나 단체나 회사의 표지들, 청소년들이 입는 옷가지들, 국제적인 활동을 할 처지도 아닌 사람들의 자필 서명39 등등 글자로 꾸미고 멋을 부리는 자리는 거의 다 로마글로 장식되어 있다. 한글을 부끄러워 하는 한국 사람들, 천하에 다시 없는 보배에 흙이 묻었어도 닦을 줄 모르고 남의 변변치 않은 것만 좋은 줄로 아는 한국 사람들, 이게 무슨 수천 해의 고유 문화를 가진 민족의 행습이며, 세계에서 으뜸 가는 글자를 날마다 읽고 쓰는 문명인의 얼빠진 몰골인가? 어떻게 이 남부끄러운 꼴을 벗어 던질 길이 없는가?
(로마글 티셔츠/한글 티셔츠 사진)
한편 최근에 들어서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각성과 애호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티셔츠에 한글로 무늬를 박아 입은 학생들을 거리에서 가끔 볼 수 있어서 한글 아끼기 운동이 눈에 띌 만큼 싹은 텄다는 느낌을 준다.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도 이제까지 거의 외국말로만 만들어 오던 방송 순서의 이름들을 순수한 한국말로 만들어 쓰겠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세 해 전에 제정된 전산기의 한글 표준 규격이 이천 삼백 쉰 개의 한글 소리마디만을 쓸 수 있도록 고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것은 일만 일천 일백 일흔 두 개 이상으로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는 한글의 소리마디를 전산기에서 다 쓸 수 없게 함으로써 실용적인 편의 뿐만 아니라 한글 주체성을 잃은 결과가 되었다는 비난이 각계에서 끊임 없이 나오고 있는 사실도 한글 문화의 앞날이 어둡지만은 않음을 뜻한다. 미국식 전산기에 매여 살면서도 그 전산기로 어떻게든 한글을 한글 답게 여러 방면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해 보려고 이 모 저 모로 연구하고 토의하는 전산학자들의 소식을 들을 때, 전산기의 전면적인 한글화 또는 한국식 전산기의 등장이 터무니없는 꿈은 아니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림 30. 최 현배: 주 시경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이 분의 고집스러운 교육 이념과 치밀한 국어학 연구와 적극적인 국어 운동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국어 교육과 국어학과 국어 생활은 아마 100 년 뒤에나 올 만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저러나 한글 사랑이 한 세대의 옷자락에 겉돌다 사라지지 않고 지속성 있는 운동으로 계승되려면, 막연한 민족주의 이념의 피상적인 구호에 머물지 않고 한자나 로마글 같은 어떠한 외세의 간섭이나 침범도 능멸할 수 있는 더운 김을 내려면, 온갖 글자 위에 뛰어난 한글의 드넓은 도량으로 세계의 언어와 문화를 안을 수 있도록 나아가려면, 먼저 한글을 바로 알아야 하고, 한글을 더 연구하며 개발해야 하고, 한글을 널리 더 알려야 한다. 그러려면 일찍이 외솔 최 현배(1894~1970) 교수40를 통해서 기초가 놓인 한글갈(한글학)을 학문적으로 계승해서, 언어학, 심리학, 사회학, 교육학, 미술, 전산학 등의 관련 분야에서 모여 협동하는 하나의 종합 과학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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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본래 띠고 난 사명은 끔직이 거륵하되, 그 타고 난 운명인즉 그리 평탄ㅎ지 못한지라, 지난 반 천 년 동안에 혹은 가시밭을 헤치고, 혹은 태령은 넘고, 혹은 절벽을 뛰어 내림이 무릇 몇 번이런가? 그러나 이러한 시련은 다 그 갸륵한 사명을 이루게 하는 준비의 과정이니, 그 과정이 저렇듯 오래었고, 그 시련이 저렇듯 단단하였음은 곧 그 사명이 특히 멀고 큰 때문이다. 이제 한글이 난 지 꼭 오백째 돐인 오늘을 도는 점으로 하여, 과거의 악운은 깨끗이 가셔 지고, 미래의 행운이 담뿍 약속되도다”(최 현배).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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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한글 연표
서기(왕조/정부) / 일 (다음 줄)
- 1397(조선 태조 6)
- 음력 4월 10일(양력 5. 15) 이 방원의 세째 아들(세종)이 태어남.
- 1398(태조 7)
- 태조가 이 방과(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림.
- 1400(정종 2)
- 정종이 이 방원(태종)에게 왕위를 물림.
- 1418(태종 18
- 태종이 세자 충녕 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림.
- 1422(세종 4)
- 세종이 활자의 글자꼴을 고쳐 만들게 함.
- 1440(세종 22)
- 세종이 교서관의 글자 연구를 장려함.
- 1443(세종 25)
- 음력 12월 세종이 몸소 ‘훈민 정음’ 만듦.
- 1444(세종 26)
-
세종이 최 항, 박 팽년, 신 숙주, 이 선로, 이 개, 강 희안 들에게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게 함.
- 최 만리 등이 훈민 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림.
-
- 1445(세종 27)
- 세종이 신 숙주, 성 삼문, 손 수산 들을 요동에 보내어 운서를 질문하게 함.
- 권 제, 정 인지, 안 지 등이 ‘용비어천가’ 125 장을 지음.
- 1446(세종 28)
-
음력 9월 상순 <훈민 정음> 펴냄.
- 세종이 대간(臺諫)의 죄를 훈민 정음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임.
- 언문청 둠.
- 훈민 정음을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시험 과목으로 정함.
-
- 1447(세종 29)
-
<용비어천가>를 풀이함.
- 관리 시험에서 훈민 정음 과목을 먼저 치르게 함.
-
<월인천강지곡>, <석보 상절>, <동국 정운> 들을 짓고, <용비어천가>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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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8(세종 30)
-
<동국 정운> 펴냄.
-
- 1449(세종 31)
- 운서를 교열하기 위해서 신 숙주, 성 삼문 등이 중국 사신의 숙소에 찾아 다님.
-
<석보 상절>, <월인천강지곡> 펴냄.
- 1450(세종 32)
- 성 삼문, 신 숙주, 손 수산 들이 명나라 사신에게 운서에 대해 질문함.
- 음력 2월 17일(양력 4. 8) 당대에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음 받던 세종 큰 임금이 돌아감.
- 1504(연산군 10)
- 연산군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글 문서 사건이 나서, 한글 가르치기를 금하고 한글로 된 책들을 불사르게 함.
- 1506(중종 1)
- 언문청 없앰.
- 1592(선조 25)
- 임진 왜란 일어남.
- 1636(인조 14)
- 병자 호란 일어남.
- 1876(고종 13)
- 12. 22. 주 시경(상호) 태어남.
- 1887(고종 24)
-
로스(J. Ross)의 <예수 셩교 젼셔> 펴냄.
-
- 1890(고종 27)
- 주 시경이 국어 공부와 연구를 시작함.
- 1894(고종 31)
- 갑오 경장.
- 7. 8. 외국의 나라, 땅, 사람의 이름들을 한글로 적도록 하는 법령이 공포됨.
- 11. 21일 칙령으로 법률과 칙령에서 국문 곧 한글로 적기를 중심으로 하고 한자를 덧붙이거나 섞을 수 있도록 규정함.
- 1895(고종 32)
-
유 길준이 <서유 견문>을 국한 혼용문으로 펴냄.
-
- 1896(건양 1)
- 4. 7. 처음으로 한글만 쓰는 신문 ‘독립 신문’이 독립 협회에서 창간됨.
- 5. 주 시경이 한글 맞춤법의 통일을 위한 ‘국문 동식회’ 모음.
- 1898(건양 2)
-
주 시경의 <국어 문법> 지음.
-
- 1905(건양 9)
-
지 석영의 <신정 국문> 펴냄.
-
- 1906(건양 10)
-
주 시경의 <대한 국어 문법> 펴냄.
-
- 1907(순종 1)
- 학부에서 국문 연구소 세움.
- 주 시경의 ‘하기 국어 강습소’ 엶.
- 1908(순종 2)
- 8. 31. ‘국어 연구 학회’ 첫 모임.
-
12. 16. 주 시경이 국문 연구소에 낸 <국문 연구안>에서 한글 풀어쓰기를 처음 주장함.
-
주 시경의 <국어 문전 음학>, 최 광옥의 <대한 문전> 펴냄.
- 1909(순종 3)
-
김 희상의 <초등 국어 어전>, 유 길준의 <대한 문전>.
-
- 1910(순종 4)
- 일본이 조선 삼킴.
-
주 시경의 <국어 문법> 펴냄.
- 1911(왜정)
- 9. 3. 국어 연구 학회를 ‘배달 말글 몯음’(조선 언문회)으로 바꿈.
- 1912(왜정)
-
조선 총독부 학무국의 <보통학교 언문 철자법> 펴냄.
-
- 1913(왜정)
- 3. 23. 배달 말글 몯음을 ‘한글모’로 바꿈.
- 1914(왜정)
-
주 시경의 <말의 소리> 펴냄.
- 7. 20. 주 시경 돌아감.
-
- 1919(왜정)
- 3.1 독립 운동.
- 1920(왜정)
-
조선 총독부의 <조선어 사전> 펴냄.
-
- 1921(왜정)
- 12. 3. 조선 총독부의 탄압으로 흩어 졌던 한글모가 ‘조선어 연구회’로 다시 모임.
-
총독부 학무국의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대요> 펴냄.
- 1924(왜정)
- 2. 1. 조선어 연구회에서 ‘훈민 정음 8 회갑 기념회’를 엶.
- 1926(왜정)
- 11. 4. 조선어 연구회에서 훈민정음의 반포를 기념하는 ‘가갸날’(음력 9월 29일)을 정하고 기념함.
- 1927(왜정)
-
2. 8. 조선어 연구회의 월간 동인지 <한글> 창간됨.
-
- 1928(왜정)
- 11. 11. 가갸날을 ‘한글날’로 바꿈.
- 1929(왜정)
- 10. 31. 조선어 연구회에서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만듦.
- 1930(왜정)
- 5. 10. 조선어 연구회 월례 모임에서 한글 가로 풀어쓰기를 토론함.
-
2. 조선 총독부 학무국의 <언문 철자법> 펴냄.
- 1931(왜정)
- 1. 10. 조선어 연구회를 ‘조선어 학회’로 바꿈.
- 10. 29. 음력 9월 29일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해서 양력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삼음.
- 박 승빈 중심의 ‘조선어학 연구회’ 모임.
- 1932(왜정)
-
10. 29. 조선어 연구회의 기관지 <한글>을 다시 펴냄.
-
- 1933(왜정)
-
10. 29. 조선어 학회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 펴냄.
-
- 1934(왜정)
- 10. 28. 조선어 연구회에서 훈민 정음 반포일을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해서 10월 28일로 한글날을 삼음.
-
조선어학 연구회의 기관지 <정음> 창간됨.
-
진단 학회 세워 지고 그 기관지 <진단 학보> 창간됨.
- 1935(왜정)
-
박 승빈의 <조선어학> 펴냄.
-
- 1936(왜정)
-
10. 28. 조선어 학회의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펴냄.
-
- 1937(왜정)
- 11. 28. 조선어 학회에서 ‘한글 가로 풀어쓰기 안’을 채택함.
-
최 현배의 <우리 말본> 펴냄.
- 1938(왜정)
- 학교의 조선말 교육이 금지됨.
-
김 윤경의 <조선 문자 급 어학사> 펴냄.
- 1940(왜정)
- 6. 25. 조선어 학회에서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함.
-
10. 9.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됨에 따라 한글날을 새로 고증해서 10월 9일로 바꿈.
- 조선말로 된 책의 출판이 금지됨.
- 1942(왜정)
- 10. 1. 조선어 학회 수난 사건 일어남.
-
최 현배의 <한글갈> 펴냄.
- 1945(미국 군정)
- 8. 15. 조선의 광복.
- 9. 1. 조선어 학회에서 각종의 국어 교과서를 지어서 군정청 학무국에 줌.
- 12. 8. 군정청 학무국 조선 교육 심의회 교과서 분과에서 ‘한자는 없애고, 모든 글은 가로쓰기’로 결정함.
- 1947(군정)
-
10. 9. 조선어 학회의 <조선말 큰 사전> 첫 권 펴냄.
-
- 1948(대한 민국)
- 8. 15. 대한 민국 정부 세움.
-
8. 6. 문교부에서 <한자 안 쓰기의 이론> 펴냄.
- 10. 9.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공포됨.
- 1949
- 9. 5. 조선어 학회를 ‘한글 학회’로 바꿈.
- 1950
- 6.25 사변 일어남.
- 1953
- 4. 27. 국무총리 훈령 제8 호 ‘한글 간소화 안’이 공포됨.
- 5. 24. 한글 학회 등에서 한글 간소화 안에 대한 반대 성명을 냄.
- 1954
- 7. 2. 국무회의에서 한글 간소화 안을 통과시키자, 각계에서 반대 성명을 냄.
- 1955
- 9. 19.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 안을 거두어 들임.
- 1956
- 10. 9.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세움.
- 1957
- 12. 6. 국무회의에서 ‘한글 전용 적극 추진에 관한 건’이 의결됨.
- 1962
- 2. 5. 문교부 안에 ‘한글 전용 특별 심의회’가 생김.
- 1964
- 9. 1. 모든 국어 교과서를 통해서 한자를 노출시켜 가르치기로 함.
- 1968
- 5. 2. 국무회의에서 한글 전용 5 개년 계획(안)이 의결되고, 이어 1970년부터 한글 전용을 실시하기로 결정됨.
- 11. 5. 대통령령으로 ‘한글 전용 연구 위원회’가 생김.
- 12. 24. 국무총리가 ‘한글 전용에 관한 총리 훈령’을 공포함.
- 1972
-
9. 한글 학회의 기관지 <한글 새 소식> 창간됨.
-
- 1979
- 9. 8. 한글 학회에서 ‘한글 글자꼴 연구 모임’을 엶.
- 1980
-
8. 28. 한글 학회에서 종래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수정하고 <한글 맞춤법>으로 펴냄.
-
- 1981
- 12. 12. 주 시경 스승의 무덤이 동작동 국립 묘지 제2 유공자 묘역으로 옮겨 짐.
- 1982
- 12. 3. 한글 학회 안에 ‘한글 풀어쓰기 연구 모임’을 만듦.
- 1984
- 5. 10. 국어 연구소 세워 짐.
-
10. 30. 국어 연구소의 기관지로 <국어 생활> 창간됨.
- 1986
- 12. 3. 한글 학회 안에 ‘한힌샘(주 시경) 연구 모임’을 만듦.
- 1987
- 3. 정보 교환용 한글 완성형 표준 코드가 제정됨.
- 4. 16. ‘한글 문화 단체 모두모임’이 세워 짐.
- 12. 22. ‘주 시경 연구소’ 세워 짐.
- 1988
-
1. 14. 문교부에서 국어 연구소를 통해 종래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간소화의 방향으로 수정한 <한글 맞춤법>을 제정하고 공포함.
-
7. 27. 주 시경 연구소의 기관지 <주 시경 학보> 창간됨.
-
- 1990
- 7. 4. 사단 법인 국어 정보학회 세워 짐.
- 1991
- 1. 23. 학술원 안의 국어 연구소가 국립 국어 연구원으로 승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