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운동의 다섯 가지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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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운동의 다섯 가지 목표

– 외솔 최 현배님 지은,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가운데서1

국어는 그 나라 사람들의 정신 생활의 표현인 동시에, 그 정신 생활의 기초 수단이다. 국어는 그 나라 백성에게 민족 의식을 북돋으며, 국민 정신을 기른다. 말은 일반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며, 겨렛말은 그 겨레를 겨레답게 만들며, 국어는 그 국민을 국민답게 만든다. 그러므로, 사람은 말 일반을 중시하여야 하며, 겨레는 그 겨렛말을 사랑하여야 하며, 국민은 그 국어를 존중하여야 한다. 그러면, 한 국민으로서 그 국어를 사랑하고 존중하여, 이를 두호2하며, 이를 길러 가는 방향은 어데에 있는가? 국어 운동의 방향은 어데에 있으며, 그 목표는 무엇일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국어 운동의 목표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깨끗하게 하기, 두째는 쉽게 하기, 세째는 너르게 하기, 네째는 풍부하게 하기, 다섯째는 너르게 번지도록 하기,

가 곧 그것이다.

다음에, 이 다섯 가지의 목표에 관하여, 약간의 이론을 베풀고자 한다.

깨끗하게

풀어 놓힘

나라말을 깨끗하게 만들려는 운동은 여러 나라에서 흔히 있는 일인데, 이는 대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침략을 당하였다가, 다시 그 굴레를 벗어나게 된 때에 일어나는 것이 예사이다. 서양에서는 로오마 제국의 압박을 벗어난 유우롭의 각 겨레들이 ㄹ라3띤 말의 위압을 없이하고, 제 스스로의 말씨를 깨끗하게 하려는 운동을 일으켰으니: 껠만 민족의 국어 운동은 다 이러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대한은 수천 년 동안의 한자, 한문의 절대적 위압에서, 또 36년 간 일제의 야만스런 동화 정책, 언어 정책에서 자유스럽게 되었으매, 이러한 “깨끗하게”의 국어 운동이 일어남은 자연의 형세인 동시에, 또 필연의 요구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개끗하게”의 운동은 말에서와 글에서와의 두 가지로 갈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외국 말

말을 깨끗이 함에는, 첫째, 외국말이 지저분하게 제 나라말 가운데에 섞기어 있음을 쓸어내어 버림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그 생겨남으로부터 오늘날까지, 항상 다른 나라들과 아무 관계 없이, 제 홀로 고립하여 있어 온 것은 없다. 뭍의 연결로 이웃하여 있는 나라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록 바다 가운데에 외따로 있는 섬의 나라일지라도, 일찍부터 반드시 다른 나라들과의 오감이 생기어, 물질적 생활 필수품과 정신적 문화의 주고 받음이 있어 온 것이 예사이다. 이러한 교통과 교역으로 말미암아, 각 처의 인류의 생활은 발전되고, 문화는 발달되어 온 것이다.

따라, 각 나라 사람들의 가진 바 문화와 말씨는, 다소의 차는 있을망정, 다 각각 다른 나라의 문화, 말씨의 영향을 입어 오면서 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 말에서 전연히 외국말의 요소를 빼어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오랜 세월을 두고서 평화스런 관계에서 생긴 이러한 문화 및 말씨의 서로 섞김은, 이제 일시에 이를 맑힌다는 것은 사리에 부당한 점이 많다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및 군사적 정복, 피정복의 부자연한 관계에서 불합리스럽게 생긴 생활 양식, 말씨, 들의 혼란은 그 부자연한 관계의 제거와 함께, 이를 맑히고자 함은, 또한, 감정 내지 문화 양심의 당연한 발로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는 과거 36년 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세계에 살이를 일삼게 되었은즉, 일제의 야만스런 무력적 위압과 혹독한 동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입은 문화적 및 언어적 해독을 마땅히 덜어버리고, 깨끗이 맑히어서, 우리 겨레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아, 제 스스로의 애짓는 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겨레 문화를 세우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일어를 버리기

말씨의 방면에서 깨끗이 맑혀야 할 부면이 적지 아니하다. 첫째, 우리는 강제적으로 배워가지고 있는 일본말을 버려야 한다. (1) 나날의 생활에서 일어를 쓰는 수치스런 더러운 버릇을 없이하여야 한다. 이만한 일은 누구든지 별 이론을 할 것 없이 다 알아챌 자명의 사리이지마는, 사람은 이성스런 동물이라 하기는 하지마는, 또 일면에서는 항상 버릇과 타성과의 종으로 되어, 안일을 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명한 사리도 이를 실천에 옮기는 용기와 부지런이 없어, 여전히 그 낡은 치욕의 버릇을 되푸리하여 지키고 있는 일이 적지 아니하다. 이러한 버릇의 종됨에서 얼른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무식한 대중 층과 너무 유식한 학자 층에 특히 많음을 보겠다. 이는, 하나는 자유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또 하나는, 이미 얻은 자기의 종스런 재산과 지위에, 손해의 염려가 있지나 않을가 하는 심리 때문에, 용감스리, 시원스리 낡은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 각종의 글월에서, 특히 관공서의 공문서에서, 일본 때를 닦아 버려야 하며, (3) 각종 학문에서도, 교육에서도, 한 가지로 일어의 그루터기를 뽑아버려야 하며, <4> 모든 사물의 이름에서, 특히 일인의 충실한 종이 되겠다고 하여 본떠 지은 사람의 이름에서, 일본의 냄새를 없이해 버려야 한다.

이와 같은 왜색 지우기에 대하여, 어떤 이는 한 가지의 반대의 이론을 꺼낸다. 곧 다른 것은 몰라도, 일본 음식에 관하여서는, 이를테면, “スシ”를 “초밥”으로, “ウト ン”을 “가락국수”로 “オデン”을 “꼬치안주”로 할 필요가 없다. 만약, 일어를 없이 한다면, 서양 음식의 이름도 다 우리말로 고칠 것인가? 이러한 음식의 이름은 고유 명사인즉, 음식의 본 고장에서의 이름 그대로 함이 옳다고 세운다.

이러한 되쟎은 이론은 취할 것이 못 된다. 첫째, 음식의 이름이 고유 명사가 아니다. 말본에서 고유 명사<홀로 이름씨>란 것은 어떠한 개체에만 쓰히는 이름이기 때문에, 그것의 무리 개념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スシ”, “ウト ン”과 같은 음식의 이름은 결코 특정의 개체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한 갈래의 음식에는 두루 통하여 쓰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따위 음식의 이름은 홀로 이름씨가 아니다. 홀로 이름씨는 그 개체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또, 만약, 고유 명사의 고유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서, “スシ”, “ウト ン”과 같은 음식의 이름은 그 본 고장에서의 이름인즉, 이를 구태여 우리말로 고칠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서양 사람들도 일본의 “人力車”를 “Rikisha”, 중국인의 “人蔘”을 “Ginseng”이라 하며, 일본도 한국이 “김치”를 “キムチ”라 한다. 우리도 외국의 음식은 그 본 고장에서의 이름 그 대로 쓰는 것이 대개는 무방하다고 세운다. 그러나, 이 말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원래, 어떤 지방에서 그 특유의 사물이 다른 나라로 옮아갈 적에는 제 본 이름을 가지고 가는 것이 예사이다. 이 새로운 딴 나라의 사물을 받아 들이는 나라에서는, 그 새로운 사물에 대하여, 금시로 새 이름을 지을 수 없으니까, 그것이 가지고 들어온 제 본 이름 그 대로 써서 그것을 부르는 것이 예사이다.

그러나, 이는 한 편의 문제이요, 결코 이론의 문제는 못 된다. 진정한 사실과 이론은 이러하다:-일반으로, 딴 나라의 사물을 받아들이는 나라에서, 그 사물이 가지고 온, 제 고장에서의 본이름을, 꼭 그 대로 지켜야 한다는 이론도 사실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보기가 흔히 있는 것은, 다만, 사람의 편의에 따르는 심리와 행동에서, 그리 할 뿐이다. 그 받아들이는 나라 사람의 생활에, 아주 친근하게 널리 쓰히게 되기나 하는 경우에는, 그 들은 외국의 사물에 대하여서도, 저희가 부르기에 편리한 제 나라말로써 고쳐 이름짓는 것이 통칙이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명치 이후에, 서양서 수입하는 모든 문물 제도에 대하여, 다 제 나라 사람이 쓰기에 편리한 제 나라 말로써 이를 번지었으며 각종의 사물에 대하여도 그리하였다. 보기로 “洋服”, “上衣”, “ズホ`ン”, “外套”, “三ツ ”, 그 밖에, 양복집에서 양복 치수를 재는 데에 쓰는 전문어 같은 것이 다 밖에서 들온 물건에 대한, 새로운, 제 나라말의 이름이다. “飛行機”, “寫眞機” 따위가 다 일본 고유의 물건이 아니로되, 일인이 제 나라 말로써 옮겨 지은 이름이다. 물론, 이는 통칙일 따름이요, 결코 벗어남을 허락하지 않는 자연 법칙 같은 엄밀성은 없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ワイシヤツ”, “ネクタイ”, “ラヂオ” 따위를 씀과 같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물을, 특히 왜색을 지우고서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고 우리가 주장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는 중에 있다. 물론, 우리 스스로 이러한 운동이 하나 벗어남 없이 완전히 성공을 거두기는 기약하기 어려운 줄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만약, 이러한 운동을 포기하라고 이론을 세우고, 우리의 국어 운동을 배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완전과 원만이 없다는 이유로써, 인생 자체를 부인하고 자살하여 버리자고 주장하는 미치광이와 다름이 없는 짓이라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새 사물에 대하여, 사람들은 제 나라에서 본래 가지고 있던, 그와 비슷한 사물로서 그 새 사물의 이름을 짓는 일이 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서양의 신을 “クツ”라 하며, 한국에서 “石 ”을 “비누”라 함과 같다. 처음에는 “石 ”과 “비누”, “釘”과 “못”의 차이가 있음을 구별하기 위하여, “왜비누” “왜못”이라 하였지마는, 옛날부터 있던 “비누”와 “못”은 뒤로, 물러가고, “왜비누”와 “왜못”이 실생활에서 널리 많이 쓰히게 됨에 따라, 그 앞가지 “왜”를 아주 떼어버리고서 다만 “비누” “못”으로만 두루 쓰게 되었음과 같다.

말을 깨끗이 함에는,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외국의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섞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첫째이어니와, 그 밖에 (ㄱ) 대중이 되지 못하는 말소리를 쓰지 않도록 할 일이며, (ㄴ)대중말이 못되는 말을 안 쓰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앞의 외국말 티 없애기가 대외적 관계의 깨끗이 함에 대하여, 한 말씨 자체 아낙에서의 깨끗이 함이다. 이 두 가지는 실로 국어 교육에 중요한 문제인즉, 사범 교육에 있어서는 특별히 주의하여, 장래 시골에서 교직에 나아갈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제스스로부터가 이 두 가지 점에서 완전한 소양을 가지고, 남의 국어 교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한자말을 내어 버려야 한다.

한자말

8.15 해방은 다만 우리 겨레를 일본의 제국주의에서 자유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 수천 년래의 중국의 한자에의 붙임에서 자유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일어의 때를 닦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아, 중국의 더러운 성가진 때조차 떨어버리지 아니하면 안 된다.

한자말이 우리 나라에 쓰히게 비롯한 것은 아마도 삼국 시대이었겠다. “사로” 또는 “서라벌” 대신에 “新羅”가, “이사금”, “마리한” 대신에 “王”이 쓰히게 된 것이 신라의 초기의 일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다투어 중국을 한문화를 수입함에 따라, 한자말을 자꾸 많이 우리에게 침입하게 되었다. 유교는 물론이요, 불교도 중국을 거쳐, 중국의 한문으로 번역된 불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수입되었기 때문에, 불교를 숭상하던 신라, 고려에서나, 유교를 국교로 한 한양 조선에서나, 마찬가지로 한자말이 우리말 속으로 침입하기에 유리한 형편을 이루었으며, 더구나, 근세로 올수록 그 침입이 더욱 왕성하였을 것이다. 이 외국어인 한자말을 수입하는 당사자는, 그 때의 상류 계급에 딸린 사람들인데다가, 유교는 그 자체가 워낙 봉건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특히 한양 조선에서는, 양반 계급이 자기 옹호의 유력한 방패로 썼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중인, 상인들과 다른 계급적 특색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네들의 쓰는 말은 일부러, 어렵고 서툴은 한자말, 한문 문자를 사용하여, 다른 하층 계급으로 하여금 엄두에도 따를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이란 그 바탈이 물과 같아, 위에서 아래에로 흘러내리는 것이라, 하나는, 하층 계급이 상층 계급에 대한 부러움으로 해서 본뜨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상층 계급이 어떤 필요로 해서 강제하기도 하며, 한자말은 양반네들의 저수지에서 끊임없이 중인, 상인의 논으로 흘러내려 들어갔다. 이러기를 장구한 세월에, 한자말은 드디어 많은 우리 고유의 어미말을 압도 구축하고서, 엄연히 안방 차지를 한 것과 같은 형세를 이룸에 이르렀다.

이러한 형편에 더 한층 악화의 기세를 가져온 것은, 일본에서 수입된 한자말의 수다함이다. “갑오 경장”이래로, 우리 나라가 서양의 문화를 수입함에 있어서, 종래의 중국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일본이었고, 더구나, 경술 년(서기 19910년) 합방으로부터 30 년 동안, 야만스런 정책으로써, 우리를 다스린 이가 또한 일본인데, 이 일본이 역시 한문화의 태안에 있어서, 옛날에는 우리 왕인 박사에게 배워서 한문, 한자를 숭상하여 오다가, 명치 유신 이후에는 약삭바르게 서양의 새 문명을 수입함에 당하여, 그 새로 들어오는 문물 제도의 모든 것을, 다 한자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이 한자말을 쓰고 지나는, 형편이었다. 36 년 동안 그 네의 동화 정책을 다스림을 받고, 그 네의 강제하는 노예 교육을 받은 우리 나라에서, 특히 새 지식을 배워 사회상 상당한 지위를 얻은 신식 양반-신사, 숙녀들이 구식 양반들보다 못하지 않게 즐겨서 일본 재의 한자말을 쓰게 되어, 오늘의 우리말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 정치, 경제, 법률, 및 사회 생활에 관한 갈말은 거의 전부가 일본 재 한자말로 되어 있다.

위에 베푼 바와 같이, 한자말은 한문화의 세력 아래에서 생긴 것인데: 옛적에는, 오로지 중국으로부터 들어왔고, 한양 조선 말기로부터는, 서양의 새 문명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우리말 속으로 들어왔다. 그 들어오는 분수는 옛적에는 극히 완만하였으나, 근세에 이르러서는 교통의 발달, 교육의 보급, 언론, 출판의 발달로 말미암아, 그 형세가 자꾸 급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우리말, 우리글의 상태는 정상스런 발전의 경과로 된 것이 못 되고, 오로지, 한문과 일본 말의 잇달은 침입으로 말미암아, 비뚤어지고 흔틀어져 혼돈 불순한 상태에 놓혀 있다. 이 따위 한자말이 아무리, 그 연원이 멀고, 그 뿌리박힘이 깊고, 그 범위가 넓고, 그 잦기가 심하고, 그 버릇됨이 오래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말 우리 문화의 자주스런 발달을 위하여, 이를 바로잡는 수술의 칼을 잡지 않을 수 없다. 밖으론, 다른 강국의 제국 주의적 간섭에서 해방되고, 안으론, 계급적 장벽을 완전히 깨뜨린 배달 겨레의 독립 자주의 기백과 문화 창조의 정신은, 우리 문화와 생활의 터전인 우리말, 우리글의 오늘날의 비뚤어진 상태에, 만족할 수는 도저히 없다. 우리는 그 중에서 가정 부당한 것부터 비롯하여, 차츰차츰 넓은 범위에 걸친 몰아내기와 고치기를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순서는 어떠한가?

(1) 가장 먼저, 일본으로부터 통으로 삼킨 일본 재 한자말을 몰아내어야 한다. 보기 하면,

  • 明渡(비어주기), 結局<끝끝내, 끝장), 手形(어음), 爲替(환), 土産(선물)

따위는 순 배달말로 고칠 수 있을 것이요, 그러지 못할 것, 이를테면,

  • 受付(접수), 場合(경우>, 支拂(지급, 치름), 請負(도급), 印肉(인주), 小切手(수표)

의 따위는 위선 순 배달 재의 한자말로라도 옮길 수밖에 없다.

(2) 계급적 요소, 봉건적 찌꺼기를 가지고 있는 한자말은 평민적인 순 우리말, 혹은 한자말로 갈아 넣어야 한다. 보기:

  • 裁縫→바느질. 廚房→부엌. 자부→며느리. 가증하다→얄밉다. 家親, 嚴親, 大人→아버지. 母, 母親, 慈堂, 萱堂→어머니.

(3)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 가외로 덧붙여 쓰는 한자말을 없이하여야 한다. 보기:

  • 윽익하다, 은휘하다→감추다. 대금→값, 보상하다→갚다. 무상→거저. 증여하다, 수여하다→주다. 교부하다. 대금, 거액→큰돈. 만연하다→퍼지다.

(4) 만만히 입말에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다만 글말에만 그쳐 있는 한자말은, 당연히 없이해 버리고, 쉬운 말로 갈음하여야 한다. 보기:

  • 건곤→하늘땅. 환기하다→일으키다. 앙양하다→돋구다. 수영하다→헤엄치다. 망각하다→잊어버리다.

(5) 근본부터 순 우리말인데, 사대주의자들이 망녕스리 그 밑뿌리를 한자로 해석해 놓고서, 한자말이란 까닭 밑에서 공연한 한자로 씨는 일이 있으니, 이런 것도 당연히 그 쓸데없는 탈을 벗겨 버려야 하겠다. 보기:

  • 生覺하다-생각하다. 生起다-생기다.

이와 같이, 한자말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그 허다한 한자말을 모주리 다 몰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한자말이라도 이미 우리말 속에서 아주 익어져서, 우리의 귀와 입과 머리에 친근하고 평이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억지로 밀어낼 것은 없을 것이요, 다만 그보다 더 친근하고 더 쉬운 순 우리말의 득세함을 따라 저절로 점차로 사라지기를 기대함이 옳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쉽고 가까운 우리말을 두어 두고서, 일부러 귀퍅스럽게 어렵고 서툴은 외국말, 또는 외국말 재의 말을 써서, 제 유식을 자랑하고, 제 특권을 옹호하려는 심리를 내어버려야 한다는 일이다. 자유에로 풀어놓히고, 자주에로 각성한 우리 겨레의 세워야 하는 앞날의 문화는 마땅히 대중의 문화, 민주주의스런 문화, 한글의 문화라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말을 깨끗이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말의 권위를 세우자. 말씨의 권위는 곧 그 말씨의 주인의 권위와 정비례하는 것이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위와 존엄과 영예를 세우지 아니하면, 안 되는 이치를 깊이 깨쳐야 한다. 우리는 일어의 종됨에서 풀혀야 함과 마찬가지로, 중국어, 한자말을 종됨에서도 풀혀야 한다.

셋째로, 우리 배달 겨레는 중국의 글자 한자를 안 쓰기로 하고, 우리의 유일무이의 보배인 한글만을 쓰기로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것이 우리의 글과 생활을 깨끗이 함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자를 안 쓰기로 하자고 외치는 것은, 다만 그것이 다른 나라의 글자이란 때문이 아니요, 그것을 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겨레의 문화 발달에 큰 장애가 되며, 생존 발전에 큰 해독이 되는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의 근본 목적은 외국의 글자를 없이함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 겨레 스스로의 생명의 발양, 문화의 발달을 이루고자 함에 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글자 한글이, 저 덜끼예의 시리아 글자 모양으로, 그 국민 생활에 소용보다 장애됨이 많다 할 것같으면, 우리는 게말 바샤의 거울을 좇아, 당연히 한글을 버리기에 주저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데, 한글은 결코 저 국민의 생활에 방해가 되는 덜끼예의 글자와 같은, 그런 비과학스럽고 어려운 것이 아닐 뿐만아니라, 천하의 식자들이 공인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도 드문 훌륭한 과학스럽고 쉽고 편리한 글자이다. 우리 나라가 오늘과 같이 문명의 낙오자가 된 것은, 그 원인이 이렇듯 훌륭한 한글을 두고서, 이를 이용하지 아니한 것에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고, 또, 우리 겨레에게 앞날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이렇듯 빼어난 한글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다. 한길, 바른 길을 놓아 두거서, 엉뚱하게 소로, 굽은 길을 잡아드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환한 길에 더러운 쓰레기를 버리고, 바른 길에 걸거치는 돌과 가시를 놓는 것은, 무지몽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앞에 가진 세종 대왕의 거룩한 뜻에 보답하기 위하여, 뒤에 오는 자자 손손의 순탄한 성장을 위하여, 우리 겨레의 민주주의스런 문화의 발전, 생활의 행복을 위하여, 모름지기 한자를 몰아내어야 한다.

쉽게

사람은 말과 글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훌륭한 문화를 차리고,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말과 글이 어려워서, 나라 백성들이 배우기 어렵고, 쓰기 어렵다면, 그 백성은, 그 말과 글의 장애로 말미암아, 남과 같은 문화를 애짓지 못하고, 항상 몽매한 가운데에 가난과 고생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과 그을 쉽게 하는 것은 그 말과 글을 쓰는 국민으로 하여금, 크게 유익함을 얻게 하는 근본 도리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현대와 같이 소수의 특수 계급보다 일반 다수의 대중의 행복이, 시대적 요구가 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스런 생활의 건설이 요청되고 있는, 이 때를 당하여, 한 나라의 말과 글을 쉽게 하는 것이, 극히 필요한 기초 공작이 되는 것이다.

말을 쉽게 함에는, 옛말 죽은 말을 쓰질 말고, 현재 말, 산 말을 쓰도록 하여야 하며, 외국말을 안 쓰고, 제 나라 말을 쓰도록 하여야 하며, 제 나라의 현대말 가운데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말을 쓰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 나라 백성들이 고래로 쉬운 제 어미말을 천시하여 버려 두고서, 구태여 남의 나라 말, 한자말을 써 온 것은, 온 국민으로 하여금, 낮은 지식의 수준에서 헤매도록 만든 결과를 가져 왔다. 우리는 어려운 말일수록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쓰는 사람도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그릇된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자말 가운데에서도 특히 더 어려운 한자말을 일부러 가려 쓰는 버릇이 있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비, 아버지, 아버님,…”보나 “부, 부친”을, 그보다 “가친, 엄친, 엄부, 춘부장,…”을 쓴다. 이러한 버릇은 다 소수 특권 계급의 오만심과 이기심에서 울어 나온 반민중적, 반시대적인 봉건주의의 여폐이다.

한자 안 쓰기

글을 쉽게 함에는, 첫째 한자를 안 쓰기로 하여야 한다. 이 어려운 한자를 쓰기 때문에, 우리 겨레의 정력과 시간을 여기에다 허비하게 되어, 백성이 무식과 가난에 허덕이고, 나라가 점점 쇠약해져서, 드디어, 다른 겨레의 정복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 어려운 한자를 버리고서, 과학스럽고, 쉬운, 우리의 한글만 쓰기로 함으로 말미암아, 광복된 조국을 민주주의 나라로 발전시키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러한 자명의 한글 운동을 막고자 하는 무리는, 다 제 개인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하여, 삼천만 온 겨레의 영원한 장래를 돌보지 아니하려는 지독한 이기주의, 봉건 사상의 노예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새 세대의 국민은, 이러한 그릇된 태도에 대하여, 굳세게 투쟁하여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맞훔법

글을 쉽게 함에는, 맞훔법의 정리와 “다입우라이떠”를 씀이 매우 필요한 조건이 된다. 오늘날, 우리 한글 학회에서 정리하여 놓은 한글 맞훔법을 어렵다고 하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글자 생활의 진상을 깨치지 못한 때문에 하는 헛걱정인 것이다. 이를테면,

(1) 종래 ㅅ받침 하나로만 지내던 것을, 이제는 ㅅ, ㄷ, ㅈ, ㅌ, ㅊ을 구별하여 쓰며,

(2) 전에 쓰지 않은 받침 –ㅎ, ㅀ, ㄾ, ㄽ, ㄲ, ㅆ, –을 쓰며,

(3) 모든 것을 일정한 규칙에 들어맞도록 하는 것, 들이 다 어렵다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 배우기와 씨기에 시간이 많이 들며, 또,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글자 생활이란 것은, 다만, 배우기와 손으로 씨기와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남의 글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고,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개인이 글을 배우는 것은, 어릴 적의 일시의 일이요, 글을 읽는 것은 온 평생의 일이며; 하루 동안에, 제 손으로 글을 씨는 것은 몇 자에 지나지 아니하지마는, 남의 글을 읽는 것은 수천 수만이나 되며; 더구나, 글을 씨기는 한 개인이 하지마는, 이것을 읽는 사람은 수백 내지 수만, 수천만이 될 수가 있다. 그러한즉, 정신으로 배워 깨치는 수고보다, 손으로 씨기와 수고보다, 눈으로 읽기의 수고를 특히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배우기와 씨기에는 다소 많은 수고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만약 읽기에 그에 비등한–아니, 조금이라도 편함과 쉬움이 있다면, 글자 생활 전체에 있어서, 그것이 훨씬 큰 유익을 주게 된다. 이제, 우리들이 정리해 놓은 한글 맞훔법은 그것이 배우기와 씨기에 얼마큼 어려움이 있음도 사실이겠지마는, 국민 학교 두째 학년 아이는 그 가정 환경, 재질의 여하를 불문하고, 그 전수의 한 70버어센뜨는 능히 글 읽는 힘을 얻게 된다 하니, 그만한 어려움 쯤은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이요, 이에 대하여, 그 글을 읽기에는 극히 편리하여 저 무법한 맞훔보다는 수 배의 능률이 나게 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정리된 한글 맞훔법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 크게 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배우기와 씨기의 작은 어려움으로써, 읽기에서의 큰 쉬움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오늘날은, 손으로 씨기는 적게 하고, 기계로 박기는 많이 하는데, 활자에서는 “있다”와 “잇다”가, “많다”와 “만타”가 결코 시간상 차이가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한글 맞훔법에서는 손으로 씨기의 수고와 시간의 많음은 절대로 문제가 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글 다입우라이떠

글자 쓰기을 한층 쉽고 편하게 함에는, 이를 기계화하는 것이 극히 필요하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자, 창안자가 많이 나오고 있음은 매우 기뻐할 만한 현상이다. 그 중에서도 능률 본위로 고안된 공 병우 박사의 다입우라이떠는 영자 다입우라이떠보다 더 나은 능률을 내게 되어 있다. 우리 사회의 각 방면에서 이러한 능률 나는 한글 다입우라이떠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거두어질 좋은 열매를 생각하면, 기쁨을 막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날마다 제 시간을 잘약할 수 있을 것이요, 모든 관청과 사무실이 온갖 사무를 재빨리 처리하게 될 것이니, 이 한글 다입우라이떠가 한자를 쫓아내는 기관총 노릇을 할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문화는 빨리 향상할 것이요, 국민의 경제 생활은 많이 나아갈 것이다. 다시 말하노니: 한글의 기계화(기계삼기)는 실로 세종 대왕의 원대한 이상의 실현을 가져오는 것으로, 배달 겨레의 장래의 운명에 지극히 중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니라.

쉬움과 갑어치

요ㅎ건대, 말과 글은 쉬워야 한다. 물론 쉬운 것만이 절대 조건은 아니지마는, 같은 값이면 쉬운 것이 훨씬 효과스럽다. 고래로 한문 배우기와 한자 쓰기에 중독된 사람들은 왕왕이 한글은 쉽기 때문에, 배달말은 쉽기 때문에 갑어치가 없는 것이라 하여, 이를 경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이가 없지 아니하다. 하기는, 쉬운 것보다 어려운 것이 갑어치가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간의 이치가 없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훌륭하고 좋은 것은 다 얻기 어렵고, 시원찮고 나쁜 것은 다 얻기 쉬움은 일반적 사실이다. 구리는 철보다, 은은 구리보다, 금은 은보다, 백금은 금보다, 금강석은 백금보다, 얻기가 더 어렵다. 이 얻기 어려움의 분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그 갑어치는 더 크고 많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귀하다”가 얻기 어려움을 뜻하는 것으로서, 드디어 갑어치가 많고, 훌륭함을 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극히 소중한 것은 얻기 어렵지 않고 도리어 얻기 쉬움을 깨쳐야 한다. 보라, 저 해와 공기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못 살 만한, 소중한 것인데, 도리어 우리에게 극히 쉽게 얻어지지 아니하는가? 세상의 예사의 물건은 얻기 쉬울수록 그 갑어치는 떨어진다. 없이 적다. 값이 적은 극도는 값이 없다. 값이 없는 것은 쓸데 없는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해와 공기 같은 것은 본질적으로 훌륭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얻기 쉬우며, 따라 값이 없다. 그것은 값이 없기 때문에, 도리어 더 좋고 훌륭한 것이다. 우리말에 “값없다”란 말이 한쪽에서는 나쁜 것을 뜻하고, 다른 한쪽에는 훌륭한 것임을 뜻하니, 바로 이러한 사리를 나타낸 말이라 하겠다. 우리의 한글은 우리 겨레의 태양이요, 공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극히 얻기 쉬우며, 얻기 쉽기 때문에 값없으며, 값없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이다. 태양과 공기가 사람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과 같이, 한글은 우리 겨레에게 문화의 원천이요, 생존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하기

말과 글을 바르게 하는 것이, 곧,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도리가 된다. 사람의 정신 활동의 산물인 말과 글이 바르지 않고는, 그 고귀한 사명을 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바르게 다듬질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가?

말을 바르게 한다 함은 대중 소리를 쓰며, 대중말을 쓰는 것이다. 소리의 장단, 강약, 및 높낮이가 정확히 그 자리를 얻게 함이다.

그을 바르게 한다 함은 맞훔법을 정리하여, 만 사람으로 하여금, 다 한가지의 맞훔법을 쓰도록 하는 일이다. 또 글씨는 가로 씨기(여기서 ‘가로 씨기’는 이른바 ‘풀어쓰기’를 가리킨다. 길동무 새김)로 함이 가장 합리적이요, 능률적이다. 우리는 맞훔법은 어느 정도까지 정리하여 행하는 중에 있지마는, 가로글씨는, 그 실시가 언제나 실현될지, 아직 가만 느낌이 있다. 가로글씨에 관한 이론은 나의 딴지음 “글자의 혁명”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더 깊이 들어가고자 아니한다. 말과 글을 바르게 하는 일은 말하기는 극히 간단하지마는; 그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복잡한 점이 있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은 개인으로서 제 힘과 시간을 허비하여야 할 것이요, 나라는 나라로서 상당한 차림과 큰 용단이 필요하다.

풍부하게 하기

말과 글은 우리의 문화 재물이다. 재물이란 사람에게 소용스런 것, 좋은 것을 뜻하는 이만큼, 풍부하고 넉넉하여야 더욱 좋은 것이 된다. 사람 활동의 목표의 하나는 그 물질적 생활과 정신적 생활을 풍부하게 함에 있다. 이제, 우리는 말과 글을 풍부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더욱더욱 정신적 및 물질적 생활을 풍부하게 만들고자 한다.

말의 풍부

말을 풍부하게 함에는, 첫째, 낱말의 내용이 풍부하여야 한다. 한 낱말이 한 가지의 뜻을 가지더라도, 그 가리키는 바가 가난하지 아니하여야 하며, 한 낱말이 여러 가지의 뜻을 가지는 것은 그 낱말을 널리, 많이 부리는 것을 뜻함이니, 역시 풍부함이 된다. 우리말은 우리가 이를 충분히 부리지 아니하여 왔기 때문에, 그 내용이 가난한 상태에 있다. 이는 우리가 저 영어의 낱말의 내용과 견주어 보면, 명백히 인정되는 바이다. 모든 것은, 많이 부림으로 말미암아, 피어나고 번지는 것이다. 말의 내용을 풍부하게 함에는, 이를 자주, 많이, 널리 쓰지 아니하면 안 된다.

다음에는, 낱말의 수가 많음이 곧 그 말의 풍부함을 뜻한다. 한 개인이 말수를 많이 가지고 있음은, 곧 그 개인의 지식이 풍부함을 뜻하나니: 동서 고금에 유수한 문학자는 다 말수의 부자이며, 그 중에도 더 훌륭한 문학자는 더 많은 말수를 가지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유명한 문장가의 말수를 조사 계산하여 본 일이 있다.

한 겨레의 가진 말수를 풍부하게 함에는, 그 겨레의 물질적 및 정신적 생활을 풍부하게 함이, 그 앞서는 조건이 된다. 야만인, 미개인이 가진 말수는 매우 적으며, 문명인의 말수는 많다. 한 겨레의 가진 말수의 많고 적음은, 곧 그 겨레의 문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글을 풍부하게 함에는, 그 글이 모든 말을 적기에 넉넉하도록 함이다. 우리 한글은 다만 24자밖에 안 되지마는, 그 됨됨이가 극히 과학스러워서, 그것으로 우리말을 적지 못할 것이 없음은 물론이요, 쓰고도 남음이 많다. 이를테면, “뮤, 뷰, 퓨, 듀, 튜, ㅎ, ㅎ” 따위는, 우리말 적기에는, 도무지 쓰히지 않는 글자이다. 참으로, 우리 배달말은, 그 소리의 수가 풍부한 동시에, 그 글자(낱내)의 수는 더 풍부하다. 이것이 확실히 우리말과 우리글의 장점의 큰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저 일본은 그 말소리가 극히 빈약하고, 또, 그 글자도 극히 빈약하다. 그 말소리가 빈약한 때문에, 한자를 쓰지 않으면, 한소리말이 너무 많게 되어, 그 말뜻을 밝혀 낼 수가 없으며, 그 글자가 노무 빈약한 때문에, “가나”만으로 마을 적어 놓을 것 같으면, 변화성이 적어서, 그 시각적 효과가 너무 나쁘다. 이러한 두 가지 근본스런 결점이 있기 때문에 일본인은, 그 한자가 국민에게 비치는 해독이 큼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능히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저번 전쟁 중까지는 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 한 점, 한 획을 소홀히 아니하더니, 전쟁 뒤에는, 곧, 한자를 폐지하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그 수를 훨씬 더 줄이고, 그 자획을 무법하게 마구 줄이고, 자형을 함부로 고쳐 놓았다. 이러한 결과는 일본 아이들에게 한 가지의 한자를 더 배우게 한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슬기가 많은 일본인이언마는, 한자를 버릴 수 없어서 고민하는 상황은 참으로 동정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에는, 일본인이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저 덩달아서, 우리 한국인도 한자를 버려서는 안 되다고 세우는 이가 상당히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집에 돈궤 속에 금은 보화를 많이 쌓아 두고서 가난한 이웃집에서 조석으로 비지로써 배 채우는 것을 본떠서, 저도 비지로 배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식구들에게 맛 없고, 먹기 어렵고, 자양이 적은, 비지 덩어리를 쳐 안기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어찌 우섭고 딱하지 아니한가? 우리에게 극히 풍부한 글자를 지어 끼쳐 주신 세종 대왕이, 영이 계시면, 이를 굽어 보시고서 이 “어리석은 백성”을 얼마나 딱하게 생각하실 것인가?

너르게 하기

깨끗하고 쉬우며, 바르고 풍부한 말과 글은 마땅히 너르게(널리) 쓰히도록 하여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말과 글이라도 이를 널리 부리지 아니할 것 같으면, 그 진가를 발휘할 수가 없다. 말과 글은, 너르게 쓰히는 데에서, 그 인류에 대한 고귀한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말과 글을 너르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가?

글 깨치기

첫째, 온 백성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 글자를 알도록 하는 일이다. 온 백성이 다 글을 알아서, 글에 담기어 있는 정신의 양식, 영양분을 넉넉히 잡아가지어, 그 둘레에 있는 자연의 이치를 깨치고, 사람의 지킬 도리를 배우고, 나라 안의 형편과 세계의 형편을 두루 알고 있는 것이, 오늘날 민주주의 생활의 건설에 극히 필요한 일이다.

모든 방면에

다음에, 말과 글을 생활의 모든 방면에 널리 쓰는 일이다. 우리 나라를 가지고 말한다면, 법률, 법령, 그 밖의 모든 공문서를 다 한글로써 우리말로 적으며, 설교문, 예식문(예장지, 청혼서, 부고, 제문)을을 우리말, 우리글로써 적으며 설교와 교수와 일상 생활에서도 항상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할 것이다. 종래 우리 나라의 형편이 이러한 점에 미치지 못함이 매우 큼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계에 펴기

끝으로, 제 나라의 말과 글을 널리 세계에 퍼지어 쓰히도록 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세계 각처에 나가서 활동함이 왕성하여야 하며, 또 그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보다 높아야 한다. 사람의 모든 활동은 반드시 말씨를 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력이 미치는 데에는, 반드시 그 말씨도 번지어 가게 되며, 경제적 활동이 미치는 데에는, 보내어 가는 물건과 함께 그 말씨도 따라 가아 번지게 되는 것이다. 낡은 시대의 제국주의는 남의 땅을 빼앗아서, 그 땅에다가, 제 나라의 백성과 함께, 말씨를 옮겨 심기를 일삼았지마는, 오늘날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는 이 때에 있어서, 정치로나, 말씨로나, 남의 나라를 정복하려는 것은 우리의 취하지 아니하는 바이지마는, 정치적 및 경제적 활동의 번짐을 떠라, 그 말씨도 번져감은 자연의 사리라 할 것이다. 또, 한 나라의 문화의 정도를 높히는 것이 그 말씨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번져 나가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문화는 물과 같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말씨도 또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문화를 나타내는 말씨가 발달되어 있으면 그 문화와 말씨는 저절로 그 가까운 것으로부터 비롯하여 먼 땅에까지 번져 가게 되는 것이다. 옛말에, 복숭아 꽃이 말이 없으되, 그 아래에 절로 길이 난다 하는 것이 있다. 문화의 꽃이 찬란히 피어 있는 나라에는, 세계의 사람이 모혀 들어, 그 꽃을 가리고, 그 꽃씨를 걷어 가는 것이다. 그러하면, 이는, 제가 기른 아름다운 꽃으로써 제 나라의 동산만 꾸미는 데에 그치지 아니하고, 널리 세계 여러 나라의 동산을 찬란히 꾸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의 형편을 도로 살피건대, 우리 겨레가 우리의 말과 글을 너르게 함에는, 매우 부족함이 크다. 우리는 세계에서도 가장 과학스럽고 쉬운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글이 온 백성에게 그 혜택을 미치지 못하여, 글자 모르는 까막눈이가 아직도 많다. 그뿐 아니라, 글자를 잘 아는 사람들은 법률, 공문서로부터 제문, 의식문 따위를 물론이요, 잡지, 신문에 이르기까지 한글만 쓰기를 꺼리고 피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제 스스로의 수족을 묶어 활발한 나아감을 막는 어리석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요새, 유식한 사람들이 입을 열면 우리의 독창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한글은 실로, 우리 겨레 독창력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최대 최고의 산물이다. 이렇듯 훌륭하여, 세계 사람이 다 경탄하여 마지 아니하는, 문화의 연장, 생활의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부지럾시, 남의 나라의 말과 글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니, 제 아무리, 남의 흉내를 잘 낸다 한들, 제 나라의 말과 글을 쓰는 그 나라 사람에게 미칠 수가 있는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높은 문화를 누리고, 놈은 발전을 이룬 것은 그 원인의 하나는, 확실히 그 나라 사람에게 들어 맞고, 또 잘 된 제 말과 글을 충분히 이용함에 있거늘, 이제, 우리는 이 참된 사실과 이치를 깨치지 못하고, 다만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배우기에만 급급하는, 오백 년래의, 그릇된 생각과 방책을 그대로만 지키고 있다. 우리는 모름지기, 모든 사물을 그 근거로부터 통찰하는 총명과 그 견식을 실천에 옮기는 용기를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된다. 더구나, 삼천리 강산이 세계인의 싸움터로 되어, 사람의 목숨은 물론이요, 정신적, 물질적 재산이 모두 파괴되어, 고생과 가난이 극도에 달한 오늘날에 처하여, 이 겨레, 이 나라의 장래의 운명을 개척하여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에게는, 이러한 총명과 용기가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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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이 글에서, 현행 맞춤법과 다른 부분은, 외솔 선생께서 글 쓰신 그대로를 좇아 실었기 때문이다. -(<한글 새 소식> 편집자 주)
  2. 斗護 – 남을 두둔하여 보호함. 
  3. 직지 주: 원글에는 쌍리을이 쓰였습니다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1 Comment

  1. 이 글월은 <한글 새 소식> 42호(1976.2.5)-45호(1976.5.5)에 실린 내용을 다시 올리는 것 입니다. 이제는 하도 오래되어서 제가 언젠가 정리할 수 있겠지, 하고 모아둔 자료가 어디서 어떻게 해서 저에게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정보를 아는 데 까지는 살려보려고 합니다. <글> 문서정보에 의하면 송 영상님이 2001년 4월 14일 토요일, 9시 53분에 입력/저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2010년 5월 20일 CEST, 직지지기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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