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이라(정명기 77장 본) 현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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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이라(정명기 77장 본) 현대문

옛한글

조선국(朝鮮國) 세종대왕(世宗大王) 즉위 십오년에 홍화문(弘化門) 밖에 한 재상(宰相)이 있으되, 성(姓)은 홍(洪)이요 명(名)은 문이니, 청렴강직(淸廉强直)하며 덕망(德望)이 거룩하니 당세(當世)의 영웅이라. 일찍 용문(龍門)에 올라 벼슬이 한림(翰林)에 처하였더니 명망(名望)이 조정(朝廷)에 으뜸됨에 전하 그 덕망을 승(勝)이 여기사 벼슬을 돋우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좌의정(左議政)을 하였으니, 승상(丞相)이 국은(國恩)을 감동하여 갈충보국(竭忠報國)하니, 사방에 일이 없고 도둑이 없음에, 시화연풍(時和年豊)하여 나라가 태평하더라.

일일은 승상이 난간(欄干)에 기대어 잠깐 졸더니 한 풍(風)이 길을 인도하여 한 곳에 다다르니, 청산(靑山)은 암암(巖巖)하고 녹수(綠水)는 양양(洋洋)한데, 세류(細柳) 천만 가지 녹음(綠陰)이 파사(婆娑)하고 황금 같은 꾀꼬리는 춘흥(春興)을 희롱하여 양류간(楊柳間)에 왕래하며 기화요초(琪花瑤草) 만발한데, 청학(靑鶴) 백학(白鶴)이며 비취(翡翠) 공작(孔雀)이 춘광(春光)을 자랑하거늘, 승상이 경물(景物)을 구경하며 점점 들어가니, 층암절벽(層岩絶壁)은 하늘에 닿았고 구비구비 벽계수(碧溪水)는 골골이 폭포(瀑布)되어 떨어지는데, 길이 끊어지고 갈 바를 모르더니, 문득 용(龍)이 물결을 헤치고 머리를 들어 고함하니 산학(山壑)이 무너지는 듯하더니, 그 용이 입을 벌리고 기운(氣運)을 토하여 승상의 입으로 뵈이거늘 깨달으니 평생(平生) 대몽(大夢)이라. 내념(內念)에 헤아리되, “필연(必然) 군자(君子)를 낳으리라.” 하며, 즉시 내당(內堂)에 들어가 시비(侍婢)를 물리치고 부인을 이끌어 취침(就寢)코자 하니, 부인이 정색(正色) 왈(曰),

“승상은 국지재상(國之宰相)이라. 체위(體位) 존중(尊重)하시거늘, 백주(白晝) 정실(正室)에 들어와 노류장화(路柳墻花) 같이 하시니 재상의 체면(體面)이 있나이까?”

승상이 생각하신즉 말씀은 당연하오나 대몽(大夢)을 허송(虛送)할까 하여 몽사(夢事)를 이르지 아니하시고 인(因)하여 간청(懇請)하시니, 부인이 옷을 떨치고 밖으로 나가시니, 승상 무료(無聊)하신 중에 부인의 도도한 고집이 애닯아 무수히 자탄(自歎)하시고 외당(外堂)으로 나오시니, 마침 시비(侍婢) 춘섬이 상(床)을 들이거늘, 좌우(左右) 고요함을 인하여 춘섬을 이끌고 원앙지락(鴛鴦之樂)을 이루시니 적이 울화(鬱火)를 덜으시나 심내(心內)에 못내 한탄하시더라.

춘섬이 비록 천인(賤人)이나 재덕(才德)이 순직(純直)한지라. 불의(不意)에 승상이 위엄(威嚴)으로 친근(親近)하시니 감(敢)히 위령(違令)치 못하고 순종한 후로는 그달부터 중문(中門) 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행실(行實)을 닦으니, 그달부터 태기(胎氣) 있어, 십삭(十朔)이 당함에 거처하는 방에서 운무(雲霧) 영롱(玲瓏)하며 향(香)내 기이하더니 혼미(昏迷) 중에 해태(解胎)하니 일개(一介) 귀남자(貴男子)라. 삼 일 후에 승상이 들어와 보시니 일변(一邊) 기꺼우나 그 천생(賤生)됨을 아끼시더라. 이름을 길동이라 하니라.

아이 점점 자람에 기골(氣骨)이 비상(非常)하여, 한 말을 들으면 열 말을 알고 한 번 보면 모르는 것이 없더라.

일일은 승상이 길동을 데리고 내당(內堂)에 들어가 부인을 대하여 탄식 왈,

“아이 비록 영웅이오나 천생(賤生)이라 무엇에 쓰리오. 원통할사 부인의 고집이 후회막급(後悔莫及)이로소이다.”

부인이 그 연고(緣故)를 묻자오니, 승상 양미(兩眉)를 빈축(嚬蹙)하여 왈,

“부인이1 어찌 천생이 되리오.”

인하여 몽사(夢事) 설화(說話)하시니 부인이 추연(惆然) 왈,

“차역(此亦) 천수(天數)이오니 어찌 인력(人力)으로 하오리까?”

세월이 여류하여 길동의 나이 팔세라. 상하(上下) 다 아니 칭찬하는 이 없고 대감도 사랑하시나, 길동은 가슴의 원한이 부친을 부친이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함에 스스로 천생됨을 자탄(自歎)하더니, 추칠월(秋七月) 망일(望日)에 명월(明月)을 대하여 정하(庭下)에 배회(徘徊)하더니, 추풍(秋風)은 삽삽(颯颯)하고 기러기 우는 소리는 사람 외로운 심사(心思)를 더욱 돕는지라. 홀로 탄식하며 왈,

“대장부(大丈夫) 세상에 나매 공맹(孔孟)의 도학(道學)을 배워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는 대장인수(大將印綬)를 요하(腰下)에 차고 대장단(大將壇)에 높이 앉아 천병만마(千兵萬馬)를 지휘중(指揮中)에 넣어두고, 남(南)으로 초(楚)를 치고 북(北)으로 중원(中原)을 평(平)하며, 서(西)로 촉(蜀)을 쳐 사업(事業)을 이룬 후에 얼굴을 기린각(麒麟閣)에 빛내고 이름을 후세에 기림이 대장부의 쾌사(快事)라. 옛 사람이 이르대 왕후장상이 영조하냐(王侯將相寧有種乎) 하였으니 그 뉘를 두고 예 이른 말인고.”

하며 탄식 왈,

“옛날 갈관박(褐寬博)같은 몹쓸 놈도 부형을 부형이라 불렀거늘, 나는 무슨 죄로 부형이라 못하는고.”

하며, 인하여 강개(慷慨)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을 빼어 들고 달빛을 좇아 검무(劍舞) 희롱(戱弄)하더니, 이 때에 대감이 추월(秋月)의 명랑함을 사랑하여 창을 열치고 월색(月色)을 구경하다가 길동이 제 방에서 나와 배회(徘徊)하며 칼춤 춤을 보시고 대왈(對曰),

“저 아이 심야(深夜)에 무슨 좋은 일이 있는고?”

시동(侍童)을 명하여 부르시거늘, 길동이 즉시 칼을 빼어 가지고 대감 전에 나아가 절하여 뵈오니, 대감이 가로대,

“밤이 심히 깊었거늘 무슨 좋은 일이 있어 월하(月下)에 노느냐?”

길동 부복(俯伏) 대왈,

“소인(小人) 좋은 일 있사와 배회하기로소이다.”

대감이 다시 문왈(問曰),

“네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길동이 공경(恭敬) 대왈,

“하늘이 만물을 내심에 오직 사람이 귀(貴)하다 하니, 소인은 대감의 정기(精氣)를 입사와 사람이 되었사오니 이만 좋은 일이 없삽고, 그 가운데 남녀유별(男女有別)하니 사람이 아들 낳으면 귀(貴)히 여기시고, 딸을 낳으시면 천(賤)하다 하오니, 소인은 당당한 귀남자(貴男子) 되었사오니 이같이 좋은 일이 없사오나, 평생 설워하나니 부형을 부형이라 못하오니 각골(刻骨) 설워하나이다.”

하고, 인하여 슬피 울거늘, 대감 마음에 긍측(矜惻)하여 왈, ‘십세(十歲) 소아(小兒)가 세상 고락(苦樂)을 짐작(斟酌)하고 항상 서러워하니 만일 제 뜻을 위로하면 마음이 방탕(放蕩)하리라.’ 하며 크게 꾸짖어 왈,

“재상가(宰相家)의 천생(賤生)이 비단 너 뿐이 아니라. 네 어찌 교만(驕慢) 방자(放恣)함이 이 같으뇨. 일후(日後) 이르는 말 듣지 아니하면 내 눈 앞에 용납치 못하리라.”

하신대, 길동이 대감 꾸중을 들음에 다만 눈물만 흘리고 난간(欄干)에 복(伏)하였더니, 식경(食頃) 후(後)에 대감이 물러가라 하시거늘, 길동이 침방(寢房)으로 돌아와 눈물 씼고 모친(母親) 침소(寢所)로 들어가 어미를 붙들고 왈,

“모친은 천생연분(天生緣分)으로 이승의 모자(母子) 되었사오니 구로지은(劬勞之恩)을 생각하니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 남아(男兒) 세상에 나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이현부모(以顯父母)하고, 조상(祖上) 향화(香火)를 빛내 부생모육(父生母育)하신 은혜(恩惠)를 갚을지라. 내 팔자(八字) 무상(無常)하여 망하게 되었다 하고 친척(親戚)이 다 천대(賤待)하니 가슴 가운데 품은 한(恨)을 천지귀신(天地鬼神) 밖에 뉘 알리오. 대장부 어찌 근본만 지키며 후회하오리까? 당당히 조선(朝鮮) 병조판서(兵曹判書) 인수(印綬)를 잡아 상장군(上將軍)이 못되올지언정 차라리 모친을 이별하고 몸을 산림(山林)에 부쳐 부운유수(浮雲流水)같이 세월을 보내려 하니, 모친은 십이세 유지 평안할지라고2, 바라옵건대 모친은 구구(區區)한 사정(私情)을 유념(留念)치 말으시고 일신(一身)을 안녕(安寧)하와 남에게 잡힘을 없게 하고 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소서.”

언파(言罷)에 눈물이 비 오는 듯하거늘, 그 어미 대경(大驚) 왈,

“재상가(宰相家) 비단 너뿐 아니라. 무슨 사곡(邪曲)한 말을 하여 네 어미 간장(肝腸)을 썪이느냐. 장래 장성하면 대감의 처단(處斷)이 있을 것이니, 너 어미 낯을 보아 천대를 서러워 말라.”

한데, 길동이 대왈,

“부형의 천대는 고사하고, 일가(一家) 노복(奴僕)과 다른 사람이 아무 집 서얼(庶孼)이라 지목(指目)하니 생각할수록 골수(骨髓)할지라. 옛날 장취의 아들 길산이라 하는 자도 또한 천첩소생(賤妾所生)이라. 십삼 세에 그 어미를 이별하고 무덤산에 들어가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하되 그 사람 알 리 없사오니, 소자 마땅히 이를 효칙(效則)하여 몸을 세상에 빼어나려 하오니, 복망(伏望) 모친(母親)은 자식이 있다 말으시고 세월을 보내시면 일후 모자지정(母子之情)을 이룰 날이 있사오리다. 근간(近間)의 곡산모(谷山母)의 행색(行色)을 보온대 대감께 총(寵)을 얻어 우리 모자 보기를 가시같이 하오니 장차 오래지 아니하여서 대환(大患)이 목전(目前)에 미칠지라. 소자 집을 떠날지라도 모친의 신상(身上)에는 소인(小人)의 독수(毒手)를 미치게 않을 것이니 모친은 불효자를 생각지 말으시고 스스로 어진 사람이 되어 환(患)을 자취(自取)치 마옵소서.”

하거늘, 그 어미 가로대,

“네 말이 유리(有理)하나 곡산모(谷山母)는 인후(仁厚)한 여자라. 어찌 그리 요악(妖惡)하리오?”

길동이 왈,

“세상 인심을 가히 측량치 못하려니와 소자(小子) 말씀을 헛되이 생각지 말으시고 장래를 보옵소서.”

그 어미 길동의 말을 듣고 비회(悲懷)를 이기지 못하여 서로 위로하더라.

원래 곡산모(谷山母)는 곡산(谷山) 기생(妓生)이라. 대감이 시첩(侍妾)을 삼아 총애(寵愛)하더라. 주옥취잠(珠玉翠簪)은 아니 가진 것이 없음에 마음이 방자(放恣)하고 뜻이 교만(驕慢)하여, 가상하(家上下)에 혹 불합(不合)한 일이 있을시면, 한 번 참소(讒訴)에 생경지폐(生梗之弊)가 나는지라. 이러한고로 남이 천(賤)히 되면 좋게 여기고, 귀(貴)히 되면 시기(猜忌)하더라. 대감이 용몽(龍夢)을 얻어 길동을 낳으심에, 인물이 비범하고 풍채(風采) 탈속(脫俗)하여 영웅의 기상이라 칭찬하고 사랑하심을 보고, 그로 말미암아 총(寵)을 춘섬에게 앗기올까 앙앙(怏怏)하던 차에 대감이 가로대,

“너도 이 같은 아들을 낳아 말년(末年)의 영화(榮華)를 보이게 하라.”

하더라. 곡산집이 슬하(膝下)에 일점(一點) 혈육(血肉)이 없어 가장 무료(無聊)하더라.

길동이 점점 자라남에 가중(家中) 상하(上下)의 기리는 소리 전파(傳播)하니, 지혜(智慧) 흩어 요악(妖惡)한 무녀(巫女) 상자(相者)를 체결(締結)하여 길동을 해(害)하라 하니, 무녀(巫女) 상자(相者) 등 날마다 왕래하며 계교(計巧)를 장(壯)할새, 초란이 가로대,

“저 아이를 없이하여 나의 일생이 편케되면 그대 등의 공을 갚으리라.”

하니 무녀 상자 등이 재물을 탐(貪)하여 사생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희왈(喜曰),

“대감이 본디 충효(忠孝)하신 군자(君子)라. 나라를 위하여 집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니, 이제 홍화문 밖에 일위(一位)1인을 청하(8)여 후히 대접하여 약속(約束)을 정하고 대감 전(前)에 고하면 길동의 상(相)을 알 것이니, 이 때를 당하여 응변(應變)으로 여차여차(如此如此)하오면 가히 대사(大事)를 이루리다.”

하거늘, 초란이 대희(大喜)하여 가로대,

“그 계교 가장 신묘(神妙)하다.”

하고, 즉시 은자(銀子) 오십 냥(五十兩)을 주어 보내니, 무녀(巫女) 하직하고 돌아가 동심(同心)하여 상자(相者)의 집에 가 이르대, 지금 홍승상 댁 시첩(侍妾) 초란이 하던 말을 설화(說話)하고 은자(銀子)를 뵈인대, 소인(小人)의 욕심이 재물을 보면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는지라. 즉시 무녀를 따라 홍승상 댁에 이르니 초란이 대희(大喜)하여 초면지예(初面之禮)를 행하고 주찬(酒饌)을 내어 대접하며 저의 전후(前後) 소원을 이르대, 상자(相者) 흔연(欣然)히 허락하고 돌아가니라.

이튿날 대감이 부인으로 더불어 길동을 칭찬 왈,

“길동은 헌연(軒然)한 사람이라. 장래 큰 사람이 되려니와 다만 천생(賤生)됨을 한(恨)하노라.”

하신대, 부인이 정히 대답코자 하시더니 문득 일위(一位) 여자 의표(儀表) 비상(非常)해 보이는데 밖에서 들어와 당하(堂下)에 재배(再拜) 아뢰거늘, 대감이 가로대,

“그대 어떠한 사람으로 무슨 사고(事故) 있어 왔느뇨?”

그 여자 답왈(答曰),

“소첩(小妾)은 홍화문 밖에 사옵더니, 팔자(八字) 기박(奇薄)하여 천지(天地)를 집을 삼고 두루 사방으로 하여 다니옵더니, 한 신(神)을 만나 관형찰색(觀形察色)하는 법(法)을 전수(傳受)함에 사람을 한 번 살핀 후에 전후(前後) 길흉(吉凶)을 판단하는 고로 재상 댁에 들어(9)와 재주를 시험코자 하나이다.”

하거늘, 부인 그 자태(姿態) 명명(明明)함을 사랑하여 정하(庭下)에 좌(座)를 주고 주찬(酒饌)을 내어 대접한 후에, 대감이 가로대,

“네 상법(相法)이 기이(奇異)타 하니 우리 가중(家中) 인물(人物)을 차례로 의논하여 재주를 시험하라.”

그 여자 심중(心中)에 암희(暗喜)하여 대감부터 상하노소(上下老少)를 한 번 보고 폄논(貶論)하되, 선후(先後) 길흉(吉凶)을 일일이 아뢰대, 대감과 부인이 칭찬을 마지 아니하시고 길동을 가리켜 가로대,

“내 늦게야 아이를 두고 사랑하더니 여자(女子)는 자세히 보아 장래 길흉을 판단하라.”

하신대, 상녀 이윽히 보다가 일어나 절하고 가로대,

“공자(公子)의 상(相)을 보오니 일대(一代) 영웅호걸(英雄豪傑)이라. 원통하다 할손 지체 부족하오니, 아지 못게라, 부인께서 낳으심이 아니로소이다.”

부인은 잠잠하시고 대감이 가로대,

“과연 천첩소생(賤妾所生)이라. 위인(爲人) 출중(出衆)하기로 내 사랑하노라.”

여자 이윽히 보다가 물러앉으며 놀라는 체하고 긍긍(兢兢)하거늘, 대감과 부인 이윽히 분부 왈,

“무슨 부족한 일이 있느냐?”

상녀 주저(躊躇)하다가 대왈,

“소첩(小妾)이 장안(長安) 억만가(億萬家)에 두루 다니며 재상가(宰相家) 귀공자(貴公子)의 상(相)을 많이 보았사온대, 일찍 이런 기이한 얼굴 처음 보오이다. 만일 이런 말씀을 하온즉 대감이 소첩을 죄책(罪責)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부인 가로대,

“그대 상법(相法)이 기이(奇異)하오니 어찌 (0)그릇 봄이 있으리오. 아는대로 이르라.”

그 상녀 좌우 번거함을 불평하는 척하여 이르지 아니하거늘, 대감이 조용히 내당(內堂)에 들어 상녀를 청하여 물으신대, 상녀 그제야 가만히 여쭈오대,

“공자(公子)의 상(相)을 보오니 만고영웅(萬古英雄), 심중(心中)에 천지조화(天地造化)를 품었고, 미간(眉間)에 안채(眼彩) 영롱(玲瓏)하오니 이는 왕자(王者)의 기상(氣像)이라. 이러하므로 바로 아뢰지 못하였나이다. 우리 조선(朝鮮) 소국(小國)이라 왕자의 기상(氣像)이 쓸 데 없삽고, 장성(長成)하여 기골(氣骨)이 활달하오면 장차 멸족지환(滅族之患)을 당하올 것이니 삼가 방어(防禦)하옵소서.”

하거늘, 대감이 듣기를 다함에 말씀을 식경(食頃)이나 못하시다가 이로대,

“이 말 같을진대 크게 놀라운지라. 제 본래 천비소생(賤婢所生)이라. 비록 재주 있으나 왕자 기상이 있은들 용납하리오.”

상녀 소왈(笑曰),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본디 씨 없다 하니 그러할까 하나이다.”

대감이 탄식하고 은자(銀子) 백 냥(百兩)을 주어 왈,

“이 일은 나의 처단(處斷)이 있으니 너는 돌아가 누설(漏泄)치 말라. 만일 누설하면 죽기를 면치 못할 것이니 삼가 조심하라.”

상녀 고두사례(叩頭謝禮)하고 돌아가니라.

대감 이 말로 좇아 길동이를 동작(動作)을 살피며 글을 읽히되, 충효겸전(忠孝兼全) 찬(讚)하고 왕망(王莽) 동탁(董卓) 류()는 천추(千秋) 난신적자(亂臣賊子)라 가히 본받지 못하게 하고, 쓸데 없는 자식이라하여 천대(賤待) 자심(滋甚)하거늘, 길동이 평생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후원(後園) 심당(深堂)에 재주를 감추고 밤낮으로 손오병서(孫吳兵書)와 육도삼략(六韜三略)이며 천문지리(天文地理)를 익히더니, 수월(數月)이 지내매 일일은 대감이 탐지(探知)하고 더욱 근심하여 가로대,

“이 아이 장래 큰 이름을 얻으면 내외(內外) 복경(福慶)이려니와, 만일 범람(氾濫)하여 두 마음을 품으면 우리 세대(世代)로 갈충보국(竭忠報國)하던 충효(忠孝)를 일조(一朝)에 저버리고 멸문지환(滅門之患)을 면치 못할 것이니, 차라리 저를 없이하여 일가(一家)를 보존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일가(一家) 문중(門中)을 모아 차사(此事)를 구하고 아이를 죽여 환(患)을 없게하리라 하시더라.

이 때 무녀(巫女) 상자(相者)로 하여금 대감이 천륜지정의(天倫之情誼)를 의심케 하고, 한 특재라 하는 자객(刺客)을 청하여 천금(千金)을 주고 정을 맺어 길동을 해(害)하라 하더라.

일일은 초란이 대감께 고왈(告曰),

“첩(妾)이 듣사오니 관상녀(觀相女) 길동을 보고 왕기(王氣) 있다하니, 이는 일가(一家)의 큰 복경(福慶)이로소이다.”

대감이 대성(大聲) 왈,

  • “이 말이 중대(重大)함을 어찌 이런 말을 구두(口頭)에 올려 환(患)을 자취(自取)코저 하느냐?”

초란이 염용(斂容) 대왈,

“옛 말씀에 이르대 ‘낮 말씀은 새가 듯삽고 밤 말씀은 쥐가 듣는다’하니, 만일 불행(不幸)하여 이 말씀이 조정(朝廷)에 미치면 집을 보존치 못하올 것이니, 첩(妾)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저를 일찍 죽여 후의 뉘우침을 없게 하옵소서.”

대감이 눈썹을 찡그리고 가로대,

“도시(都是) 나의 팔자(八字)이니 너희 등(等)은 수구(守口)하라.”

엄명(嚴命)하시니 초란이 황공(惶恐)하여 다시 참소(讒訴)치 못하더라.

대감이 이 일로 마음이 주야(晝夜) 위구(危懼)하나 부자지정(父子之情)을 측은히 여겨 후원(後園)의 수간(數間) 별당(別堂)을 소쇄(掃灑)하고 길동을 있게 하니, 초란은 사람 신(身)을 불평(不平)케 한고로 길동 한(恨)이 골수(骨髓)에 박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안(書案)을 의지하여 주역(周易) 육십사괘(六十四卦)며 음양조화(陰陽造化) 천문둔갑(天文遁甲)을 모를 것이 없는지라. 대감이 길동의 탈속(脫俗) 비범(非凡)한 줄을 알으시나 상녀(相女)의 말을 들으심에 자연 마음이 변하여 가로대,

“우리 세대(世代) 충심(忠心)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거늘, 만일 길동으로 말미암아 누항(陋巷)에 떨어지면 욕(辱)을 먹고, 대화(大禍) 삼족(三族)에 이를 것이며, 또한 저를 죽이여 후환(後患)을 면(免)코자 하나 부자지정의(父子之情誼)에 차마 못할 바라.”

하시고 심사(心思) 자연 불평(不平)하나, 자식을 불쌍히 하고 침식(寢食)이 불안하여 기부(肌膚) 수척(瘦瘠)하고 혜옴 환난(患難)하여 길동으로 말미암아 병이 점점 침중(沈重)하시니3, 가만히 길동을 죽여서 대감의 마음을 위로하시면 좋을까 하고, 또 계교 없음을 한탄하더라. 초란이 부인께 고왈(告曰),

“대감 병환이 위중(危重)하심은 일전(日前) 상녀(相女)의 말을 좇아 길동을 두고자 하온즉 일후(日後) 대환(大患)을 염려하시고, 죽이고자 하온즉 인정에 차마 못하여 유예미결(猶豫未決)하시니, 비록 박절(迫切)하오나 사잔(死殘)하옵고 이 연유를 고하오면 병환이 잠깐 차도(差度)있을까 하노라 하나이다.”

부인이 가로대,

“네 말이 유리(有理)하나, 길동 죽일 계교 없어 민망(憫惘)하도다.”

초란이 암희(暗喜)하여 왈,

“첩(妾)이 들으니 홍화문 밖에 특자라 하는 자객(刺客) 있으되 용력(勇力)이 과인(過人)하여 나는 제비를 잡는 재주라 하오니, 이 사람을 불러 천금(千金)을 주시고 밤을 타 들어가 길동을 죽이면 좋을까 하나이다.”

하시거늘, 부인과 길현이 눈물을 흘리며 가로대,

“이는 인정(人情)에 차마 못할 바라. 그러하오나 첫째는 나라를 위함이요, 둘째는 대감을 위하옴이니, 아무리 박절한들 설마 어찌 하리오. 밤에 계교를 행하라.”

한대, 초란이 암희(暗喜)하여 제 방으로 와 특자를 청하여 술을 권하며 후사(後事)를 설화(說話)하며 왈,

“이는 부인과 장자(長子)의 명(命)이니, 금야(今夜)에 들어가 저를 죽이되 흔적이 없이하여 공(功)을 이루어 후환(後患) 없게 하면 천금(千金)을 상사(賞賜)하리라.”

하고 은자(銀子) 백 냥(百兩)을 주니 특자 대희(大喜)하며 은자를 받고 왈,

“이 놈은 황구소아(黃口小兒)니라.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

하고, 밤을 기다려 죽이려 하더라.

이 때 초란이 특자를 보내고 내당에 들어가 부인께 고한대, 부인이 탄식 왈,

“내 저를 미워 죽임이 아니라, 사세 난처하여 마지 못하여 행하였거니와 어찌 자손(子孫)에 재앙(災殃)이 없으리오.”

길현이 답왈(答曰),

“일이 이미 당함에 후회막급(後悔莫及)이로소이다.”

하고,

“제 신체(身體)는 금백(金帛)으로 명정(銘旌)하고 제 어미는 후히 대접하면 대감 병환이 자연 회춘(回春)할테니 복망(伏望) 모친은 관위(寬慰)하옵소서.”

부인이 종야(終夜)토록 번민(煩悶)하니 잠을 이루지 못하더라.

각설. 이때 길동이 고요한 별당(別堂)에 앉아 등촉(燈燭)을 밝히고 주역(周易)을 잠심(潛心)하더니 야색(夜色)은 삼경(三更)이라. 서안(書案)을 밀치고 정히 취침코져 하더니, 문득 창 밖에서 까마귀 세 번 울고 가거늘, 길동이 놀라 가로대,

“저 짐승은 본디 사람에게 고(告)하는 바라. 이제 남(南)으로부터 북(北)으로 가며 우는 소리 심히 괴이(怪異)하나 글자로 해득(解得)하리라.”

하고 생각하되, ‘까마귀 곡곡 세 번 울고가니 자객(刺客)이라.’ 하는 글이 있으니, 이는 다른 사람 칼로 찌를 괘(卦)라. 심중(心中)에 내념(內念)하고 가로대, ‘어떠한 흉인(兇人)이 나를 해(害)하려 하는가.’ 소매 안으로 한 괘(卦)를 얻으니 선흉후길지상(先凶後吉之相)이라. ‘아무러나 방신지계(防身之計)를 행하리라.’ 하고, 방중(房中) 사진(四陣)을 벌리고 그 방위(方位)를 바꾸어 남방(南方) 이허중(离虛中) 괘(卦)는 북방(北方)으로 옮기고, 북방(北方) 감중련(坎中連)은 남방(南方)에 붙이고, 동방(東方) 진하련(震下連)은 서방(西方)에 옮기고, 서방(西方) 태상절(兌上絶)은 동방(東方)에 붙이고, 건방(乾方) 건괘(乾卦)는 손방(巽方)에 옮기고 손방(巽方) 괘(卦)는 곤방(坤方)에 옮기고, 곤방(坤方) 곤괘(坤卦)는 간방(艮方)에 옮기고서라. 동서남북(東西南北)을 각 방위를 바꾸어 육정육갑(六丁六甲)을 가운데 두고 때를 기다리더라. 이는 둔갑장신(遁甲藏身)하는 비계(秘計)라.

이 때 특자 비수를 옆에 끼고 후원 담을 넘어 길동거처하는 초당(草堂) 난간(欄干) 앞에 이르러 보니, 사창(紗窓)의 촉영(燭影) 희미하고 인적이 고요하거늘, 잠을 들면 죽이고저 하더니 문득 까마귀 남(南)으로 좇아 창 앞으로 지나가며 슬피 울거늘, 특자 마음에 대경(大驚)하여 가로대,

“이 짐승이 고요 깊은 밤에 슬피 우니 길동은 필연 범상(凡常)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하는고. 만일 지음(知音)하고 미리 방비하면 대사(大事) 그릇되리로다. 그러하나 제 십 세(十歲) 소아(小兒)라. 무슨 의심이 있으리오.”

하고, 몸을 날려 초당 처마에 붙어 방중(房中)을 살펴보니, 일개 선동(仙童)이 책상을 의지하여 팔괘(八卦)를 희롱하며 진언(眞言)을 염송(念誦)하니 문득 음풍(陰風)이 심하며 정신이 산란(散亂)한지라. 특자 괴히 여겨 칼을 더욱 굳게 잡고 탄식 왈,

“내 전일(前日)에 대사(大事)를 당하여도 두려워함이 없더니 그 날 밤을 당함에4

마음이 울울(鬱鬱)하여 돌아가고자 하다가 다시 생각하되, ‘내 세상에 나매 사해(四海) 팔방(八方)을 두루 편답(遍踏)하되 한 번 실수함이 없었거늘, 어찌 조그만 유생(幼生)을 두려워하여 일생 재주를 돌아보지 아니하리오.’ 하고, 손에 비수(匕首)를 들고 언연(偃然)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길동은 간 데 없고 일진음풍(一陣陰風) 일어나며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진동(天地震動)하더니, 홀연(忽然) 방중(房中)이 변하여 망망광야(茫茫廣野) 되어 무수한 돌무더기 층층첩첩(層層疊疊)하여 살기충천(殺氣衝天)한데, 청산(靑山)은 암암(巖巖)하고 녹수(綠水)는 잔잔(潺潺)하여 물소리 쟁쟁(錚錚)하거늘, 특자 정신을 수습치 못하여 생각하되, ‘내 아까 길동을 해하려 하고 방중에 들어왔더니 어떤 연고로 첩첩산곡(疊疊山谷)이 되었는고.’ 몸을 돌려 피하고자 하다가, 아무데로 갈 바를 몰라 동서(東西)를 분별치 못하여 시냇물 가에 앉아 탄식 왈,

“내 남을 경(輕)히 생각하다가 대환(大患)을 자취(自取)하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

하며, 비수를 품에 감추고 시냇물을 좇아 한 곳에 이르니, 길이 끊어지고 층암절벽(層岩絶壁)은 반공(半空)에 달렸으니, 진퇴유곡(進退維谷)하여 바위 밑에 앉아 사면을 살피더니, 문득 청아(淸雅)한 옥저(玉笛)소리 동편(東便)에 들리거늘, 괴이하여 눈을 들어보니 일위(一位) 소년이 청포옥대(靑袍玉帶)에 나귀를 타고 옥저(玉笛)를 불며 오거늘, 특자 몸을 피코자 하더니, 그 소년이 옥저를 그치고 특자를 향하여 가로대,

“이 무식한 필부(匹夫) 놈아. 나의 훈계(訓戒)를 들으라. 성인(聖人)이 이르시되 나무를 깎아 사람을 만들어 죽여도 죄악(罪惡)이라 죄벌(罪罰)이 있거늘, 하물며 너는 일개 필부 놈으로 용력을 믿고 재물을 탐(貪)하여 사람을 해코자 밤 야삼경(夜三更)에 비수를 들고 언연(偃然)히 들어오니 내 비록 삼척소아(三尺小兒)나 어찌 너 같은 놈에게 몸을 바치리오. 옛날 초패왕(楚覇王)의 용력(勇力)으로도 오강(烏江) 언월(偃月)에 자문(自刎)했다 하고, 형경(荊卿)의 날랜 칼도 쓸 곳이 전혀 없어 역수(易水)에 울었거늘, 네 오늘날 어찌 환(患)을 얻지 않으리오.”

하거늘, 특자 황망(慌忙)히 살펴보니 이는 곧 길동이라. 생각하되, ‘내 길동을 취(取)하려 하고 이에 왔더니 일이 낭패(狼狽)되었으나 대장부(大丈夫) 영사(寧死)언정 어찌 삼척소아(三尺小兒)에게 굴복하리오.’ 하고 고성대질(高聲大叱) 왈,

“내 힘을 다하여 검술을 배워 천하에 당할 리 없건만은 이제 네 부형의 명(命)을 받아 너를 죽여 일가(一家)의 환(患)을 없게 하라 함에 내가 왔으니 나를 해(害)치 말라.”

하고, 언파(言罷)에 칼춤 추며 달려들거늘, 길동이 대로(大怒)하여 즉시 죽이고자 하나 손에 척촌지검(尺寸之劍)이 없는지라. 몸을 날려 공중에 올라 풍백(風伯)을 부리니, 이윽하여 음풍(陰風)이 일어나며 궂은 비는 박으로 담아 뿌리거늘, 사석(沙石)이 날려 특자 눈을 뜨지 못하거늘, 특자 바위를 의지하여 길동의 재주를 탄복하며 정히 도망코자 한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대성통곡(大聲痛哭) 왈,

“내 재물을 탐(貪)하여 불의지사(不義之事)를 행하다가 하늘이 밉게 여기사 대환(大患)을 목전(目前)에 당하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 다만 원통한 바는 관상녀(觀相女) 꾀에 속았도다.”

하고 탄식을 마지 아니하더니, 길동이 공중에서 내려와 바위(8)에 앉으며 꾸짖어 왈,

“내 너와 더불어 원수지은 바 없거늘 무슨 혐의로 나를 해(害)하려 하는가.”

하거늘, 특자 그역편하여5 복지(伏地) 애걸 왈,

“나는 이렇듯 할 뿐 소인의 죄 뿐 아니요, 상공댁(相公宅) 초란이와 관상녀(觀相女) 대감께 여차여차(如此如此) 참소(讒訴)하옵고, 소인을 시켜 공자를 죽여 후환(後患) 없게 하면 금은(金銀)을 많이 주마 하옵기로 재물을 탐(貪)하여 이리 왔삽더니 명천(明天)이 공자를 도우사 성(成)치 못하옵고 죄를 범(犯)하였사오니, 바라건대 공자는 명(命)을 보존케 하옵소서.”

하고 애걸하거늘, 길동이 이 말을 들음에 분기충천(憤氣衝天)하여 특자의 가진 칼을 앗아 손에 들고 대질(大叱) 왈,

“네 재물을 탐하여 사람 죽이기를 일삼으니 너를 두면 일후(日後)에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일 것이니, 너 같은 놈을 어찌 일시(一時)인들 살려 두리오.”

하고, 언파(言罷)에 검광(劍光)이 번득하며 특자의 머리 방중에 내려지는지라.

길동이 칼을 들고 밖에 나와보니 은하수는 서(西)로 기울어지고 희미한 달빛은 몽롱(朦朧)하여 수회(愁懷)를 돕는지라. 바로 관상녀의 집에 이르러 풍백(風伯)을 불러 관상녀를 잡아다가 특자를 죽인 방에 던지고 크게 꾸짖어 왈,

“네 나를 아느냐? 난 홍승상 댁 서공자(庶公子)라. 너와 더불어 원수 지은 바 없거늘, 무슨 혐의로 대감께 참소하여 부자지정(父子之情)을 끊(9)게 하니 너를 어찌 살려두리오.”

하거늘, 상녀(相女) 정신을 차려보니 길동이 칼을 들고 꾸짖거늘, 상녀 애걸 왈,

“이 일이 다 초란이의 모함이니 비단 첩의 죄(罪)뿐 아니오. 복원(伏願) 공자는 용서하옵소서.”

하거늘, 길동이 대책(大責) 왈,

“초란은 대감지첩(大監之妾)이요, 내 의모(義母)라. 차마 죽이지 못하려니와, 너는 일개(一介) 요물(妖物) 인명(人命)을 살해코자 하니 아무리 살리고자 한들 어찌 살리리오.”

하고, 언파(言罷)에 칼을 날려 베더라.

각설. 길동 특자와 관상녀를 베고 분기충천(憤氣衝天)하여 바로 들어가 초란을 죽이고자 하다가 다시 생각하되, ‘영인부아(寧人負我)언정 무아부인(毋我負人)이로다.’ 하고, ‘차라리 망명도주(亡命逃走)하여 사절인사(謝絶人事)하고 몸을 산림(山林)에 부쳐 부운유수(浮雲流水) 같은 세월을 보냄이 옳다.’ 하고, 바로 대감 침소(寢所)에 들어가 하직을 하고 집을 떠나려 하더니, 이 때 대감이 기침(起寢)하여 창 밖에 인적(人跡) 있음을 보고 놀래어 창 틈으로 엿보니, 길동 계하(階下)에 복지(伏地)하였거늘, 대감이 괴히 여겨 문왈,

“네 이제 밤이 깊었거늘 어이 자지 아니하고 무슨 일로 와서 우느냐?”

길동이 일장통곡(一場慟哭)하고 여쭈오대,

“소동(小童)이 대감의 정기(精氣)를 입사와 사람이 되었삽기로 망극지은(罔極之恩)을 만분지일(萬分之一)이나 갚사올까 바라옵더니, 집안에 불초자(不肖者)가 와 대감께 참소하여 무죄한 사람을 해코자 하다가 성사(成事)치 못(0)하옵고 금일(今日)의 차변(此變)이 난지라. 다행히 잔명(殘命)을 보존하였사오나 필경(畢竟)은 명(命)을 도모(圖謨)치 못하올지라. 사세(事勢) 난처하옵기로 마지 못하여 목숨을 도망하와 집을 떠나려 하오니 부형을 다시 보올 날이 망연(茫然)한지라. 이제 대감 안전(眼前)에 하직하옵나이다. 어느날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 갚사오리까? 복걸(伏乞) 대감은 지체를 보존하옵소서.”

하고 눈물을 흘리거늘, 대감이 대경(大驚) 왈,

“네 무슨 일로 집을 버리고 내 영(令) 없이 어디를 가려 하느냐?”

길동이 대왈,

“명일(明日)에 여쭈올 이가 있사오리다. 불효자 길동을 유념(留念)치 말으시고 가사(家事)를 선치(善治)하옵소서.”

대감이 생각하되, 길동은 범류(凡類)한 아이 아니라 아무리 만류(挽留)하여도 듣지 아니할 줄 짐작하고 위로 왈,

“네 집을 떠나면 어디로 가려 하느냐?”

길동이 답(答) 고왈(告曰),

“신세 부운(浮雲) 같사오니 어찌 거처(居處)를 정하리까?”

대감 침음양구(沈吟良久)에 왈,

“너는 나의 기출(己出)이니 사방(四方)으로 주유(周遊)할지라도 범람(氾濫)한 마음을 두지 말고 가중(家中)의 대환(大患)을 끼치지 말지어다. 다만 대환(大患)을 있게 하면 죽기를 면치 못하리라.”

하신대, 길동이 재배(再拜) 왈,

“소자(小子) 심중(心中)에 철천지원(徹天之寃)이 있사오니, 소자의 나이 십 세 되도록 부형을 부형이라 부르지 못하오니 원(寃)이 골수(骨髓)에 맺혔는지라.”

하고, 통곡하거늘 대감이 재삼(再三) 위로 왈,

“오늘부터 네 원(寃)을 풀어주는 것이니 홍씨공자(洪氏公子)는 하여 몸에 환(患)을 미치게 말라.”

하고, 손을 잡고 무한(無限) 한탄(恨歎)하시거늘, 길동이 유체(流涕) 왈,

“아버님은 천한 자식을 생각지 말으시고 혈혈(孑孑)한 어미를 긍측(矜惻)히 여기사 박대(薄待) 말으시고.”

대감이 흔연(欣然)히 허락하시고 악수(握手) 생별(生別)하니 어린 아이 모자(母子) 이별함 같더라. 길동이 다시 절하고 왈,

“평생 골수에 맺힌 원을 오늘날 해원(解寃)하오니 석사(夕死)라도 무한(無恨)이로소이다. 복걸(伏乞) 아버님은 만세무강(萬世無彊)하옵소서.”

하고 언파(言罷)에 몸을 일어 나가거늘, 대감이 측은히 여기나 무슨 연고(緣故) 줄을 아지 못하여 마음 불안하시더라. 길동이 그 어미 침소(寢所)에 들어가 이별을 하여 왈,

“소자(小子) 금일(今日)에 망명도주(亡命逃走)하와 천 리 길 관산(關山)으로 가려하오니, 바라옵건대 모친은 불효자 길동을 생각지 말으시고 지체를 보존하와 소자 돌아오기를 기다리소서.”

그 어미 길동의 손을 잡고 유체(流涕) 왈,

“아이야, 문 밖에 한 번 나면 기약(期約) 못할 것이니 모자 상봉이 망연(茫然)한지라. 오늘날 외로운 정을 생각하여 수히 수히 돌아와 반가옵게 하여라.”

길동이 두 번 절하고 하직하니, 모자붙들고 목이 메어 말을 못하다가 눈물을 거두고 나오니, 달은 서산(西山)에 기울어지고 금계(金鷄)는 새벽을 고하니 강개(慷慨)함을 이기지 못하는지라. 길동이 슬픔을 머금고 문 밖에 나오니, 운산(雲山)은 첩첩(疊疊)하고 해수(海水)는 양양(洋洋)하여 그지 없는 해안(海岸)이 광대(廣大)하여 소식이 망망(茫茫)하다. 아지 못게라. 생(生)이 어찌 이리 될 줄 알리오.

각설. 초란이 자객(刺客)을 보내고 날이 밝도록 기다리니 그리 소식이 없는지라. 괴히 여겨 사람으로 탐지(探知)하니, 길동은 간 데 없고 자객 신체(身體) 목 없이 방중에 있고 또 관상녀(觀相女)의 신체(身體) 있거늘, 대경(大驚)하여 들어가 고하니, 초란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급히 내당(內堂)에 들어가 부인께 고(告)한대, 혼불부신(魂不附身)함에 길현을 불러 길동을 찾으라 하신대, 길현이 대경(大驚)하여 두루 방문(訪問)하되 종적(蹤迹)이 없는지라. 악연(愕然)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감께 고왈(告曰),

“길동이 밤에 사람을 죽이고 망명도주(亡命逃走)하였나이다.”

대감이 대경(大驚) 왈,

“그 아이 이별을 하매 괴히 알았더니 사고(事故) 있도다.”

하시거늘, 길현이 감(敢)히 은휘(隱諱)치 못하여 바로 고하여 왈,

“야야(爺爺) 길동으로 말미암아 심회(心懷) 불평(不平)하사 병환이 나 위중(危重)하시기로 초란 명(命)하여 독약(毒藥) 써 사사(賜死)하옵고 대감께 고하렸삽더니, 초란이 망령(妄靈)되게 자객을 보내여 해(害)코저 하다가 성사(成事)치 못하였사오니 도리어 길동의 해(害)를 입사온가 하나이다.”

대감 노(怒)한대,

“저런 소견으로 어찌 조정(朝廷)에 참예(參預)하리오.”

하시고,

“초란을 베어 후환(後患)을 덜리라.”

하고, 하인을 분부하여 가로대 두 신체(身體)를 치우고, 엄히 분부하여 가로대,

“너 차후(此後) 만일 이 일을 누설(漏泄)하면 죽기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초란을 죽이려 하시다 생각하되, ‘일즉 길동을 무양(無恙)코저 하여 차(此)일을 발설(發說)하면 좋지 못할 것이오, 타인(他人) 알면 살인지죄(殺人之罪)를 면치 못하리라.’ 하시고 가만히 멀리 구축(驅逐)하여 자취를 없게 하리라 하시더라.

각설 홍화문 밖에 있는 관상녀(觀相女)의 부모 여식(女息)을 잃고 사방으로 찾되 종적이 없노라. 동네 사람들이 이르되, 풍운(風雲)에 싸여 승천(昇天)하였다 하더라.

차설(此說). 길동이 한번 문 밖에 남에 일신(一身)이 표박(漂泊)하여 사해(四海)로 집을 삼고 세월을 보내더니, 일일은 한 곳에 이르니 산천(山川)은 명랑(明朗)하고 경개(景槪) 절승(絶勝)한지라. 길동이 태산(泰山) 험로(險路)로 좇아 들어가며 좌우(左右) 산천(山川)을 살펴보니, 층암절벽(層岩絶壁)은 반공(半空)에 달려있고 산수(山水)는 잔잔(潺潺)하고 청송녹수(靑松綠樹) 울창(鬱蒼)한데 기화요초(琪花瑤草)는 객(客)을 보고 길을 인도(引導)하는 듯 하거늘, 풍경(風景)을 탐(貪)하여 점점 들어가니 석양(夕陽)은 장령(藏嶺)하고 숙조(宿鳥) 투림(投林)이라. 도로 나가고자 하나 길이 끊어지고 더 가고자 하나 돌아갈 길이 없는지라. 진퇴유곡(進退維谷)하더니 난데없는 표주(瓢舟) 물 위에 떠오거늘 심중(心中)에 대희(大喜)하여 왈,

“이 심산벽계(深山碧溪)에 어찌 배가 있는고? 반드시 절이 있도다.”

하고 시내를 좇아 들어가니, 평원광야(平原廣野)한대 일망무제(一望無際), 산천(山川)은 명랑(明朗)하고 지형(地形)도 평탄(平坦)한대, 백여(百餘) 대촌(大村)이 즐비(櫛比)하고 그 가운데 고루거각(高樓巨閣) 있거늘, 그 집을 향하고 들어가니 마침 천여(千餘) 원(員) 사람이 들어오는지라. 대연(大宴)을 배설(排設)하고 공론(公論) 분분(紛紛)하거늘, 길동이 좌말(座末)에 나가 공론을 들으니, 원래 이 촌중(村中)은 도적(盜賊)의 굴혈(窟穴)이라. 서로 행수(行首)를 정(定)치 못하여 공론이 분분(紛紛)하거늘, 길동이 생각하되, ‘내 망명도주(亡命逃走)하여 의탁(依託) 무처(無處)하더니 오늘날 하늘이 도우심이라. 영웅(英雄)의 기(氣)를 펴게 함이라. 어찌 다행치 아니하리오.’ 하고, 언연(偃然)히 좌우(左右) 말(末)에 나아가 예(禮)를 전하고 가로대,

“나는 서울 홍화문 밖에 사는 홍승상댁 천첩소생(賤妾所生)이더니, 내 가중(家中)의 천대(賤待)를 피하여 사해(四海)로 집을 삼고 정처 없이 다니더니, 오늘날 하늘이 도우시고 귀신(鬼神)이 지시(指示)하시어 이 곳에 이르니, 내 비록 재주 없으나 모든 호걸(豪傑)의 으뜸 장수(將帥) 되어 사생고락(死生苦樂)을 한가지로 함이 어떠하뇨?”

하거늘, 모든 도적들이 술이 대취하여 공론이 분분하다가 난데없는 총각 아이 들어와 행수(行首) 자청(自請)함을 보고 하졸(下卒)을 불러 내치라 하니, 하졸이 일시에 달려들어 끌어내치며,

“우리 영웅 수천 명이로되 오히려 용력(勇力)이 과(過)하고 지략(智略)이 유여(有餘)한 자(者)가 많거늘, 어찌 너 같은 일개(一介) 소동(小童)으로 행수(行首)를 삼으리오?”

하고 동구(洞口) 밖에 내치거늘, 길동이 할 길 없어 물러나와 나무 깎아 방(榜)을 썼으되,

“용(龍)이 얕은 물에 잠겼으니 고기 새우들이 희롱하고, 범이 깊은 수풀을 잃었음에 여우와 토끼들이 교만하는도다.”

하더라. 이때 하졸 중에6 한 사람이 보고 가로대,

“그 아이를 보니 기골(氣骨)이 웅장(雄壯)할 뿐아니라, 하물며 홍승상의 아들이라 하니 재주를 보아 가히 강약(强弱)을 보고 제 말 맞거든 장수를 정하면 옳도다.”

하고, 하졸을 불러 길동을 청하여 상좌에 앉히고 술을 권하며 왈,

“그대 상(相)을 보니 진실로 영웅이라, 이제 우리 등이 두 가지를 시험코자 하니 그대 당할손가?”

길동이 대희 왈,

“무슨 일인가 하노라?”

하거늘, 제인(諸人)이 가로대,

“하나는 이 앞에 비석이라 하는 돌이 있으되 일천팔백(一千八百) 근수(斤數)라, 그 돌을 들면 가히 용력(勇力)을 알 것이요, 둘째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를 치고 재물을 탈취코자 하되, 그 절 중이 수천 명이요, 재물(財物) 누거만(累巨萬) 냥(兩)이라.”

길동이 대소 왈,

“대장부 세상에 나서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중찰인의(中察人意)하며 하달지리(下達地理)하고 이음양순사시(理陰陽順四時)하여, 나아가며 삼군(三軍)의 대장(大將)이 되어 얼굴을 능연각(凌煙閣)에 붙이고 이름을 죽백(竹帛)에 드리면 대장부 쾌사(快事)라. 내 신수(身數) 불길(不吉)하고 명도(命途) 기박(奇薄)하여 사족(士族)에 참예(參豫)치 못함에 평생의 한한 바라. 어찌 이 두 개를 못하리오.”

하거늘, 중인(衆人)이 다 옳이 여겨 길동을 이끌고 비석 있는 곳에 가니, 길동이 나삼(羅衫)을 걷고 돌을 들고 수십 보를 행하다가 내려 놓되 조금도 신고(辛苦)함이 없거늘, 모든 사람들이 배사(拜謝) 왈,

“장사(壯士)로다. 우리 수천 명이로되 돌 드는 자는 없더니, 오늘날 하늘이 영웅을 내사 행수(行首)를 정(定)케 하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오.”

하고, 인하여 술을 권하며 길동을 상좌에 앉히고 차례로 현신(現身)하며 안책(案冊)을 봉(封)하여 올리거늘, 길동이 군사를 명하여 백마(白馬)를 잡아 먼저 사람이 각각 피를 마시고 종(終)토록 사생(死生)을 동락(同樂)하기로 맹세를 정하고 가로대,

“만일 내 명을 거역하는 자 있으면 죄를 면치 못하리라.”

한대, 모든 군사 일시에 청령(聽令) 왈,

“장군의 영이 지극 마땅하니 죽기로써 봉행(奉行)하오리다.”

하거늘, 길동이 대희(大喜)하여 하졸을 불러 무예(武藝)시키며 마상(馬上) 재주로 바로2 무예(武藝) 십팔기(十八技) 하며 일일(日日) 연습하니, 수월(數月)이 못하여 군용(軍容)을 정제(整齊)하고 위령(威令)을 세우더니, 일일은 하졸을 불러 분부하오대,

“합천 해인사를 치러 가려 하니 만일 내 영을 어기는 자 있으면 군법(軍法)으로 시행(施行)하리다.”

한대, 하졸이 일시에 청령(聽令)하고 물러나는지라. 길동이 노새를 타고 하인 수삼(數三) 인(人)을 거느려 재상가(宰相家) 자제(子弟) 모양으로 선명히 갖추고 나오며 이르대,

“내 해인사를 살피고 올 것이니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고, 청포옥대(靑袍玉帶)에 표연(飄然)히 나오니 완연(宛然)한 재상가의 자제라. 노새를 바삐 몰아 해인사 동구(洞口)에 들어가 일변(一邊) 노문(路文)하였으니,

“경성(京城) 홍승상댁 자제 글 공부하러 왔다.”

하였겠다. 중들이 대희(大喜)하여 가로대,

“우리 절 경상도(慶尙道) 내(內)에 유명한 절이로대 근래(近來) 빈한(貧寒)하였더니, 이제 글공부 하신다 하니 덕(德)이 적지 아니하리로다.”

제승(諸僧)이 일시에 동구 밖에 나와 맞아 절에 들어 합장재배(合掌再拜)하고 왈,

“원로(遠路)에 행차(行次) 평안히 하시니까?”

하거늘, 길동이 정색(正色) 왈,

“내 들으니 너희 절이 경상도 내에 유명한 대찰(大刹)이요, 경물(景物)이 가히 봄직하다 하기로 한 번 보기를 원하더니, 오늘날 공부 왔으니 수월(數月) 유(留)하였다 과거(科擧)를 보려하니, 절에 잡인(雜人)을 엄금(嚴禁)하고 고요한 방을 소쇄(掃灑)하라.”

중들이 고두청령(叩頭聽令)하고 차담(茶啖)을 정히 차려 들이거늘, 길동이 다 먹은 후에 법당(法堂)에 들어가 노승(老僧)을 불러 왈(曰),

“내 인읍(隣邑) 아중(衙中)에 들어가 수삼(數三) 일을 유(留)하고7 올 것이니 부디 잡인(雜人)을 금(禁)하고, 내 명일(明日)에 백미(白米) 삼십 석(石)을 보낼 것이니 금(今) 십오일(十五日)에 밥과 술을 많이 갖추고 나 오기를 기다리라. 너희로 더불어 상하동락(上下同樂)하고 인하여 공부하리라.”

한대, 제승(諸僧)이 합장복례(合掌復禮)하거늘, 길동이 절을 떠나 동구에 돌아오니 모든 군사 맞아 사례하더라. 명일에 백미 삼십 석을 절에 보내 왈,

“(8)홍승상댁 자제께오서 백미를 보내오니 절에 쌓고 상약(相約)한 날에 밥과 술을 갖추어 기다리라.”

하고, 길동이 모든 하졸을 불러 분부 왈,

“내 오늘날 절에 가 여차여차 모든 중을 다 결박하거든 때를 기다려 응명(應命)하라.

하고 한대, 모든 하졸이 일시에 응낙(應諾)하거늘, 길동이 하인 수삼 명을 거느리고 노새를 몰아 해인사에 이르니 제승이 동구 밖에 대후(待候)하였다가 영접하여 절에 들어가거늘, 길동이 노승을 불러 왈,

“거번(去番)에 백미 삼천 석을 보내였더니 밥과 술을 어찌 하였느냐?”

노승이 대왈,

“이미 준비하옵고 상공(相公) 행차(行次) 기다렸나이다.” “내 들으니 너희 절 후면(後面)에 벽계(碧溪) 있으되 대청(大廳)이 넓고 절승(絶勝)하다니, 내 금일에 너희 등으로 더불어 담화(談話)하고 종일 놀고저 하니, 중 하나도 떠나지 말고 다 모이라.”

하거늘, 제승(諸僧)이 어찌 대적(大賊)의 흉계를 알리오. 행여 떠나면 죄벌(罪罰) 있을까 하여 상하노소(上下老少) 없이 다 벽계에 모였는지라. 길동이 제승으로 더불어 좌정(座定)할새, 신반(新飯)을 받들어 올리거늘, 상(床)을 각 받은 후 선반주(先飯酒)를 마시고 차례로 전하더니, 제승이 황공하여 각각 한 잔씩 먹은 후에, 길동이 나삼(羅衫)을 걷고 흔연(欣然)히 밥을 먹더니 두 술이 지남에 모래를 가만히 입에 넣고 밥을 씹으니, 모래 (9)깨어지는 소리에 놀래어 제승이 사죄하고 각각 손을 맺어 사죄하거늘, 길동이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어 왈,

“내 너희로 더불어 승속지예(僧俗之禮)를 버리고 여동락(與同樂)코저 하거늘, 너희 나를 경멸(輕蔑)히 여겨 음식을 부정(不淨)히 하여 주니 어찌 절통(切痛)치 아니하리오.”

언파(言罷) 하인을 불러 분부하되,

“모든 중을 다 결박하라. 내 영문(營門)에 들어가 각별(恪別) 중치(重治)하리라.”

한대, 하졸 등이 일시에 달려들어 결박하거늘, 제승(諸僧)이 비록 의심이 있으나 어찌 양반의 영을 거역하리오 하고, 혼불부신(魂不附身)하여 황공점두(惶恐點頭)할 따름일레라.

이 때 모든 적졸이 동구 밖에 복병(伏兵)하였다가 제승을 결박함을 보고 일시에 달려들어 절을 수탈(收奪)할새 완연(宛然)히 제 것 가져가듯 하였거늘, 제승이 거동을 보고 아무리 잡고자 하나 사지를 동였으니 어찌 요동하리오. 소리만 지를 따름이오. 이렇듯 하여 동구 요란하거늘, 이때 나무하는 중 하나가 절을 지키다가 불의에 대적을 만나 후원 담을 넘어 도망하여 합천 읍중에 들어가 관문(官門)을 두드리며 급히 고하니, 관가(官家)에서 대경(大驚)하여 대강 들은 후 즉시 관졸(官卒)을 보내어 도적을 잡으라 하고 또한 읍중(邑中) 백성을 조발(調發)하여 후응(後應)하라 하니, 장교(將校) 수백(數百) 군(軍)을 거닐어 나오니라.

이 때 모든 적졸이 수(0)다(數多)한 재물 수탈하여 우마(牛馬)에 싣고 정히 돌아가고자 하더니, 멀리 바라보니 일진군마(一陣軍馬) 들어오는데, 기치창검(旗幟槍劍)은 일월(日月)을 희롱(戱弄)하고 고각함성(鼓角喊聲)은 천지진동(天地震動)하거늘, 모든 적졸(賊卒)이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독에 든 쥐 같더라. 적졸 등이 도리어 길동을 원망하거늘, 길동이 대소(大笑) 왈,

“너희 등이 어찌 신기한 나의 계교 알리오? 조금도 겁내지 말고 완완(緩緩)히 동(東)으로 우마(牛馬)를 몰아 큰 길로 가면 관군을 지휘하여 북편(北便) 적은 길로 보내리라.”

하거늘, 하졸이 일시에 내닫거늘, 길동이 법당(法堂)에 들어가 몸에 장삼(長衫)을 입고 머리에 송낙을 쓰고, 동구(洞口) 밖에 나와 높은 데 올라 관군 오는 양(樣) 보고 크게 외쳐 왈,

“도적이 북편 사로전 큰 길로 갔으니 급히 좇아 잡으소서.”

하고, 장삼 소매로 북편 산곡(山谷) 가리키니 관군이 오다가 바라보고 남편 큰 길을 버리고 북편 적은 길로 좇아 가거늘, 길동이 그제야 둔갑(遁甲)하여 동구(洞口)에 돌아오니, 이 때 날이 오시(午時)라 하였거늘, 술과 밥을 갖추어 기다리더니 일락서산(日落西山) 함에 모든 도적이 우마(牛馬)를 몰아 들어와 치하 왈,

“장군의 신기하신 재주는 귀신도 측량 못하리로소이다.”

길동이 대소(大笑) 왈,

“남의 장수되어 이만 재주 없으리오.”

하더라. 모든 적졸이 대연(大宴)을 배설(排設)하고 가져온 재물을 계수(計數)하니, 누거만(累巨萬) 냥(兩)이라. 잔치를 파(罷)하고 인하여 동구(洞口) 별호(別號)를 하여 할미당이라 하고, 팔도(八道)에 다니며 무도(無道)한 자 있으면 재물을 탈취하며 불쌍한 자 있으면 구제하나 성명을 이르지 안하더라.

각설. 이 때 합천 관졸(官卒)이 북편 산을 겹겹이 싸고 수백 리를 추적하되, 도적의 자취 없는지라. 할 길 없거늘 돌아와 사연을 관가에 고한대, 합천 원(員)이 대경(大驚)하여 나라에 장문(狀聞)하되,

“난데없는 도적 수천 명이 백주(白晝) 해인사를 치고 재물을 탈취하여 갔사오나 그 종적을 알지 못하니, 복망(伏望) 왕상(王上)은 살피사 역률(逆律)로 다스려 후폐(後弊) 없이 하심을 천만(千萬) 복망(伏望)하옵나이다.”

하였거늘, 상(上)이 크게 근심하사 팔도(八道)에 행관(行關)하시되,

“도적을 빨리 잡는 자 있으면 천금(千金)을 상사(賞賜)하리라.”

하였더라. 팔도(八道) 방백(方伯)이 행관을 보고 대경(大驚)하여 도적을 잡으려고 하더라.

각설. 이 때 길동이 할미당에 있어 대연을 배설하고 매일 즐기더니 일일은 하졸 등을 불러 의논 왈,

“우리 조선이 비록 적으나 지방(地方)이 천리(千里)요, 곡식이 귀하여 우리 등이 도적이 되었으나 나라 백성이라. 난시(亂時)를 당하면 마땅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몸이 마치도록 임금을 도울 것이로대, 이제 천하태평 국가 무사하니, 우리 각각 산중(山中)에 웅거(雄據)하시고 백성의 재물 취하면 나라 근본을 망케 하는지라. 이는 불의지사(不義之事)라.”

하고,

“여염간(閭閻間)에 작폐(作弊)하는 자 있으면 죽기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가로대,

“나라 진봉(進奉)하는 재물과 상납(上納)하는 재물과 상납(上納)하는 전곡(錢穀)을 탈취하면 언즉(言卽)하되 국적(國賊)이라. 사죄(死罪)를 면치 못할 것이요, 다만 좋은 바는 팔도(八道) 방백(方伯)과 각읍(各邑) 수령(守令)의 준민고택(浚民膏澤)하는 재물을 탈취하여 먹어도 의리에 마땅하고 할미당의 당당한 법(法)이니 제군은 죄를 범치 말라.”

하거늘, 모든 하졸이 일시에 응낙하더라.

수월(數月)이 지남에 길동이 제군더러 의논 왈,

“우리 이제 양식이 없으니 내 함경감영(咸鏡監營)에 들어가 창곡(倉穀)을 탈취하여 올 것이니 그대 등은 위령(違令)을 말라.”

하고,

“내 현덕릉 밖에 시초(柴草)를 쌓고 불을 지를 것이니, 그대 등은 남경문 밖에 복병하였다가 관졸(官卒) 관속(官屬) 백성이 다 문 밖에 나오거든 그 때를 기다려 들어가 창곡(倉穀)과 병기(兵器)를 탈취하라. 백성의 재물은 조금도 해치 말라.”

제졸(諸卒) 청령(聽令)하고 물러나는지라. 길동이 이날 밤 삼경에 현덕릉에 이르러 군사 수십 명을 가려 시초(柴草)를 수운(輸運)하여 능성(陵城) 해자(垓字) 밖에 쌓고 불을 지르니 능상(陵上)에 미치지 않게 하고 불을 지르니라. 이 때 화광(火光)이 충천(衝天)하니 참봉(參奉)과 능승군이 망지소조(罔知所措) 하거늘, 길동이 성중에 들어가 관문(官門)을 두드리며 크게 외쳐 왈,

“능소(陵所)에 불이 나서 참봉(參奉)과 능군(陵軍)이 다 타서 죽겠다.”

하거늘, 감사(監司)잠이 몽롱(朦朧)한 중에 이 말을 듣고 대경(大驚)하여 바라보니 화광이 충천한지라. 대경한지라. 하여 일변 군사를 급히 능소로 보내라 하니, 성중이 요란하여 남녀노소(男女老少) 없이 황황(遑遑)히 분주히 나오니 창곡(倉穀)의 수직(守直)하던 군사도 다 나가고 없는지라. 이 때 모든 적졸을 불러 급히 탈취하라 하니, 제군이 일시에 달려들어 창곡과 병기를 탈취하여 가지고 북문(北門)으로 내달아 동구 돌아오니, 벌써 동방(東方)이 밝는지라. 길동이 가로대,

“우리 행(行)치 못할 일을 하였으니 감사 애매한 놈 한 놈이 잡히면 사죄를 면치 못하리니 남에게 죄악이 아니리오.”

하고, 방(榜)을 써주며 왈,

“오늘 밤에 가서 명록문에 붙이고.”

한대, 제졸이 그 방을 보니, 하였으되,

“창곡과 군기 도적은 할미당 장수 홍길동이라.”

하더라. 제졸이 대경 왈,

“행수(行首) 어찌 이런 말씀 하여 대환(大患)을 자취(自取)코자 하시나이까?”

길동이 대소 왈,

“자연(自然) 할 묘책이 있으니 그대 등은 염려치 말라.”

하거늘, 군사 연고를 모르고 밤에 가 명역문에 붙이고 돌아오니라.

이 때 길동이 길동 초인(草人) 일곱을 만들어 각각 육갑(六甲)으로 혼백(魂魄)을 붙이니, 여덟 길동이 팔을 뽐내며 서로 말을 하니 어느 놈이 참 길동인 줄을 알지 못할레라. 여덟 길동을 팔도(八道)에 분발(分發)할새, 한 길동이 일천 군(軍)씩 거느려 가게 하니 모든 군사 각각 길을 떠날새, 팔도(八道) 감사(監司) 성명과 각 읍(各邑) 수령의 이름이며 조선 팔도를 역력히 하여 주니, 군졸 등이 길동이 재주를 탄복하며 일변 의심하더라.

이 때 함경감사 불을 구하고 들어오니 창고 군사 급히 고하되,

“불을 구하러 올라간 사이에 무수한 도적이 들어와 창곡 군기를 탈취하여 갔다.”

하거늘, 감사 대경하여 팔방으로 발포(發捕)하여 도적을 잡으라 하되, 종적을 모르더니 북문지기 급고(急告) 왈,

“간밤 삼경 후에 보온즉 여차여차한 방을 붙였나이다.”

하고 방서(榜書)를 드리거늘 감사 보고 대경 왈,

“이는 천고에 없는 도적이라.”

하고, 각 읍(各邑)에 행관(行關)하되,

“함경도 내에 홍길동이라 하는 도적 잡으라.”

하였거늘, 수월(數月)이 되어도 종적을 알지 못함에 시고(是故)로 나라에 장계(狀啓)하되,

“불의에 난데없는 도적이 모월 모 야(夜)에 창곡 군기를 도적하여 갔사오대 그 종적을 알지 못하니 복걸(伏乞) 황상(皇上)은 살피사이다. 도적을 급히 잡아 처치하옵심을 천만축수(千萬祝壽)하옵나이다.”

하였거늘, 상(上)이 남필(覽畢)에 대경하사 팔도에 행관하였으되,

“대적 홍길동을 잡아 바치는 자 있으면 중상(重賞)하리라.”

하고, 또 사대문(四大門)에 방을 걸었으되 잡는 자 없는지라.

이 때 길동이 초인 일곱을 만들어 각각 보내고 저도 할미당에 있어, 각 도(各道) 각 읍(各邑) 수령이 사(私)로 봉송(封送)하는 재물을 탈취하니 소동(騷動) 각 도(道)에 낭자(狼藉)하며, 또 백관 수령이 잠을 자지 못하고 창곡 군기를 지키나, 길동의 수단이 바람을 부르며 비를 청하는 조화 있음에, 백주(白晝)에 풍우(風雨)를 대작(大作)하여 사람마다 눈을 뜨지 못하거늘, 창곡(倉穀)을 조석(朝夕) 없이 도적하여 가거늘, 팔도 조정에 연속하여 팔도 장계(狀啓) 일시에 조정에 이르니, 하였으되,

“홍길동이란 대적이 운무(雲霧) 지어내며 풍백(風伯)을 부려 창곡과 각 읍 수령의 재물을 탈취하니 세(勢) 태산(泰山) 같은지라. 또 백(百)의 힘으로는 잡지 못하옵기로 여시(如是) 앙달(仰達)하오니 왕상(王上) 살피사 급히 처치하옵소서.”

하였거늘, 상이 가로대,

“이 도적의 용맹은 옛날 초패왕(楚覇王)이라도 미치지 못할지라. 어떠한 놈이관대 팔도에 다니며 장난하는고.”

하시거늘, 계하(階下)에 한 신하가 출반주(出班奏) 왈,

“소인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반적(叛賊) 홍길동을 잡아 국가의 근심을 덜까 하나이다.”

하거늘, 모두 보니 이는 포도대장(捕盜大將) 이흡이라. 상이 대희하사 즉시 경군(京軍) 수백 명을 조발(調發)하여 주거늘, 이흡이 궐하(闕下)에 하직하고 군사를 거느려 성 밖에 나와 각각 흩어 보내며 왈,

“조령(鳥嶺)을 넘어 문경(聞慶)에서 모이자.”

언약하고 떠나니라.

각설. 이흡이 홀로 행(行)하여 김포(金浦) 육십 리를 나와 저물거늘, 주점(酒店)으로 좇아 유숙(留宿)코자 하더니 문득 일위(一位) 청포(靑袍) 소년이 나귀를 타고 동자(童子) 수인(數人)을 거느려 주점에 들거늘8, 이흡이 문왈,

“그대 무슨 일이 있어 이렇듯 시름하시나이까?”

그 소년이 가로대,

“보천지하(普天之下) 막비왕토(莫非王土)며 솔토지빈(率土之濱)이 막비왕신(莫非王臣)이라. 아이 내 비록 황구유생(黃口幼生)이나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노라.” “그대 근심하는 바를 듣고자 하노라.”

그 소년이 대왈(對曰),

“이제 홍길동이라 하는 대적이 팔도에 장난함에 각 읍 수령이 잠을 자지 못하고, 나라에서 근심하사 팔도에 행관하여 홍길동을 잡는 자 있으면 중상(重賞)하리라. 이제 시생(侍生)이 힘이 약할 뿐아니라, 아우를 사람 없음을한하노라.”

이흡이 흡연(洽然) 대왈,

“그대 기골이 이같이 장대하시니 내 비록 재주 없사오나 그대 뒤를 좇아 일심동력(一心同力)하여 도적을 잡아 국가의 근심을 덜면 어떠하리까?”

청포 소년이 왈,

“이 도적이 용맹이 과인(過人)하니, 그대 내 뒤를 좇아 동력(同力)하면 잡으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도리어 환(患)을 당하리라.”

이흡이 왈,

“대장부 죽을지언정 어찌 실신(失信)하리오.”

청포 소년,

“내 대사(大事)를 시작코자 하리오. 역과인(力過人)한 사람 얻지 못하였삽더니, 이제 그대를 얻었으나 나의 뒤를 좇고자 하거든 고요 깊은 곳에 가서 재주를 시험하리라.”

하고, 표연(飄然)히 몸을 일어 밖으로 나가거늘, 이흡이 뒤를 좇아 한 곳에 이르니 그 소년이 천만(千萬) 장(丈)이나 한 바위에 올라 앉으며 왈,

단권(單卷)이라

각설(却說)이라.

올라 앉으며 왈,

“그대 힘을 다하여 나를 바위 아래 내리치면 그 용력(勇力)을 알 것이요, 홍길동을 사로 잡으리라.”

하거늘, 이흡이 생각하되, ‘제 아무리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할 용맹이 있은들 내 한 번 하면 제 어찌 항거하리오.’ 하고, 힘을 다하여 두 발로 차니 그 소년이 몸을 움직여 돌아 앉아 왈,

“그대 장사(壯士)로다. 그간 나를 요동(搖動)하는 자 없더니 나를 그대가 한 번 차매 오장(五臟)이 울리는도다. 그대 나를 좇으면 홍길동을 잡을 것이니 내 뒤를 따르라.”

하고, 첩첩산곡(疊疊山谷)으로 들어가니 산천이 험악하고 초목이 무성하여 동서를 분별치 못할레라. 그 소년이 쉬 길동을 잡을까 하더라.

각설. 이 때 이흡 소년을 따라 첩첩산(8)곡으로 들어가니 봉만(峯巒)이 차아(嵯峨)하고 석경(石逕)이 험악한대 사람의 자취 없는지라. 그 소년이 돌아서며 가로대,

“이 곳이 홍길동이 있는 곳이라. 내 먼저 들어가 탐지하고 나올 것이니 그대 잠깐 이 곳에 머물렀어라.”

하거늘, 이흡이 대왈,

“그대로서 더불어 사생(死生)을 한가지로 하려 하고 이 곳 찾아 왔거늘, 어찌 홀로 있어 시랑(豺狼)의 해(害)를 당하리오.”

한대, 그 소년이 왈,

“대장부 어찌 이만 시랑(豺狼)을 두려워하리오. 정 겁나거든 그대 먼저 들어가 탐지하고 나오라. 내 홀로 이곳에 있으리라.”

한대, 이흡이 대왈,

“그대 말씀 그러하면 들어가 적세(賊勢)를 살펴 공을 이루게 하소서.”

하거늘, 그 소년이 미소부답(微笑不答)하고 표연(飄然)히 산곡(山谷)으로 들어가거늘, 이흡이 홀로 앉아 적막 기다리더니 일락서산(日落西山)하고 월출동령(月出東嶺)하니, 모든 시랑(豺狼)은 전후(前後)에 옹위(擁衛)하고 휘파람 부는 소리 좌우 소란하니, 이흡이 진퇴유곡(進退維谷)하여 큰 나무를 의지하여 앉았더니 홀연 훤화성(喧譁聲) 들리며 산곡에서 들리는 소리 요란하거늘, 마음이 경황(驚惶)하여 살펴보니 수십 군졸(軍卒)이 오거늘, 이흡이 대경하여 정히 몸을 감추고자 하더니 군사 일시에 달려들어와 결박하여 꾸짖어 왈,

“네가 포도대장 이흡이냐? 우리 염라대왕(閻羅大王)(9)의 명을 받아 너를 잡으려 조선 팔도로 다녀 누월(屢月)이 되었으되, 종시 잡지 못하였더니 어찌 이곳에 있을 줄을 알리오.”

언파(言罷)에 철사(鐵絲)로 목을 옭아 풍우(風雨)같이 잡아 가거늘, 이흡이 혼불부신(魂不附身)하여 수십 리를 가더니, 이곳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심중(心中)에 생각하되, ‘내 아직 죽지는 아니하였으나 어찌 살아 가리오.’ 정신을 진정하고 살펴보니, 의의(依依)한 궁궐(宮闕) 무수한 군사 황건(黃巾)을 쓰고 철퇴(鐵槌)를 들고 왕방울 차고 문 밖에서 요란하거늘, 이흡이 사생(死生)을 분별치 못하고 업드려졌더니, 문득 대상(臺上)에서 한 소리 지르며 이흡을 족불이지(足不履地)하게 잡아들여 계하(階下)에 꿇리고 꾸짖어 왈,

“네조그마한 필부 놈으로 외람한 뜻을 내어 홍장군을 잡으려 함에, 죽육산 신령(神靈)이 대로하사 너를 잡아 문죄(問罪)하고 지옥에 가두어 광언망설지죄(狂言妄說之罪)를 다스리라 하심에, 너는 지부(地府)를 원망치 말라.”

하고, 하졸 불러 분부하되,

“너 놈을 철옥(鐵獄)에 가두라.”

하거늘, 좌우 하졸 일시에 달려들어 착가(着枷)하니 이흡이 황망(慌忙) 중에 난간을 붙들고 통곡 왈,

“소인은 인간 천인(賤人)으로 무죄히 잡혀왔사오니, 복걸(伏乞) 염왕(閻王)은 살피사 애매한 (0)인생을 살려주소서.”

하고 기절하거늘, 좌우 대소하고 꾸짖어 왈,

“이흡아, 세상에 어찌 지부(地府) 있으리오. 네 눈을 들어 나를 자세히 보라. 나는 할미당 홍장군이라. 네 무식한 놈으로 감히 나를 잡으려 함에 내 너의 지혜와 용력을 알고자 하여 작일(昨日) 청포 소년의 모양으로 하여 이 곳에 이흡으로 하여금 지혜를 보게 한지라.”

하고, 언파(言罷)에 하졸을 명하여 잡아맨 것을 끌러 올려 앉히고, 술을 권하여 왈,

“너 같은 유() 놈은 수만 명이라도 나를 잡지 못하며 금단(禁斷) 어려운지라. 내 너를 죽여 세상을 다시 보지 못하게 할 것이로되, 내 여(汝) 같은 무명필부(無名匹夫)를 죽이고 내 어디가 용납하리오. 죄(罪)를 사(赦)하여 보내니 네 돌아가 보았다 하면 도리어 네게 유익치 아니 할 것이니 구외불출(口外不出)하고 재생지은(再生之恩) 생각하여 너 같은 오활(迂闊)한 사람이 있거던 경계하여 너 같이 속는 폐(弊) 없게 하라.”

또 이튿날 사람 두엇을 잡아다가 계하(階下)에 꿇리고 꾸짖어 왈,

“네 무식한 놈으로 이흡과 합력하여 나를 잡으려 하니, 내 너희 죽여 다시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로되, 이왕에 이흡을 살려 보내고 홀로 너희를 죽이리오. 너희 외람한 의사를 둔즉, 너희 집에 있을지라도 내 잡아다가 죽일 것이니 삼가 조심하라.”

하고, 일시에 해박(解縛)하여 술을 먹이고 이흡을 위로 왈,

“그대는 조금도 놀라지 마라. 한 잔 술로 정을 토하리라.”

하고, 사오 잔을 권하니 이흡이 그제야 흩어진 정신을 수습하여 눈을 들어보니 과연 주점에서 만났던 청포소년일레라. 이흡이 고개를 숙이고 감히 말을 대답지 못하고, 권하는 술을 사양치 못하여 취하도록 먹고 앉았더니, 청포 소년 일어나 하인을 다시 살리거늘 그 신기함을 탄복하더라. 이윽고 또 술을 권하거늘 감히 사양치 못하여 수 배(數盃)를 먹으니 대취하여 대청 난간에 의지하여 잠을 깊이 들었더니, 문득 취한 술이 깨어 갈(渴)함을 참지 못하여 일어나고자 하나 감히 요동치 못하는지라. 가만히 정신을 차려보니 가죽 부대(負袋)에 험한 나무에 걸려있거늘, 겨우 부대를 열고 나와보니 이흡이 처음에 떠날 때 데리고 가던 하졸과 한가지로 가죽 부대에 넣어 일자(一字)로 나무에 걸렸거늘, 차례로 끌러 앉히고 이르대,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우리 떠날 때 문경으로 모이자 언약하였더니 어찌 이 곳에 왔는고?”

하며 두루 살펴보니 장안(長安) 북악산(北嶽山)일레라. 어이없어 산(山)을 굽어보니 춘몽(春夢)을 깨닫지 못하는듯 하거늘, 이흡이 가로대,

“나는 청포소년에게 여차여차이 속아 왔거니와, 너희는 어찌하여 잡혀 왔느뇨?”

하인이 답왈,

“소인 등은 주점에서 자옵더니 난데없는 뇌성 소리 천지진동하더니 풍운(風雲)에 싸이어 황망(遑忙)히 가오나, 아무 데로 가는 줄 모르옵더니 어찌 이 곳에 왔을 줄 알이오.”

하거늘, 이흡 듣고 탄식 왈,

“이 일이 정히 허망하다. 너희 등 삼가 누설치 말라. 길동 신통한 재주를 보니 옛날 제갈량(諸葛亮)의 재주와 힘이나 더하니 어찌 인력으로 잡으리오. 우리 등이 이제 들어가면 필연 죄책이 있을 것이니 수월 후에 들어가자.”

하더라.

각설. 이때 왕상(王上)이 팔도에 행관하나 길동 잡으려 하는 계교(計巧)를 듣지 못하여 탄식 왈,

“길동은 변화무궁(變化無窮)하여 초헌(軺軒)을 타고 왕래하되 알 자 없고 각읍에 노문(路文) 놓고 쌍교(雙轎)를 타고 장난하되 잡을 자 없다.”

하더라.

차설. 길동이 팔도에 종횡하며 가어사(假御使)로 그른 고을은 선참후계(先斬後啓)하되, 각 읍 수령이 빙공영사(憑公營私)하고 준민고택(浚民膏澤)하기로 길동 어사(御使)되어 선참후계(先斬後啓)하는지라. 이 때는 계유(癸酉) 팔월(八月)이라. 안찰어사(按察御使) 일시에 내려와 관헌(官憲)의 출척(黜陟)을 임의로 하니, 각 읍이 황황분주(遑遑奔走)하고 의혹하여 명령이 서지 아니하니 백성이 소동하는지라.

일일은 팔도 장계 일시에 들어왔거늘 보니, 하였으되,

“모월 모일에 길동이 창곡을 탈취하여 갔다.”

하거늘, 왕상이 보시고 탄식 왈,

“조정에 이 놈 잡을 자 없으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오.”

하신대, 계하(階下) 일원(一員) 대신(大臣)이

“듣사오니 길동이는 전(前) 우의정(右議政) 홍모(洪某)의 천첩소생(賤妾所生)이옵고 형조참의(刑曹參議) 홍길현의 서제(庶弟)라 하오니, 홍모를 금부(禁府) 나수(拿囚)하시고 길현으로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보내어 잡으라 하시면, 제 아무리 불충불효(不忠不孝)하오나 제 부형의 낯을 보아 스스로 잡히리다.”

하거늘, 상이 옳히 여기사 즉시 홍모를 금부 나수하라 하시고 길현을 패초(牌招)하신대, 선전관(宣傳官)이 어명을 받아 홍승상의 집에 이르니, 이 때 홍승상 길동이 나간 후로 어디가 작변(作變)하는가 염려하여 자연 병이 되어 날로 침중(沈重)하였는지라. 장자 길현이 벼슬을 살고 부친 병석을 떠나지 아니하더니, 일일은 문득 밖에서 나졸(邏卒) 임(臨)하고 어명(御命)으로 대감(大監)을 착가(着枷)하여 금부로 나수하고 선전관(宣傳官)은 길현을 패초(牌招)한대, 길현이 탑전(榻前)에 들어가 황공복지(惶恐伏地)하니, 상(上)이 진노(震怒)하사 가로대,

“네가 국적(國賊) 홍길동의 적형(嫡兄)이라 하니 길동을 바삐 잡아 국가의 근심을 덜고 네 문중(門中)의 재환(災患)을 면하라.”

하신대, 길현이 머리를 옥계하(玉階下)에 두드리며 왈,

“천(賤)한 동생이 불의무쌍(不義無雙)하여 일찍 사람을 죽이고 망명도주(亡命逃走)하여 그 후 사생존망(死生存亡)을 모르는지라. 거의 수년(數年)이 되었사옴에, 노부(老父) 이로 말미암아 신병(身病)이 촉발(促發)하여 명재조석(命在朝夕)이오니 아뢰올 말씀이 없사오며, 이제 불충불효 길동이 가내(家內)의 작죄(作罪) 뿐이 아니라 또한 국가(國家)에 범죄(犯罪)하였사오니 황공무지(惶恐無地)로소이다. 옛날 고수(瞽叟)는 불량(不良)하오나 순(舜)을 낳으시고, 순(舜)은 천하(天下)의 성인(聖人)이로대 상균(商均)같은 불효자(不孝子)를 두시고, 유하혜(柳下惠)는 어진 사람이로대 그 아우는 불량(不良)하여 천한 도적 되어 자칭(自稱) 도척(盜跖)이라 하고 대양산에 웅거(雄據)하여 적자(賊子) 수천 인을 거느리고 사람의 간(肝)을 내어 먹으며 이르는 곳 마다 장난이 무수하니, 작은 나라는 성(城)을 버리고 달아나옵고 큰 나라는 성을 굳게 지키고 살기를 도모하오니 이는 천하의 대환이라, 유하혜가 그 형으로 금치 못하였사오니, 지금 신의 아비 나이 칠십이라, 천한 동생으로 하여 병 촉발(促發)하여 명재경각(命在頃刻)이오니, 복걸(伏乞) 전하(殿下)는 넓으신 덕택으로 늙은 애비 죄를 사하셔서 집에 돌아가 조병(調病)하게 하옵시면, 신이 죽도록 힘을 다하여 불충불효 길동을 잡아 전하의 근심을 덜리다.”

아뢰온대, 상이 효성을 감동하사 홍모를 다시 추존(推尊)하여 우의정을 복직하시고, 길현으로 경상감사를 제수하시고 일년 말미를 주어 길동을 잡아들이라 하신대, 길현이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즉일(卽日) 발행(發行)하여 경상(慶尙) 감영(監營)에 도임(到任)하고 각관(各官) 방곡(坊曲) 괘서(掛書)하였으되,

“모든 사람들이 세상 남에 오륜(五倫)이 으뜸이라. 윤리(倫理)의 중(重)한 것이 임금과 애비니 군부(君父)의 명(命)을 거스리면 이는 불효불충이라. 어찌 세상에 용납하리오. 불효 아이야, 길동은 천고(千古)에 불효불충을 면하고 윤기(倫紀)를 알거든 형을 찾아 잡히라. 대감이 너로 하여금 백수(白首) 노년(老年)에 슬픈 눈물 마를 날이 없고 침식이 불안하사 병환이 위중하시거늘, 네 죄악이 중하기로서 상이 진노하사 대감을 금부 나수하시고, 나로 하여금 경상감사로 제수하사 너를 잡으라 하시니, 만일 너를 잡지 못하면 홍씨의 누대(累代) 청덕(淸德)이 너로 말미암아 일조(一朝)에 망케 되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오. 바라나이다. 길동은 부형의 평생 일을 유념하여 일찍 돌아와 일문의 대환을 면케 하라. 천지간(天地間) 누명(陋名)을 끼치지 말게 하라.”

하였더라.

각설. 이 때 감사(監司) 각 관(官)에 방문(榜文)을 전하고, 도임 삼 일에 마음 산란하여 침식이 불안함에 공사(公事)를 전폐(全廢)하고 정히 근심하시더니, 문득 삼문(三門) 밖이 요란하며 군사 고하되,

“어떠한 소년 양반이 나귀를 타고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감사께 뵈옴을 청하나이다.”

하거늘, 감사 괴히 여겨 동협문(東夾門)을 열고 들어오라 하니, 그 소년이 몸을 나귀 등에 부쳐 하인 수십 명이 옹위(擁衛)하여 바로 정하(庭下)에 이르러 절하여 보이거늘, 반드시 이웃 수령인 줄 알았더니 자세히 보니 이는 매일 유념(留念)하던 길동이라. 감사 대경하여 좌우를 치우고 내달아 손을 잡고 방성통곡(放聲痛哭) 왈,

“네 한 번 나감에 사생존망(死生存亡)을 알지 못하여 대감이 너로 인하여 침식이 불안하시고 병환이 위중하사 상요의2 침고(沈痼)하시거늘, 너는 불효를 끼쳐 맑은 세상 도적의 행수(行首) 되기를 좋아하여 나라에 죄인이 되고 불충불효하니, 네 총명준수(聰明俊秀)한 재주로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오. 방금 왕상(王上)이 너를 잡지 못하여 근심하시니, 옛글에 하였으되, 천작지얼(天作之孼)은 유가활(猶可活)이오, 자작지얼(自作之孼)은 불가내활(不可乃活)이라. 자연히 너는 생각하여 경사(京師)에 올라가 왕명(王命)을 준수하여 일문의 대환을 면하게 하라.”

언파(言罷)에 눈물이 비오는 듯하거늘, 길동 고개를 숙여 대감 안부를 묻잡고 왈,

“천생(賤生) 이리 오기는 부형의 중치(重治)를 위로코자 하며, 이전에 천한 길동으로 한 말씀만 부형을 부형이라 하였사오면 어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하며 통곡 왈,

“지난 일은 쓸 데 없사오니 명일에 소제를 결박하여 일변 장계하고 경성으로 올려보내옵소서.”

말을 다 함에 입을 봉(封)하고 다시 묻는 말에 통 대답지 아니하거늘, 감사 이튿날 나라에 일변 장계하고 길동을 항쇄족쇄(項銷足銷)하여 연장을 갖추어 주야(晝夜) 올라가니, 각 도 각 읍 백성들이 길동의 신출귀몰한 재주를 들었는지라9 잡아온단 말을 듣고 거리거리 구경하며 길이 행(行)치 못할레라.

각설. 이 때 팔도 감사 나라에 장문하되 (8)길동을 착송(捉送)하는 사연이거늘, 만조백관(滿朝百官)이 일변(一邊) 기다리며 만성(滿城) 인민(人民)이 망지소조(罔知所措)하여 오기를 바라더니, 그 날이 당함에 팔도에서 길동을 항쇄족쇄(項銷足銷)하여 장안에 이르니 팔 길동의 한 변화를 뉘 능히 알리오. 일변 금부(禁府) 나수(拿囚)하고 나라에 주달(奏達)한대, 상이 대경하사 능연각에 전좌(殿座)하시고 만조백관(滿朝百官)을 거느리고 친문(親問) 놓고자 하실새, 금부(禁府) 나졸(邏卒)이10 여덟 길동이 서로 말을 하여 왈,

“네가 참 길동이라.”

하며, 이렇듯 다투다가 필경(畢竟)은 한데 어우러져 싸우거늘, 상이 다시 국문(鞠問)하시나 죄인을 알 길이 없는지라. 도리어 일대 장관일레라. 상이 우승상 홍모를 불러 왈,

“지자(知子)는 막여부(莫如父)라. 자식 알기는 애비 밖에 없으니 경(卿)의 자식을 저 중에 잡아내라.”

하시거늘, 승상이 복지(伏地) 주왈(奏曰),

“신(臣)이 팔자(八字) 무상(無常)하와 불효천생(不孝賤生)으로 하여금 이같이 불황(不遑)하시니 욕사무지(欲死無地)로소이다. 불효자 길동은 나올 적에 왼편 다리에 붉은 점 여덟이 있사오니, 저 놈들을 다 벗기고 붉은 점 있는 놈을 잡으소서.”

말을 마치며 길동을 불러 왈,

“네 아무리 불효하나 위로 전하(殿下) 친임(親臨)하시고, 아래로 애비 있어 너로 하여(9)금 이같이 불황(不遑)하니, 너 같은 놈은 세상이 용납치 못할지라. 바삐 불충불효지죄(不忠不孝之罪)로 죽어라.”

언파(言罷)에 승상이 계하(階下)에 업드러져 피를 토하고 기절하거늘, 좌우 대경하고 왕상도 놀래사 대신을 명하여 구하라 한대 생도(生道) 없는지라. 여덟 길동이 눈물을 흘리고 낭중(囊中)에서 대추같은 환약(丸藥) 두 개씩 내어 갈아 입에 들이오니 승상 양구(良久)에 인사(人事)를 진정(鎭靜)하여 일어나 앉거늘, 여덟 길동이 눈물을 흘려 왈,

“애비 국은을 입사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오니 어찌 범람(氾濫)한 의사(意思) 두리이까? 소신 전생의 죄 중하와 천비(賤婢)의 배를 빌어 세상에 나옴에 부형을 부형이라 못하니 이로 말미암아 원(寃)이 골수(骨髓)에 맺혔삽기로 차라리 사절인사(謝絶人事)하고 몸을 산림(山林)에 붙여 부운유수(浮雲流水)같이 세월을 보내옵더니, 하늘이 무심하여 몸이 누항(陋巷)에 떨어졌사오나 일호(一毫)도 불의지사(不義之事)를 행치 말라 이르고, 다만 각 읍 수령이 무상(無狀)하여 백성의 재물을 탈취하옵기로 홍승에서2 중간에 올라가는 재물을 탈취한즉 이 같이 분운(紛紜)하니 죄사무석(罪死無惜)이오나, 이제 삼 년 후면 소신이 조선(0)을 떠나 갈 곳이 있사오니, 복걸(伏乞) 왕상은 근심 말으시고 길동 잡는 관자(關子)를 거두소서.”

말을 마치며 여덟 길동이 일시에 다 엎드러져 죽으니라. 좌우 백관(百官)이 의혹하여 죽은 것을 상고(詳考)하니, 다 초인(草人)이요 참 길동은 간 데 없는지라. 상이 대노하사 금선(錦扇)으로 용상(龍床)을 쳐 가라사대,

“뉘 능히 길동을 잡을 자 있으면 제 원대로 벼슬 시키리라.”

하신대, 만조백관(滿朝百官)이 길동의 신출귀몰(新出鬼沒)한 재주 칭찬 아니하는 이 없는지라. 뉘 감히 잡기를 대답하리오 하더라.

이 날 오후에 사문(四門)에 방을 붙였으되,

“홍길동은 평생 원을 풀 길이 없사오니 복걸(伏乞) 성상(聖上)은 길동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제수(除授)하와 유지(諭旨)를 내리오시면 신(臣)이 스스로 잡히리라.”

하고, 하였거늘 상이 백관 모아 의논하신대, 제신(諸臣)이 합주(合奏) 왈,

“제가 국가에 무슨 공 있사와 병조판서를 주시리까? 불충불효하는 놈을 제 원대로 하시면 국법(國法) 해이(解弛)하니 하교(下敎)를 거두소서.”

하거늘, 상(上)이 제신의 소견을 듣고 가라사대,

“뉘 능히 길동을 잡는 자 있으면 전장(戰場)에 나아가 적국(敵國)을 소멸(掃滅)함과 같은 공(功)을 쓰리라.”

하신대, 만조백관(滿朝百官)이 하나 응한 자 없는지라.

이 적에 길동 장안에서 지내되 혹 별연도 타며, 옥교(玉轎)도 타며 완완(緩緩)히 왕래하되 아는 자 없는지라.

일일은 경상감사에게 엄지(嚴旨)를 내리오신대,

“헛 길동을 잡지 말고 참 길동을 잡아 삼족(三族)의 환을 면하라.”

하였거늘, 감사(監司) 교지(敎旨)를 보고 송구하여 육방관속(六房官屬)과 근읍(近邑) 수령에게 분부하여 길동 잡기를 성화(星火)하더라. 이날 밤 삼경에 선화당(宣化堂) 들보의 위에서 일원(一員) 소년이 내려와 절하여 뵈옵거늘, 대경하여 귀신인가 하였더니 자세히 보니 이는 곧 길동이라. 크게 꾸짖어 왈,

“이 불효 무상(不孝無雙)한 놈아, 위로 군명(君命)을 거역하고 아래로 부형의 교훈을 듣지 아니하여 군부(君父)의 철천지원(徹天之寃)을 얻게 하며, 너로 말미암아 일국이 요란하고 부친께오서 백수노년(白首老年)에 주야(晝夜) 눈물로 지내시니 네 어찌 염려치 아니하느냐?”

길동이 울며 답왈,

“형장(兄丈)은 조금도 근심치 말으시고 소제를 결박하여 본영(本營) 장교 수십 명으로 하여금 압령(押領)하여 보내시면 소제 또한 도리(道理) 있나이다.”

감사 또한 의혹하고 이튿날 길동을 항쇄족쇄(項銷足銷) 하고 수레 위에 싣고 철사(鐵絲)로 무수히 동여 요동치 못하게 하고, 장교 수십 인을 명하여 분부하되,

“장난 못하게하라.”

하시니, 모든 장교 청령(聽令)하고 길동을 압령(押領)하여 수레를 풍우(風雨)같이 몰아가니 길 가에 구경하는 사람 무수하더라. 수일 만에 경성(京城) 근처에 들어가니 원근(遠近) 백성 남녀노소 없이 다투어 구경하더라. 길동 잡히어 가되 조금도 얼굴을 변치 아니하고 다만 술만 취하여 수레 위에 누었으니 구경하는 백성들이 그 연고를 알지 못하더니, 남태령(南泰嶺)을 넘어 동자기(銅雀)를 당하여 물 건너 남대문(南大門)에 다다르니, 좌우(左右)에 도감포수(都監砲手)들이 총(銃)을 일시에 장약(裝藥)하여 가지고 첩첩(疊疊) 싸고 들어 오더니, 중도에 이르러 길동이 문득 장교에게 일러 왈,

“너희 압령(押領)하여 내 이미 이 곳까지 무사히 오고, 성상(聖上)도 나를 잡아 이 곳까지 잡혀 온 줄을 알으실 것이니 너희는 죽어도 나를 원망치 말라.”

하고, 인하여 한 번 몸을 요동하여 용맹을 쓰니 동인 철사 썩은 줄같이 끊어지고 수레 풍비박산(風飛雹散)하여 길동이 몸을 날려 공중에 솟아 구름 사이로 소리개같이 달아나니, 좌우 도감포수들이 미쳐 손을 놀리지 못하여 하늘만 바라볼 따름일레라. 압령 장교를 엄형(嚴刑) 주아지 못하시고,11

“국변(國邊) 원찬(遠竄)하라.”

하시나이다. 상이 만조백관을 모아 길동 잡을 계교를 정할 제 제신(諸臣)이 주왈(奏曰),

“제 소원인 병조판서의 유지(諭旨)를 내리오시면 제 조선을 떠나리라 하오니, 이제 원대로 병조판서를 주시면 스스로 잡히리라.”

하거늘, 상이 옳게 여기사 길동으로 병조판서를 제수(除授)하시는 유지를 내려 사대문(四大門)에 걸고 일변(一邊) 병조판서 하인을 사방으로 흩으시더라. 이적에 동대문(東大門)으로 일위(一位) 소년이 홍포옥대(紅袍玉帶)하고 초헌(軺軒)을 타고 들어오며 이르대,

“국은(國恩)이 망극(罔極)하도다. 길동으로 병조판서를 제수하심에, 수명(受命)하러 가오니라.”

하니, 병조(兵曹) 하인이 일시에 옹위(擁衛)하여 완연히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궐하(闕下)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여쭈오대,

“불효 길동은 국사에 큰 화를 끼치다가 오늘날 평생 원을 풀고 돌아가니 여한이 업도소이다. 신이 전하를 하직하옵고 조선을 떠나오니, 복걸(伏乞) 성상(聖上)은 만세보중(萬歲保重)하옵소서.”

하고, 언파(言罷)에 구름 사이로 표연(飄然)히 가거늘, 상이 차탄(嗟歎) 왈,

“길동의 신기한 재주는 천고(千古)에 미칠 이 없도다. 어찌 인력으로 잡으리오. 제 조선을 떠나노라 하니 다시 장난함은 없으리라.”

하시고 왈,

“제 비록 불의무상(不義無常)하나 일단 장부(丈夫)의 쾌(快)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도왔으면 당초에 당할 이 없으리라.”

하시고, 즉시 팔도에 사문(赦文)을 내리어 길동 잡는 관자를 거두라 하시니라. 길동이 한 번 궐하(闕下)에 하직하고 돌아간 후에 다시 작폐(作弊)함이 없더라.

각설. 이 때는 병인(丙寅) 추구월(秋九月) 망일(望日)이라. 금풍(金風)이 소슬(蕭瑟)하고 월색(月色)이 고요한대 북으로 향하는 기러기 소리 처량한지라. 왕상(王上)이 추월(秋月) 명랑(明朗)함을 사랑하사 환자(宦子)를 데리고 후원(後園)을 배회하시더니, 문득 일진청풍(一陣淸風)이 일어나며 공중에서 옥저(玉笛) 소리 들리더니 일위(一位) 소년이 내려와 복지(伏地)하거늘, 상(上)이 대경(大驚) 문왈(問曰),

“선관(仙官) 사람이거늘 어찌 인간에 내려와 무슨 말을 묻고자 하느뇨?”

그 소년이 복지(伏地) 주왈(奏曰),

“신은 전 병조판서 홍길동이로소이다.”

하거늘, 상이 대경 왈,

“어찌 여차여차 심야(深夜)에 들어왔느뇨?”

길동이 왈,

“신이 전하를 받들어 만세(萬歲)를 섬길 것이로대, 소인이 근본이 천생(賤生)이라. 세상에 어찌 부모 없는 사람이 있사오리까? 재주를 닦아 육도삼략(六韜三略)을 통달하니 장상(將相)에 참여치 못하옵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오나 장원급제(壯元及第) 못하와 용납하올 곳이 없사와 하올 말씀 없사옴에, 세상을 다 버리옵고 사해(四海)로 집을 삼아 부운유수(浮雲流水) 같이 다니면서 가읍(家邑)에 작폐(作弊)하옵고 조정을 소요케 하였사오니 죄사무석(罪死無惜)이오니, 신(臣) 이름이 용탑(龍榻)에 미쳤사오니 국은망극(國恩罔極)하온지라. 소년의 평생 소원을 푸오니 충성으로 다하여 전하를 섬기고자 하오나, 근본이 천생이라. 조정에서 받지 아니할 것이요, 이름이 나라에 죄인이요 이 세상에 용납치 못하올지라. 이러함으로 나라를 하직하옵고 조선을 떠나 갈 곳이 있사오니, 복걸(伏乞) 왕상(王上)은 유념(留念)치 말으시고 백미(白米) 삼천(三千) 석(石)만 차급(借給)하옵소서. 서강(西江)으로 수운(輸運)하여 주시면 전하의 은덕을 입사와 수만 인명을 보존할까 하나이다.”

상이 마지 못하여 허락하시고 가라사대,

“백미 삼천 석을 주려니와 경(卿)이 어찌 수운(輸運)하리.”

길동이 주왈(奏曰),

“이는 신의 수단이 있사오니 전하는 하념(下念)치 마옵소서.”

상이 가라사대,

“너를 자세히 보게 네 얼굴을 들라.”

하신대, 길동이 얼굴을 들고 눈을 뜨지 아니하거늘, 상이 가라사대,

“너를 보니 기이하나 눈을 뜨지 아니함은 어쩐 일이뇨?”

길동이 주왈,

“눈을 뜨오면 전하 놀래실까 하나이다.”

상이 강권(强勸)치 못하시고 물러가라 하시되, 길동이 일어나 사배(四拜) 왈,

“전하 백미 삼천 석을 주오시니, 신이 천은(天恩)을 입사와 가옵나이다. 복걸(伏乞) 성상(聖上)은 만세보중(萬歲保重)하옵소서.”

말을 마치며 몸을 소소와 일진음풍(一陣陰風)을 타고 옥저를 불며 구름 사이로 표연(飄然)히 가거늘, 상이 길동의 신기한 재주를 신기히 여기사 그 이튿날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에게 전지(傳旨)를 내리사,

“백미 삼천 석 백미를 서강으로 수운(輸運)하여 쌓으라.”

하시니, 당상(堂上)이 즉시 역꾼을 조발(調發)하여,

“쌀 천 석을 수운하여 서강에 쌓으라.”

하신대, 문득 상류(上流)에서 수십 척 배 들어오더니 백미를 실어 가거늘, 한 역군이 물은대 답왈,

“나라에서 능현군에게 사송(賜送)하신 바라.12

다 실은 후에 길동이 서향(西向)하여 재배(再拜)하고 가로대,

“병조판서 홍길동이 천은(天恩)을 입사와 백미 삼천 석을 얻어 가노라.”

하니 역군이 대경하여 즉시 나라에 주달(奏達)하대, 상이 대소(大笑) 왈,

“짐(朕)이 길동에게 사급(賜給)함이니 경 등은 놀라지 말라.”

하신대, 모두 그 연고를 알지 못하더라.

각설이라. 이 때 길동이 수만 군졸을 거느리고 조선을 하직하고, 삼천 석 백미를 싣고 강호(江湖)에 흘러서 망망대해(茫茫大海)를 건너 남경(南京) 근처에 들어, 도라 하는 섬 중에 창고를 짓고 군기(軍器)를 수보(修補)하여 양초(糧草)를 무수히 쌓고 매일 연습(鍊習)하더라. 길동이 군졸을 불러 왈,

“내 망당산에 들어가 살촉에 바를 약을 캐어 올 것이니 너희 등은 도상(島上)을 지키라.”

하거늘 좌우 응낙하고 하직하니 또 분부,

“내 좌우(左右) 변지2 에다른 이는 들어오지 못하게 꾸몄으니 너희 등은 먼저 출입치 못하리라.”

하고, 모든 군사를 이별하고 길동이 배를 타고 수도(水道)를 월섭(越涉)하여 육지에 내려 향할새, 수십 리를 행하여 낙천 골을 다다르니 그 읍(邑) 중에 만석(萬石)꾼 거부(巨富) 있으되 명(名)은 백웅이라. 일찍 한 딸을 두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무불통지(無不通知)하고 인의예절(仁義禮節)을 품었으니 진실로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부모 애중(愛重)하여 옛날 두목지(杜牧之) 적선(謫仙) 같은 문장재사(文章才士)를 구하여 사위를 삼아 봉황(鳳凰)의 쌍유(雙遊)함을 보려 하더니, 일일은 홀연 풍우대작(風雨大作)하며 지척(咫尺)을 분별치 못하여 황망(慌忙) 중에 보니, 백웅의 딸이 간 데 없거늘, 백웅이 천금(千金)으로 사방에 흩어 주어 방방곡곡(坊坊曲曲)에 찾으되 종적(8)이 없는지라. 백웅이 주야 통곡하며 식음전폐(食飮全廢)하고 실성하여 다니며 왈,

“뉘 능히 나의 여식을 찾아주면 내 집 수만 금 재물을 반분하여 주고, 딸로 하여금 건즐(巾櫛)을 받들어 백년(百年) 동락(同樂)할지라.”

하거늘, 길동이 이 말을 듣고 심중에 측은하나 할 수 없는지라. 인하여 망당산에 들어가 약을 캘새 점점 심산(深山)으로 들어가더니 일락서산(日落西山) 함에 돌아올 길이 희미한지라. 정히 산중에 방황하더니 문득 바라보니 사람의 소리 들리거늘 바라보니 화광(火光)이 충천(衝天)한지라. 길동이 인간이 있음을 다행히 여겨 찾아 들어가니, 수백 인이 모여 잔치하거늘 심중에 생각하되, ‘이게 비록 사람의 형용이 있으나 짐승의 무리 울금이라 하는 짐승이라.’ 길동이 생각하되, ‘내 반세상(半世上)을 천하에 두루 다니되 이런 짐승을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날 이 곳을 보았으니 울금의 무리를 잡아 세상에 나가 사람에게 구경시키리라.’ 하고, 몸을 깊은 수풀에 감추고 활을 잡아 그 짐승 중 제일 상좌석(上座席)을 쏘아 맞히니 그 짐승 소리를 지르고 일군(一群)을 거느려 달아나거늘, 길동이 좇아 잡고자 하더니 마침 밤이 깊어 가는 길이 없는(9)지라. 큰 나무 있거늘 그 밑에 의지하여 밤을 지내고, 이튿날 내려가 보니 그 짐승이 피 흘렸거늘, 그 짐승 있는 곳을 좇아가더니 큰 집이 있으되 가장 웅장하거늘, 길동이 나가 문을 두드리니 수문장이 나와 문왈,

“그대 어떠한 사람이관대 깊은 밤에 이 곳에 들어왔느뇨?”

하거늘, 길동이 보니 그 짐승이거늘, ‘아무러나 내종(乃終)을 보리라.’ 새로 초면지예(初面之禮)를 행(行)하고 왈,

“나는 조선 사람으로 의술(醫術)을 배워 채약(採藥)하려 하고 이 곳에 왔더니 길을 잃고 귀처(貴處)에 찾아왔으니 그대는 길을 인도하라.”

하니, 그 놈 기꺼 가로대,

“이미 의술을 안다 하오니 살에 상(傷)한대 고칠소냐?”

하거늘, 길동이 대왈,

“내 세상에 남에 의술을 배웠으니 무슨 병을 못고치리오.”

하거늘, 수문장이 대희 왈,

“우리 대왕을 살리려고 하늘이 그대를 보내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하거늘, 길동이 대왈,

“무슨 일이오?”

수문장이 답왈,

“우리 대왕이 새로 미인을 얻음에 어제 대연을 배설하고 놀으시더니 난데없는 살이 들어와 우리 대왕을 맞혀 지금 병환이 위중하오니, 그대는 좋은 백약(百藥)을 가르쳐 우리 대왕 상처를 낫게하옵소서.”

하고 안으로 들어가더(0)니, 이윽하여 나와 길동을 인도하여 두어 문 지내어 들어가니 오색 풀로 담을 쌓고 그 위에 울금이 누었거늘, 길동이 나아가 예(禮)를 전하고 좌우를 살펴보니, 동편(東便) 협실(夾室)에 한 미인이 수건으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하니 또한 여자 둘이 붙들고 죽지 못하게 하는 중이라.2

“상(傷)치 아니하였음에 내게 좋은 환약(丸藥)이 있으니 대왕 먹사오면 즉시 효험 있어 상처 나을 것이요, 인하여 장생불사하려이다.”

한데, 울금이 대희 왈,

“복(僕)이 스스로 몸을 삼가치 못하여 환(患)을 자취하여 명(命)이 진(盡)케 되었더니, 이제 천우신조(天佑神助)하여 이 같은 명의(名醫)를 만났사오니 죽은 자 다시 살고, 병 회춘(回春)하오니 바라건대 선생은 약을 급히 시험하소서.”

길동이 낭중(囊中)에서 독약(毒藥)을 한 봉을 내어 술에 타 주니, 급히 받아 마시니 이윽하여 울금이 몸을 두르며 크게 소리하여 왈,

“너로 하여금 원수 지은 바 없거늘 무슨 혐의로 죽을 약을 먹이느냐?”

하고, 모든 동생 등(等)을 불러 왈,

“불의에 흉적을 만나 내 목숨을 죽게하니 너희 등은 이 놈을 놓치지 말고 나의 원수를 갚으라.”

하고, 인하여 죽으니 모든 울금이 일시에 칼을 들고 내달아 꾸짖어 왈,

“내 형을 무슨 죄로 모해(謀害)하뇨? 너는 빨리 칼을 받으라.”

하고, 달려 들거늘 길동이 대소 왈,

“내 어찌 네 형을 죽이리오. 제 명이 그만이라.”

하되, 모든 울금 등이 대로(大怒)하여 일시에 내달아들거늘, 길동이 대적코자 하나 손에 일촌(一寸) 병(兵)이 없는지라. 응(應)하여 막을 길이 없어 사세 위급하거늘 몸을 날려 공중으로 달아나거늘, 길동이 할 길 없어 급히 육갑육정(六甲六丁)을 부르니 문득 공중에서 무수한 신장(神將)이 내려와 모든 울금 결박하여 땅에 꿇리거늘, 길동이 그 놈의 칼을 앗아 울금을 함몰(陷沒)하고 그 여자 삼 인을 죽이려 하니, 삼 인이 울며 애걸 왈,

“첩 등은 요괴 아니오. 인간 사람으로 불행하여 요괴에게 잡혀와 이 곳에 와 잔명(殘命)이 일시에 죽지 못하옵고 부지(扶持)하였나이다.”

하거늘, 길동 그 여자 삼 인의 거주성명을 물으니, 하나는 낙천의 백웅이 천금으로 구하던 딸이요, 두 여자는 정 조 양인(兩人)의 여자라. 길동이 이 세 여자를 데리고 돌아와 백웅을 보고 이 말을 한대, 백웅이 평생 서러워하던 여자를 찾으니 기쁜 마음을 어찌 다 측량하리오. 천금으로써 대연을 배설하고 향당(鄕黨)을 모아 홍생(洪生)으로 사위를 삼고, 일가(一家)의 칭찬하는 소리 낭자(狼藉)하더라. 이튿날 또 정 조 양인이 홍생을 청하여 사례하고 여자로써 첩을 정하니, 길동이 나이 이십 되도록 봉황(鳳凰)의 짝을 모르더니 일조(一朝)에 세 숙녀를 만났으니 극(極)한 정(情)이 새말하고13 백용 부처도 사랑하고 가산(家産)을 수습(收拾)하고 일가(一家)를 거느리고 겨도로 오니, 모든 군사 멀리 나와 맞아 원로에 평안히 다녀오심을 문후(問候)하고 행차를 옹위하여 제도에 무사히 돌아와 대연을 배설하고 주야 즐기더라.

세월이 여류하여 겨도에 들어온 지 거의 삼 년이라. 일일은 길동이 월하(月下)에 배회하더니 홀연(忽然) 천문(天文)을 살펴보니, 부모를 생각하더니 마침 기러기 울거늘 길동이 심회(心懷)를 정치 못하여 낙루(落淚)하거늘, 백씨 문왈,

“낭군이 평생 설워함이 없더니 오늘 어찌 설워하시나이까?”

길동 유체(流涕) 왈,

“나는 천지간에 용납치 못할 불효자라. 본디 이곳 사람이 아니라 조선 홍승상의 천첩소생이라. 집안의 천대를 면치 못하고 조정에 참여치 못하니 장부의 심사를 이길 길이 없는 고로 부모를 하직하고 이곳에 와 은신하였으니, 주야(晝夜) 부모의 기후(氣候)를 살피더니 오늘날 천문(天文)을 본즉 부친 유명(幽明)하사 불구(不久)에 세상을 이별하실지라. 내 몸이 만리 밖에 있어 미처 득달치 못하여 생전에 뵈옵지 못하게 되오니 설워하노라.”

한대, 백씨 그 근본을 감춤이 없음을 장부로 알아 재삼 위로하더라.

길동이 일군을 거느려 일봉산으로 들어가 산맥(山脈)을 살펴 일좌(一坐) 명승지지(名勝之地)를 보고, 그 날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좌우(左右) 산곡(山谷)과 분묘(墳墓)를 나라 능소(陵所)같이 하고, 돌아와 모든 군사를 불러 분부 왈,

“모월 모일에 대선(大船) 일척을 준비하여 조선국 서강(西江)으로 대령하라. 내 부친을 모시고 오리라.”

하고, 즉시 백씨와 정 조 양인을 이별하고 소선(小船) 일 척(一隻)을 재촉하며, 길동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소선으로 조선을 향하니라.

각설. 이 때 홍승상이 연기(年紀) 구십에 졸연(猝然) 득병(得病)하여 추구월(秋九月) 망일(望日)이라. 부인과 길현을 불러 가로대,

“내 나이 구십이라. 무슨 한이 있으리오마는, 다만 길동이 천비소생(賤婢所生)이라, 또한 나의 기출(己出)이니, 한 번 눈에 남에 사생존망(死生存亡)을 알지 못하고, 일조(一朝)에 부자 상면치 못하고 황천에 돌아가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내 죽은 후에 길동 에미를 후히 대접하여 제 일신을 편케하고, 만일 길동이 들어오거든 달래어 적서(嫡庶)를 분별치 말고 동복(同腹)같이 하여 구천(九泉)에 돌아간 망부(亡父)의 원(願)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길동 어미를 불러 손을 잡고 눈물 흘려 왈,

“내 너를 잊지 못함은 길동을 보지 못하고 가니 원(寃)이 가슴에 맺혔도다. 길동은 녹녹(碌碌)한 인물 아니라. 살았으면 너를 저버리지 아니하리라. 부디 부디 잘 지내라.”

하고, 언파(言罷)에 향탕(香湯)을 재촉하여 목욕하시고 의복을 갈아 입고 상(床)에 누워서 인하여 별세하시니 부인과 일가 망극하여 곡성(哭聲)이 구천(九泉)에 사무치는지라. 초종지례(初終之禮)를 극진히 하여 성복(成服)을 지낸 후에 명승지지(名勝之地)를 구하여 안장(安葬)코자 하니 사방 지사(地師)들이 구름 모이듯 하여 난분분(亂紛紛)하되 여의(如意)치 못한지라. 문득 시동(侍童)이 고하되,

“밖에 어떠한 중이 와 대감 영위(靈位)에 조문(弔問)코자 하나이다.”

하거늘, 좌우(左右) 조객(弔客)이 괴히하더라. 그 중이 와 영위전(靈位前)에 나아가 망극애통(罔極哀痛)하기를 마지 아니하거늘, 좌우 조객이 가로대,

“대감께오서 전일 친근한 중이 없거늘 어떠한 중이”14

울음을 그치고 대청(大廳) 나아가 눈물을 씼고 가로대,

“형장(兄丈)은 소제(小弟)를 모르시나이까?”

좌우 자세히 보니 이는 곧 길동이라. 일변 놀라며 일변 반가워 통곡 왈,

“이 무상(無常)한 아이 어디를 갔다가 이제야 돌아오느뇨? 대감께옵서 임종시(臨終時)에 너를 생각하사 눈을 감지 못하노라 하시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이 곳이 번거하니 내당으로 들어가자.”

하고 붙들어 내당에 들어가니, 부인 왈,

“네 어떠한 중을 데리고 오느뇨?”

하시거늘, 길현이 고왈,

“이는 외인(外人)이 아니라 아우 길동이로소이다.”

부인이 일희일비(一喜一悲)하여 길동을 붙들고 통곡 왈,

“네 한번 집을 떠남에 대감이 너를 생각하사 임종시에 눈을 감지 못하리로다 하시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오.”

길동이 통곡 왈,

“불효자 길동은 근본이 천미(賤微)하와 세상에 있을 마음이 없사옵기로 삭발위승(削髮爲僧)하고 지술(地術) 배워 대감 만년유택지(萬年幽宅地)를 정하여 구산(丘山)같은 불효죄(不孝罪)를 만분지일(萬分之一)이나 면할까 하나이다.”

부인이 시비를 명하여 길동의 모를 부르니, 그 어미 이 말 듣고 전지도지(顚之倒之) 내당에 들어가 길동을 붙들고 통곡 기절하거늘, 모든 사람이 구하니라. 이윽고 정신을 진정하여 모자 서로 붙들고 그리던 정을 못내 슬퍼하더라. 길동이 왈,

“형장은 소제를 길동이라 마옵고, 지술(地術)하는 중이라 하옵소서. 만일 길동이라 하오면 좋지 못하올까 하나이다.”

장자(長子) 점두(點頭)하니라. 길동이 왈,

“소제 일찍 명산 세 곳을 보았사오니 형장이 내 말을 듣사오리까?”

장자 왈,

“그러하면 명일에 그 곳을 보아 정하리라.”

하고, 이튿날 수삼 하인을 데리고 길동을 따라 한 곳에 이르니, 석각(石角) 중중(重重)하고 절벽(絶壁)은 층층(層層)한데, 앉히고 가로대,

“이 곳이 명당(明堂)이오니 형장의 소견은 어떠하리까?”

길현이 좌우를 살펴보니 석각지지(石角之地)라. 길동의 지술(地術) 허탄(虛誕)함을 개탄하고 가로대,

“네 지술이 부족하도다. 이러한 천루(淺陋)한 곳에 어찌 부친을 안장(安葬)하리오. 다른 곳을 보아 정하라.”

하니, 길동이 탄식하고 가로대,

“할 일 없도다. 이 곳 같은 곳이 없사오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까? 형장은 이 곳이 싫다 하니 소제 재주를 보옵소서.”

하고15, 한 쌍 백학(白鶴)이 날아가거늘, 그제야 크게 놀래어 길동의 손을 잡고 가로대,

“명지(名地)를 모르고 고집하였으니 이제는 소견대로 하여 야야(爺爺)를 모시라. 이 곳 같은 명당이 있느뇨?”

길동이 탄식 왈,

  • “이 곳에서 백승(百勝)이나 더한 명당이 있사오나 다만 길이 멀으니 형장이 좇으리까?”

길현이 대왈,

  • “이제는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네 가는대로 좇으리라.”

길동이 대왈,

  • “수로(水路)로 수천 리(數千里)를 건너가면 대대(代代)로 공후재상(公侯宰相)이 떠나지 아니하는 명당이 있사오니, 바라건대 형장이 소제 말씀을 믿사오면 명일에 상구(喪具)를 모시고 그 곳으로 가사이다.”

하거늘, 길동의 형이 허락하고 돌아와 대부인(大夫人)께 사연을 고하니 부인이 또 허락하시니, 이튿날 행상(行喪)을 매며 발행(發行)할새, 길동이 부인께 여쭈오대,

  • “천생(賤生)이 어미를 이별하온 지 십 년만에 지금 만나오나 또한 이별을 차마 못할지라. 복걸(伏乞) 부인은 수유(受由)를 수월(數月)만 하시면 어미를 모셔 회포를 풀고 대감 영위(靈位) 조석(朝夕) 향화(香火)를 받들까 하나이다.”

대부인과 길현이 허락하시거늘, 상구를 모셔 서강(西江)으로 이르니 길동의 하졸이 바라며 선척(船隻)을 강변(江邊)에 대후(待候)하였더라. 즉시 상구(喪具)를 배에 모시고 본댁(本宅) 노자(奴子)를 도로 보내고, 다만 길동이 일행과 길현이 시종(侍從) 수십 인을 거느리고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순풍(順風)으로 인하여 수십 일만에 한 곳에 이르니, 배 수십 척이 대후하였더라. 길동의 일행을 맞아 잔치를 배설하고 상구(喪具)를 호송(護送)하여 섬 중에 들어가니, 수만 군졸이 나와 조문(弔問)하고 상구 메어 산상(山上)으로 올라가니, 좌우 산석(山石)과 분묘(墳墓)는 나라 능소(陵所)같이 하였거늘, 길현이 대왈,

“이 어인 일인고?”

묻거늘, 길동이 왈,

“형장은 놀라지 마옵소서.”

언파(言罷)에 군사를 호령하여 왈,

“시(時)가 당(當)하였으니 하관(下棺)을 바삐 하자.”

한대, 군사 일시에 관을 받들어 만년유택지지(萬年幽宅之地)에 모시고, 길동이 중의 복색(服色)을 벗고 상복(喪服)을 갖추어 어미와 길현을 모시고 분묘(墳墓)를 (8)하직 통곡한 후에 본부(本府)로 찾아오니, 백씨 등이 포진(鋪陳)을 배설하고 장자(長子)와 존고(尊姑)를 시접(侍接)하고 고부지예(姑婦之禮)를 행하고, 존구(尊舅)의 장사(葬事)를 위문하니, 길동의 신기함을 탄복하며 흔연(欣然)히 입잡2 하고 자부(子婦) 등을 사랑하더라. 빈객(賓客)이 일일 조문(弔問)하더라.

길현이 제도에 온 지 누월(屢月)이 됨에 홀연 본국에 돌아갈 마음이 간절한지라. 길동을 불러 왈,

“이 곳에 친산(親山)을 정하였으니 가히 못올 곳이 아니나 고국을 생각하니 첩첩(疊疊)하고16, 해수(海水) 양양(洋洋)하여 만리(萬里)의 적조(積阻)함이 한심하고 기약이 망연한지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하고, 인하여 체루(涕淚)하거늘, 길동 위로 왈,

“형장은 슬퍼말으소서. 이 곳이 천만 대로도 공후재상(公侯宰相)이 떠나지 아니하는 곳이요, 남에게 참소(讒訴) 입어 멸문지환(滅門之患)을 입을 곳이 아니오니, 이러한 산지(山地)는 천하에 두루 찾아도 쉽지 아니하오니 어찌 원장(遠葬)함을 근심하리까? 또한 사람의 운명이 달라 평생을 모시기 어렵사오니 형장은 야야(爺爺)를 생전에 모시고, 소제는 사후에 모시라 하오니 조금도 싫어 말으시고 고국에 돌아가 대부인을 위로하소서. 소제는 이곳에 있사와 사시(四時) 향화(香火)를 극진히 받들려니와 대부인 또 만세(萬歲) 후에 또한 이곳에 모시리라.”

하거늘, 길현이 마지 못하여 (9)허락하고 명일에 발행할새, 길동의 모(母)와 백씨 등이 이별 회답(回答)하여 수로(水路) 만리(萬里)에 안녕보중(安寧保重)하시고 다시 오심을 신신당부(申申當付)하더라. 길현 모든 군사에게 하직을 받고 부친 산소에 배사(拜辭) 애통(哀痛)하여 기절하거늘, 길동 재삼 위로하고 일척 소선(小船)을 재촉하여 배에 오를새, 길동이 이별하여 왈,

“한 쌍 기러기 각각 흩어지오니 어느 날에 만나 서로 그리던 정회를 푸오리까? 복걸(伏乞) 형장은 안녕보중(安寧保重)하시고 대부인을 모셔 만세무양(萬世無恙)하옵소서.”

길현이 길동 손을 잡고 유체(流涕) 왈,

“아우 길동은 나로 하여금 야야(爺爺) 분묘를 다시 보게 하여라.”

길동이 재삼 위로하고 사공을 불러 왈,

“편안히 모시라.”

하고, 금은(金銀) 채단(綵緞)을 무수히 실어 보내니 길현이 칭찬을 마지 아니하더라. 배를 저어 사십 일만에 조선에 돌아와 길동에게 편지하고, 본가(本家)에 돌아와 대부인께 뵈옵고 전후사를 고한대, 부인이 길동의 소견(所見)을 칭찬하나 들으며 슬퍼하더라.

이 때 길동이 게도에 있어 조석(朝夕) 향화(香火)를 극진히 받들어 지내고 백씨도 존고(尊姑)를 지성으로 공양(供養)하니,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하고 사방으로 무일사(無一事)라. 삼년초종(三年初終)을 지성으로 지내고 길동이 화복(華服)을 갖추고 군사를 위로하여 태평 세월을 보내며 농업을 힘쓰고, 노는 날에 무예를 힘써, (0)곡식이 태산 같고 병기(兵器) 많은지라.

이 때 근처에 한 나라 있으되 이름은 율도국이라. 대국(大國)은 섬기지 아니하고 율왕이 누대(累代) 전위(傳位)하여 제화(濟化)를 행하니 나라가 윤택하고 백성이 요부(饒富)하여 사방에 근심이 없더라.

이적에 길동이 춘추(春秋)로 군사를 연습하니, 기병(騎兵)이 삼만(三萬)이요, 보병(步兵)이 이십만(二十萬)이라. 일일은 길동이 제장(諸將)을 모아 의논 왈,

“우리 천하를 횡행(橫行)하되 대적할 자 없는지라. 조그마한 계도를 종시(終始) 지키어 장자(長者)와 같이 세월을 보내리오. 내 들으니 율도국이 좋다 하니 한 번 치고자 하니.”17 “대장부 어찌 이곳에 있어 속절없이 세월을 보내리까? 빨리 출전(出戰)하옵소서.”

길동이 택일(擇日)하여 군사를 발행할새, 대장(大將) 사만군으로 선봉(先鋒)을 삼고 부장(副將) 김익순으로 후군장(後軍將)을 삼고 수십만 군을 거느려 출전하니, 기치창검(旗幟槍劍)은 일월(日月)을 희롱하고 고각함성(鼓角喊聲)은 천지진동(天地震動)하더라. 대군을 재촉하여 강둑에 이르니 무수한 선척(船隻)이 강변(江邊)에 대후(待候)하였거늘, 군사와 군량(軍糧)을 싣고 행선(行船)하여 일삭(一朔)만에 율도국 지경(地境)에 이르러 군사를 육지에 내리고, 선척(船隻) 파래2 하고 대군을 급히 몰아 쳐들어가니, 각 읍이 문을 열고 맞아 항복하거늘,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지경(地境)을 범하니 수월만에 칠십여 성을 항복 받고, 연(連)하여 쳐들어가니 위엄이 사방에 진동하더라. 백성이 병란(兵亂)을 모르다가 불의에 난(亂)을 당하여 일국이 물 끓듯하여 산중(山中)으로 피란(避亂)하더라.

길동의 대군 후새성에 이르니 율도국 왕도(王都) 불원(不遠)하고 성(城)이 험악(險惡)하여 가볍게 파(破)치 못할지라. 길동이 사십 리 허(許)에 설진(設陣)하고 율도왕에게 격서(檄書)를 보내니라. 율왕이 개탁(開坼)하니 그 글에 하였으되,

“의병장(義兵將) 할미당 행수(行首) 홍길동은 삼가 글월을 받들어 율도국 왕하(王下)에 올리나니. 그대 나라는 본래 한 사람의 그릇이 아니라 천하 사람의 그릇이라. 이러함으로 옛날 성탕(成湯)은 어진 임금이로대 걸(桀)을 명조(鳴條)에서 베었으니, 시고(是故)로 나라를 위하여 전쟁함은 상사(常事)라. 이러하므로 내 삼군(三軍)을 인솔하여 대해(大海)를 건너 한 번 북 쳐 칠십여 성을 항복받고 이에 왔으니, 대왕 재주 있거든 빨리 나와 나와 자웅을 결단하고, 만일 겁(怯)하거던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고 또 위로 왈,

“그대 항복하면 지도군(君)을 봉(封)하리라. 만일 천명을 거역하고 대병을 막다가는 상의라 하고2 나라가 망하여 옥석(玉石)을 분별(分別)치 못하리니 원컨대 대왕은 재삼 생각하라.”

하였더라. 율왕이 남필(覽畢)에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문무제신(文武諸臣)을 모아 의논 왈,

“즉시 출전하라.”

하신대, 제신이 고왈,

“전하(殿下)가 일시 분(忿)하심으로 도적을 대하여 싸우시다 그만 일패(一敗)하오면 후세에 누명(陋名)을 면치 못할지라. 복망(伏望) 성상(聖上)은 칭병불출(稱病不出)하옵고 일군(一軍)으로 도성(都城)을 지키시면 도적이 어쩌지 못할 것이요, 또 군사를 보내어 동정소수구를 막아 적병의 길을 끊사오면 제 아무리 싸우고자 하오나 싸우지 못하옵고, 세월이 오래되면 양초(糧草) 핍절(乏絶)하올 것이니 그 때를 타 조발(調發)하여 치오면 가히 적장을 사로잡으리다.”

하거늘, 율왕이 분연(憤然) 왈,

“적병이 벌써 상안에 웅거(雄據)하였으니 어찌 스스로 퇴병(退兵)함을 기다리리오.”

하고, 정병(精兵) 삼만을 조발(調發)하여 친히 출전코자 하여 서주를 보내어 적세를 탐지하라 하신대 이윽고 군사 보(報)하되,

“적병이 벌써 옥계성을 파하고 성중에 버사18하였다.”

하거늘, 율왕이 군사를 호령하여 양안에 이르니 적병 벌써 사장(沙場)에 진(陣)하였더라.

각설. 길동이 양안 삼사십 리에 결진(結陣)하고, 제장(諸將)을 분발(奮發)할새,

“오늘 오시(午時)에 왕을 사로 잡으리라.”

하고, 선봉장 유면충을 불러 왈,

“그대는 제군을 거느리고 양안 남편에 복병하였다가 내 여차여차 하여 율왕을 인도하여 양안을 지내어, 산곡으로 들어갈 것이니 이리이리 하라.”

하고, 또 군대장 김익순을 불러 왈,

“그대는 삼천 군(三千軍)을 거느리고 산곡 좌우편에 매복하였다가 여차여차 하라.”

하고, 또 에기를 불러 왈,

“그대는 삼천을 거느려 산곡 우편에 복병하였다가 이리이리 하라.”

하신대, 삼장(三將)이 각각 청령(聽令)하고 물러나니라.

이튿날 선봉장 만총이 일천 군을 거느려 사장에 웅거하였다가 평명(平明)에 진문(陣門)을 열고 일성(一聲) 방포(放砲)에 말을 달려 외쳐 왈,

“무도(無道)한 율왕은 무죄한 백성을 죽이지 말고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되, 율왕이 대로(大怒)하여 의갑(衣甲)을 입고 말에 올라 우수(右手)에 유회2 를 들고, 좌수(左手)에 방천극(方天戟)을 들어 내노라 만충을 맞아 수십여 합(合)을 싸우더니, 만충이 거짓 패하여 산곡으로 달아나거늘, 율왕이 꾸짖어 왈,

“쥐 같은 도적은 가지 말고 내 칼을 받으라.”

하고, 급히 말을 달려 양안을 지내어 산곡으로 들어가니, 제장이 외쳐 왈,

“대장은 따르지 마옵소서. 이 곳은 산천이 험악하고 초목이 무성하오니, 이는 반드시 적장의 흉계 있나이다.”

하거늘, 율왕이 대로 왈,

“비록 흉계 있으나 쥐 같은 도적을 어찌 두려워하리오? 제군은 의심치 말고 군사를 재촉하여 나의 뒤를 좇으라.”

하고, 말을 쳐 만충을 좇더니19, 양구(良久) 아니하여 후면으로서 일성(一聲) 방포(放砲)에 대군을 만나니라. 길을 막거늘, 살펴보니, 대장 홍길동 몸에 용린갑(龍鱗甲)을 입고, 머리에 순금 투구를 쓰고, 손에 철퇴(鐵槌)를 들고, 백설마(白雪馬)를 타고 나는 듯이 나오며 외쳐 왈,

“율왕은 달아나지 말고 내 창을 받으라.”

하거늘, 율왕이 대로 왈,

“너 외람(猥濫)한 뜻을 두어 죽기를 재촉하느냐?”

하고, 삼십여 합에 승부를 짓지 못하더니 홀연이 좌편에서 금고함성(金鼓喊聲)이 천지진동(天地震動)하더니 일진(一陣) 군마(軍馬) 치닫거늘, 율왕 적장에게 속은 줄 알고 자퇴(自退)코자 하더니 또한 후군(後軍)이 응한지라. 적병이 산곡에 불을 지르고 일변 추살(追殺)한다 하거늘, 율왕이 황망(慌忙)히 말을 달려 남편(南便)을 바라보고 달아나더니, 문득 전면(前面)으로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어나며 사면(四面)으로 급한 불이 바람을 좇아 들어오거늘, 율왕이 대경하여 앙천(仰天) 탄왈(嘆曰),

“내 남을 쉽게 생각하다가 대환(大患)을 자취(自取)하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

하고, 인하여 칼을 빼어 자결(自決)하니, 그 아들 여차가 부왕(父王)의 신체(身體)를 붙들고 통곡하다가 또한 자결하니라. 길동이 모든 군사를 일시에 항복 받고 군사를 거두어 본진(本陣)으로 돌아와, 제장을 거느리고 승전고(勝戰鼓)를 울리고 율도국 도성에 들어가 백성을 안돈(安頓)하고, 제군을 상사(賞賜)하며, 만충으로 수문어사를 삼고, 율도국 삼백육십 주(州)를 순행(巡行)하여 창곡(倉穀)을 열고 곡식을 내어 백성을 진무(鎭撫)하니, 백성이 신왕(新王)의 덕을 일컫더라.

각설. 이 때는 삼월(三月) 갑자일(甲子日)에 신왕(新王)이 황각전에 전좌(殿座)하시고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아 조회(朝會) 받고, 제장(諸將)을 각(各) 벼슬을 시키고 부귀를 누리게 하고, 대감(大監) 추존(追尊)하여 현덕왕이라 하고, 백웅으로 부원수(副元帥)를 하시고, 그 모친(母親)으로 왕후(王后)를 봉(封)하고, 백씨로 왕비(王妃)를 봉하고, 조씨로 충렬부인을 봉하시고, 정씨로 정절부인을 봉하시고, 각각 궁궐을 지어 거처하게 하시고, 대감 산소는 현릉이라 하고 참봉(參奉)으로 춘추(春秋) 제향(祭享)하게 하고, 정 조 양인(兩人)도 벼슬을 시키시니라.

이 때 왕이 덕을 기르며 밖으로 인정(仁政)을 행(行)하니, 십 년이 못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하고 가급인족(家給人足)하여 도불습유(道不拾遺)하고 사무도적(四無盜賊)하니, 나라에 일이 없고 백성이 격양가(擊壤歌)를 불러 왈,

“요순(堯舜) 적 백성인가, 삼황(三皇) 적 시절인가, 곡식 싹이 질기온대 섞여나고2 채단(綵緞)이 고중(庫中)에 무한(無限)이니 사방이 태평하더라.”

세월이 여류하여 왕후(王后)의 시년(時年)이 칠십세에 몸이 위중(危重)하여 십수년의 영화(榮華)를 받들다가, 병자(丙子) 구월 망간(望間) 우연히 득병(得病)하여 세상을 이별하니, 왕이 붙들고 만성인민(滿城人民)이 망극애통(罔極哀痛)하여 설워함을 마지 아니하더라. 초종(初終)을 극진히 하여 삼삭(三朔) 후에 현릉 좌편(左便)에 안장(安葬)하고 이름을 여흘릉이라 하고, 삼 년 초종(初終)을 극진히 지내고 풍악(風樂)을 갖추어 즐기더라.

왕이 일찍 삼자(三子)를 두었으니 장자(長子)의 명(名)은 창이니 백씨 낳은 바요, 차자(次子)의 명(名)은 선이니 조씨 낳은 바요, 삼자(三子)의 명(名)은 석이니 정씨 낳은 바라. 장자(長子) 창의 위인(爲人)이 총명재승(聰明才勝)하여 가히 왕의 뒤를 본받을레라. 왕이 태자(太子)를 봉하였더니, 왕이 등극하시고 연신산에 자주 거동(擧動)하시더니, 일일은 천지 아득하여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진동하며 운무(雲霧) 영신산에 둘렀거늘, 왕이 대경하여 조신(朝臣)으로 더불어 영신산에 올라가니, 대왕(大王) 대비(大妃) 간 데 없는지라.왕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사방에 방문(訪問)하되 인적(人迹) 없는지라. 망극애통(罔極哀痛)함을 마지 아니하고 등신(等身)을 만들어 허장(虛葬)하고 주야(晝夜) 슬퍼하시더라. 이러하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대왕(大王) 대비(大妃) 백주(白晝)에 승천(昇天)하였다.”

하더라.

각설. 세월이 여류하여 또한 삼십 년 치국(治國)하되, 왕이 현덕(賢德)을 본받아 인의(仁義)를 베풀새 일국이 태평하더라. 이러함으로 율왕이 대대(代代)로 전위(傳位)하니 어찌 아니 조록하리오. 2 세상 사람들이 뉘 아니 칭복(稱福)하리오 하더라.

이 때 조선국 홍승상의 장자 길현이 매일 친산(親山)을 생각하여 길동을 보고자 하더라.

계유(癸酉) 이월(二月) 이일(二日) 날 자서(自書)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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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원문 입력자 주: 내용이 빠졌음. 한문본에는, “有觀相女子 一見人之相貌 則能判一生之吉凶禍福”이라는 대목이 있음.
  2. 원문 입력자 주: 내용이 빠졌음. 서강대 30장본에는, “其傍兩女子 流涕而執之 使不得死. 吉童內心疑訝 與就乙臥處 視傷處 紿之曰, 於我有一箇仙藥 君食之 非但傷處之快差 因爲迎年益壽矣.” 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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