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Contents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책 표지

– 심훈

출전

정음문고, 1974년 9월 10일

  • 전산화: 2005년 8월 14 ~9월 24일

본문

머리말씀

나는 쓰기를 위해서 시를 써 본 적이 없읍니다. 더구나 시인이 되려는 생각도 해 보지 아니하였읍니다. 다만 닫다가 미칠 듯이 파도치는 정열에 마음이 부대끼면 죄수가 손톱 끝으로 감방의 벽을 긁어 낙서하듯 한 것이 그럭저럭 근 백 수2나 되기에 한 곳에 묶어 보다가 이 보잘것없는 시가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가에 관한 이론이나 예투의 겸사는 늘어놓지 않습니다마는 막상 책상 머리에 어중이떠중이 모인 것들을 쓰다듬어 보자니 이목이 반듯한 놈은 거의 한 수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병신 자식이기 때문에 차마 버리기 어렵고 솔직한 내 마음의 결정3인지라 지구4에게 하소연이나 해 보고 싶은 서글픈 충동으로 누더기를 기워서 조각보를 만들어 본 것입니다.

30이면 선다는데 나는 아직 배밀이도 하지 못합니다. 부질없는 번뇌로, 마음의 방황으로 머리 둘 곳을 모르다가 고개를 쳐드니 어느덧 내 몸이 30의 마루터기 위에 섰읍니다. 걸어온 길바닥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나이만 들었으니 하염없게 생명이 좀 썰린 생각을 할 때마다 몸서리를 치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체법 걸음발을 타게 되는 날까지 내 정감의 파동은 이따위 변변치 못한 기록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리라고 스스로 믿고 기다립니다.

1932년 9월 가배절 이틑날

당진 향제에서 심훈

서시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 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장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 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 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1929년 겨울, <검은돌> 집에서

봄의 서곡

봄의 서곡

동무여,
봄의 서곡을 아뢰라,
심금엔 먼지 앉고 줄은 낡았으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새 봄의 해조5를 뜯으라!

그대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줄이야 말 아니 한들 어느 누가 모르냐
그러나 그 아픔은 묵은 설움이
엉기어 붙은 영혼의 동통6이 아니요
입술을 깨물며 새로운 우리의 봄을
빚어 내려는 창조의 고통이다.
진달래 동산에 새 소리 들리거든

너도 나도 줄거이 노래 부르자
범나비 쌍쌍이 날아 들거든
우리도 덩달아 어깨춤 추자.
밤낮으로 탄식만 한다고 우리 봄은 저절로 굴러들지 않으리니 —
그대와 나, 개미 떼처럼
한데 뭉쳐 꾸준하게 부지런하게
땀을 흘리며 폐허를 지키고
또 굽히지 말고 싸우며 나가자.
우리의 역사는 눈물에 미끄러져
뒷걸음치지 않으리니–

동무여,
봄의 서곡을 아뢰라
심금엔 먼지 않고 줄은 낡았으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닥쳐올 새 봄의 해조를 뜯으라.

1931.2.23

피리

내가 부는 피리 소리 곡조는 몰라도

그 사람이 그리워 마디마디 꺽이네.

길고 가늘게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어서–

봄 저녁의 별들만 눌물에 젖네.

1929.4

봄비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늘 두드리시네

건반 우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엔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숨도 못 이루시네.

1929.4

거리의 봄

지난 겨울 눈밤에 얼어 죽은 줄 알았던 늙은 거지가
쓰레기통 곁에 살아 앉았네.
허리를 펴면 먼 산을 바라다보는 저 눈초리!
우묵하게 들어간 그 눈동자 속에도
봄이 비최는구나 봄빛이 떠도는구나.

원망스로워도 정든 고토7에 찾아드는 봄을
한 번이이라도 저 눈으로 더 보고 싶어서
무쇠도 얼어 붙는, 그 치운 겨울에 이빨을 앙물고 살아 왔구나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뻗어 볼 시절이 올 것을
점쳐 아는 늙은 거지여 그대는 이 땅의 선지자로다.

사랑하는 젊은 벗이여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거두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탄식의 뿌리를 뽑아 버리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아 왔거늘
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앞에 오고야 말 것을
아아, 어지하여 그대들은 믿지 않는가?

1929.4.19

영춘 삼수

책상 우에 꺽어다 꽂은 복숭아꽃
잎잎이 시들어선 향기 없이 떨어지니
네 열매는 어느 곳에 맺으려는고.

개천 바닥을 뚫고서 언덕 우로
파릇파릇 퍼어 오르는 풀 잎새
망아지나 되어지고 송아지나 되어지고.

창경원 벚꽃 구경을
휩쓸려 들어갔다가 등을 밀려 나오니
가등8 밑에 기다란 내 그림자여!

1929.4.28

나의 강산이여

높은 곳에 올라 이 땅을 굽어보니
큰 봉우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여, 아지랑이 속으로 시선이 녹아드는 곳까지 오똑오똑 솟았다가는 굽이쳐 달리는 그 산줄기 네 품에 안켜 딩굴고 싶도록 아듬답고나.

소나무 감송감송 목멱9 등어리는
젖 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은 적의 앞에 뽑아든 칼끝처럼 한 번만 찌르면 먹장구름 쏟아질 듯이 아직도 네 기상이 늠름하구나.

에워싼 것이 바다로되 물결이 성내지 않고 샘과 시내로가늘게 수놓았건만 그 물이 맑고 그 바다 푸루서서,
한 모금 마시면 한10백년이나 수11를 할 듯 퐁퐁퐁 솟아서는 넘쳐넘쳐 흐르는 구나.

할아버지 주무시는 저 산기슭에
할미꽃이 졸고 뻐꾹새는 울어예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도 돌아만 가면 저 언덕 우에 편안히 묻어 드리고
그 발치에 나도 누워 깊은 설움 잊으오리다.

바가지 쪽 걸머지고 집 떠난 형제,
거칠은 벌판에 강냉이 이삭을 줍는 자매여,
부디부디 백골이나마 이 흙 속에 돌아와 묻히소서,
오오 바라다볼수록 아름다운 나의 강산이여!

1926.5

어린이날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의 행렬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추겨 줍니다.
비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사존들이라,
일 년의 한 번 나들이에도 깃지 젖습니다그려.

여러분은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살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만 얼크러진 벌판에도 봄이 오며는
하늘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
지둥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1929.5.5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동요의 나라 동화의 세계로
다시 한 번 이 몸이 돌아가지이다.

세상 티글에 파묻히고
살길에 시달린 몸은
선잠 깨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루만지던 엄마의 젖가슴에 안기고 싶습니다, 품기고 싶습니다.
그 보드랍고 따뜻하던 옛날의 보금자리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오리까
엄마의 젖꼭지는 말라 붙었고
제 입은 계집의 혀를 빨았읍니다.
엄마의 젖가슴은 식어 버리고
제 염통에는 더러운 피가 괴었읍니다.

바람이 부더이다, 바람이 차더이다.
온 세상이 거칠고 쓸쓸하더이다.
가는 곳마다 차디찬 바람을
등어리에 끼얹어 주더이다.

오오 와 다오, 포근한 잠아!
하염없는 희망을 덮고
끊임없이 근심스러운 마음 우에
한 번 다시 그 잠이 와 주려무나.

  • 「자장 자장 잘두 잔다
    • 얼뚱아기 잘두 잔다
      • 자장골에 들어가니

      그 골에는 잠두 많어

    센둥이두 자드란다

    • 검둥이두 자드란다」

엄마도 이 노래를 부르시다가 꼬박꼬박 졸음이 와서
내 이마에다 이마뚝도 하셨었지.

노근한 봄말
낮잠 주무시는 할아버지의
은실 같은 수염을 뽑아 가지고
개나리 회초리에 파리를 매어

  • 「잠자로 종조옹
    • 파아리 종조옹
    • 이리 오면 사느니라
      • 저리 가면 죽느니라……」

고초자지 달랑거리고
논둑 건너 밭이랑 넘어
나비같이 돌아다니던
귀여운 어린 천사야
아아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

함박눈이 울 안을 덮고
밭전자 들창에 달빛이 물들 때
언니하고 자리 속에서 듣던
할머니의 까치 이야기는
어ㅉ저면 그렇게도 재미가 있었을까요?
여우한테 물려간 까지 새끼가
가없고 뿔쌍해서 울었었지요.
찾아다 달라고 떼를 쓰면 울었었지요.

아아 옛날의 보금자리에
이 몸을 포근히 품어 주소서.
하루도 열 두 번이나 거짓말을 시키고도
얼굴도 붉히지 말라는 세상이외다.
사람의 마음도 돈으로 팔고 사는
알뜰히도 더러운 세상이외다.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동요의 나라, 동화의 세계로
한 번만 다시 돌아가지이다.

1922.2

필경(筆耕)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우를 갈[耕]며 나간다.
한 자리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머칠은 산기슭에 한 이랑]의 화전을 일려면
돌부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 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그러나 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과 동맥의 피
최후의 일적12까지 종이 우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의 바퀴가 역전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날을 기약하는 우리의 정성이 굽힐 것인가
동지여 우리는 퇴각 모르는 전위의 투사다.

<박탈>, <아사>, <음독>, <자살>의 경과 보고가 우리의 밥벌이냐
<아연활동>, <검거>, <송국>, <판결언도>, <5년>, <10년>의
<스코어>를 적는 것이 허구헌날의 직책이란 말이냐
창 끝같이 철필촉을 베려 모든 암흑면을 파헤치자
샅샅이 파헤쳐 온갖 죄악을 백주에 폭로하자.

<스위치>를 젖혔느냐 윤전기가 돌아가느냐
깊은 밤 맹수의 포효와 같은 굉음과 함께
한 시간에도 몇만 장이나 박아 돌리는 활자의 위력은,
민중의 맥박을 이어 주는 우리의 혈압이다.
오오 붓을 잡은 자여 위대한 심장의 파수병이여!

1930.7

명사십리

시푸른 성낸 파도 백사장에 몸 부딪고
먹장구름 꿈틀거려 바다 우를 짓누르네
동해도 우울한 품이 날만 못지않구나.

풍덩실 몸을 던져 물결과 태껸하니
조알만한 세상 근심 거품같이 흩어지네,
물가에 가제집 지며 하루 해를 보내다.

해당화

해당화 해당화 명사십리 해당화야
한 떨기 홀로 핀게 가엾어서 꺽었거니
네 어찌 가시로 찔러 앙갚음을 하느뇨.

빨간 피 솟아 올라 꽃입술에 물이 드니
손끝에 핏방울은 내 입에도 꽃이로다
바닷가 흰 모래 속에 토닥토닥 묻었네.

송도원(松濤園)

뛰어라 창랑13 우에 굴러라 백사장에
여름이 한철이니 기를 펴고 뛰놀아라
<아담>과 <이브>의 후예이니 무슨 설움 있으랴.

물 너머 지는 해에 흰 돛이 번득이고
백구도 돌아들 제 뭍에 오른 <비이너스>
송풍14에 머리 말리며 파도15 소리 듣더라.

총석정(叢石亭)

멀리선 생황이요 다가보니 <빌딩>일세
촉촉 능릉 온갖 형용 엄청나 못 붙일레
신기ㅎ다, 조물주의 손장난도 이만하면 관주러라.

벌집같이 모난 돌이 창대처럼 뻗어 올라
창공이 구녕날 듯 비바람 쏟아질 듯
격랑에 돌부리 꺽어질까 소름 오싹 돋더라.

1932.8.10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구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0.3.1

통곡 속에서

큰 길에서 넘치는 백의의 물결 속에서 울음 소리 일어난다.
총검이 번득이고 군병의 말굽 소리 소란한 곳에
분격한 무리는 몰리며 짓밟히며
따에 엎디어 마지막 비명을 지른다
땅을 뚜드리며 또 하늘을 우러너
외오치는 소리 느껴 우는 소리 구소16에 사무친다.

검은 <댕기> 드린 소녀여
눈송이같이 소복 입은 소년이여
그 무엇이 너희의 작은 가슴을
안타깝게도 설움에 떨게 하더냐
그 뉘라서 저다지도 뜨거운 눈물을
어여쁜 너희의 두 눈으로 짜내라 하더냐?

가지마다 신록의 아지랭이가 되어 오르고
종달새 시내를 따르는 즐거운 봄날에
어찌하여 너희는 벌써 기쁨의 노래를 잊어버렸는가?
천진한 너희희 행복마저 차마 어떤 사람이 빼앗아 가던가?

할아버지여! 할머니요!
오직 무덤 속의 안식밖에 희망이 끊친 노인네여!
조팝17 주름잡힌 얼굴은 누르렀고 세고18에 등은 굽었거들
창자를 쥐어짜며 애통하시는 양은 차마 뵙기 어렵소이다.

그치시지요 그만 눈물을 걷으시지요
당신네의 쇠잔한 백골이나마 편안히 묻히고자 하던 이 땅은
남의 <호미>가 샅샅이 파헤친 지 이미 오래어늘
지금에 피나게 우신들 한 번 간 옛날이
다시 올아올 줄 아십니까?

해마다 봄마다 새 주인은
인정전 <벚꽃>그늘에 잔치를 배풀고
이화의 휘장은 낡은 수레에 붙어
티끌만 날리는 페허를 굴러 다녀도
일후19란 뉘 있어 길이 설어나 하라마는……

오오 쫓겨 가는 무리여
쓰러져 버린 한낱 우상 앞에 무릅을 꿇지 말라!
덧없는 인생 죽고야 마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어니!
한 사람의 돌아오지 못함을 굳이 설어하지 말라.

그러나 오오 그러나
철천의 한을 품은 청상20의 설움이로되
이웃집 제단조차 무너져 하소연할 곳 없으니
목맺혀 울고자 하나 눈물마저 말라붙은
억색21한 가슴을 이 한날에 뚜드리며 울자!
이마로 흙을 비비며 눈으로 피를 뿜으며 —

4월 29일

생명의 한 토막

내가 음각가가 된다면
가느다란 줄이나 뜯는
제금가22는 아니 되려오.
Hight C까지나 목청을 끌어 올리는
<카루소>같은 성악가가 되거나

<쇼ㅏㄹ23라핀>만치나 우렁찬 <베이스>로,
내 설움과 우리의 설움을 버무려
목구멍에 피를 끓이며 영탄24 노래를 부르고 싶소.

창자 끝이 묻어나도록 성량껏 내뽑다가
설움이 복받쳐 몸둘 곳이 없으면
몇 만 청중 앞에서 거꾸러져도 좋겠소.

내가 화가가 된다면
<피아드리>처럼 고리삭고
<밀레>처럼 유한25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이 살아서
구름 속 용같이 꿈틀거리는
<반·고호>의 필력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꺼멓고 싯붉은 원색만 써서
우리의 사는 꼴을 그려 보아도,
대대손손이 전하여 보여주고 싶지는 않소.
그 그림은 한칼로 찢어 버리기를 바라는 까닦에……

무엇이 되든지 내 생명의 한 토막을
짧고 굵다랗게 태워 버리고 싶소!

1932.0.8

너에게 무엇을 주랴

너에게 무엇을 주랴
맥이 각각으로 끊어지고
마지막 숨을 가쁘게 들이모는
사랑하는 너에게 무엇을 주랴

눈물도 소매를 쥐어짜도록 흘려 보았다.
한숨도 땅이 꺼지도록 쉬어 보았다.
그래도 네 숨소리는 더욱 가늘어만 가고
시방은 신음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물도 한숨도 소용이 없다.
<죽음>이란 엄숙한 사실 앞에는
경 읽거나 무꾸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당장에 숨이 끊어지는 너를
손끝맺고 들여다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에게 딸린 생명이 하나요 둘도 아닌 것을……

오직 한 가지 길이 남았을 뿐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따끈한 피를
그 입속에 방울방울 떨어뜨리자!
우리는 반드시 소생할 것을 굳게 믿는다.
마지막으로 붉은 정성을 다하여
산 제물로 우리의 몸을 너에게 바칠 뿐이다!

1927.3

박군의 얼굴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콜>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26같이 부풀어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 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에
양미간에는 가까이 못 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사람의 박(朴)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生)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뀌어져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아 박군아 XX27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28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1927.12.2

조선은 술을 먹인다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입을 어기고29 독한 술잔으로 들이붓는다.

그네들의 마음은 화장터의 새벽과 같이 쓸쓸하고
그네들의 생활은 해수욕장의 가을처럼 공허하여
그 마음 그 생활에서 순간이라도 떠나고자 술을 마신다.
아편 대신으로 죽음 대신으로 <알콜>을 삼킨다.

가는 곳마다 양조장이요 골목마다 색주가다
<카페>의 의자를 부수고 술잔을 깨뜨리는 사나이가
피를 아끼지 않는 조선의 <테로디스트>요,
파출소 문앞에 오줌을 깔기는 주정꾼이
이땅의 가장 용감한 반역아란 말이냐?
그렇다면 전한목을 붙안고 통곡하는 친구는
이 바닥의 비분을 독차지한 지사로구나.

아아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뜻이 굳지 못한 청춘들의 골을 녹이려 한다.
생재목에 <알콜>을 끼얹어 태워 버리려 한다.

1929.12.10

독백

사랑하는 벗이여,
슬픈 빛 감추기란 매맞기보다도 어렵소이다.
온갖 설움을 꿀꺽꿀걱 참아 넘기고
낮에는 히히 허허 실없는 체하건만
쥐죽은 듯한 깊은 밤은 사나이의 통곡장이외다.

사랑하는 벗이여,
분한 일 참기란 생목숨 끊기보다도 힘드오이다.
적덩이처럼 치밀어 오르는 가슴의 불길을
분화구와 같이 하늘로 뿜어 내지도 못하고
청춘의 염통을 <알콜>에나 젓 담그려는
이놈의 등어리에 채찍이라도 얹어 주소서.

사랑하는 그대여,
조상에게 그저 받은 뼈와 살이어늘
남은 것이라고는 벗거벗은 알몸뿐이어늘
그것이 아까와 놈들 앞에서 절하고 무릎을 꿇는 나는 <샤일록>보다도 더 인색한 놈이외다.
쌀 삶은 것 먹을 줄 아니 그 이름이 사람이외다.

1929.6.13

조선의 자매여

  • — 홍, 김 두 여성의 변사를 보고

나는 그대들의 죽음이 너무나 참혹하여 눈물지었노라
그대들의 흘린 피가 너무나 값 없음을 아끼어 울었노라
우리는 흙 한줌 보태기에도 오히려 작은 알몸뿐이다
강아지에게 던져도 씹지 않을 고깃덩이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생선 같은 청춘의 몸을 철로 바탕에 쌍으로 던져
20년이나 자라난 사지를 잘리고 뼈를 갈아 버리다니
그 한 점의 살 한 방울의 피가 그다지 값 없는 줄 알았던가.

오 약하고 가엾은 이 땅의 누이들이여,
그대들이 저주한 모든 제도는 본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랑도 허무도 마음 속에 떠도는 한 조각의 구름장인걸
무엇을 꺼려어 주순30을 열어 부르짖지도 못하고
가냘픈 손에나마 반역의 깃대를 들지 못했는가
<청천백일31> 밑에 팔을 뽐내는 이웃 나라의 여성을 보라.

사랑에 침취하여 쥐잡는 약을 사람이 삼키고
인생이 허무ㅎ다 하여 헛되이 생명을 태질치던 것은
이미 세기가 몇 번이나 바뀌인 옛날의 비극이다
우리에게서 청산된 지 오래된 소극의 감정이다
가엾다!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그 잔혹을 마시며
생목숨 끊는 것으로 유일한 자유를 삼으려는가
어버이와 형제의 은혜를 자멸로써 갚으려 하는가
젊고 아름다운 이 땅의 여성이여,
지금은 봄이다! 4월의 태양이 구르는 폐허 우에
기를 펴고 우리와 함께 달음질할 준비를 하자!
개천 바닥에 콸콸콸 얼음장 뚫는 물소리 들리나니
한 방물의 피라도 혈관 밖으로 쏟아 버리지 말라
가슴 속에는 정의에 불붙는 새빨간 염통이 방아를 찧거늘
그 소중한 염통을 양잿물로 썩히거나 철로 바탕에 버리지 말라
나의 사랑하는 조선의 자매여!

1931.4.9

짝 잃은 기러기

짝 잃은 기러기

짝 잃은 기러기 새벽 하늘에
외마디 소리 이끌며 별밭을 가(耕)네.
단 한잠도 못 맺은 기나긴 겨울 밤을
기러기 홀로 나 홀로 잠든 천지에 울며 헤매네.

허구헌날 밤이면 밤을
마음 속으로 파고만 드는 그의 그림자,
덩이피에 벌릉거리는 사나이의 염통이
조그만 소녀의 손에 사로잡히고 말았네.

1926.2

고독

진종일 앓아 누워 다녀간 것들 손꼽아 보자니
창살을 걸어간 햇발과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
두 손길 펴서 가슴에 얹은 채 임종 때를 생각해 보다.

그림자하고 단둘이서만 지내는 살림이어늘
천장이 울리도록 그의 이름은 왜 불렀는고
쥐라도 들었을새라 혼자서 얼굴 붉히네.

밤 깊어 첩첩이 닫힌 덧문 밖에 그 무엇이 뒤설레는고
미닫이 열어젖히자 굴러드느니 낙엽 한 잎새
머리맡에 어루만져 재우나 바시락거리며 잠은 안 자네.

값 없는 눈물 흘리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맹세했던고
울음을 씹어서 웃음으로 삼키기도 한 버릇 되었으련만
밤중이면 이불 속에서 그 울음을 깨물어 죽이네.

1929.10.10

한강의 달밤

은하수가 흘러 나리는 듯 쏟아지는 달빛이
잉어의 비늘처럼 물결 우에 뛰노는 여름 밤에
나와 <보우트>를 같이 탄 세 사람의 여성이 있었다.

으늑한 <포플라> 그늘에 뱃머리를 대고
손길을 마주 잡고서 꿈속같이 사랑을 속삭이려면
달도 부끄럼을 타는 듯 구름 속으로 얼굴을 가렸었다.

물결도 잠자는 백사장에 찍혀진 발자국은
어느 곳에 끝이 나려는 두 줄기 <레일(軌度)>이던가
몇 번이나 두 몸이 한덩이로 뭉쳤었던가.

아아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모든 것이 꿈이다
초저녁에 꾸다가 버린 꿈보다도 허무하고
기억조차 저 물결같이 흐르고 말려 한다.

그 중에 가장 어여쁘던 패성32의 계집아이는,
돈 있는 놈에게 속아서 못된 병까지 옮아,
피를 토하다가 청춘을 북망산에 파묻었다.

「당신 아니면 죽겠어요」하던 또 한 사람은,
배맞았던 사나이와 벌어진 틈에 나를 끼워서
얕은 꾀로 이용하고는 발꿈치를 돌렸다.

마지막 동혈의 굳은 맹세로 지내오던 목소리 고운 여자는
「집 한 간도 없는 당신과는 살 수 없어요」라고
일전 오리 엽서 한 장을 던지더니 남의 첩이 되었다.

그들은 달콤한 것만 핥아 가는 꿀벌과 같이
내 마음의 순진한 정열을 다투어 빨아 가고
골안개처럼 내 품에서 감돌다가는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 밤도 그 강변에 그 물결이 노닐고 그 달이 밝다
하염없이 좀썰려 꺼풀만 남은 청춘의 그림자를
길로 솟은 <포플라> 그늘이 가로 세로 비질을 할뿐……

1930.8

풀밭에 누워서

가을날 풀밭에 누워서
우러러보는 조선의 하늘은
어쩌면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높을까요?
닦아논 거울인들 저보다 더 깨끗하오리까.

바라면 바라다볼수록
천리 만리 생각이 아득하여
구름장을 타고 같이 떠도는 내 마음은,
애달픈 심란스럽기 비길 데 없소이다.

오늘도 만주 벌에서는 몇천 명이나 우리 동포가
놈들에게 쫓겨나 모진 악형까지 당하고
몇십 명씩 묶여서 총을 맞고 꺼꾸러졌다는 소식33!

거짓말이외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거짓말 같사외다.
고국의 하늘은 저다지도 맑고 푸르고 무심하거늘
같은 하늘 밑에서 그런 비극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소이다.

안땅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상팔자지요.
철창 속에서라도 이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이 명랑한 햇발을 쬐어 볼 수나 있지 않습니까?

논두렁에 버티고 선 허사비처럼
찢어진 옷 걸치고 남의 농사에 손톱 발톱 달리다가
풍년 든 벌판에서 총을 맞고 그 흙에 피를 흘리다니……

미쳐날 듯이 심란한 마음 걷잡을 길 없어서
다시금 우러드니 높고 맑고 새파란 가을 하늘이외다
분한 생각 내뿜으면 저 하늘이 새빨갛게 물이 들 듯하외다.

1930.9.18

가배절

팔이 곱지 않았으니 더덩실 춤을 못 추며
다리 못 펴 병신이 아니니 가로 세로 뛰진들 못 하랴
벼 이삭은 고개 숙여 벌판에 금물결이 일고
달빚은 초갓집 용마루를 어루만지는 이 밤에–

뒷동산에 솔잎 따서 송편을 찌고
아랫목에 신청주 익어선 밥풀이 동동
내 고향의 추석도 그 옛날엔 풍성했다네
비렁뱅이도 한가위엔 배를 두드렸다네.

기쁨에 넘쳐 동내방내 모여드는 그날이 오면 기저귀로 고깔 쓰고 무둥 서지 않으리
쓰레받기로 꽹과리치며 미쳐나지 않으리
오오 명절이 그립구나! 단 하루의 경절이 가지고 싶구나!

1929.9.17

고향은 그리워도

나는 내 고향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10년이나 되건만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넘어연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 주택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신사가 들어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오대나 내려오면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의 은행나무나 부등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굵도록 정이 든 그 산과 그 들을
무슨 낯짝을 쳐들고 보더란 말이요?
번접하던 식구는 거미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 줄 성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최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찣기면 어찌 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소.

1932.10.6

추야장(秋夜長)

귀뚜라미는 문지방을 쪼아대고
뭇퍼레 덩달아 밤을 써는데
눈 감고 책상 머리에 앉았으려면
내 마음은 가볍고 무서운 생각에 눌려,
깊이 모를 바다 속으로 가라 앉는다.
백 길 천 길 한정 없이 가라앉는다.

그 물 속에서 가만히 눈을 뜨면
작은 걱정은 송사리 떼처럼 모여들어
머리를 마주 모았다가 흩어지고
큰 근심은 낙지박 같은 흡반으로
온 몸을 칭칭 감고 떨어질 줄 모른다.
나는 그 근심을 떼치려고 몸을 뒤튼다.

그럴 때마다 내 눈앞에 반짝 뜨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꽃같이 새빨간 산호다.
파아란 해초 속에서 불이 붙는 산호 가지는
내 가슴에 둘도 없는 귀여운 패물이다.
가지마다 새로운 정열을 부채질하는
꺼지지 않는 사랑의 조그만 표상이다.

바닷속은 캄캄하고 차디찬 물결이 흘러도
그 산호 가지만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 괴로울 것이 없다.
불타는 사랑과 뜨거운 정열로
이 몸을 태우는 동안에는 온갖 세상 근심이
고기밥이 된다, 거품처럼 흗어지고 만다.

귀뚜라미야 밤을 새워 가며 울거나 말거나
바람이야 삭장귀에 몸을 매달거나 말거나
나는 잠자코 내 가슴의 보배를 어루만진다.
밝을 줄 모르는 가을 밤, 깊이 모르는 바다 속에서
눈을 감고 그 산호 가지를 어루만진다.

1931.10.9

소야락(小夜樂)

달빛같이 창백한 각광을 받으며
흰 구름장 같은 <드레스>를 가벼이 끌면서
처음으로 그는 <세레나아데>를 추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애달픈 <멜로디>에 맞춰
사뿟사뿟 때어 놓은 길고 희멀건 다리는
무대를 바다 삼아 물생선처럼 뛰었다.

그 <멜로디>가 고대로 귀에 젖어 있다.
두 손을 젖가슴에 얹고 끝마칠 때의 <포오즈>가
대리석의 조각인 듯 지금도 내 눈 속에 새긴 채 있다.

그 때까지 그는 참으로 깨끗한 소녀였다.
돈과 명예와 사나이를 모르는 귀여운 처녀였다.
나의 청춘의 반을 가져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30.9

첫 눈

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립니다.
삼승버선이 엎어 신고 사뿟사뿟 내려앉습니다.
논과 들과 초갓집 용마루 우에
배꽃처럼 흩어져 송이송이 내려앉습니다.

조각조각 흩날리는 눈의 날개는
내 마음을 고이고이 덮어 줍니다.
소복 입은 아가씨처럼 치맛자락 벌리고
구석구석 자리를 펴고 들어앉습니다.

그 눈이 녹습니다. 녹아 내립니다.
남몰래 짓는 눈물이 속으로 흘러들 듯
내 마음이 뜨거워 그 눈이 녹습니다.
추녀 끝에, 내 가슴 속에 줄줄이 흘러 내립니다.

1930.11

눈 밤

소리없이 내리는 눈, 한 치, 두 치 마당 가뜩 쌓이는 밤엔

생각이 길어서 한 자외다, 한 길이외다.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편지나 써서 온 세상에 뿌렸으면 합니다.

1929.12.23

패성(浿城)의 가인(佳人)

네 무덤에 눈이 덮였구나
흰 조갑지를 씻어서 엎어논 듯
새하얀 눈이 소복히 쌓였구나.

흑진주같이 영롱하던 너의 눈도
복숭아를 쪼개논 듯 연붉던 너의 입도
그리고 풀솜처럼 희고 부드럽던 너의 살도
저 눈 속에, 저 흙 속에 파묻히고 말았구나.
네 마음 속의 조그만 허영이
죄 없는 네 몸을 죽음의 길로 이끌었다.
참새가 한 섬 곡식을 다 먹지 못하고
비단 옷도 열 겹 스무 겹 껴입지는 못할 것을
논에 몸을 팔아 일찌감치 죽음을 샀구나.

<구두>를 전당잡혀 고무신짝을 끌고
네게로 달려갔을 때 너는 나를 보지도 않았더니라.
병든 네 몸을 위하여 그 사나이와 칼부림할 때
너는돌아앉아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더니라.
대동강은 얼음만 풀리면 전과 같이 흐르려니
이제 청류벽을 끼고 도는 내 그림자만 외롭구나! 봄이나 와야 저 산기슭에 새들이 울어 주지 않으랴 꽃이나 피어야 네 무덤에 한 송이 꽂아 주지 않으랴.

1925.2

동우(冬雨)

저 비가 줄기줄기 눈물일진대
세어 보면 천만 줄기나 되엄즉허이,
단 한 줄기 내 눈물엔 배게만 젖지만
그 많은 눈물비엔 사태가 나지 않으랴.
남산인들 삼각산인들 허물어지지 않으랴.

야반에 기적 소리!
고기에 주린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냐
우리네 젊은 사람의 울분을 뿜어내는 소리냐
저력 있는 그 소리에 주춧돌이 움직이니
구들장 밑에서 지진이나 터지지 않으려는가?

하늘과 땅이 맞붙어서 맷돌질이나 하기를
빌고 바라는 마음 몹시도 간절하건만
단 한 길 솟지도 못하는 가엾은 이 몸이여
달리다 뛰면 바단들 못 건너리만
걸음발 타는 동안에 그 비가 너무나 차구나!

1929.12.14

선생님 생각

날이 몹시도 춥습니다.
방 속에서 떠다 놓은 <숭늉>이 얼구요,
오늘 밤엔 영하로도 20도나 된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속에서 오죽이나 추우시리까?
얼음장같이 차디찬 마룻방 우에
담여 자락으로 노쇠한 몸을 두르신
선생님의 그 모양 뵈옵는 듯합니다.

석탄을 한 아궁이나 지펴넣은 온돌 우에서
홀로 딩굴며 생각하는 제 마음 속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습니다그려.
아아 무엇을 망설이고 진작 따르지 못했을까요?
남아 있어 저 한 몸은 편하고 부드러워도
가슴 속엔 <성애>가 슬고 눈물이 고드름 됩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젊은데요
어째서 벌써 혈관의 피가 말랐을까요?
이 한밤엔 창밖에 <고구마> 장사의 외치는 소리도
떨리다가는 길바닥에 얼어 붙고
제 마음은 선생님의 신변에 엉기어 붙습니다.
그 마음이 스러져 가는 화로 속에 깜박거리는
한덩이 숯(木炭)만치나 더웠으면 합니다.

1930.1.5

태양의 임종

태양의 임종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너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태양이여, 네게는 운명할 때가 돌아오지 않은가」하고.

억만 년이나 꾸준히 우주를 밭갈고 있는
무서운 힘과 의지를 가지고도 너는 눈이 멀었다.

사람은 뒷간 속에 <구데기>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정의의 심장은 미친 개의 이빨에 물려 뜯기되
못 본 체하고 세기와 세기를 밟고 지나가는 너의 발자취!
너는 O억만 촉광의
엄청난 빛을 무심한 공간에 발사하면서
백주에 캄캄한 지옥 속에서 울부짖는 무리에게는
반딧불만한 편광조차 아끼는 인색한 놈이다.

네 얼굴에 여드름이 돋으면 지각에 화산이 터지고
네 한 진노하면 문명을 자랑하던 도시도
하루 아침에 핥아 버리는 몇 만 도의
잠열을 지배하는 위력을 땅 속에 감추어 두고도
한 자루의 총칼을 녹일 만한 작은 힘조차
우리 젊은 사람에게 빌려 주고자 하지 않는다.

해여, 태양이여!
대륙에 매어달린 조그만 이 반도가
네 눈에는 쓸데없는 맹장과 같이 보이는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이다지도 이다지도 짓밟혀만 살라고
악착한 운명의 부작을 붙여서
우리의 시조부터 흙으로 빚었더란 말이냐?

오오 위대한 항성이여
일 분 동안만 네 궤도를 미끄러져
한 걸음만 가까이 지구로 다가오라!
그러면 우리는 모조리 타죽고나 말리라.
그도 못 하겠거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라……
북극의 흰 곰들이나 우리의 시체 우에서
즐거이 뛰놀며 자유롭게 살리라.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네가 지평선을 넘은 뒤까지도
「차라리 너의 임종 때가 돌아오지나 않는가」하고……

1928.10

광란의 꿈

블어라, 불어!
하늘 꼭대기에서
내리질리는 하늬바람,
땅덩이 복판에 자루를 박고
모든 것을 휩싸서 핑핑 돌려라.
머릿속에 맷돌이 돌 듯이
세상은 마지막이다, 불어 오너라.

쏟아져라, 쏟아져!
바다가 거꾸로 흐르듯
폭포수 같은 굵은 빗발이
쉴 새 없이 기울여 쏟아져서
사람의 새끼가 짓밟은
땅 우의 모든 것을
부신 듯이 씻어 버려라!

번갯불이 번쩍
으지끈 뚜욱 따악
벼락 불똥이 튀어
뾰족집을 후려갈기고
우상, 동상을 자빠뜨리고
선정비, 송덕비, 영세불망비,
닥치는 대로 깨뜨려서
모든 거룩하다는 것 우에
벼락불의 세례를 내려라.

지진이다, 지진, 대지진이다!
나무 뿌리가 하늘로 솟고
바윗덩이가 굴러 내린다.
지구는 두 쪽에 갈라지고
모든 것은 가꾸로 섰다, 뒤집혀졌다.

불이야, 불이야!
분 바른 계집의 얼굴을 끄스르고
「당신을 사랑합니다」하는
조동아리를 지져 놓아라!
길로 쌓인 인류의 역사를
첫 <페이지>부터 살라 버리고
천만 권 거짓말의 기록을
모조리 깡그리 태워 버려라.

16억의 사람의 씨알들이
악마구리 끓듯 한다, 아우성을 친다.
사람은 이빨을 갈며
사람의 고기를 물어뜯고
뼉다귀를 다투어 깨무는
주린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해골을 쪼아먹는 까마귀의 떼울음!

불길이 훨훨 날으며
온 지구를 둘러쌌다,
새빨간 혀 끝이 하늘을 핥는다
모든 것은 죽어 버렸다,
영원히 영원히 죽어 버렸다,
명예도, 욕망도, 권력도, 야만도, 문명도……

바람소리 빗소리!
해가 떨어지고 별은 흩어지며
땅이 울고 바다가 끓는다.
모든 것은 원소로 돌아가고
남은 것이란 희멀건 공간 뿐이다,
오오 이제까지의 인류는 멸망하였다!
오오 오늘까지의 우주는 개벽하고 말았다!

1923.10

마음의 낙인

마음 한복판에 속 깊이 찍혀진 낙인을
몇 줄기 더운 눈물로 지어 보려 하는가,
칼끝으로 도려낸들 하나도 아닌 상처가 가시어질 것인가
죽음은 홍소34한다. 머리맡에 쭈르리고 앉아서……

자살한 사람의 시집을 어루만지다 밤은 깊어서
추녀 끝의 풍경 소리 내 상여 머리에 요령이 흔들리는 듯.
혼백은 시꺼먼 바닷속에 잠겨 자맥질하고
허무히 그림자 악어의 입을 벌리고 등어리에 소름을 끼얹는다.

쓰라린 기억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앞길은
행복이란 도깨비가 길라잡이 노릇을 한다.
꿈속에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어릿광대들
개미 떼처럼 뒤를 따라 첫바퀴를 돌고 도는걸……

<캄풀> 주사 한 대로 절맥되는 목숨을 이어 보듯이
젊은이여 연애의 한 찰나에 목을 매달려는가?
혈관을 토막토막 끊으면 불이라도 붙을 성싶어도
불 꺼져 재만 남은 화로를 헤집는 마음이여!

모든 것이 모래밭 우의 소꼽장난이나 아닌줄 알았더면
앞장을 서서 놈들과 겯고 틀어나 볼 것을
길거리로 달려나가 실컷 분풀이나 할 것을
아아 지금엔 희멀건 허공만이 내 눈앞에 틔어 있을 뿐……

1930.5.24

토막 생각

  • — 생활시

날마다 불러 가는 아내의 배,
낳은 날부터 돈 들 것 꼽아 보다가
손가락 못 편 채로 잠이 들었대.

뱃속에 꼬물거리는 조그만 생명
「네 대에나 기를 펴고 잘 살아라!」
한 마디 축복밖에 선사할 게 없구나.

<아버지> 소리를 내 어찌 들으리
나이 30에 해논 것 없고
물려줄 것이라곤 <선인35>밖에 없구나.

급사의 봉투 속이 부럽던
월급날도 다시는 안 올 성싶다
그나마 실직하고 스무 닷샛날.

전등 끊어 가던 날 밤 촛불 밑에서
나어린 아내 눈물 지며 하는 말
「시골 가 삽시다, 두더지처럼 흙이나 파먹게요.」

오관으로 스며드는 봄
가을 바람인듯 몸서리쳐진다.
조선 팔도 어는 구석에 봄이 왔느냐.

불 꺼진 화로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 내듯이
식어버린 정열을 더듬어 보는 봄저녁.

옥중에 처자 잃고
길거리로 미쳐난 머리 긴 친구
밤마다 백화점 기웃거리며 휘파람 부네.

선술 한잔 내라는 걸
주머니 뒤집어 털어 보이고
돌아서니 <카페>의 붉고 푸른 불.

그만하면 신경도 죽었으련만
알뜰한 신문만 펴들면
불끈불끈 주먹이 쥐어지네.

몇 백 년이나 묵어 구멍 뚫린 고목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엄이 돋네
뿌리마다 썩지 않은 줄이야 파 보지 않은들 모르리.

1932.4.24

어린것에게

고요한 밤 너의 자는 얼굴을 무심ㅎ고 들여다볼 때,
새근새근 쉬는 네 숨소리에 귀를 귀울일 때,
아비의 마음은 해면처럼 사방에 붇(潤)는다.
사랑에 겨워 고사리 같은 네 손을 가만히 쥐어도 본다.

이 손으로 너는 장차 무엇을 하려느냐
네가 씩씩하게 자라나면 무슨 일을 하려느냐,
붓대는 잡지 마라, 행여 붓대만은 잡지 말아라
죽기 전 아비의 유언이다 호미를 쥐어라! 쇠마치를 잡아라!

실눈을 뜨고 엄마의 젖가슴에 달라붙어서
배냇짓으로 젖 빠는 흉내를 내는 너의 얼굴은
평화의 보드라운 날개가 고이고이 쓰다듬고
잠의 신은 네 눈에 들락날락하는구나.

내가 너를 왜 낳아 놓았는지 나도 모른다.
네가 이 알뜰한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너도 모르리라
그러나 네가 땅에 떨어지자 오아 소리를 우렁차게 지를 때
나는 들었다. 그 뜻을 알았다. 억세인 삶의 소리인 것을!

  • (이하 십이행 약(略)))

조선 사람의 피를 백대36나 천대37나 이어 줄 너이길래
팔 다리를 자근자근 깨물고 싶도록 네가 귀엽다.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고야 말 우리 집의 업둥이길래
남달리 네가 귀엽다. 꼴딱 삼키고 싶도록 네가 귀여운 것이다.

모든 무거운 짐을 요 어린것의 어깨에만 지울 것이랴
온갖 희망을 염체 네게다만 붙이고야 어찌 살겠느냐
그러나 너와 같은 앞날의 일꾼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우리의 뿌리가 열 길 스무 길이나 박혀 있구나.

그믐밤에 반딧불처럼 저 하늘의 별들처럼
반득여라 빛나거라 가는 곳마다 횃불을 들어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어서어서 저 주먹에 힘이 올라라
오오 우리의 강산은 온통 꽃밭이 아니야? 별투성이가 아니냐!

1932.9.4 재건이 낳은 지 넉 달 열흘이 되는 날

R씨의 초상

내가 화가여서 당신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지금 10년만에 대(對)한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면
채색이 없어 <파레트>를 들지 못하겠소이다.
화필이 떨려서 획 하나도 긋지 못하겠소이다.

당신의 얼골에 저다지 찌들고바래인 삧깔을 칠할
물감은 쓰리라고 생각도 아니 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마에 수없이 잡힌 주름살을 그릴
가느다란 붓은 준비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결 거칠은 황포탄(黃浦灘)에서 생선같이 날뛰던 당신이
고랑을 차고 3년 동안이나 그물을 뜨다니 될 뻔이나 한 일입니까
물푸레나무처럼 꿋꿋하고 물오른 버들만치나 싱싱하던 당신이
때아닌 서리를 맞아 가랑잎이 다 될 줄 누가 알았으리까.

「이것만 뜯어 먹어도 살겠다」던 여덟 팔자 수염은
흔적도 없이 깍이고 그 터럭에 백발까지 섞였읍니다그려.
오오 그러나 눈만은 샛별인 듯 전과 같이 빛나고 있읍니다.
불똥이 떨어져도 꿈쩍도 아니 하던 저 눈만은 살았소이다!

내가 화가여서 지금 당신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백호나 되는 큰 <캔버스>에 저 눈만을 그리겠소이다.
절망을 모르고 끝까지 조금도 비관ㅎ지 않는
저 형형38한 눈동자만을 전신의 힘을 다하여 한 획으로 그리겠소이다.

1932.9.5

만가(輓歌)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만장39도 명정40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을 지나
철벅철벅 말 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은 귀화41같이 껌벅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 (이하 육행 略)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42도 부르지 못하는 산 송장들은
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1927.9

곡(哭) 서해(曙海)

온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아버지 죽었다」고 자랑 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이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것의 약을 지어다 주던 그대여
어린것은 나아서 요람 우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 주시려오?

그 유우머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사기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 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노모약처를 길바닦에 나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30평생을 숨도 크게 못 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1932.7.10

거국편

잘 있거라 나의 서울이여

오오 잘 있거라! 저주받은 도시여,
<폼페이>같이 폭삭 파묻히지도 못하고, 지진때 동경처럼 활활 타 보지도 못하는
꺼풀만 남은 도시여, 나의 서울이여!

성벽은 토막이 나고 문루는 헐려
<해태>조차 주인 잃은 궁전을 지키지 못하며
반 천년이나 네 품속에 자라난 백성들은
산으로 기어오르고 두더지처럼 토막43 속을 파고들거니
이제 젊은 사람까지 등을 밀려 너를 버리고 가는구나!

남산아 잘 있거라, 한강아 너도 잘 있거라
너희만은 옛모양을 길이길이 지켜다오!
그러나 이 길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겠느냐
내 눈물이 마지막 너를 조상하는 눈물이겠느냐
오오 빈사44의 도시, 나의 서울이여!

1927.2 경부선 차중에서

현해탄

달밤에 현해탄을 건너며
갑판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몇 해 전 이 바다 어복45에 생목숨을 던진
청춘 남녀의 얼굴이 환등46같이 떠오른다.
값 비싼 오뇌에 백랍같이 창백한 <인텔리>의 얼굴
허영에 찌들어 여류 예술가의 풀어 헤친 머리털,
서로 얼싸안고 물 우에서 소용돌이를 한다.

바다 우에 바람이 일고 물결은 거칠어진다.
우국지사의 한숨은 저 바람에 몇 번이나 스치고
그들의 불타는 가슴 속에서 졸아 붙는 눈물은
몇 번이나 비에 섞여 이 바다 우에 뿌렸던가
그 동안에 얼마나 수많은 물건너 사람들은
<인생도처유청산47>을 부르며 새 땅으로 건너 왔던가.

갑판 위에 섰자니 시름이 겨워
선실로 내려가니 <만연도항48>」의 백의군49이다.
발가락을 억지로 째어 다비를 꾀고
상투 자른 자리에 벙거지를 뒤집어 쓴 꼴
먹다가 버린 <벤또>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강아지처럼 핥아 먹는 어린것들!

동포의 꼴을 똑바로 볼 수 없어
다시금 갑판 우로 뛰어 올라서
물 속에 시선을 잠그고 맥없이 섰자니
달빛에 명경(明鏡)같은 현해탄 우에
조선의 얼굴이 떠오른다!
너무나 또렷하게 조선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 둘 곳 없이, 마음 붙일 곳 없이
이슥하도록 하늘의 별 수만 세노라.

1926.2

무장야(武藏野)에서

초겨울의 무장야는
몹시도 쓸쓸하였다.
석양은 잡목림 삭장귀
오렌지 빛의 낙조를 던지고
쌀쌀바람은 등어리에
우수수 낙엽을 끼얹는데
나는 그와 어깨를 겯고
마른 풀을 밟으며 거닐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아득히
고향의 하늘을 더듬으며
<소프라노>와 <바리톤>은
나직이 망향의 노래를 불렀다,
내 손등에 떨어진 한 방울의
따끈한 그의 눈물은
여린 정50에 아름다운 결정3이매
참아 씻지를 못했었다.

이윽고 나는 참다 못하여
끓어오르는 마음을
그의 가슴에 뿜고 말았다
손을 잡고 사랑을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말이 없었다
능금같이 빨개진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은 채……

그의 작은 가슴은
비 맞은 참새처럼 떨리고
그의 순진한 마음은
때아닌 파도에 쓰러지는
해초와 같이 흔들렸을 것이다.
햇발이 우리의 발치를 지난 뒤에야
그는 조심스러이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더 자라거든요
인제 세상을 알게 되거든요.

나는 입을 다문 채
무안에 취해서 얼굴을 붉혔다.
깨끗한 눈 우에다가
모닥불을 끼얹어 준 것 같아서……
가냘픈 꽃가지를 꺾은 것처럼
무슨 큰 죄나 저지른 듯하여서……
말없이 일어서 지향없이 거닐었다.
쓸쓸한 황혼의 무장야를–

1927.2

북경의 걸인

  • — 세기말 맹동51에 초췌한 행색으로 정양문52 차참에 내리니 걸개(乞丐)의 떼 에워싸며 한 분53의 동패54를 빌거늘 달리는 황포55 차상56에서 수행57을 읊다.

나에게 무엇을 비는가?
푸른 옷 입은 인방58의 걸인이여
숨도 크게 못 쉬고 쫓겨 오는 내 행색을 보라,
선불 맞은 어린 짐승이 광야(曠野)를 헤매는 꼴 같지 않으냐.

정양문52 문루 구에 아침 햇발을 받아
펄펄 날리는 오색기를 치어다보라.
네 몸은 비록 헐벗고 굶주렸어도
저 깃발 그늘에서 자라나지 않았는가?
거리거리 병영의 유량[[FootNote(嚠喨=瀏亮,嚠 자 좌변이 잘 보이지 않아서 추측해서 풀었다)한 나팔 소리!
내 평생엔 한 번도 못 들어 보던 소리로구나
호동59 속에서 채상60의 웨치는 굵다란 목청
너희는 마음껏 소리질러 보고 살아 왔구나.

저 깃발은 바랬어도 대중화61의 자랑이 남고
너의 동족은 늙었어도 <잠든 사자>의 위엄이 떨치거니
저다지도 허리를 굽혀 구구히 무엇을 비는고
천년이나 만년이나 따로 살아온 백성이어늘–

때 묻은 너의 남루와 바꾸어 준다면
눈물에 젖은 단거리 주의62라도 벗어 주지 않으랴
마디마디 사모친 원한을 나눠 준다면
살이라도 저며서 길바닥에 뿌려 주지 않으랴
오오 푸른 옷 입은 북국의 걸인이여!

1919.12

고루(鼓樓)의 삼경(三更)

눈은 쌓이고 쌓여
객창63을 길로 덮고
몽고바람 씽씽 불어
왈각달각 잠 못드는데
북이 운다 종이 운다.
대륙의 도시, 북경의 겨울 밤에–

화로에 <메틸64>도 꺼지고
벽에는 성애가 슬어
얼음장 같은 <촹65> 우에
새우처럼 오그린 몸이
북소리 종소리에 부들부들 떨린다.
지구의 맨 밑바닥에 동그라미 앉은 듯
마음조차 고독에 덜덜덜 떨린다.

거리에 땡그렁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호콩장사도 인제는 얼어 죽었나 보다.
입술을 꼭꼭 깨물고 이 한밤을 새우면
집에서 편지나 올까? 돈이나 올까?
<만터우66> 한 조각 얻어먹고 긴 밤을 떠는데
고루에 북이 운다 종이 운다.

1919.12.12 북경에서

심야과황하(深夜過黃河)

별그림자……그믐밤의 적막을 헤치며
화차는 황하의 철교 우를 달린다
산 하나 없는 양안의 묘망67한 평야는
태고의 신비를 감춘 듯 등불만 깜박이고
황하는 장사68와 같이 꿈틀거리며
중원의 복판을 뚫고 묵묵히 흐른다.

찬란한던 동방의 문명은
이 강의 물줄기를 따라 일어났고
4억이나 되는 중화의 족속은
이 연안에서 역사의 첫 <페이지>를 꾸몄거니.

이제 천년 만년 굽이져 흐르는
물줄기는 싯누렇게 지쳐 늘어지고
이 물을 마시고 자라난 백성들은
아직도 고달픈 옛 꿈에 잠이 깊은데
난데없는 우렁찬 철마의 울음소리!
무심한 나그네를 싣고 화차는 황하를 건넌다.

1920.2

상해(上海)의 밤

우중충한 <농당69> 속으로
<훈둔70>장사 모여들어 딱딱이 칠 때면
두 어깨 웅숭그린 연놈의 떠드는 세상
집집마다 마작판 뚜드리는 소리에
아편에 취한 듯 상해의 밤은 깊어 가네.

발 벗은 소녀, 눈먼 늙은이를 이끌며
구슬픈 호궁71에 맞춰 부르는 맹강녀72 노래,
애처롭구나 객창63에 그 소리 창자를 끊네.

사마로73 오마로74 골목 골목엔
<이래양듸>, <량쾌양듸> 인육75의 저자
침의76 바람으로 숨바꼭질하는 <야아지77>의 콧잔등이엔
매독이 우굴우굴 악취를 풍기네.

집 떠난 젊은이들은 노주78잔을 기울여
걷잡을 길 없는 향수에 한숨이 길고
취하고 취하여 뼛속까지 취하여서는
팔을 뽑아 장검인듯 내두르다가
채관79 <소파>에 쓰러지며 통곡을 하네.

어제도 오늘도 산란한 혁명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까오리80> 망명객의 심사를 뉘라서 알고
영희원81 <산데리아>만 눈물에 젖네.

1920.11

항주유기(抗州遊記)

항주유기(抗州遊記)

항주는 나의 제 2의 고향이다. 이면약관의 가장 로맨틱하던 시절은 2개 성상82이나 서자호83와 전당 강변84에 핍류85하였다. 벌써 10년이나 되는 옛날이던만 그 명미한 산천이 몽매간에도 잊히지 않고 그곳의 단려한 풍물이 달콤한 애상과 함께 지금도 머릿속에 채를 잡고 있다. 더구나 그 때에 유배나 당한 듯이 호반에 소요하시던 석오86·성재87 두 분 선생님과 고생을 같이하며 허심탄회로 고유하던 엄 일파·염 온동·정 진국 등 제우가 몹시 그립다. 유랑민의 신세 –, 부유88와 같은지라 한 번 동서로 흩어진 뒤에는 안신89조차 바꾸지 못하니 면면한 정회가 절계를 따라 간절하다. 이제 추억의 실마리를 붙잡고 학창 시대에 끄적여 두었던 묵은 수첩의 먼지를 털어 본다. 그러나 항주와는 인연이 깊던 백 낙천·소 동파 같은 시인의 명편을 예빙ㅎ지 못하니 생색이 적고 또 고문을 섭렵한 바도 없어 다만 시조체로 10여 수(首)를 별여 볼 뿐이다.

평호추월(平湖秋月)

1

중천의 달빛은 호심90으로 쏟아지고
향수는 이슬 내리듯 마음 속을 적시네,
선잠 깬 어린 물새는 뉘 설움에 우느뇨.

2

손바닥 부름도록 뱃전을 뚜드리며
<동해물과 백두산> 떼를 지어 부르다가
동무를 얼싸안고 느껴느껴 울었네.

3

나 어려 귀 너머로 들었던 적벽부를
운파 만리 예 와서 당음 읽듯 외단말가
우화이 귀향하여서 내 어버이 뵈옵고저.

삼담인월(三潭印月)

삼담91에 잠긴 들을 무엇으로 건져 볼꼬

팔 벌려 건지자니 달은 등에 업혔고나

긴 밤을 달 한짐 지고 꾸벅꾸벅 거니네.

채연곡(採蓮曲)

1

<이호92>로 일엽화방93 소리 없이 저어드니
연 잎새 뱃바닥을 간질이듯 쓰다듬네
사르르 풍기는 향기에 잠이 들 듯하구나.

2

코노래 부르면서 연근 캐는 저 <꾸냥94>
걷어붙인 팔뚝 보소 백어같이 노니누나
연밥 한톨 던졌더니 고개 갸웃 웃더라.

3

누에가 뽕잎 썰 듯 세우성95 잦아진 듯
연봉오리 푸시시 기지개 켜는 소릴러라
연붉은 꽃입술 담쑥 안고 입맞춘들 어떠리.

소제춘효(蘇堤春曉)

동파가 쌓은 소제 사립96 쓴 저 노옹아

오월97은 어제런 듯 그 양자98만 남았고나

죽장을 낚대 삼고서 고기 낚고 늙더라.

남병만종(南屛晩鐘)

나귀를 채찍하여 남변산에 치달으니

만종 소리 잔물결에 주름잡혀 남실남실

고탑99의 까마귀 떼는 낯설다고 우짖더라.

누외루(樓外樓)

술을 마시고 싶어서 인호상이100 자작할까

가슴 속 타는 불을 꺼 보려는 심사로다

취하여 난간에 기대서니 어울리지 않더라.

방학정(放鶴亭)

방학정 주난간101에 하루 종일 기다려도

구름만 오락가락 학은 아니 돌아오고

임처사 무덤 곁에는 늙은 매화 수절ㅎ더라.

악왕분(岳王墳)

천년 묵은 송백은 얼크러져 뫼를 덮고

애닯다 만고정충102 길이길이 잠들었네,

진희103란 놈 쇠사슬 찬 채 남의 침만 받더라.

고려사(高麗寺)

운연104이 잦아진 골에 독경105 소리 그윽ㅎ고나

예 와서 고려 태자 무슨 도를 닦았던고

그래서 내 집인 양하여 두 번 세 번 찾았네.

항성(抗城)의 밤

항성의 밤저녁은 개가 짖어 깊어 가네

비단 짜는 오희106는 어이 날밤 새우는고

뉘라서 나그네 근심을 올올이 엮어 주리.

전당강상(錢塘江上)에서

가거라! 가거라!
지나간 날 애처로운 자최여
가엾이도 희고 여윈 얼굴이여
나의 머리에서 가거라!

눈앞에 보이지도 말고
꿈속에 오지도 말고
소나기 뒤에 구름같이
흩어져 없어져서
다시는 내 마음 기슭으로
기어들지를 말아라.

불 같은 <키스>를 주던
나의 입술은
하염없는 한숨에 마르고
보드라운 품에 안기던 가슴 속엔
서리가 내렸다.

아! 첫사랑에 애닯던 꿈이여!
두견새 우는 느근한 봄밤
나그네의 베갯머리로는
제발 떠오르지를 말아라.

4월 8일, 밤

겨울밤에 내리는 비

뒤숭숭한 이상스러운 꿈에
어렴풋이 잠이 깨어
힘없이 눈을 뜬 채 늘어져
창 밖의 밤비 소리를 듣고 있다.

음습한 바람은 방 안을 휘돌고
개는 짖어 컴컴한 성 안을 울릴 제
철 아닌 겨울밤에 내리는 비!
나의 마음은 눈물비에 고요히 젖는다.

이 팔로 향기로운 애인의 머리를 안고
여름밤 섬돌에 듣는 낙수의 <피아노>
즐거운 속살거림에 첫닭이 울던
그윽하던 그 밤은 벌써 옛날이어라.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꿈에라도 좋으니 잠깐만 다녀가소서
찬 비는 객창에 부딪치는데 긴긴 이 밤을
아, 나 홀로 어찌나 밝히잔 말이냐.

1월 5일, 남경107

기적(汽笛)

깊은 밤, 캄캄한 하늘에
길게 우는 저 기적 소리
어디로서 오는 차인지,
그는 몰라도
만나서 웃거나 보내고 울거나
나는 몰라도
간신히 얻은 고운 임의 꿈을
행여 깨우지나 말아라.

2월 16일

뻐꾹새가 운다

오늘 밤도 뻐꾹새는 자꾸만 운다
깊은 산속 빈 골짜기에서
울려나오는 애처로운 소리에
애끊는 눈물을 베개를 또 적시었다

나는 뻐꾹새에게 물어 보았다
「밤은 깊어 다른 새는 다 깃들였는데
너는 무엇이 설기에 피나게 우느냐」고.
뻐꾹새는 내게 도로 묻는다
「밤은 깊어 사람들은 다 꿈을 꾸는데
당신은 왜 울며 밤을 밝히오」라고.

아 사람의 속 모르는 날짐승이
나의 가슴 아픈 줄을 제 어찌 알까
고국은 멀고 먼데 임은 병들었나니
차마 그가 못 잊어 잠 못 드는 줄
더구나 남의 나라 뻐꾹새가 제 어찌 알까.

5월 5일 밤, 남경서.

절필(絶筆)

오오, 조선의 남아여!

  • — 백림108 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에게

그대들의 첩보109를 전하는 호외 뒷 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 3백만의 한사람인 내 혈관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110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속에 짓눌렀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111를 켜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1936.8.10 새벽 신문호외 이면에 쓴 절필.

수필

조선의 영웅

우리 집과 등성이 하나를 격한 야학당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 편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에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 가는 소리와, 아홉 시 반이면 파해서 흩어져 가며 재깔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틈에 한 번쯤은 보던 책이나 들었던 붓을 던지고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에 여112 아동이 80명이나 들어와서 세 반에 나누어 가르친다. 물론 5리밖에 있는 보통 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는 극빈자의 자녀들인데 선생들도 또한 보교113를 졸업한 정도의 청년들로 밤에 <가마니>때기라도 치지 않으면 잔돈 푼 구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시간과 집안 살림을 희생하고 하루 저녁도 빠지지 않고 와서는 교편을 잡고 아이들과 저녁내 입씨름을 한다. 그 중에는 동절114에 보리밥을 먹고 보리도 떨어지면 시래기 죽을 끓여 먹고 와서는 이팝이나 두둑이 먹고 온 듯이 목소리를 높여 글을 가르친다. 서너 시간 동안이나 칠판 밑에 꼿꼿이 서서 선머슴 아이들과 소견 좁은 계집애들과 아귀다툼을 하고 나면 상체의 피가 다리로 내려 몰리고 허기가 심해져서 나중에는 아이들의 얼굴이 돋보기 안경을 쓰고 보는 듯하다고 한다. 그러한 술회를 들을 때 그네들을 직접으로 도와 줄 시간과 자유가 아울러 없는 나로서는 양심의 고통을 느낄 때가 많다.

표면에 나서서 행동하지 못하고 배후에서 동정자나 후원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곁의 사람이 엿보지 못할 고민이 있다. 그네들의 속으로 벗고 뛰어들어서 동고동락을 하지 못하는 곳에 시대의 기형아인 창백한 <인텔리>로서의 탄식이 있다.

나는 농촌을 제재로 한 작품을 두어 편이나 썼다. 그러나 나 자신은 농민도 아니요 농촌 운동자도 아니다. 이른바, 작가는 자연과 인물을 보고 느낀 대로 <스케치> 판에 옮기는 화가와 같이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처지에 몸을 두어 오직 관조의 세계에만 살아야 하는 종류의 인간인지는 모른다. 또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 세계에 입각해서 전적 존재의 의의를 방불케 하는 재주가 예술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 위에 기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예술가의 무리는, 실사회에 있어서 한 군데도 쓸모가 없는 부유층115에 속한다. 너무나 고답적이요 비생산적이어서 몹시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시각116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호의로 바라본다면 세속의 누117를 떨어 버리고 오색 구름을 타고서 고왕독맥118하려는 기개가 부러울 것도 같으나 기실은 단 하루도 입에 거미줄을 치고는 살지 못하는 유약한 인간이다. 「귀족들이 좀더 잰 체하고 뽐내지 못하는 것은 저이들도 측간에 오르기 때문이다.」라고 뾰족한 소리를 한 말이 생각나거니와 예술가라고 결코 특수 부락의 백성도 아니요, 태평성대의 일민119도 아닌 것이다.

적지않이 탈선이 되었지만 백 가지 천 가지 골이 아픈 이론보다도 한 가지나마 실행하는 사람을 숭앙하고 싶다. 살살 입술발림만 하고 턱 밑의 먼지만 톡톡 털고 앉은 백 명의 이론가, 천 명의 예술가보다도 우리에게는 단 한 사람의 농촌 청년이 소중하다. 시래기죽을 먹고 겨우내 <가갸 거겨>를 가르치는 것을 천직이나 의무로 여기는 순진한 계몽 운동자는 조선의 영웅이다.

나는 영웅을 숭배하기는커녕 그 얼굴에 침을 뱉고자 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 농촌의 소영웅들 앞에서는 머리를 들지 못한다. 그네들을 쳐다볼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2월 초하룻날

2월 초하루는 머슴의 설날이라 한다. 남의 논 마지기를 얻어 하거나, 밥술 먹는 집의 머슴 노릇을 해서 농노의 생활을 하는 그네들이 1년에 한 번 실컷 먹고 마시고 마음껏 뛰노는 날이 이 2월 초하루다.

아침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아래 윗 마을에서 징·꽹가리·쐐납·장고 같은 풍물을 불며 뚜드리는 소리가 끊일 사이 없이 들린다. 그네들이 두레를 노는 광경은 『상록수』중에도 묘사한 바 있어 약하지만, 아직도 눈이 풀풀 휘날리는 그믐밤, 고등120 아래서 종이 위에 펜을 달리면서 바람결에 가까이 또는 꿈속같이 은은히 들려 오는 그 소리를 들으면 미상불 향토적 정서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낮에 그네들이 뛰놀던 정경을 눈앞에 그려 보면 다시금 우울증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이 궁벽121한 해변 산촌에 수간122 모옥123을 짓고 죄 없는 귀양살이를 하게 된 후로 다만 고적124과 벗을 삼고 지내기 이미 만 3년이나 되었다. 비록 구화조절난위청125일만정 산가126, 와 촌적127이나마 그리워서, 두레꾼들과 얼려 다니며 막걸리 사발도 얻어 먹고, 춤추는 흉내도 내어 보았다.

첫 해에는 누데기를 벗지 못한 머슴꾼들이 헌털뱅이 패랭이를 쓰고 곤댓질을해서 긴 상무를 돌리며, 호적128 가락 꽹과리 장단에 요두전목129을 하는 것이며, 신명이 나서 개구리처럼 뛰노는 것이 남양의 토인 부락으로나 들어간 듯 야만인종의 놀이같이 보였다.

그렇더니 그 다음에는 두레는 농촌 오락으로 없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었다. 좀더 규모를 크게 하고 통제 있게 놀도록 지도 장려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금년에 와서는 두레를 보는 관점이 변해졌다. 조석으로 만나고 사이 좋게 지내던 아래 윗 동리가 합하기만 하면 반드시 시비가 나고, 시비 끝에는 싸움으로 끝을 마친다. 그것은 유식 무식간에 두세 사람만 모여도 자그락거리고 합심 단결이 되지 못하는 조선놈의 본색이라, 씨알머리가 밉기도 하려니와 한편으로 돌이켜 생각하면 가엾기가 짝이 없다. 배를 실컷 불린다는 날 집집으로 돌아다니며 얻어먹은 것이라고는 끽해야 두부 쪽, 콩나물 대가리에 돼지 죽같이 틉틉한 막걸리뿐이다.

평소부터 영양 부족에 걸린 그네들은 그나마 걸더듬을 해서 그 술을 마시고, 걸신이 들린 것처럼 그 거친 음식을 어귀어귀 걷어 넣는다. 그리고는 온종일 뚜드리고 뛰놀면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고 나니, 알콜 기운은 그네들의 창자와 단순한 신경을 자극시켜서 악성으로 취하게 한다. 곤죽이 되도록 취하고 나니 대수롭지 않은 일에 충돌이 되고 평소의 불평이 폭발되면 유혈의 참극까지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주막 거리에서 그런 광경을 보다못해서 달려가 뜯어 말렸다. 몇 <퍼센트>밖에 아니 되는 <알콜> 기운을 이기지 못해서 두 눈이 만경을 한 것처럼 개개 풀렸는데, 시척 건드리기만 해도 픽픽 쓰러지는 그네들의 육체는 흡사히 말라빠진 북어를 물에다 불려논 것 같다.

그러나 그네들의 혈색 없는 입은 「우리에게 육체와 정신의 영양을 달라!」고 부르짖을 줄 모른다. 자기네의 빈곤과 무지를 아직도 팔자 탓으로만 돌릴 뿐.

오오 형해130만 남은 백만 천만의 숙명론자여!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그 숙명을 짊어지고 살려는가? 중추신경이 물러앉은 채 그 누구를 위하여 대대 손손이 이 땅의 두더지 노릇을 하려는가?

적권세심기(赤拳洗心記)

마당에 엿장수가 왔다. 가윗소리를 들은 어린 놈이 귀가 번적 띄어서 사랑방으로 화닥닥 뛰어들었다.

「아버지 엿장수 왔어.」
「응.」
「나 엿 사줘.」
「응응.」

원고 쓰기에 몰두한 아비는 코대답만하니까 어린 놈은 대들어 아비의 머리를 꺼두르고 붓을 빼앗아 던진다.

「가만있어 사주께.」

하면서도 아비는 무슨 혼신131이 씌운 사람처럼 붓을 집어 들고 쓰던 글을 계속하려고 한다.

엿장수는 바로 창밑까지 와서 쩔그렁쩔그렁 가윗소리를 낸다.

어린 것은 그만 떼가 나왔다.

「어서 사줘. 어서어서, 왜 엿장수 오면 사준댔지.」

재촉이 성화같다가 나중에는 발버둥질을 치고 몸부림을 땅땅 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붓을 던지고 호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은 물론 책상 서랍을 열어 보고 안방으로 건너가, 머릿장, 경대 서랍까지 들들 뒤져도 일전 한푼이 나오지 않는다.

「아아니 일전 한 푼이 없어?」

나는 성화가 더럭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십 이 전밖에 없던 거 엊저녁에 석유 사지 않았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송곳 끝 같다. 심청 사나눈 엿장수는 대문간까지 와서 엿 목판을 열어 뵈는데 어린것은 손구락을 물고 들여다보다가 그만 비쭉비쭉 울기를 시작한다.

「내 내일 장에 가서 과자 사다 주께 울지 마, 응 울지 말어.」

달래도 타일러도 어린것은 말을 아니 듣는다. 아비는 정말 골딱지가 나서,

「예에라 요눔의 자식!」

하고, 우는 놈의 귀퉁이를 쥐어박았다. 어린것은 그만 통곡이 나왔다. 아내는,

「동냥도 안 주고 쪽박 깨뜨려 보낸다더니 엿 한푼어치 못 사주면서 그 애가 뭘 잘못했기에 손찌검까지 한단 말요」 하고 자식 역성을 뿌옇게 한다. 게다가 젖 떨어진 둘쨋놈은 영문도 모르고 귀가 따갑도록 울어싸니 집안은 그만 난가를 이루었다.

엿장수는 무색해서 엿 목판을 짊어지고 집 모퉁이로 돌아갔다. 어린것을 무릎 위에 앉히고 눈물을 씻겨 주면 꾀송꾀송 달래는 아비의 속은 부글부글 끓는 것 같다. 아뭏든 솥 붙이고 살림을 하는 집안에 단 일전 한푼이 없어 소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스스로도 곧이가 들리지 않거니와 생활의 책임을 진 소위 가장으로서의 위신과 면목이 일시에 땅에 떨어진 생각을 하니 분하기 짝이 없다.

이놈의 현실에서 서투른 붓끝을 놀려 호구를 하려는 것도 애당초에 망령된 생각이어니와 빈약한 머릿속을 박박 긁고 때로는 피를 쥐어짜듯 해서 창작을 한것이 겨우 담뱃값밖에 아니 될 때 책상이고 <잉크>병이고 으지끈 아지끈 바수어 버리고 싶다. 그러면서도 청빈한 문사로서의 자존심을 가지려는 염치가 개를 보기도 부끄러운 때가 있다.

<반소사132 음수133하고 곡굉이침지134라도 낙역재기중135>이라고 한 2천년 전의 안연의 얼굴이 보고 싶다. 문학도 예술도 다 귀찮고 발바닥만 핥고도 산다는 곰의 신세가 부럽다. 무엇보다도 공기만 마시고 냉수만 먹고도 경변136을 누는 재주를 배우고 싶다.

없거든 씻은 듯 부신 듯이 없거라. 문자대로 <적빈여세137>함이 오히려 뱃속이나 편할는지 모른다. 더러운 재물이 덕지덕지 붙은 것보다는 책상머리에 두 손 싹싹 비비고 앉은 사람이 오히려 천공해윤138의 심경을 가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울지마, 우리 착한 애기 울지마, 이것 써 보내서 돈 오거들랑 과자 사주께. <미루끄139>사 주께 응 응.」

봄은 어느 곳에?

  • — 필경사140 잡기

벌써부터 신문에는 봄 춘자가 푸뜩푸뜩 눈이 뜨인다. 꽃송이기 통통히 불어오른 온실 화초의 사진까지 박아내서 아직도 겨울 속에 칩거해 있는 인간들에게 인공적으로 봄의 의식을 주사하려 한다. 노염141이 찌는 듯한 학기 초의 작문 시간인데 새까만 칠판에 백묵으로 커다랗게 쓰인<추(秋)>자를 바라다보니 그제야 비로소 가을이 온 듯 싶더라는 말을 내 질녀142에게 들은 법한데, 오늘 아침쯤에 체부가 가져온

「어제 오늘 서울은 완연한 봄이외다」라고 쓴 편지의 서두를 보고서야 창밖을 유심히 내어다보았다. 먼 산을 바라다보고 앞 바다를 내려다보나 아직도 이 시골에는 봄이 기어든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산봉우리는 백설을 인 채로 눈이 부시고 아산만은 장근143 두 달 동안이나 얼어붙어 발동선의 왕래조차 끊겼다. 그러다가 요새야 조금 풀려서 성앳장이 떠밀려 다니는 것이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데 어제밤 눈바람에 시달리던 뜰 앞에 꽃나무에는 떨어지다 남은 잎새가 앙상한 가지에 목을 매어 단 채 바들바들 떨고 있다. 돼지 우리 위에 옹숭거리고 앉은 까치 두어 마리도 털이 까아칠한 것이 아직도 추위를 털어버리지 못한 듯.

그러나 어쩐지 봄은 내 신변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 같다. 오줌 장군을 짊어진 이웃집 머슴들이 보리밭으로 출동하고 땅바닥의 잔설이 햇살이 퍼지기가 무섭게 녹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뜨여서 그런지, 아뭏든 앞으로는 봄이 나와 친분이 두터월질 것 같다.

양지바른 책상머리에 정좌하여 수년 전 출판하려다가 붉은 도장 투성이가 되어 나온 시집을 몇 군데 뒤적이는데 <토막 생각>이란 제목 아래에 이런 구절이 튀어나왔다.

「오관144으로 스며드는 봄 가을 바람인 듯 몸서리쳐진다. 조선 8도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느냐.」

그렇다. 3천리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는지 모른다. 사시장철 심동145과 같이 춥고 침울한 구석에서 헐벗은 몸이 짓눌려만 지내는 우리 족속은 봄을 잃은 지가 이미 오래다. 아무리 따스한 햇살이 이 땅 위에 내려쪼이고 풀솜 같은 바람이 산천초목을 어루만져도 우리는 마음의 봄과 등지고 사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의 감각은 새봄을 새틋이 느끼고 즐겨하기에는 목석과 같이 무디어진 것이 또한 사실임에야 어찌하랴.

「불 꺼진 화로를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내듯이
식어버린 정열을
더듬어 보는 봄 저녁」

피리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엉덩춤부터 추려는 것도 가소로운 일이어니와 나지 않는 춘흥을 억지로 불러일으키려는 자도 가엾은 어릿광대다. 작별 없이 지나간 청춘은 방정맞은 소조146와 같이 한 번 앉았던 가지[枝]로 다시 돌아올 줄 모르고, 성냥불처럼 확하고 켜졌던 정열은 재[灰]가 되고 먼지로 화하여 자취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다시금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임으로써 빛깔없이 보낸 지난날이 더욱 그립고 정열적이었던 그 시간이 야속하게도 짧았기 때문에 싸늘한 잿무더기에다가 다시 한 번 불을 피워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혹시나」하고 새봄의 맥박을 짚어 보려 한다. 일부러 나의 청춘을 조상147하지 않으려 하고 억지로라도 우리의 환경은 비관하기 않으려 한다. 그것은 졸시148에 이러한 끝 귀절이 있기 때문이다.

「몇 백년이나 묵어서
구멍 뚫린 고목(古木)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 움이 돋아나네.
뿌리마저 썩지 않은 줄이야
파 보지 않은들 모르리」

7월의 바다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 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는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 다가 탄식하였다.

저녁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한 절해의 고도149다.

나는 굴 껍데기가 닥지닥지 달라붙은 바위를 짚고 내렸다. 호수가 다녀나간 자취가 뚜렷한 백사장에는 새우를 말리느라고 공석을 서너 닢이나 깔아 놓았다. 꼴뚜기와 밴댕이 같은 조그만 생선이 섞인 것을 해쳐 보려니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외로운 섬 속에도 사람이 사나 보다.>

나는 탐험이나 하듯이 길로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인가를 찾아 섬 가운데로 들어갔다.

  •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려서 부르던 노래를 휘파람 섞어 부르며, 뱀이 지나간 자국만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과연 집이 있다! 하늘을 꿰뚫은 듯 열 길이나 까마아득하게 솟아오른 백양목 그늘 속에서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하였다.

<저기서 사람이 살다니 무얼 먹고 살까?>

는 단장을 휘두르면 내려갔다. 추녀와 땅바닥이 마주 닿은 듯한 그나마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속에서 60도 넘어 보이는 노파가 나왔다. 쑥방석 같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면서 맨발로 나오더니,

「아, 어디서 사시는 양반인데‥‥‥ 이 섬 구석엘 이렇게 찾아 오셨시유?」
하고, 바로 이웃집에서 살던 사람이나 만난 듯 얼굴의 주름살을 펴면서 나를 반긴다.

「여기서 혼자 사우?」

나는 그 노파가 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길 지경이었다.

「아들허구 손주새끼허구 살어유.」

「아들은 어디 갔소?」

「중선으로 준치 잡으로 갔슈.」

노파는 흐릿한 눈으로 아득한 바다 저편을 건너다본다. 그 정기 없는 눈동자에는 무한한 고적에 속절없이 시들어 가는 인생의 낙조가 비치지 않는가! 백양목 윗가지에는 바람이 씽씽 분다. 이름도 모를 물새가 흰 날개를 펼치고 그 위를 난다.

「쓸쓸해서 어떻게 사우?」

나는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여북해야 인간 구경두 못 허구 이런 데서 사나유. 농사처가 떨어져서 죽지 못해 이리루 왔지유.」

나는 차마 더 묻기 어려워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는데, 노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침침한 부엌 속으로 들어간다. 수숫대로 엮은 울타리 밖에는 마늘과 파를 심었다. 북채만한 팟종에는 씨가 앉아 알록달록한 나비가 쌍쌍이날아다니다. 조금 있자,

「이거나 하나 맛보시유.」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다보니 노파는 손바닥만한 꽃게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 어찌 이 불쌍한 노파의 친절을 물리치랴. 나는 마당 구석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짭짤한 삶은 겟발을 맛있게 뜯었다. 그대로 돌아 설 수가 없어 백동전 한 푼을 꺼내어 한사코 아니 받는 노파의 손에 쥐어 주고 나왔다.

<아아, 인생의 쓸쓸한 자태여!>

나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그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응아, 응아」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가 우는구나! 그 늙은이의 손주가 우나 보다.>

나는 발을 멈추었다. 불현듯 그 어린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한번 안아 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발을 돌렸다. 토굴 속 같은 방 속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달라붙어 젖을 빠는 것은 이 집의 옥동자였다. 그 침침한 흙방 속이 이 어린애의 흰 살빛으로 환하게 밝은 듯,

「나 좀 안아 봅시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살이 삐죽삐죽 나오는 베옷 한 벌로 앞을 가린 젊은 어머니는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한다. 노파는,

「이 더러운 걸.」
하며, 손주를 젖에서 떼어다간 내 팔에 안겨 준다.

어린것은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사지를 바둥거리며 내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본다. 울지도 않고 낯도 가리지 않고 반가운 인사나 하는 듯 무어라고 옹알거린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제 힘껏 감아쥐고는 놓지를 않는다.

까만 눈동자의 별같이 영롱함이여, 조그만 코와 입 모습의 예쁨이여.

나는 가슴에 옮아드는 어린 생명의 따스한 체온에서 떨어지기 어려웠다. 이 고도의 어린 주인을 떼치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바다 위에는 저녁 바람이 일어 성낸 물결은 바윗돌에 철썩철썩 부딪친다. 내 얼굴에는 찬 빗발이 뿌리고 백양목은 한층 처창150한 소리를 내며 회색빛 하늘을 비질한다.

내가 그 집에서 나오자 어린애는 다시 울었다. 걸어오면서도, 배를 타면서도, 등 뒤에서 「응아, 응아」하는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들렸다. 머리 위에서 날으는 물새의 우는 소리조차 그 어린애의 애처로운 울음 소리인 듯.

<그 어린애가 잘 자라는가?>
<그들은 그저 그 섬 속에서 사는가?>

그 뒤로 나는 바람 부는 아침, 눈 오는 밤에 몇 번이나 베갯머리에서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병없이 자라기를 빌어 주었다.

그 애처로운 울음 소리가 언제까지나 내 귓바퀴를 돌며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1년이란 세월이 꿈결같이 흘렀다. 며칠 전에 나는 마을의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숭어 잡는 구경을 하려고 나갔다가 <가치내> 섬으로 뱃 머리를 돌렸다.

그 노파와 젊은 며느리는 전보다도 갑절이나 반가이 나를 맞아 주었다. 그들은 1년에 한두 번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쁜인 듯‥‥‥

그러나 어린애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어린애 잘 자라우?」
하고 묻는데, 때 묻은 적삼 하나만 걸친 발가숭이가 토방으로 엉금엉금 기어나오지 않는가. 작년에 내가 대접을 받은 꽃게 발을 뜯어먹으며 두 눈을 깜박빰박 하고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오오, 네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나는 그 어린애를 끌어안고 해변을 거닐었다.

어린애는 1년 동안에 몰라보도록 컸다.

오래 안아 주기가 힘이 들 만치나 무거웠다.

‥‥‥그 날은 바다 위에 일점풍도 없었다. 성자의 임종과 같이 수평선 너머로 고요히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석조에 타는 붉은 물결을 멀리 보며 느꼈다.이 외로운 섬 속,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속에서도 우리의 조그만 생명이 자라나고 있지 않은가. 그 어린 생명이 교목과 같이,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뒤가 든든해지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1935, 첫 여름, 당진에서.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어머님께

어머님!

오늘 아침에 차입해 주신 고의적삼을 받고서야 제가 이 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동이의 생사를 한 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 길 없으셨으니 그 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저는 이 곳까지 굴러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고생을 겪었지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집에 와서 지냅니다. 고랑을 차고 용수는 썼을 망정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사를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 들어가는 듯하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들어 있는 방은 28호실인데 성명 삼자도 떼어 버리고 2007호로만 행세합니다. 두 간도 못 되는 방 속에 열 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했는데 그 중에는 목사님도 시골서 온 상투장이도 있구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수염 잘난 천도교 도사도 계십니다. 그 밖에는 그날 함께 날뛰던 저의 동무들인데 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귀염을 받는답니다.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의 얼굴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처럼,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조차 엄숙합니다. 날마다 이른 아침 전등불 꺼지는 것을 신호 삼아 몇 천 명이 같은 시간에 마음을 모아서 정성껏 같은 발원으로 기도를 올릴 때면 극성 맞은 간수도 칼자루 소리를 내지 못하며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발꿈치를 돌립니다.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거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길래 나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와하여 하소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 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지면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먹기가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어머님!

오늘 아침에는 목사님한테 사식이 들어왔는데 첫술을 뜨다가 목이 메어 넘기지를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외다. 아내는 태중에 놀라서 병들어 눕고 열 두 살 먹은 어린 딸이 아침마다 옥문 밖으로 쌀을 날라다가 지어 드리는 밥이라 합니다. 저도 돌아앉으며 남 모르게 소매를 적셨습니다.

어머님!

며칠 전에는 생후 처음으로 감방 속에서 죽는 사람의 임종을 같이 하였습니다. 돌아간 사람은 먼 시골의 무슨 교를 믿는 노인이었는데 경찰서에서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어 나와서 이 곳에 온 뒤에도 밤이면 몹시 앓았습니다. 병감은 만원이라고 옮겨주지도 않고 쇠잔한 몸에 그 독은 나날이 뼈에 사무쳐 어제는 아침부터 신음하는 소리가 더 높았습니다.

밤이 깊어 악박골 약물 터에서 단소 부는 소리도 끊쳤을 때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가뿐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그의 머리맡을 에워싸고 앉아서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덮쳐오는 그의 얼굴을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희미한 눈초리로 오촉밖에 안 되는 전등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추억의 날개를 펴서 기구한 일생을 더듬는 듯합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본 저는 무릎을 베개 삼아 그의 머리를 괴었더니 그는 떨리는 손을 더듬더듬하여 제 손을 찾아 쥐더이다. 금새 운명을 할 노인의 손아귀 힘이 어쩌면 그다지도 굳셀까요, 전기나 통한 듯이 뜨거울까요?

어머님!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벌떡 솟치더니 「여러분!」하고 큰 목소리로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찢어질 듯이 긴장된 얼굴의 힘줄과 표정이 그날 수천 명 교도 앞에서 연설을 할 때에 그 목소리가 이와 같이 우렁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그의 연설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하고는 뒤미처 목에 가래가 끓어오르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 같아서 어느 한 분이 유언할 것이 없느냐 물으매 그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어 보이나 그래도 흐려 가는 눈은 꼭 무엇을 애원하는 듯합니다. 마는 그의 마지막 소청을 들어 줄 그 무엇이나 우리가 가졌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그날에 여럿이 떼지어 부르던 노래를 일제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첫절도 다 부르기 전에 설움이 북받쳐서 그와 같은 신도인 상투 달린 사람은 목을 놓고 울더이다.

어머님!

그가 애원하던 것은 그 노래인 것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최후의 일각의 원혼을 위로하기에는 가슴 한복판을 울리는 그 노래밖에 없었습니다. 후렴이 끝나자 그는 한 덩이 시뻘건 선지피를 제 옷자락에 토하고는 영영 숨이 끊어지고 말더이다.

그러나 야릇한 미소를 띤 그의 영혼은 우리가 부른 노래에 고이고이 싸이고 받들려 쇠창살을 새어서 새벽 하늘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저는 감지 못한 그의 두 눈을 쓰다듬어 내리고 날이 밝도록 그의 머리를 제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어머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록사록이 아프고 쓰라렸던 지난 날의 모든 일을 큰 모험 삼아 몰래몰래 적어 두는 이 글월에 어찌 다 시원스러이 사뢰올 수가 있아오리까? 이제야 겨우 가시밭을 밟기 시작한 저로서 어느새 부러 이만 고생을 호소할 것이오리까?

오늘은 아침부터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더위가 씻겨내리고 높은 담 안에 시원한 바람이 휘돕니다. 병든 누에같이 늘어졌던 감방 속의 여러 사람도 하나 둘 생기가 나서 목침돌림 이야기에 꽃이 핍니다.

어머님!

며칠 동안이나 비밀히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어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덧 멈추고 날은 오늘도 저물어 갑니다.

구름 걷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님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답사온 듯 먼 천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1919. 8. 29

30년대초의 농촌과 심훈문학

  • — 홍이섭

30년대초의 농촌과 심훈문학

여섯 마디로 된 이 글은 저작권 정보가 분명하지 않아 전산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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