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 — 건반 위에 피곤한 손을 한가이 쉬이시는 만하(晩霞) 누님에게 한 구절 애달픈 울음의 노래를 드려 볼까 하나이다.
- 공개되어 있는 내용이 없어서 2009.8.7 ~ 8.10 직접 입력해서 올립니다.
- 입력본은 학원출판공사의 학원한국문학전집 4권입니다.
지은이
나도향
출전
백조 2호, <1922>
본문
1
저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누님 누님 누님 하고 눈물이 날 만큼 감격에 떨리는 목소 리로 누님을 불러 보고 싶습니다.
그것도 한낱 꿈일까요? 꿈이나 같으면 오히려 허무로 들리어 보내일 얼마간의 위로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러나 그것도 꿈이 아닌가 하나이다. 시간을 타고 뒷걸음질 친 또렷하 고 분명한 현실이었나이다.
그러나 꿈도 슬픈 꿈을 꾸고 나면 못 견딜 울음이 복받쳐 올라오는데, 더구나 그 저의 작은 가슴에 쓰리고 아픈 전상(箭傷)을 주고 푸른 비애로 물들여 주고 빼지 못할 애달픈 인상을 박아 준 그 몽롱한 과거를 지금 다시 돌아다볼 때 어찌 눈물이 아니 나고 어째 가슴이 못 견디게 쓰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멀리 멀리 간 과거는 어쨌든 가 버리었읍니다. 저의 일생을 꽃다운 역사, 행복스러운 역사로 꾸미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가 아닌 게 아니지마는 지나갔는지라 어찌할까요. 다시 뒷걸음질을 칠 수도 없고 다만 우연히 났다 우연히 사라지는 우리 인생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 운명이라 덮어 버리고 다만 때없이 생각되는 기억의 안타까움으로 녹는 듯한 감정이나 맛볼까 할 뿐이외다.
2
그날도 그전과 같이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몽롱한 의식 속에 C동 R의 집 에를 갔었나이다. R은 여전히 나를 보더니 반가와 맞으면서 그의 파리한 바른손을 내밀 어 악수를 하여 주었나이다. 저는 그의 집에 들어가 마루끝에 앉으며,
“오늘도 또 자네의 집 단골 나그네가 되어볼까?”
하고 구두끈을 끄르고 방안으로 들어가 모자를 벗어 아무데나 홱 내던지며 방바닥에 가 펄썩 주저앉았다가 그 R의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 한 개를 꺼내어 피워물었나이다.
바닷가에서는 거의 거의 그쳐 가는 가늘은 눈이 사르락사르락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나 이다.
그때 R의 얼굴은 어째 그전과 같이 즐겁고 사념없는 빛이 보이지 않고 제가 주는 농담에 다만 입 가장자리로 힘없이 도는 쓸쓸한 미소를 줄 뿐이었나이다. 저는 그것을 보고 아주 마음이 공연히 힘이 없어지며 다만 멍멍히 담배 연기만 뿜고 있었나이다.
R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멀거니 앉았다가,
“DH.”
하고 갑자기 부르지요. 그래 나는,
“왜 그러나?”
하였더니,
“오늘 KC에 갈까?”
하기에 본래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저는 아주 시원하게,
“가지.”
하고 대답을 하였더니 R은 아주 만족한 듯이 웃음을 웃으며,
“그러면 가세.”
하고 어디 갈 것인지 편지 한 장을 써 가지고 곧 KC를 향하여 떠났나이다.
KC가 여기서부터 60리, R의 말을 들으면 험한 산로(山路)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요. 그리고 벌써 11지나 되었으니 거기를 가자면 어두워서나 들어갈 곳인데 거기다가 오다가 스러지는 함박눈이 태산같이 쌓였나이다. 어떻든 우리는 떠났나이다. 어린아이들같이 기꺼운 마음으로 뛰어갈 듯이 떠났나이다.
우리가 수구문(水口門)에서 전차를 타고 왕십리 정류장에 가서 내릴 때에는 검은 구름이 흩어지기를 시작하고 눈이 부신 햇살이 구름 사이를 통하여 새로 덮인 횐 눈을 반짝반짝 무지개빛으로 물들였었나이다. 저는 그 눈을 밟을 때마다 처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때없이 지저귀는 어린 꾀꼬리의 그 소리같이 연하고도 애처롭게 얼크러지는 듯한 눈소리를 들으며 무슨 법열권 내에 들어나 간 듯이 다만 R의 손만 붙잡고 멀리 보이는 구부러진 넓은 시골길만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어갔을 뿐이외다.
그러나 R의 기색은 그리 좋지 못하였나이다. 무슨 푸른 비애의 기억이 그를 싸고 돌아가는 것같이 그의 앞을 내다보는 두 눈에는 검은 그림자가 덮여 있는 듯하였나이다. 그리고 때때 내가 주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보이지 않게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의 괴로운 듯한 가슴을 내려앉혔나이다.
때때 거리거리 서울로 향하여 떠돌아 온 시골 나무장사의 소몰이 소리가 한적한 시골의 가만한 공기를 울리어 부질없이 뜨겁게 돌아가는 저의 핏속으로 쓸쓸하게 기어들어 올 뿐이 었나이다.
넓고 넓은 벌판에는 보이는 것이 눈뿐이요, 여기저기 군데군데 서 있는 수척한 나무가 보일 뿐이었나이다. 저는 이것을 볼 때 마다 저 북쪽 나라를 생각하였으며 정처 없는 방랑의 생활을 생각하였나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두 사람이 방랑의 길을 떠난다고 가정까지 하여 보았나이다. R은 다 만 나의 유쾌하게 뛰어가는 것을 보고 쓸쓸한 웃음을 웃을 뿐이었나이다.
우리가 SC강을 건널 때에는 참으로 유쾌 하였지요. 회오리바람만 이 귀퉁이에서 저 귀퉁이로 저 귀퉁이에서 이 귀퉁이로 획획 불어갈 때에 발이 빠지는 눈 위로 더벅더벅 걸어갈 제 은싸라기 같은 눈가루가 이리로 사르락 저리로 사르락 바람에 불려가는 것이 참으로 끼어안을 듯이 깜찍하게 귀여웠나이다. 우리는 그 눈덮인 모래톱으로 두 손을 마주잡고 하나, 둘을 부르며 달음질을 하였나이다. 그리고 또다시 SP강에 다다랐을 때에는 보기에도 무서워 보이는 푸른 물결이 음녀(淫女)의 남치맛자락이 바람에 불리어 그의 구김샅이 울멍줄멍하는 것같이 움실움실 출렁출렁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그 강을 건너 주막 거리에서 점심을 먹을 때에 R이 나에게 말하기를,
“술 한잔 먹으려나?”
하기에 나는 하도 이상하여
“술!”
하고 아무 소리도 못하였읍니다. 여태까지 술을 먹을 줄 모르는 R이 자진하여 술을 먹 자는 것은 한 가지 이상한 일이었나이다.
KC를 무엇하러 가는지도 모르고 가는 저는 또한 R이 술 먹자는 것을 또다시 그 이유까지 물어 볼 필요가 없었나이다.
그는 처음으로 술을 먹었나이다.
우리는 또다시 걸어갔나이다. 마액(魔液)은 그 쓸쓸스러운 R을 무한히 흥분시켰나이다. 그는 팔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크게 하여 말하기를 시작하였나이다. 그는 나의 손을 힘있게 쥐며,
“DH.”
하고 부르더니 무슨 감격한 듯한 어조로,
“날더러 형님이라고 하게.”
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나는 DH를 얼마간 이해하고 또한 어디까지 인정하는데.”
하였나이다.
아, 얼마나 고마운 소리일까요? 저는 손 아래 동생은 있어도 손위의 형님을 가질 운명에서 나지를 못하였나이다. 손목 잡고 뒷동산 수풀 사이나, 등에 업고 앞세워 물가로 데리고 다녀 줄 사람이 없었나이다. 무릎에 얼굴을 비벼가며 어리광부려 말할 사람이 없었나이다. 다만 어린 마음 외로운 감정을 그렁저렁한 눈물 가운데 맛볼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부드러운 사랑을 맛보지 못하였나이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는·본래 젊으시니까‥‥‥
그리고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지낸 과거를 생각하여 보면 웬일인지 한귀퉁이 가슴속이 메인 듯해요.
-
그런데 <형님>이라 부르고 <아우>라고 부르라는 소리를 듣는 저는 그 얼마나 기꺼웠 을까요? 그 얼마나 반가왔을까요.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얼마간일지라도 인정하여 준다는 말을 들은 나는 얼마나 감사하였을까요?
그러나 그 감사하고 반갑고 기꺼운 말소리에 나는 얼핏 <네> 하지를 아니하였나이다.
그 <네>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일는지 잘못 아닐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하였든 저는 <네>소리를 하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를 이해하고 나를 인정하여 주는 그 R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하였을는지 더 무슨 만족을 주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거기에 이렇게 대답을 하였나이다.
“좋은 말이오, 우리 두 사람이 어떠한 공통 선상에 서서 서로 인정하고 서로 이해함을 서로 받고 주면 그만큼 더 행복스러운 일이 없지. 그러하나 형이라 부르거나 아우라 부르지 않고라도 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도리어 형이라 아우라는 형식을 만들 것이 없지 아니하냐?”
고 말을 하였더니 그는 무엇을 깨달은 듯이,
“딴은 그것도 그렇지.”
하고 나의 손을 더 힘있게 쥐었나이다.
3
금빛나는 종소리가 파랗게 갠 공중을 울리고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지? 그렇지 아니하면 온 우주에 가득 찬 ‘’에에테르’’를 울리며 멀리멀리 자꾸자꾸 끝없이 가는지, 어떻든 그 예배당 종소리가 우두커니 장안을 내려다보는 인왕산 아래 붉은 벽돌 집에서 날 때 저와 R은 C예배당으로 들어갔나이다.
그때에 누님도 거기에 앉아 계시었지요. 그리고 그 MP양도‥‥‥
처음 보지 않는 MP양이지마는 보면 볼수록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자꾸자꾸 변하여 갔나이다. 지난번과 이번이 또 다르지요.
지난번 볼 때에는 적지 않은 불안을 가지고 그 여성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낙망을 가지고 보았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번에 그를 볼 때에는 웬일인지 그에게서 보이지 않게 새어 나오는 무슨 매력이 나의 온 감정을 몽롱한 안개 속으로 헤매이는 듯이 누런 감정을 나에게 주더니 오늘에는 불그레하게 황금색이 나는 빛을 나에게 던져 주더이다. 그리고 그 황금색이 농후한 액체가 평평한 곳으로 퍼지는 듯이 점점점점 보이지 않게 변하여 동(銅)색의 붉은빛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어여쁜 처녀의 분흥저고리 빛으로 변하기까지 하였나이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릴 듯 돌릴 듯 할 때 마다 나의 전신의 혈액은 타오르는 듯하고 천국의 햇발 같은 행복의 빛이 나의 온몸 위에 내리붓는 듯하였나이다.
그리고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예배 시간이 나의 마음을 공연히 못살게 굴었나이다.
어찌하였든 예배는 끝이 났지요. 그리고 나와 R은 바깥으로 나왔지요, 그때 누님은 나를 기다리었지요. 그리고 저와 누님은 무슨 이야기든가 그 이야기를 할 때 아아, 왜 MP양이 누님을 쫓아오다가 저를 보고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저편으로 줄달음질쳐 달아났을까요? — 그렇지 않다는 그 MP양이— 누님, 그 MP양이 고개를 돌리고 줄달음질을 하거나 부끄러워 얼굴빛이 타오르는 저녁 노을빛 같거나 그것이 나에게 무엇이 되겠읍니까?
그러나 왜 나를 보고 그리하였을까요? 아마 다른 남성을 보고는 그리 안했을 터이지요? 그리고 그 줄달음질하여 저쪽으로 돌아가서는 그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더욱 부끄럽지나 아니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는 마음이 나지나 아니하였을까요?
어떻든 그것이 나에게 준 MP의 첫째 인상이었나이다. 그리하고 환희와 번뇌의 분기점에 나를 세워 놓은 첫째 동기였나이다.
저는 언제든지 이 시간과 공간을 떠날 날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 깊이 박힌 인생은 두렵건대 그 시간과 공간에 영원한 흔적을 남겨 줄는지요?
4
사랑하는 누님, 왜 나의 원고는 도적질하여 갖다가 그 MP양을 보게 하였어요? 그 MP양이 그 글을 보고 얼마나 웃었을까요?
누님의 도적질한 것은, 그것을 죄를 정할까요, 상을 주어야 할까요? 저는 꿇어엎디어 절을 하겠읍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을 열어 드릴 터입니다.
그런데 그 원고 OOO이라 한 곳에 서투른 필적을 자랑하려 한 것인지?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요, 그렇지는 않지요?
그러나 나의 원고를 더럽힌 그에게는 무엇이라 말을 하여야 좋을까요?
그러나 그러나 그 필적은 나의 가슴에 무엇인지를 전하여 주는 듯하였나이다. 사람의 입으로나 붓으로는 조금도 흉내낼 수 없는 그 무엇을 전하여 주더이다. 다만 취몽 중에 헤매이는 젊은이의 가슴을 못살게 구는 그 무엇을?
5
고맙습니다. 누님은 그 MP양과는 또다시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형제와 같다 하였지요? 그리고 서로서로 형님 아우하고 지낸다지요. 저는 다만 감사할 뿐이외다. 그리고 영원한 무엇을 바랄 뿐이외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 누님과 MP사이를 얽어 놓은 형제라 하는 형식의 줄이 나를 공연히 못살게 구나이다. 그리고 모든 불안과 낙망 사이에서 헤매이게 하나이다.
누님의 동생이면 나의 누이지요. 아니 나의 누님이지요. 그 MP양은 나보다 한 살이 더하니까 — 그러면 나도 그 MP양을 누님 이라 불러야 할 것이지요.
아아, 그러나 그것이 될 일일까요. 누님이라 부르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마는 나의 입으로 그를 누님이라고 부른다 하면 그 부르는 그날로부터는 그의 전신에서 분흥빛나는 무슨 타는 듯한 빛을 무슨 날카로운 칼로 잘라 버리는 듯이 사라져 버릴 터이지. 아니 사라져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제가 이 눈을 감아야지요.
아아, 두려운 누님이란 말, 나는 이 두려운 소리를 입에 올리기도 두려워요.
6
오늘 저는 PC에 보낼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신흥(神興)이 나지기 않아서 펴 놓은 종이를 척척 접어 내던져 버리고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대님을 한 번 갈아 매고 모자를 집어쓰고 바깥으로 나갔읍니다. 시계는 벌써 7시를 10분이나 지나고 있었나 이다.
저의 가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R의 집이지요. 그리고 내가 책을 볼 때에나 글씨를 쓸 때에나 길을 걷거나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을 때나 눈을 감고 명상할 때에나 나의 눈앞을 떠나지 않는 그 MP양을 오늘 R의 집에를 가면서도 또 보았읍니다.
저는 언제든지 MP양을 생각합니다. 허무한 환영과 노래하며 춤추며 이야기하며 나중 에는 두렵건대 손을 잡고 이 세상의 모든 유열을 극도로 맛보았읍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공상인 것을 깨달을 때에는 저도 공연히 싫증이 나고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비관의 종자가 될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아아 과연 다만 일찰나 사이라도 그 MP의 머릿속에서 나의 환영을 찾아낸다 하면 그 얼마나 나의 행복일까 하였나이다. 그리고 그 MP는 나를 조금도 생각지 않는 것만 같아서 공연히 마음이 애달팠나이다.
그날 R은 집에 있지 않았읍니다. 저의 마음은 눈물이 날 듯이 공연히 ‘’센티멘탈’’로 변 하여졌나이다. 그래서 정처없이 방황하기로 정하고 우선 L의 집으로 가 보았읍니다.
제가 그 처녀와 같이 조금도 거짓 없음을 부러워하는 L은 나를 보더니 그 검은 얼굴에 반가와 죽을 듯한 웃음을 띠우고 손목을 잡아 자기 방으로 끌어들이더니 어저께도 왔었는데,
“왜 그 동안에 그렇게 오지를 않았나?”
하지요. 그래 나는 그 얼마나 고독히 지내는 그 L을 보고 이때껏 계속하여 왔던 감상이 가슴 한복판으로 모여드는 듯하더니 공연히 눈물이 날 듯‥‥‥하지요. 그래 억지로 그것을 참고 멀거니 앉아 있었더니 그 L은 또 날더러 독창을 하라지요. 다른 때 같으면 귀가 아프다고 야단을 쳐도 자꾸자꾸 할 저이지마는 오늘은 목구멍에서 무엇이 잡아당기는지 그 목소리가 조금도 나오지를 아니하였나이다. 그래 공연히 앙탈을 하고 일어나기를 싫어하는 그 L을 옷을 입혀 끌고 바깥으로 나갔읍니다.
저녁 안개는 달빛을 가리우고 붉은 전등불만이 어두움 속에 진주를 꿰뚫어 놓은 듯이 종로 큰거리에 나란히 켜 있을 뿐이었나이다.
두 사람이 나오기는 나왔으나 어디로 갈 곳이 없었나이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하루 저녁을 유쾌히 놀 수도 없고 또 갈 만한 친구의 집도 없고 마음만 점점 더 귀찮고 쓸쓸스러운 생각을 하였나이다.
우리 두 사람은 결국 때없이 웃는 이의 집으로 가기로 하였나이다. 우리는 한 집에를 갔으나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그는 있지 않았나이다. 그래 하는 수 없이 설영(雪影)의 집으로 가기를 정하고 천변(川邊)으로 내려섰나이다. 골목 안의 전기불은 누구를 기다 리는 것같이 빙그레 웃으며 켜 있었지요. 우리는 그 집에를 들어가 ‘설영이’ 하고 불렀나이다. 안방에서 영리한 목소리로,
“누구요?”
하는 설영의 목소리가 났읍니다. 우리 두 사람은,
“있고나.”
하였읍니다. 그리고 공연히 마음이 반가왔나이다. 그리고 설영이는 마루끝까지 나와,
“아이그 어서 오세요, 왜 그렇게 한 번도 아니 오세요.”
하지요.
아, 누님 그 소리가 진정이거나 거짓이거나 관성으로 인하여 우연히 나온 말이거나 아무것이거나 나는 그것을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만 감상에 쫓기어 정처없이 방황하려는 이 불쌍한 사람에게 향하여 그의 성대를 수고롭게 하여 발하여 주는 그의 환영의 말이 얼마나 나의 피곤한 심령을 위로 하여 주었을까요.
그는 날더러 <오라버니>라 하여 주기를 맹서하여 주었읍니다. 그리고 영원히 오라버니가 되어 달라 하였읍니다.
누님, 과연 내가 남에게 오라버니라는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도 나의 원치 않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설영을 친누이동생같이 사랑하렵니다. 그리고 영원히 영원히 나의 누이동생을 만들려 하나이다. 그리고 다만 독신인 설영이도 진정한 오라비 같은 어떠한 남성의 남매 같은 애정을 원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나 무상인 세상에 그것을 과연 허락할 참 신(神)이 어느 곳에 계실는지요?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외다.
그날 L은 설영을 공연히 못살게 놀려먹었나이다. 물론 사념없는 어린애 같은 유회지요.
그때 L은 설영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읍니다. 설영은 소리를 지르며 간지러운 웃음을 웃으면서 나의 앞으로 달려들며,
“오아버니! 오라버니!”
하고 그 L을 피하였나이다. 나는 그때 그 설영이 비록 희롱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L에게 쫓기어 나에게 구호함을 청할 때에 아아, 과연 내가 이와 같은 여성의 구호를 청함을 받 을 만한 자격의 소유자일까 하였나이다. 그리고 모든 여성은 다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는 생각을 하고 혼자 이 설영이가 나에게 구호함을 청 한다는 것은‥‥‥ 그 설영을 끼어안을 듯이 귀여운 생각이 났나이다. 그러나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영의 그림자일까? 팔팔팔 날리는 봄날의 아지랭이일까? 영원이란 무엇일는지요‥‥‥
7
날이 매우 따뜻하여졌읍니다. 내일쯤 한 번 가서 뵈오려 하나이다. 하오에 기다려 주 십시오. 그리고 W군은 어저께 동경으로 떠나갔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만나보지 못한 것이 매우 섭섭하외다. 그리고 S군 Y군도 그리로 향하여 수일 후에 떠나간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아아, 저는 외로운 몸이 홀로이 서울에 남아 있게 되겠지요. 정다운 친구들은 모두 다 저 갈 곳으로 가 버리고‥‥‥
8
왜 어저께 저는 누님에게를 갔을까요? 간 것이 나에게 좋은 기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좋지 못한 기회이었을까요.
어떻든 어저께 나는 처음으로 그 MP와 말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가까이 서로 보 고 앉아 간질간질한 시선으로 그를 보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나의 눈에서 방산하는 시선의 몇 줄기 위로 나의 될 새 없이 뛰는 영의 사자를 태워 보내었나이다.
그는 그때 그 예배당 앞에서 나를 보고 고개를 돌리고 줄달음질하던 때와는 아주 달랐 읍니다. 그의 마음속으로는 나의 전신의 귀퉁이로부터 귀퉁이까지 호의의 비평을 하였을는지 악의의 비평 — 그렇지는 않겠지요 — 을 하였을는지 어떻든 부단의 관찰로 비평을 하였겠지요. 그러나 그의 눈과 안색은 아주 침착하였나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는 아주 나의 마음을 취하게 할 듯이 부드럽고 연하며 은빛이 났나이다.
그리고 나의 글을 너무 칭상(稱賞)하는 것이 조금 나를 부끄럽게 하였으며 또는 선생님이라는 경어가 아주 나를 괴롭게 하였나이다.
누님, 만일 그가 날더러 선생이라 그러지 않고 오라비라고 하였더면? 그 찰나의 나의 모든 것은 다 절망이 되어 버렸을 터이지요. 그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제가 도리어 그 선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행복인 것을 깨달을 날이 있을 줄은 이제 처음으로 알게 되었나이다.
어떻든 저는 그 MP와 만날 기회를 얻었읍니다. 그리고 서로 말소리를 바꾸게 되었읍 니다. 아마 이것이 저와 그 MP사이에 처음 바꾸는 말소리가 되었겠지요? 그리고 우주의 생명 중에 또다시 없는 그 어떠한 마디이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불안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못 견딜 만큼 불안합니다. 다만 한 번 있는 그 기회의 순간이 좋은 순간이었을까요? 기쁜 순간이었을까요. 무한한 희망과 영원한 행복을 저에게 열어 주는 그 열쇠 소리가 한번 째깍 하는 그 순간이었을까요. 그렇지 아니하면 끝없는 의혹과 오뇌 속에서 만일의 요행만 한 줄기 믿음으로 몽롱한 가운데 살아 있다 그대로 사라져 없어졌다면 도리어 행복일걸 하는 회한의 탄식을 나에게 부어줄 그 순간이었을까요?
어찌하였든 저는 한옆으로 요행을 꿈꾸며 한옆으로 부질없는 낙망에 에매이나이다.
9
오늘은 아침 9시에 겨우 잠을 깨었나이다. 그것도 어제 저녁에 공연히 돌아다니느라고 늦게 잔 덕택으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행복을 얻었더니 그나마 행복이 되어 그리하였는지 R이 찾아와서 못살게 굴지요. 못살게 구는 데 쪼들리어 겨우 잠을 깨어 세수를 하였나이다.
이상한 일이었나이다. 제가 R의 집을 가기는 하여도 R이 저의 집에 찾아오는 일이 없는 그가 오늘 식전 아침에 저를 찾아온 것은 참으로 뜻밖이고 이상합니다.
그는 매우 갑갑한 모양이었나이다. 그리고 요사이 며칠 동안 그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하였으며 언제든지 무슨 실망의 빛이 있었나이다.
오늘도 그는 침묵 속에 있었나이다. 그리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나이다.
그는 어디로 산보를 가자 하였나이다. 저는 아침도 먹지 않고 그와 함께 정처없이 나섰나이다.
우리는 전차를 타고 H와 P의 집에를 가 보았으나 H는 아침 먹고 막 어딘지 가고 없다하고 P는 집에 일이 있어서 가지를 못하겠다 하지요. 그래 하는 수 없이 우리 단 두 사람이 또다시 HC를 향하여 떠났나이다.
천기는 청명, 가는 바람은 살살, 아주 좋은 봄날이었나이다. 우리는 전차에서 내렸나이다. 오포(午砲)가 탕 하였나이다.
멀리멀리 흐르는 HC강은 옛적과 같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나이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향기도 없고 아무 웃는 것도 없고 다만 푸른 물 속에 취색(翠色)의 산 그림자를 비추어 있어 다만 ‘아아 아름답다’하는 우리 두 사람의 못 견디어 나오는 탄성뿐이 고요한 침묵을 가늘게 울릴 뿐이었나이다. 우리는 언덕으로 내려가 한가히 매여 있는 주인 없는 배 위에 앉아 아무 소리 없이 물 위만 바라보았나이다. 푸른 물 위에는 때때 은사(銀絲)의 맴도는 듯한 파련(波漣)이 가늘게 떨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사르렁사르렁 은사의 풀렸다 감겼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나이다.
우리는 한참이나 앉아 있었나이다.
우리는 문득 저쪽을 바라보았나이다. 그리고 나의 가슴은 공연히 덜렁덜렁하고 전신에·식은땀치 흐르는 듯하였나이다. 저기 저쪽·에는 그 비단결 같은 물 위에 한가히 떠 있어 물 속으로 녹아들 듯이 가만히 있는 그 ‘’요트’’위에는 참으로 뜻밖이었지요, 그 MP가 어떠한 다른 동무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나이다.
그러나 그 MP는 나를 보고도 모르는 체하는지 보지 못하고 모르는 체하는지 다만 저의 볼 것, 저의 들을 것만 보고 들을 뿐이었나이다.
저는 그 MP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나 만일 그가 나를 보고도 못 본 체한다면? 불과 몇십 간 되지 않는 거기에 있는 그가 어째 나를 보지 못하였을까? 못 보았을 리가 있나? 라고만 생각하는 저는 그에게로 가기가 두렵고 공연히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무엇이 원망스러웠을 뿐이었나이다.
그런데 웬일일까요‥‥‥MP를 나 혼자만 아는 줄 아는 저는 R의 기색에 놀라지 아니치 못하였나이다.
R은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MP가 왔네.”
하였읍니다. 그 소리를 듣는 저는 R이 어떻게 MP를 아는가 하였나이다. 그리고 무엇 인지 번개와 같이 저의 머리를 지나가는 것이 있더니 저는 그 R에게서 무슨 공포를 깨달은 것이 있었나이다.
R은 대담하게 MP에게로 갔읍니다. 저도 그를 따라갔읍니다. R은 모자를 벗고 그에게예를 하였나이다. 아아 그러나 누님, 정성을 다하지 않고 몽롱한 의심과 적지 않은 불안으로 주는 저의 예에는 그의 입 가장자리로 불그레한 미소가 떠돌았으며 따뜻한 눈동자 의 금빛 광채이었나이다. 그리고,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오셨어요?”
하는 그의 전신을 녹이는 듯한 독특한 어조가 저를 그 순간에 환희의 정화 속으로 스며들게 하였나이다.
우리 두 사람은 그를 작별하고 바로 시내로 들어왔나이다. 웬일인지 저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나이다. 그리고 전신의 혈액은 더욱더 펄펄 끓기를 시작하였나이다. 그러나 R의 얼굴은 그 전보다 더 비애롭고 실망의 빛이 떠돌았나이다. 쓸쓸한 미소와 쓸쓸한 어조가 도는, 저의 동정의 마음을 일으킬 만큼 처참한 듯하였나이다. 저는 R에게,
“어떻게 MP를 알던가?”
하였읍니다. 그는 무슨 옛날의 환상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전부터 알아.”
하였나이다. 이 소리를 듣는 저는 그러면 이성 사이에 만나면 생기는 사랑의 가락이 그 MP와 이 R 사이에 매여지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여태껏 기껍던 것이 점점 무슨 실망의 감상으로 변하여 버리었나이다. 그리고 차차 의혹 속에 방황하게 되었나이다.
그리하다가도 그 R의 실망하는 빛과 MP의 냉담한 답례가 저에게 눈물날 만큼 R을 동정하는 생각을 나게 하면서도 또 한옆으로는 무슨 승자의 자랑을 마음 한귀퉁이에서 만족히 여기었으며 불행한 R을 옆에 세우고 다행히 환희를 맛보았읍니다.
그날 저는 R의 집에서 자기로 정하였나이다. 밤 11시가 지나도록 별로 서로 말을 한 일이 없는 R과 두 사람 사이에는 공연히 마음이 괴로운 간격을 깨닫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그의 푸른 비애와 회색 실망의 빛이 그의 얼굴로 가끔가끔 농후하게 지나갈 때마다 저는 공연히 불안하였나이다.
저는 R에게 그 기색이 좋지 못찬 이유를 묻기를 두려워하였나이다. 그리고 만일 그 비애의 빛과 실망의 빛이 그 MP로 인한 것이 아니고 다른 것으로 인한 것이라 하면 저는 그때 그 R의 그 비애와 실망과 똑같은 비애와 실망을 맛보았을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형제와 같은 그 R의 비애와 실망을 그 MP로 인하여서라고 인정하지를 아니하면 저의 마음이 불안하셔 못 견딜 정도였읍니다.
그날 저녁 R은 자리에 누워서도 한잠을 자지 못하는 모양이었나이다. 다만 눈만 멀뚱멀뚱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나이다. 그리고 머리를 짚고 눈을 감고 무엇인지 명상 하듯이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나이다. 그의 엷은 눈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읍니다.
저도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읍니다. 그래 머리맡 서가에 놓여 있는 <On The Eve>를 집어들고 한참이나 보다가 잠이 깜빡 들었나이다.
10
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버리었나이다. 꿈을 믿고 길에서 장님을 만나면 두 다리에 풀이 다하도록 실망을 하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꽃의 화판을 “하나 둘” 하며 <MP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하며 차례차례 따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사랑한다> 하는 곳에서 맨 나중 꽃잎사귀가 떨어지면 성공한 것처럼 춤을 출 듯이 만족하였으며 그렇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는 곳에 와서 그 맨 나중 꽃잎사귀가 떨어지면 공연히 낙망하는 생각이 나며 비로소 그 헛된 것을 조소합니다. 그러나 어느 틈에 또다시 그 꽃잎사귀를 따 보고 싶어 못 견디게 되나이다. 저는 요행을 바라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미신자가 되었읍니다. 오늘은 제가 누님을 만나뵈러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W군이 ‘’피스’’(piece)를 찾아 달라 하여서 누님에게로 갔읍니다.
누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다만 침착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정문 앞 ‘’플랫폼’’을 왔다 갔다 하였나이다.
그러다가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나오는 사람은 누님이 아니고 그 MP였읍니다. MP 는 나를 보더니 쌩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하여 주었나이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있 었나이다. 그 뒤를 따라 나온 이가 누님이었지요.
저의 마음은 이상하게 기뻤나이다. 그리고 아주 무슨 희망을 얻은 듯하였나이다. 길거리로 걸어다니면서도 혹시나 MP를 만나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순간의 기회를 기대하는 저는 누님에게로 갈 때마다 그 MP를 만날 수가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다니었나이다. 오늘도 그 기대를 조금일지라도 아니 가지고 간 것이 아니었건마는 그 MP가 있지 않을 줄 안 저는 아주 단념을 하고 갔었읍니다. 그래 그 MP를 만난 것은 아주 의외이었지요.
누님 그 MP가 무엇하러 누님보다도 먼저 저를 보러 나왔을까요. 어린 아우를 만나려 는 누님의 마음이었을까요. 반가운 정인을 만나려는 애인의 마음이었을까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저와 오랫동안 말을 하였나이다. 그리고 동청이 푸른 잔디 사이를 누님과 저 세 사람이 산보하였지요? 저희가 그 좁은 길로 지나올 때 저는 그 MP에게,
“R을 어떻게 아셨던가요?”
하고 물어 보았읍니다. 그 MP는 조금 얼굴이 불그레한 중에도 미소를 띠우며,
“네, 그전에 한 두어 번 만나본 일이 있었어요.”
하고 대답을 하였지요. 그 소리를 듣는 저는 곧,
“R은 참 좋은 사람이야요.”
하였지요. 그러니까 그 MP는 곧 다른 말로 옮기어 버렸나이다.
그렇게 한 10분쯤 되어 누님과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조용히 할 말이나 있는 것처럼 주저주저하였나이다. 그러니까 그 MP는 곧 영리하게 그것을 알아차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요.
아아 그때 저의 마음은 아주 섭섭하였읍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MP는 떠나기가 싫었나이다. 그러나 그의 검은 치맛자락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게 사라져 버리었나이다. 그때 누님은 절더러 이야기를 하여 주었지요. 그 MP를 R이 사랑하려다가 그 MP가 배척을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MP가 저의 그 누님이 도적하여 간 원고를 보고 도외(度外)의 찬상을 하더라는 것과 그러나 그가 한가지 불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적더라는 것을. 저는 누님과 작별을 하고 문 밖으로 나오며 뛰어갈 듯이 걸음을 속히 하여 걸어 가며,
“내가 행복한 자냐 불행한 자냐?”
하고 혼자 소리를 질러 보았읍니다. 그거다가는 그 신앙이 적다고 하는데 대하여는 적지 않은 불쾌와 또 한옆으로는 희미한 실망을 깨달았읍니다.
그래 집에 돌아와 아랫목에 누워서 여러 가지로 그 MP와 저 사이를 무지개빛 나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만 얽어 놓아 보다가도 그 신앙이란 말을 생각하고는 곧 의혹 속에 헤매었나이다. 그러다가는 그의 집에서본 <On The Eve>를 읽던 것이 생각되며 그 여주인공 ‘’에레나’’의 일기가 생각났읍니다.
그의 애인 ‘’인사로프’’와 그의 아버지가 그와 결혼시키려는 ‘’크르나도오스키’’를 비교하여 ‘’인사로프’’에게는 신앙이 있을지라도 ‘’크르나도오스키’’에게는 신앙이 없었다. 자기를 믿는 것 만으로는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누님, 저는 이 글을 볼 때 공연히 실망하였읍니다. ‘’에레나’’는 신앙 있는 사람을 사랑하였읍니다. 그리고 신앙 없는 사람을 사랑치 않았읍니다. 그러면 MP도 언제든지 신앙 있는 사람을 사랑할 터이지요. 그러면 그 MP가 저에게 신앙이 없다고 한 말은 저를 동생 이나 친우로 여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애인으로 생각지는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누님, 그러면 저는 실망할까요. 낙담할까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물론 누구에게든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없읍니다. 누구는 예수를 믿고 석가를 믿고 우상을 믿고 여러 가지를 믿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를 믿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님, 저도 무엇인지 신앙하는 것이 있겠지요? 신앙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니까—누구든지 각각 자기가 신앙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아 있으니까 저도 또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 어떠한 신앙이든지 가지고 있겠지요.
저 어떠한 종교를 어리석게 믿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신앙만이 참신앙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의 신앙을 조소합니다. 그러나 한 번 더 크게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어 사면을 둘러보는 자는 각각 이것과 저것을 대조할 수가 있을 것이지요. 그리고 각각 장처와 결점을 찾아 낼 수가 있을 것이지요.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물론 그 이불 속뿐이 세상인 줄 알 터이지요. 그리고 그 속에만 참진리가 있는 줄 알 터이지요. 그러하나 그 이불 속만이 세상이 아니고 그 속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닌 줄 아나 그 이불을 벗어 버린 자는 그 이불 쓴 사람을 불쌍히 여기었을 터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는 그 이불을 벗은 사람이 여럿이 있었읍니다. 그리하여 그 이불을 뒤집어쓴 사람들을 아주 불쌍히 여기었읍니다.
그러면 저도 그 이불을 벗은 사람의 하나가 되려 합니다. 다만 어떠한 이름 아래서든지 그 온 우주에 가득 차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는 진리를 믿는 사람이 되려 하나이다. 그리하여 다만 그것을 구할 뿐이요, 그것을 체험하려 할 뿐이외다.
물론 사람은 약한 것이지요. 심신이 다 강하지는 못하지요. 제가 어떠한 때 본의아닌 일을 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약한 까닭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때 는 그것을 고치겠지요. 그리고 누님 한 가지 끊어 말하여 둘 것은 <Quo Vadis>에 있는 ‘’비니큐스’’와 같이 ‘’리기아’’의 신앙과 같은 신앙으로 인하여서 저도 그 ‘’비니큐스’’는 되지 않겠지요.
아아 그러나 누님, 제가 어찌하여 이와 같은 말을 쓸까요? 사랑보다 더 큰 신앙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요.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것은 사랑이 있을 뿐이지요. 사람 이 사랑으로 나고 사랑으로 죽고 사랑으로 살기만 하면 그 사람의 생은 참생이 되겠지요. 그러하나 저희는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처음은 이성에게 사랑을 구하는 자가 누가 주저하지 않은 자가 있고 누가 가슴이 떨리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그러면 사랑이란 죄악일까요? 죄지은 자와 똑같은 떨림과 불안을 깨닫는 것은 어찌함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읍니다. 그것은 열정과 이지입니 다. 이 세상의 역사는 이 두 가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모든 불행의 근원은 이 열정과 이지가 서로 용납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운 이성을 보고 자기 마음을 피력치 못하고 혼자 의심하고 오뇌하는 것도 이 이지로 인함이지요? 저는 어떻게 하면 이 이지를 몰각한 열정만의 인물이 되려 하나, 그 이지를 몰각한 열정의 인물이 되겠다는 것까지도 이지의 사주지요. 저도 또한 그렇게 되려 하나이다.
오늘 저는 또다시 R의 집에를 갔었나이다. 그 R은 있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으면 곧 들어오리라는 그 집 사람의 말을 듣고 저는 그의 방에서 기다리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R이 저와 형제같이 친하지가 않으면 그와 같이 주인 없는 방안에 들어가 앉아 있지를 못하였을 터이지요. 그래 그와 친하다 하는 무엇이 저를 그의 방으로 들어가게 하였읍니다.
저는 그의 방에 들어가 그의 책상 앞에 앉았나이다. 그때 문득 저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가 써서 놓은 편지였나이다. 그리고 그 편지 피봉에는 MP라 씌어 있었읍니다. 저의 마음은 공연히 시기하는 마음이 나며 또한 그 편지를 기어이 보고 싶은 생각이 났었읍니다. 마침 다행한 것은 그 편지를 봉하지 않은 것이었나이다.
저는 그것을 보았읍니다.
그 속에는 이러한 말이 쓰여 있었읍니다.
‥‥‥DH는 미숙한 문사이오. 그리고 일개 ‘’부르주아’’에 지나지 못하는 사람이오‥‥‥
라고.
아아 누님, 저는 손이 떨리었나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다시 그 자리에 놓고 그대로 바깥으로 뛰어나왔읍니다. 그리고 길거리로 걸어오며 눈물이 날 만큼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또 한옆으로는 분한 생각이 나서 못 견디었나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R이 그와 같은 말을 써 보낼 줄 참으로 알지 못하였나이다. 누님 그렇지요. 저는 글쓰는 데 미숙하겠지요. 저는 거기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말하려 하지 않나 이다. 그러나 그 말을 무엇하러 MP에게 한 것일까요.
아아 누님, 저는 일개 참사람이 되려 할 뿐이외다.
저는 문학가, 문사라는 칭호를 원치 않아요. 다만 참사람이 되기 위하여 글을 봅니다. 그리고 느끼는 바를 견딜 수 없었읍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느낌과 깨달음이 우리 인생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 일개인의 성공은 얻기가 어려울 터이지요. 제가 느끼고 깨닫는 것은 길고 긴 우주의 생명과 함께 많고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것에 다만 몇천만억분의 1이 될락말락 할 터이지요. 그리고 그 저의 생명이 그치는 날에는 그것보다 조금 더하여질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무엇을 원할지라도 유한한 저의 육체와 정신은 그것을 용서치 않을 터이지요.
그러면 제가 ‘’부르주아’’나 ‘’프를레타리아’’나 무엇 어떠한 부름을 듣던지 언제든지 참사람이 되려 할 뿐이외다.
아마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혼자 깨달은 줄 아는 사람일지라도 이 참사람이 되려는 데서 더 벗어나지는 못하였을 터이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부터 친애하는 친우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나이다. 아무리 아무리 제가 너그러운 마음으로써 그전과 같이 R을 대하려 하나 그는 나를 모함한 자이지요. 어찌 그전과 같은 정의(情[[誼]])를 계속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저의 마음은 괴롭습니다. 그리고 그 KC를 가면서 저에게 형제와 같이 지내자 던 것을 생각하고 또는 그동안 지내 오던 정분을 생각하고 그것이 다만 한순간에 깨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저의 마음은 아주 안타까왔나이다. 그러다가도 그 R의 손을 잡고 기꺼워하고 싶었읍니다.
11
집에서 나을 때 동생 L이 울며 쫓아나오면서,
“형님 형님 나하고 가.”
하며 부르짖었나이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어머니에게 L은 맡기고 또다시 R을 찾아갔나이다.
어제 저녁 늦도록 잠을 자지 못한 저는 오늘 또다시 새벽에 일찍 일어났으므로 몸이 조금 피곤하였나이다.
저는 R의 집으로 가면서 몇 번이나 가지 않으리라 하여 보았읍니다. 날마다 가는 R의 집에를 1주일이나 가지 않은 저는 오늘도 또 가 볼 마음이 그리 많지는 않았읍니다. R을 생각하면 할수록 분하고 답답한 저는 언제든지 그 마음을 누르려 하였으나 그리 속마음이 편치는 못하였읍니다.
제가 R의 집에 들어갈 때에는 아주 마음이 유쾌치 못하였읍니다. R은 저를 보고 힘없이 저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하여 주었읍니다. 그리고,
“어서 오게.”
하는 소리가 아주 반갑지 못하였읍니다. 저는 그 R을 보기 전에는 반갑게 인사를 하리 라 한 것이 지금 그를 만나보니까 공연히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싫은 생각이 나서 그대로 바깥으로 나오고 싶었읍니다.
저는 그대로 서서,
“여러 날 만나지 못하여서 조금 보고나갈까 하고‥‥‥”
하며 그를 쳐다보았읍니다. 그는 다만 고개를 끄덕하며,
“응‥‥‥”
할 뿐이었나이다. 저는 갑자기 뛰어나오고 싶었읍니다. 그래,
”내일 또 봅시다.”
하고 그대로 뛰어나왔읍니다. 그 R은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읍니다.
아아, 누님,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어째 이리 멀어졌을까요? 무슨 간격이 생겼을까요? 그리고 무슨 줄이 끊어졌을까요. 저는 그것을 알 수가 없읍니다.
제가 종로를 걸어올 때였읍니다. 저쪽에서 뜻밖에 그 MP가 걸어왔읍니다. 그때 저는 그 MP와 만나 인사를 하리라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MP는 어떠한 양복 입은 이와 함께 저를 못 보았는지 저의 곁으로 그대로 지나가 버렸나이다. 저는 다만 지나가는 그만 바라보고 있다가 손을 단단히 쥐고, ‘에 고만 두어라’ 하였읍니다.
저는 말할 수 없는 번뇌 가운데 ‘에, 설영에게나 가리라’ 하였나이다. 그리고 천변으로 그의 집을 찾아갔읍니다. 그때 저의 마음 에도 ‘설영이가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없이 으례히 만나려니 하였나이다. 그러나 설영을 부르는 저의 목소리에 그 영리하고 귀여운 우리 누이동생의 목소리는 나지 않고 그의 어머니가 “없소” 하고 냉대하듯 보통 손님과 같이 대답을 하였읍니다. 그 소리를 듣는 저는 공연히 섭섭한 생각이 나며 또는 설영이가 저를 한낱 지나가는 손처럼 생각하는 듯하고 또한 어떠한 정인이나 찾아가지 않았나 할 때 오라비 노릇을 하려는 저도 공연히 질투스러운 마음이 나며, ‘다 그만두어라’하는 생각이 나고 공연히 감상(感傷)의 마음이 났읍니다.
저는 그대로 집으로 갔읍니다. 집 문간에 서 놀던 L은 반기어 맞으면서 두 팔을 벌리고 저에게 턱 안기며 몸을 비비 꼬고 그의 가는 손으로 간지럽고 차디차게 저의 뺨을 문질러 주었나이다. 그때 저는 모든 감상의 감정은 가슴 한복판으로 모아드는 듯하더니 눈물이 날 듯하였나이다. 그때 그 L은,
“형님, 임마!”
하였나이다. 그래 저는 그에게 입을 맞추려 하니까 그는 무엇이 만족치 못한지,
“아니 아니 귀 붙잡고.”
하며 그의 손으로 저의 두 귀를 붙잡고 입을 맞추어 주려다가 또다시,
“형님도 내 귀 붙잡아.”
하였나이다. 저는 그 L의 귀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나이다. 그러나 그때 L은 저를 쳐다보며,
“형님 우네.”
하였나이다. 아아 누님, 저의 눈에는 눈물이 나왔읍니다. 그리고 그 L을 껴안고 울고 싶었읍니다.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