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새는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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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1

정애(晶愛)는 <신여자(新女子)>란 잡지를 보다가 또다시 미닫이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시름없이 오는 비는 오히려 아니 그치었다. 하늘을 회칠한 듯하던 구름이 히실히실 헤어져서 저리로 저리로 달아나건만는 그래도 푸른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머리올 같은 가랑비가 연기나 안개 모양으로 공중에 가물거리고 있었다.

 

오늘이 공일이라, 모처럼 동물원 구경을 가자고 동무들과 튼튼히 맞추어둔 것이 원수의 비로 말미암아 하릴없어 수포(水泡)에 돌아가고 말았다. 비가 오거든 펑펑 쏟아지거나 하였으면 단념이나 하련마는 시들지 않은 가는 빗발이 부슬부슬 뿌리기만 하기 때문에, 그는 조금만 있으면 개려니, 얼마 안되어 그치려니, 하는 일루(一縷)의 희망을 품고 미닫이가 닳도록 열어보고 또 열어보았음이었다.

 

정애의 얼굴에는 그늘이 지며, 혼잣말로 울 듯이,

 

(그저 비가 오네! 참 속상해 죽겠구먼!)

 

하고 미닫이를 홱 닫고는 다시금 아까 보던 잡지를 들추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볼꼬? 이것을 볼까? 그런데 이것이 몇 페이지나 되노?) 하고 손으로 책장을 날리며 (한 장 두 장 석 장…… 모다 석 장이구먼, 이것만 다 보고 나면 혈마 비가 그치겠지) 무릎 밑에 깔린 치맛자락을 빼내기도 하고, 눈을 가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기도 하며, 턱 괸 한 팔을 무릎 위에 얹고는 맥맥히 보기 시작하였다.

 

(벌써 끝일세. 인제는 비가 아니 올거야.)

 

기쁜 빛이 살짝 얼굴에 퍼지며, 또 손이 미닫이로 가려다 말고 걱정스럽게

 

(아직도 아니 그쳤으면 어쩌나?)

 

라고 입안말로 소곤거리었다.

 

누가 그에게, 여기서 예까지 보기만 하면 비가 아니오리라고 언약한 것도 아니요, 내기한 것도 아니언만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스스로 그러려니 기대하며, 그 정(定)한 페이지를 읽고 날 적마다 인제는 비가 개었거니 하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른 것처럼 기뻐하면서 미닫이를 열었다가 그저 비가 오는 것을 보면 누가 그를 속인 것처럼 애닯고 슬펐었다. 이러구러 한 번 속고 두 번 속아 내려옴에, 점점 자기의 결정과 기대에 대한 믿음이 엷어가서, 인제는 미닫이를 열기 전부터 미리 근심조차 하게 되었다.

 

그의 귀에는 가만가만히 내려지는 빗소리가 그윽히 울리는 듯하였다.

 

(그래도 혈마 이때껏 올라구.)

 

그는 문틈으로 눈을 주며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비는 벌써 개지 않았을까? 구름조차 벗겨지지 않았을까? 화라(花羅)와 영숙(永淑)이가 나를 더리러 오지 않는가?…….고만 밖을 내다볼까? 아니 그럴 것이 아니다. 비가 오고 아니 오는 것을 통히 잊어버리고 있는 게 상책이다. 무망중에 화라와 영숙이가 쑥 달겨들면 얼마나 기쁠까?)

 

그는 이렇게 고쳐 생각하고, 또다시 잡지를 집어들다가 오늘 아침에 비오는 것이 하도 속이 상해서 갈아입으려던 옷도 아니 갈아입고 닦아두려던 구두도 아니 닦아 둔 것이 문득 마음에 걸리었다. 그리고 화라와 영숙이가 와서 남이 옷도 못 갈아입고 구두도 못 갈아 신게 재촉을 하면 어찌 할꼬 하였다. 입으려면 지금 입어야 되고 닦으려면 지금 닦아야 되리라. 날이 들고 아니 든 것을 시방 당장 알아두어야 되리라……

 

정애는 불현 듯 미닫이를 열어보았다. 비는 아니 온다. 회색 장막을 드리울 듯이 음침하던 공기 가운데 밝은 빛에, 해의 그림자조차 하야스름하게 드러나 있었다.

 

정애는 놀란 듯이 몸을 일으켰다. 기쁨으로 하여 춤추는 듯한 그의 발길은 선뜻 마루를 내려섰다. 마당 여기저기를 자근자근 밟아보았다. 땅은 그리 질지 아니하였다. 시방이라도 구경을 가려면 못갈 것이 아니다.

 

그는 부랴부랴 구두를 닦기 시작하였다. 구두를 닦기전에 화라와 영숙이가 올까 보아 조바심을 하면서 문소리가 날 적마다 연해 연방 돌아보았다. 그러나 구두를 다 닦을 때까지 동무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닦은 구두를 신고서, 또한번 마당을 밟아본 뒤에 다시 한길을 시험해보려고 막 중문(中門)을 나서려 할즈음이었다.

 

“편지 받으오”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체전부가 편지 한 장을 떨어뜨리었다.

 

2

정애는 슬쩍 그 편지를 집어들어 겉봉을 보았다.

 

「시내 익선동 一九, 이은우(李殷雨)씨 방 이정애 씨 앞」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것 보아, 누가 나한테 편지를 하얐네.)

 

그는 저도 모를 사이에 이렇게 중얼거리고, 얼른 뒤쪽을 보았다.

 

「안국동 김영숙으로부터」

 

(이애가 웬 편지를 하였을꼬? 비가 그쳤는데 오지를 않고…… 아마도 저도 나 모양으로 오늘 아침, 비 오는 것이 속이 상해서 화풀이로 편지를 하였나 보다.) 마음 속으로 소곤거리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급히 겉봉을 떼어보았다.

 

정애씨! 용서하야 주시오.

 

그 편지의 첫머리는 이러하였다. 가는 웃음이 그의 입술에 흘렀다.

 

만나면 서로 네니 내니 하면서 편지에다가는 정애씨!라고 끌어올린 것이 우스웠음이다.

 

이런 편지를 드리는 것은 정애씨의 신성(神聖)을 더럽힘이요, 예절에 틀린 줄 모르는 바 아니외다. 몇 번이나 쓰다말고 부치려다 말았는지요! 그러나 인제는 참을 수 없습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정애의 눈은 호동그래지고 말았다.

 

(이애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정애씨!

 

보시고 정애씨의 마음에 거슬리거든 뜯어버리시든지 살라버리시든지 뜻대로 하기는 하십시오! 그래도 읽기는 다 읽어주셔야 합니다. 보기는 다 보아주셔야 합니다.

 

정애씨!

 

무엇으로 나의 가슴을 형용하며 무엇으로 나의 마음을 비유할는지요! 천 갈래로 흩어진 머리카락 같다 할까, 만 가닥으로 엉클어진 실끝 같다 할까? 이 불완전한 우리 인간의 발명한 글로와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도 없고, 비유할 수도 없습니다.

 

정애는 그린 듯한 눈썹을 보일 듯 말 듯 찡그리며, (이애가 왜 구슬픈 소리만 하나?……. 그애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하고 다시 그 밑을 보았다.

 

정애씨!

 

나는 외롭습니다. 나는 쓸쓸합니다. 바다는 바다를 이었는데 외로이 떠나가는 편주(扁舟)와 같습니다. 사막에서 사막으로 쓸쓸히 걸어가는 행려(行旅)와 같습니다.

 

정애씨!

 

나를 외로운 데서 건져주소서, 쓸쓸한 데서 구해주소서!

 

세상도 넓고 사람도 많지마는 정애씨만 아니면 나는 영원히 외롭고 쓸쓸할 것이외다.

 

정애씨의 사랑이라야 가을바람이 소슬(蕭瑟)한, 싸늘한 이 가슴에도 따스한 봄 입김이 들 것이외다. 줄여 말하면, 나는 정애씨를 사랑하노니, …… 열렬히 사랑하노니 정애씨도 나를 사랑하야 달란 말이외다. 그러나 나는 전적으로 정애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외다. 정애씨와 같이 그림자처럼 서로 따르고 거울처럼 마조앉기를 바라야 바랄 수 없는 사람이외다.

 

봄날 따뜻한 꽃 그림자 밑에 자리를 쓸어안고 가을바람 선선한 달빛 아래 옷깃을 날리면서 꿀 같은 장래의 낙원을 그림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복된 일일까요?

 

그러나 그보담도 내 마음은 정애씨의 마음에 있고 정애씨의 마음도 내 마음을 떠나지 아니하야 기쁨도 노누고 슬픔도 노눈다고 하면 그뿐일 것이외다.

 

멀리멀리 서로 떠나 있어, 산 막히고 문 가린 저 편에 있는 정애씨를 생각하고 애닮은 눈물을 흘리다가도 「정애도 지금 너를 생각하고 있나니라」하는 정애씨의 마음소리를 들을 것 같으면 나는 눈물이 걷히기 전에 기쁜 웃음을 웃을 것이외다.

 

정애는 단숨에 예까지 보고 나서 두 손이 힘없이 그 편지를 무릎 위에 놓으며 한참 황황(恍惶)하였다.

 

꽃 그림자 밑에 앉은 자기의 모양, 달 아래 선 자기의 모양이 선하게 나타나다가, 서로 외로이 서서 저편 사람을 생각하고 눈물을 짓는 광경이 보이며, 그 거슴츠레한 눈에 스르르 눈물이 괴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였다. 홱 하고 밑창이 열리며 정애의 동무 화라가 들어온다.

 

3

살이 삐죽삐죽 내다보일이만큼 팽팽히 양말(洋襪)을 잡아당긴 종아리가 가볍게 문지방을 넘어선다. 솜씨있게 화장한 얼굴엔 흔적 없는 분길이 보얗게 퍼졌고, 삼분의 일로 멋부려 가른 머리엔 윤이 지르르 흐르면서도 힘없이 풀린 두어 올이 뺨 위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정애는 놀란 듯이 몸을 흠칫하며 두 손으로 얼른 그 편지를 움켜쥐었다.

 

“들어앉아서는 무엇을 하니? 동물원 구경을 아니 갈 터이냐? 땅이 아주 말렀더라.”

 

화라는 앉지도 아니하고 서서, 이런 말을 하다가 정애가 한 발이 넘을 듯한 편지를 움켜쥐고 있는 양을 보고,

 

“그것은 무엇이냐? 누구한테서 온 편지길래 그야말로 만지장서이냐?”

 

정애는 고개를 숙이며 몹시 말하기 어려운 듯이

 

“아니 저어……”

 

어물어물하고는 귀밑까지 새빨갛게 당홍물이 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영숙이한테서 온 것인 줄 알고 읽었다가 그 사연에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까지 흘릴 뻔하였으나 다만 그 말이 이상하다 할 뿐이요, 그 경우가 가엾다 할 뿐이요, 영숙 아닌 다른 사람의 편지인 줄은 짐잠하지 못하였다. 짐작하지 못하였다느니보다 의심할 어느 겨를이 없었다. 함이 적당할지 모르리라.

 

그러나, 이제 와서는 직각적(直覺的)으로 영숙의 편지가 아닌 줄도 알았고 또 자기와 같은 여성의 편지가 아니라 어떤 남성의 편지인 줄도 어렴풋이 깨닫기도 하였다.

 

화라는 몸을 구부려 「너의 하는 양이 괴이쩍구나」하는 듯이 정애의 얼굴을 뚫어지라고 들여다보았다.

 

불이 붙은 듯한 두 뺨에는 후끈후끈 단김이 나는 듯하고 내리감은 긴 속눈썹엔 젖은 듯 한 듯한 눈물 빛이 은가루같이 번쩍이고 있다.

 

정애는 화라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쓰며,

 

“이 애가 왜 남의 얼굴을 이렇게 들여다보아!”

 

라고 안타까운 소리를 떨었다.

 

화라는 의심을 더럭 내었다.

 

“울기는 왜 울었니? 대관절 무슨 편지길래 그렇게 숨기려 드느냐?”

 

이럴 즈음에 그는 정애의 곁에 놓인 편지를 손싸게 집어들었다.

 

“나는 누가 한 편지라고, 영숙의 편지로구나…… 그 속에 무슨 말이 있건대 나를 아니 보이려 든단 말이냐? 내가 알면 아니될 비밀이 무에냐?”

 

“비밀이 무슨 비밀이냐, 아모 말도 없어……”

 

“아모 말도 없으면 왜 아니 보이려고 한담!”

 

정애는 덤덤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를 따돌리고 너희들 둘이만 소곤소곤하던 게 인제 아니 무슨 까닭이 있었구나.”

 

하고 화라는 그 눈초리가 길게 찢어진 실눈을 샐쑥하게 깔아메치었다.

 

“내가 언제 너를 따돌리고 영숙이와 소곤거리던? 남의 애매한 말도 퍽도 한다”

 

정애는 말이 딴 길로 나간 것을 마음 그윽히 기뻐하면서 매우 분한 듯이 채쳐 물었다.

 

“왜 저어 그날– 영숙의 집에 놀러 갔던 날, 너희 둘이만 무엇 사러 나가지 아니하얐니?”

 

“원참, 그때 자꾸 같이 가지니깐 저 혼자 책을 보고 있겠다 하구서!”

 

“그 말은 그만하고 편지나 좀 보여주렴!”

 

하다가 겉봉의 글씨를 자세히 보더니

 

“이것은 영숙의 글씨가 아니야! 그애가 웬걸 이렇게 쓸 줄 아나. 이것은 여필이 아니고 남필이야!”

 

라고 무슨 큰발견이나 한 듯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한동안 그는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멍멍히서 있었다. 그 찰나에 그의 얼굴은 오리알빛같이 해쓱해지고 말았다. 그럴 동시에 정애를 노려보는 시선은 칼날같이 날카로왔다.

 

“흥, 그래서 아니 보여주랴고 했구나. 그래도 기어기 좀 보고는 말걸!”

 

하고는 자기를, 또는 남을 빈정대듯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속엔 허전허전하는 절망의 울림과 가슴을 짜내는 애닯은 웃음가락이 품기어 있었다.

 

정애의 곁으로 바싹 다가들며 우격으로 그 편지를 빼앗으려 하였다.

 

4

화라가 달려드는 양을 보고 정애의 눈에는 마치 첫날밤에 신랑의 달겨듬을 바라보고 신부의 그것 모양으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섞이어 돌고 있었다.

 

“남의 편지를 왜 자꾸 보자니?”

 

정애는 뒤로 쏠리며 들어오는 화라의 손을 밀치었다.

 

“안 보이겠다는 것을 빼앗기까지 하렬 것은 무에야!”

 

그 목소리는 벌써 울음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화라의 한 손은 힘있게 그 편지 한 머리를 잡았다. 정애는 한 손으로 그 편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또 한 손으로는 편지 잡은 화라의 손을 밀어내려 들었다.

 

바람에 취둘리는 백합화 모양으로 네 송이 보오얀 손은 이리 번뜻, 저리 번뜻 서로 부딪쳤다 서로 떨어졌다 하였다. 그럴 사이에 화라의 한 손이 영악스럽게 그 말썽부리는 종이쪽을 훔쳐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이 정애의 편지 잡은 손을 비틀어돌리기 시작하였다. 엉긴 우유처럼 보얗던 살에 연지빛이 스미며 가늘게 떨고 있다.

 

“아이구 아퍼! 이 애가 왜 이래!”

 

정애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그러기에 편지를 좀 놓으란 말이야.”

 

화라는 숨찬 소리로 부르짖었다.

 

두 처녀는 피차에 숨소리를 씨근벌떡거리고 있었다. 다 같이 상기된 새빨간 뺨들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올올이 검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주 닿은 두 대가리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흔들 춤추듯 하였다.

 

처음부터 승패는 기정적(旣定的) 사실이었다. 화라는 열아홉 살로 정애보다 이태 맏이었고 또 힘도 세었다.

 

화라에게 잡힌 정애의 손목은 붉다 못하여 자주빛을 띠어오더니, 마침내 그 손아귀가 맥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어느 곁에 화라는 그 편지지를 빼앗아들었다.

 

그 약탈물은 배배 꼬이어 짓비벼 놓은 듯하였다. 화라는 버럭 몸을 일으켜 저리로 가며 개가(凱歌) 대신 씩 웃었다.

 

“나 좀 보고 주께.”

 

하고는 구긴 것을 살살 펴가며 읽어보려 하였다.

 

실랑이에 더할 수 없이 지친 정애는 그만 그 자리에 늘어질 것 같았으나 화라의 편지를 펴보려는 꼴을 볼 제 없던 기운이 온몸에 넘치는 듯하였다. 그는 나의 보배를 남에게 빼앗긴 것처럼 분하고 아깝고 애닯아 견딜 수가 없었음이다.

 

나는 듯이 몸을 소스라칠 겨를도 없이 화라를 뒤로 안으며 잃은 물건을 도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늦었다.

 

화라는 정애의 일어남을 보고 벌써 어느 곁에 그 약탈물을 몸속 깊이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쉬웁게——–”

 

하고 화라는 돌아서서 정애를 떠다밀며 어림도 없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이리 주어! 왜!”

 

정애의 눈에는 핏발이 돌았다.

 

“주기는 무엇을 주어! 보지도 않고 준단 말이야!”

 

하고 한 마디 던지고는 빼쳐 밑창을 열고 달아나려 하였다. 정애는 간신히 도주자(逃走者)의 치마 뒤폭을 쓸어잡았다.

 

“이건 왜 이래! 놓아요, 치마 터지겠다!”

 

도망꾼이 고개를 돌이켜서 이런 말을 하며 추격자에게 붙들린 치맛자락의 어금을 잡아 휙 뿌리치었다. 손에 잡힌 것이 슬쩍 빠져나가자 정애는 허탕을 치고 기운 없이 쓰러져버렸다.

 

화라는 나는 몰라, 하는 듯이 밑창을 확 닫치고 번개같이 마루를 내려선 그는 구두 신기가 바쁘게 끈도 맨체만체 무슨 사나운 짐승한테나 쫓겨가는 사람 모양으로 촉급(促急)한 발길을 문간을 향하고 옮기었다.

 

한편으로, 정애는 밑창이 탁 닫히매 그 엷은 종이와 가는 칸살로 된 것이언만, 그에게는 강철이나 반석(盤石)으로 만든 성문(城門) 모양으로 제 힘 가지고는 열어도 볼 수 없고 밀어도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어느 때까지 멍멍하게 쓰러진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문득 가슴이 찌르르해 오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무엇인지 슬픈 듯하였다. 무엇인지 원통한 듯하였다. 무엇인지 궁금한 듯하였다. 흰 물이 돌고 또 도는 그의 눈에는 아까 본 그 편지의 첫머리가 너붓너붓하게 보이는 듯하였다.

 

5

그 이튿날 학교에서 정애는 화라를 보았다. 보기는 보았으되 그 편지 말을 묻지도 아니하였다. 자기가 묻기는새려 화라가 그 편지 말을 끄집어낼까 보아 그의 곁에도 아니 가고 비슬비슬 피하였다.

 

정애에게 대한 화라의 태도도 일변하였다. 정애를 보기만 하면 손목도 쥐고 어깨도 누르며 할 말 못할 말 아니하는 것이 없던 그가 오늘은 웬일인지 정애를 힐끗 한번 보고는 고개를 다소곳하고 인사도 아니하였다. 그의 태도는 평일과 아주 딴판이었다. 하학 시간이면 온 학교 안을 울리던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상학중이든 하학중이든 넋 잃은 사람 모양으로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눌러앉아 있었다. 가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은 어푸수수하게 이마에 흐늘거리고 언제든지 봄빛이 무르녹은 듯하던 두 뺨은 새하얗게 혈색이 없었다. 두 관자놀이에는 파릇파릇하게 힘줄이 뛰놀고 있었다.

 

“이애, 오늘은 웬일이냐! 아주 어른이 다 되어버렸으니……”

 

하고 동무 하나가 그의 어깨를 누르며 웃을 적에 화라는 괴로운 듯한 얼굴로,

 

“이애가 왜 이래. 남 귀찮아 죽겠는데.”

 

하고 그 손을 밀어내리었다.

 

“여보 하이칼라 씨, 오늘은 왜 화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동무 하나가 웃는다.

 

“유난스럽게 화장을 잘하더니 구라브 백분(白粉)이 동이 난 게지.”

 

다른 동무 하나가 곁에서 말보탬을 하였다.

 

“아모리 한들 동이야 날라구, 좀 잠이 과하셨든 게지.”

 

또 동무 하나가 조롱을 하였다.

 

“듣기 싫다! 저리들 가주어.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견딜 수가 없다.”

 

하고 화라는 소태나 먹은 듯이 온 상판을 찡그려 부쳤다.

 

“그러길래 내가 공부를 너무 맙시사고 한두 번 일르지 않았지요.”

 

또 다른 동무가 이렇게 말을 뒤받고 스스로 재치있는 제 말을 기뻐하는 듯이 땍때글 웃었다. 여러 동무도 한번에 웃었다.

 

“왜들 까짜를 올려!”

 

화라는 참지 못하여 성을 버럭 내었다.

 

“성냈다 빗냈다 호박국 끓여라, 하하하……”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라는 세숫물을 떠오라 하였다. 팔뚝을 부르걷고 옷깃을 뒤로 훨씬 젖히고 저고리 고름을 허붓이 풀어 안가슴까지 드러내고는 세수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분으로 씻고 그 다음에는 비누로 씻고 또 그다음에는 분으로 씻었다.

 

한 시간도 넘도록 늘어지게 물로 얼굴을 대패질하고 방에 돌아온 그는 일본제 경대(鏡臺)의 큼직한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춰가며 희기 백설과 같고 길이 두 발을 넘을 듯한 양수건(洋手巾)을 휘몰아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요모조모를 맵자하게 닦기를 말지 않았다.

 

늠실늠실 떠나가는 흰구름 사이에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달 모양으로 그의 얼굴도 거울 하늘에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두어 군데 발긋발긋이 솟은 여드름을 애써 짜내고는 화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앞에 옹긋쫑긋이 늘어놓인 긴 병 짧은 병 푸른 갑(匣) 흰 갑이 차례차례로 들먹거려지며 한동안 열 손가락이 북같이 얼굴 위로 쏘대었다. 머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가르고는 일부러 몇 올의 머리칼을 풀리게 하여 귀밑에 남실거리게 하였다. 이러기에 넉넉히 두 시간은 걸렸으리라.

 

그리고 나서 보얀 숙고사 깨끼저고리와 은옥색(銀玉色) 생수치마를 내어 입었다. 양말은 아니 찢어질이만큼 팽팽이 잡아당기었다.

 

단장을 마친 그는 거울 속의 제 모양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만족과 기쁨으로 그의 눈자위는 번쩍이었다. 저 스스로도 몰라볼이만큼 어여뻐진 까닭이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그의 시각의 광채는 사라지기 비롯하였다. 흐리멍덩하게 치뜬 그의 눈에는 안타까운 슬픔의 그림자가 그물그물이 졸고 있었다. 이때껏 낼 대로 낸 몸꼴의 속절없음을 생각하매 그의 가슴은 어두웠다.

 

이렇게 자기의 미화시키기에 갖은 정신을 다 들임에는 무슨 목적이 없지 못할 것이다. 있어야 할 이 목적이 극히 하잘 것 없고 보잘 것 없음을 깨달으매 그의 심장은 난도질치는 듯이 아니 쓰릴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쓰리고 따가운 눈물이 어른어른히 스미고 있었다.

 

(내가 미쳤나, 울기는 왜 울어) 하고, 손으로 눈을 씻었다.

 

(네가 미쳤니? 그게 무슨 꼴사나운 눈물이야!)

 

거울 속의 자기를 손가락질하면서 정말 미친 듯이 때글때글 웃었다.

 

(가만 있어, 어느 표정이 너한테 제일 어울리나 어데 보자!) 하고 해죽이 웃어도 보고 양미간을 살짝 찡겨도 보았다. 입술을 단정하게 꼭 다물어도 보고 애교있게 방긋이 열어도 보았다. 그리다가 또 한번 미친 듯이 소리쳐 웃었다.

 

이 모양으로 얼마를 거울과 수작을 하고 있다가 팔뚝시계를 보고 놀란 듯이 몸을 일으키며

 

(에그, 벌써 여섯점 반일세. 갈때가 되었군!) 하고는 치마를 치키기도 하고 분지(粉紙)로 얼굴을 닦기도 하며 옷고름을 다시 매기도 한 뒤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밤길은 남산공원으로 향하였다.

 

6

화라가 남산공원 마루턱에 올라 발을 멈추고, 잠깐 숨을 돌릴 적에는 어느덧 붉은 놀도 잿빛으로 사라지려 할 임물이었다.

 

저녁 그림자는 짙푸른 연기를 뿜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들기 시작하였다. 이 연기에 싸이어 하늘이나 땅이나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나 낱낱이 제 빛깔을 잃어버리고 흐리멍덩하게 조는 듯하였다. 어느 곁엔지 시가(市街)를 점(點)친 전등불도 광휘(光輝)가 빛나지 않아 슬픔에 젖은 눈동자 모양으로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지는 해의 밝은 빛이 아직 다 걷히지 아니하고 어두운 밤이 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을 때 흔히 있는 광경이었다.

 

(그이가 나 먼저 왔으면 어데서 나 오는 것을 볼는지 몰라—-)

 

화라는 찬 숨을 씨근거리며 두리번두리번 이리저리를 살펴보았다.

 

저녁밥때가 된 까닭인가,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축축히 젖은 실바람이 풀냄새를 날리며 화라의 후끈거리는 뺨과 목을 산산하게 핥을 뿐이었다.

 

화라는 살 듯이 깊은 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직 아니 온 모양이야, 시방 몇 점이나 되었을까!)

 

하고 시계를 보며

 

(일곱점밖에 아니 되었네. 여덟시라 하였으니 인제도 반시나 남았구먼>)

 

속으로 속살거리고 이 편 언덕 소나무 숲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멀리는 조밀한 듯싶은 숲이 다다라보면 뜻밖에 나무가 엉성하여 자기가 환하게 드러날 것도 같고 그렇다고 아늑한 자리를 찾아들어가자니 올라오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어려울 듯도 하여, 이도 저도 아닌, 적호(適好)한 자리를 찾기까지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면 그의 꼴을 볼 수 있다. 오지도 않은 애인을 헛되이 찾으면서 애간장을 태우는 그의 꼴을 볼 수 있다……)

 

포근포근히 잔디 깔린 경사면에 미끄러진 듯이 몸을 뉘고는, 불쑥 솟은 언덕 위 차양치듯 늘어선 소나무둥치틈으로 눈을 내놓으며 화라는 스스로 중얼거렸다. 그 눈에는 잔인한 기쁨이 번쩍이고 있었다.

 

어두운 빛이 점점 진해 갈수록 전등은 반짝반짝 부신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집도 흐렸고 길도 흐렸고 모든 것이 흐려진 가운데 점점이 빛나는 전등은 수많은 별들이 낮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저 먼 산밑에 두 셋 외딸리 띄엄띄엄 떠 있는 것은 별인지 불인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이가 그것을 보고 시방 엎어지며 자빠지며 안달박달 달아오렷다……)

 

화라는 호젓하게 사람 기척 없는 그곳 일판을 연해연방 보살피면서 빙글 웃었다.

 

(인형이나 무엇같이 그이는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사람에게 끄을리는 소처럼 내 명령대로 꾸벅꾸벅 걸어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짐작을 하니 화라는 가슴이 찌르르하도록 기뻣었다. 그러나 그 찌르르한 맛은 안슬픈 눈물이 북받칠 때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저는 시방 기쁨을 걷잡다 못하여 걷는 발이 춤을 추렷다. 저 말마따나 가슴에 봄 입김이 들어찼을걸. 흥! 그래도 오기만 와보아! 봄 입김을 불어넣을 사람이 있나없나. 그 실심낙담(失心落膽)하는 꼬락서니를 내가 알뜰살뜰히 구경을 할걸!…… 이 공원을 메매여 찾으렷다. 아따 삼산굽이를 헤매며 찾으라지. 밤새도록이라도 찾아보라지. 누가 말리나, 하하하…….)

 

화라는 자지러지듯이 또 한번 웃었다. 그 웃음이 악 홍소(哄笑) 모양으로 훼덩그렇게 빈 산머리 솔밭에 무시무시하게 울리었다.

 

화라는 찬물을 끼얹힌 듯이 으쓱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두려운 듯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솟은 때 모르는 둥근 달이 출기청정(出其淸淨)의 나래 같은 흰구름 자락을 고이고이 뒤로 밀며 이리저리로 미끄러져 나온다. 그 광선의 희고 맑은 물결이 슬쩍 이편 일폭(一幅)을 적시었다. 나뭇잎에는 푸른빛이 새로웠다.

 

허연 땅바닥 위에는 선지(宣紙)에 흑공화(黑工畵)를 친 듯이 검은 나무 그림자가 가로누웠다. 그 물결이 스르르 밀리어 저리로 퍼지며 푸른 내에 잠긴 서울 시가를 꿈속같이 떠보이게 하였다.

 

이 아름다운 경치에 화라는 한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있었다.

 

7

망연(茫然)한 가운데 망연한 의식이 돌아오며 이 밤의 경(景)을 호올로 보기가 아깝다 하였다.

 

정다운 애인과 짝지어 볼 것이라 하였다. 고운 임의 어깨에 정열에 타는 어깨를 엇비슷이 뉘고 꿀 같은 사랑을 속살거리며 상(賞)줄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나의 애인은?…………)

 

화라의 가슴은 메어지는 듯하였다. 자기의 의중인(意中人)이 자기 아닌 남을 의중에 둔 것을 생각하매, 그는 쓸쓸한 가을 들에 외로이 서 있는 듯한 낙막(落寞)을 느끼었다.

 

달빛은 은가루같이 나뭇가지에 번쩍이고 있었다.

 

(그가 오기는 올 것이다. 나 있는 이곳에 오기는 올 것이다. 그와 나와 한갓같이 아름다운 이 경치를 대하기는 대할 것이다.)

 

이런 의식이 그의 온몸 온마음을 짜릿짜릿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제 목전(目前)에 닥쳐오는 이 행복—- 그렇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성, 그이야 누구에게로 마음이 쏠렸든 그 이성(異姓)과 한 자리에 이 경(景)을 감상할 수 있음은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랴—-을 차마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희생할지언정 이 행복만은 그대로 내버릴 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훌쩍거리는 저 자신을 환상(幻想)하였다.

 

(….옳다, 그러나 그가 오거든 다짜고짜로 그의 가슴에 이 몸을 던지리라. 던지고는 울리나, 울면서 말하리라, 오늘날까지 내가 그를 얼마나 생각한 것을, 남모르게 얼마나 이 속을 태운 것을 눈물 섰어 하소연하리라. 그러면 그도 응당 느끼리라, 느끼어 사랑하리라. 이번 이 일도 뜨거운 정열에서 우러나온 줄 알아주리라. 그리고 신성한 연애가 성립되리라. 화락(和樂)한 가정을 이루리라.)

 

이런 몽상(夢想)의 흐름에 봄눈 슬 듯 몸도 녹고 마음도 사라질 즈음이었다.

 

무엇인지 자기 옆을 툭하며 스쳐 나간다. 화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옆으로 젊은 사람 둘이 지나간다.

 

“사람을 왜 떠다밀어!”

 

청년 하나가 웃는다.

 

“무얼 좋아서……”

 

하고 딴 청년 하나의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화라는 몸을 소스라쳤다. 올라온 때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드문드문하였다.

 

(벌써 그이도 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번쩍이며 머리가 휑하고 내둘리는 듯하였다.

 

핑핑 돌리는 화라의 시선에는 모두 그이 같기도 하고 모두 그이 아닌 듯도 하였다. 어느 것이 그이인 줄은 아무리 달빛이 밝다 한들 분명히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앞앞이 찾아가서 자세히 보아야만 분명히 알겠거든 비록 평일에 당돌하다는 평을 듣는 화라로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고양기가 쥐를 엿보듯 시력이 자라는 대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물색할 뿐이었다. 혼자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둘 아니면 셋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이는 혼자 올 터인데…… 웬일인가? 아직도 아니왔나?) 하고 화라는 산보객이 오르내리는 길목을 지키기로 하였다.

 

비슬비슬 사람 없는 데로 돌아서 길목의 한편에 서 있는 소나무 뒤에 몸을 감추었다.

 

얼마 아니되어 밑에서 사람 하나가 올라온다. 옷 입은 것이든지 걸음 걷는 것이든지 하릴없는 그이였다.

 

(저기 오는구면!)

 

화라는 하도 반가와 버럭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그래도 억지로 그 충동을 참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시력을 그곳으로만 모으고 있었다.

 

그 사람은 한 걸음 두 걸음 다가들었다. 화라는 온몽의 피가 파득파득 뛰노는 듯하였다. 앞을 지나간다. 아니었다! 그이가 아니었다. 화라의 기다리는 그이가 아니었다. 딴사람이었다.

 

화라는 더할 수 없이 실망하였다. 이 모양으로 그는 한두 번 속지 아니하였다. 팔뚝시계는 열점을 가리키건마는 기다리는 그이는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달 실은 나뭇잎을 휘날리는 밤바람이 외로운 앙가슴을 싸늘하게 헤칠 뿐이었다.

 

8

그날 밤에 정애도 어찌 잠이 깨었다. 방 안이 밝고 미닫이가 허여스름하길래 동녘이 벌써 트는 줄 여겼더니 알고보니 그것은 달 그림자가 어슴푸레하게 깃들인 것이었다.

 

달을 좋아하는 정애는 이불자락을 고이 밀치고 일어나 미닫이를 열었다.

 

밤 공기가 선뜩하게 얼굴에 끼치며, 한 줄기 희미한 광선이 소리없이 이불 위에 가로누웠다.

 

달은 시방 구름 속에 잠겨있다. 구름은 이곳저곳에 멍울멍울 떠 있는데 어떤 것은 희며 어떤 것은 연회색(軟灰色)이다. 그 구름장들의 한복판은 두터워도 양 가장자리는 실실이 풀리어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끼는 듯하였다. 그리고 구름과구름의 벌어진 틈에 맑은 하늘이 파릇파릇 엿보이며 한 개 두 개 조그마한 별들이 졸음 오는 듯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달은 이 구름에서 저 구름으로 저 구름에서 이 구름으로 바쁜 듯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흰 몸이 부딪치는 곳마다 구름이 스르르 헤어지기는 하건마는 그래도 구름장이 두터울 때는 밝은 얼굴이 온전히 까므러지는 때도 없지 않았다 이럴 땐 온 천지가 애인을 잃은 듯이 눈물에 어리는 것 같고, 그 장애물을 벗어나 흰 얼굴을 뚜렷이 드러내면 온 천지는 잃었던 애인을 찾은 것같이 기쁨에 떠는 것 같았다.

 

모은 음향과 모든 동작이 고요하게 잠들고 공기조차 아무런 파동이 없었다.

 

다만 월색(月色)의 명암을 따라 희었다. 검었다 할 뿐이었다.

 

(에그 저를 어째. 달이 또 저 구름 속으로 들어가네!)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갈 적마다, 달이 구름에 가리우듯이 정애의 얼굴에도 구름이 끼며 안타까운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다가, 달이 그 구름 속에서 헤어나오면

 

(인제 나왔다, 인제 나왔다!) 하고 정애의 얼굴 구름도 걷히며 어린애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다 사람 볼 겨를도 없이 구름은 연기같이 저편 하늘 가로 몰려버리고 향수로 씻어놓은 듯한 새맑은 창공에 오직 둥그렇게 걸린 달이 옥(玉)가루같이 밝은 빛을 흩날리고 있었다.

 

정애의 가슴도 갑자기 환하여지는 듯하였다.

 

그리고 달빛을 들이마실 듯이 가슴껏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가스에도 달빛이 수루룩 흘러들어가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 달빛을 멍에하고 무어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행복이 술렁술렁 날아오는 듯하였다.

 

정애 자신이 그 술렁거리는 달빛에 실려 공중으로 둥실둥실 떠올라가는 듯도 하였다.

 

문득 정애는 신성한 연애를 생각해보았다.

 

신성한 연애!

 

글자부터 향기롭고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었다. 어째서 연애가 신성한지 무엇으로 신성한 연애인지 정애는 모른다.

 

아니, 생각도 않았다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신성한 연애는 신성한 연애로 그뿐이 아닌가. 거기 설명을 붙이고 장단(長短)을 캐는 것부터 벌써 틀린 수작이다. 다만 이것을 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고 행복이 있을뿐이라 한다. 반대로 이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제든지 슬퍼하고 불행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 한다.

 

우리가 오늘날 말 못되게 된 것도 이 신성한 연애가 없는 까닭이라 한다. 그러므로 신시대(新時代)의 사람들은 이 신성한 연애를 하여야 될 줄 안다.

 

물론 자기와 같은 꽃다운 처녀는 이 신성한 연애를 할 줄 안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만 연애의 대상이 없을뿐이었다. 연애의 대상은 누가 될꼬?

 

어슴푸레한 저 머릴 연애의 대상이 선연(鮮然)하면서도 흐리멍덩하게 나타나는 듯하였다. 그것은 뚜렷한 남성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성도 아니었다.

 

세상에도 아름답고 세상에도 깨끗한 그 무엇이 나비나래 같은 옷자락을 하늘거리며 하느적하느적 자기에게 걸어오는 듯하였다.

 

정애는 이 몽상으로 그린 환영(幻影)을 안을 듯이 저도 모르게 두 팔로 제 가슴을 안았다. 과연 무엇이 슬쩍 안기는 듯하며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러다 제 손이 하염없이 제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 달착지근한 비애(悲哀)가 봄아지랭이 모양으로 황홀하게 가슴이 스미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밤이 새는 듯한 발긋발긋한 환희를 느끼었다.

 

이윽고 정애는 몸이 노곤해지고 으쓱으쓱 추운 증(症)이 들어서 미닫이를 닫고는 이불을 쓰고 누웠다.

 

이때 씻은 듯이 잊어버렸던 그 편지 생각이 일어났었다.

 

「대관절 그 편지는 누가 한것인 고?」

 

이것이 적지 않게 그를 궁금케 하였다. 웬일인지 이날 밤에는 그 편지 생각을 하는게 몹시 부끄러운 듯싶었다.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 그기 자김껏 생각한 꽃다운 사랑의 빗깔 모양으로……

 

이불 속에서도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하다가 정애는 그만 나무둥치같이 잠이 들고 말았다.

 

9

“이애, 이게 무슨 잠이야! 어데가 아프니?”

 

하면서 어머니가 흔드는 바람에 정애는 간신히 잠을 깨었다. 그때는 벌써 붉은 햇발이 미닫이를 쏘고 있을 때였다.

 

정애는 잠오는 눈을 비비며

 

“지금 몇점이나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딸이 병난 게 아니라 잠을 지쳐잔 줄 깨닫자 어머니는 자애(慈愛)의 웃음을 띠며

 

“몇점이 다 무에냐, 벌써 열점이다.”

 

정애의 눈은 휘둥그래지며

 

“벌써 열점이야요?”

 

하고, 자칫하면 꾸벅꾸벅 잠의 나라로 끌려가려는 몸을 급작스럽게 일으켜 얼른 책상 위에 놓인 좌종을 보았다. 열점은 아니라도 일곱점 반은 지나 있었다.

 

정애는 총총히 옷을 입고 마루 끝에 나와 할멈의 세숫물 떠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루 끝에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정애는 무심히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때 키가 짤막하고 몸치가 똥똥하게 방어(魴魚) 토막 같은 할멈이 세숫물을 떠나 놓으며

 

“저어 오늘 아침에 대문을 열러 가보니 이 편지가 외있어요”

 

하고, 그 편지의 유래를 설명한다.

 

정애의 가슴은 이상하게 흔들리었다.

 

그 편지는 화라가 빼앗아간 그 이상한 편지와 똑같은 것이었다. 그 봉투며 그 글씨며 하릴없는 그 편지이었다. 다르긴 그 일부(日附)뿐이었다.

 

정애의 당황해하는 빛이 얼굴에까지 드러났음이리라. 할멈도 그 편지를 기웃기웃 들여다보며 의아한 상판으로

 

“어째 이 편지엔 우표가 없어요? 누구한테 온 편지에요?”

 

정애는 얼굴이 화끈하며

 

“응? 나한테 온거야.”

 

하고는 세수도 한체만체 불현 듯 방으로 들어왔다.

 

한참 무엇을 생각하고 있던 정애는 결심한 듯이 그 편지의 웃머리를 떼었다.

 

사연은 보지도 않고 접은 것을 속히 폈다. 누가 한 것임을 알고자 함이다. 그 편지의 맨끝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새벽 바람이 촛불을 날릴제 -김창섭(金昌燮)은 올림」

 

김창섭이? 정애는 선뜻 생각이 아니 남인지 잠깐 눈썹을 찡그리고 있더니 얼마 아니되어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오옳지! 영숙의 오빠로구나!)라고 입안말로 중얼거리었다. 그리하여 창섭이와 자기가 서로 알게 된 일을 얼른 생각하였다.

 

벌써 두어 달 전의 일이다.

 

어느 날, 화라와 정애가 영숙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영숙의 방에서 청년 하나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이는 갈샹갈샹한 가는 몸피에 얼굴이 새하얀 청년이었다. 그때 화라가 영숙에게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시골 있는 우리 사촌오빠야. 동경 유학을 하다가 집안 사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돌아오셨다. 지금 여기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영어 공부를 하신다니 우리처럼 무슨 독본(讀本)이나 배우는 줄 아니? 아주 어려운 문학책만 보신단다. 혹 모르는 게 있으면 서양사람한테 물으러 다니실 뿐이야. 그리고 또 한문도 넉넉하시겠지. 젊으신 이로 신구(新舊) 학문을 그렇게 가지신 이는 참말 드물어. 그뿐이 아니야, 어떻게 다정하고 싹싹한지——나참, 그런 이를 처음 보았어.”

 

이렇게 훌륭한 사촌오빠가 네게 있니, 하는 듯이 자랑과 기쁨으로 영숙은 입에 침이 없이 제 사촌 오빠의 칭찬을 마지않았다.

 

영숙의 말이 끝나자 화라가 웃으며 이런 소리를 했다.

 

“응, 그러기에 저번 학기에 네 영어 성적이 좋더라.”

 

“이애, 저번 학기에는 우리오빠가 오시지도 않았단다.”

 

“따로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네가 재조가 좋아서 영어 성적이 좋았단 말이지. 나도 너같이 재조나 좀 있어 보았으면 좋겠다.”

 

라고 화라는 말을 비꼬았다.

 

“원참, 너는 걸핏하면 남을 꾀집어 말하더라.”

 

하고 영숙의 얼굴은 새무룩하였다.

 

“웃음엣소리를 성낼 거야 무엇있니. 그 말은 그만두고 나도 네 오빠한테 영어나 좀 배웠으면 좋겠다.”

 

하고 화라는 선웃음을 치며 정애를 향하여,

 

“우리 같이 배워, 응. 그래가지고 영숙이를 한번 이겨보자.”

 

“왜, 정애의 성적이 나보다 못하길래?”

 

“더 나으면 더 좋지……”

 

하고 화라는 무엇이 기뻤던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후, 둘이 영숙의 집에 놀러를 가면 그 청년과 한두번 만나지 않았다. 그 청년은 두 처녀만 보면 언제든지 몸을 피하였다.

 

하루는 화라가 웃으며 영숙이더러,

 

“너 오빠가 우리보고 내외할 거야 무엇 있니…… 이리 좀 들어오시래라. 친해가지고 영어나 좀 배우자.”

 

“정말 그럴까?”

 

영숙은 기쁜 듯이 다지었다.

 

“그건 왜 그래.”

 

하고, 정애는 하염없이 얼굴을 붉혔다.

 

“이애, 신시대여자람 남자교제를 잘해야 된다. 학교다니는 애가 그렇게 부끄럼을 타서 무엇에 쓴단 말이냐?”

 

하고 화라는 매우 분한 듯이, 벙애를 반박하였다.

 

영숙은 제 동무를 자랑하고도 싶고 제 오빠를 자랑하고도 싶어서

 

“그러면 오시랄까? 오시랄까?”

 

“그래, 오시라고 해요.”

 

화라는 재촉하였다.

 

“오빠!”

 

하고 영숙은 마침내 소리내어 부르고 제 동무를 보며 웃었다.

 

정애는 고개를 숙이었다. 화라는 가장 엄전한 체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응, 왜 그래?”

 

“이리 좀 오세요.”

 

그 말에 아무 대답이 없고, 뜰아래 방문 열리는 소리가 씨그등 하였다. 그의 발자취는 마루에 올라 세 처녀의 있는 방문에 다다르며

 

“나를 불렀니?”

 

라고 묻는 그 소리는 조금 떨리는 맛이 있었다. 두 처녀는 숨소리를 죽이었다. 영숙은 얼른 방문을 열고 나갔다. 무에라고 소곤소곤하며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소를 띤 영숙이가 문을 열고

 

“자아, 들어가세요.”

 

하였다.

 

두 처녀는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화라는 일부러 애교있는 웃음을 띠고, 정애의 얼굴은 당호박같이 되고 말았다.

 

창섭이도 조금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들어온다.

 

“이애는 이정애, 이애는 박화라, 모두 제 동무예요.”

 

영숙은 나오는 웃음을 참아가며 먼저 동무를 소개했다.

 

“이이는 우리 사촌오빠……”

 

간신히 예까지 말하고는 그만 웃고 쓰러졌다.

 

그 뒤부터 가끔 화라에게 졸리어 정애는 영숙이한테 놀러 갔었다.

 

가면 흔히 창섭을 만나고, 창섭을 만나면 그냥 반갑게 인사만 할 적도 있고 같이 앉아 놀기도 하였다.

 

점점 얼굴이 익어갈수록 두 처녀는 창섭에게 모르는 것을 묻기도 하고 창섭이는 두 처녀에게 서양 소설의 경개(梗槪)도 이야기하였다.

 

10

정애는 그 편지 끝을 뚫을 듯이 들여다보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럴 사이에 그의 눈은 멍하게 바람벽의 한 군데로 모이었다. 그 눈에는 지난 날의 온갖 영상(影像)이 어른어른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정애는 그 편지를 끝으로부터 한 칸씩 차근차근히 접기 시작하였다. 맨 첫머리의 한 칸조차 두툼한 종이의 접은 밑으로 들어가려 할 제 그의 접어들어가는 손이 자재스럽게 멈추어지며 가늘게 떨렸다. 저도 모르게 거기 있는 글자가 또렷또렷하게 그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정애씨!

 

먼저 무에라고 사죄할 말씀이 없습니다. 오직 정애씨의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빌 뿐입니다. 헛되이 기다리시노라 얼마나 애를 쓰셨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매 이 가슴은 칼로 에어내는 것 같습니다.

 

정애는 또 아니 놀랄 수 없었다. 자기는 꿈에도 염에도 그를 기다린 사실이 없거든 이게 또 무슨 말인가.

 

그 편지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인가까지 의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기계적으로 그 편지를 펴고, 그 편지가 펴지는 대로 그의 눈은 줄을 따라 옮기었다.

 

정애씨!

그 편지가 왔을 제 나는 없었습니다. 호사다마로 나는 공교히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밤 늦게야 들어와 쓸쓸하게 비인 방에 싸늘한 이불자락을 펼치려다가 책상머리에 놓인 그 편지를 급히 떼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몇 번을 읽고야 겨우 그뜻을 알기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꿈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생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정애씨가 나에게 사랑을 허(許)하시고 만나기까지 약속하심은 참말 꿈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꿈으로 정애씨의 아름다운 환영(幻影)을 몇 번이나 만났을까요? 정애씨의 꿈 같은 사랑을 몇 번이나 받았을까요?! 꿈이 아니고는 길이 아닌 생시에 이런 기쁨과 이런 생복을 맛볼 줄은 참으로참으로 믿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기쁘다 못하여 두 줄기 눈물이 소리없이 꽃다운 편지를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정애씨!

나는 허둥허둥한 발길로 갈팡질팡 남산공원으로 올라가기는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새로 두점이 지난 적이외다. 공원에는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밤바람에 흔들리우는 소나무 그림자가 밝은 달빛에 어지러울 뿐이었습니다.

마음이 어린 위라 몇 번이나 바라에 스치는 풀잎의 속살거림을 정애씨의 옷 끄으는 소리로 속았는지요. 달빛에 희어진 나무등걸을 정애씨의 안타까운 입상(立像)으로 알았는지요!

정애씨!

그러다가 저 먼 지평선이 훤하게 새어올 때야 나는 속절없이 끓는 가슴을 식히며 힘없는 발길로 숙소(宿所)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채 자리로 잡기 전에 이 글월을 적었습니다.

정애씨!

딴 말은 다 그만두려고 합니다. 엎친 물을 다시 담을수 없고 지난 일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까닭이외다.

오늘 저녁 여덟점에 나는 또 남산공원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정애씨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끝으로 이 편지는 체전부를 수고로이 할 것 없이 내가 댁에 전하겠습니다. 조조(躁躁)한 이 마음으로는 도저히 체전부의 지지한 걸음에 맡길 수 없는 까닭이외다.

총총히 적으므로 사연에 어룰한 데 많을 듯 깊이 용서를 비는 바이외다.

새벽 바람이 촛불을 날릴 제 – 김창섭(金昌燮)은 올림

 

제 2 장

1

밤은 자정을 넘은 지 오래다. 태양의 광선을 따라 대지를 입맞추던 이른 봄의 입김도 얼어버리고 새맑은 하늘이 검은내 가물거리는 공간을 서늘서늘하게 덮고 있었다.

 

무덤 같은 침묵이 쓸쓸하게 미닫이를 대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평일의 습관대로 열점이 되자 불을 끄고 누운 창섭은 입때껏 암만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모로도 눕고 바로도 누우며 잠을 들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눈이 보송보송 해옴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무슨 생각에 잦아져 있었다.

 

하되 만일 누가 그더러 「시방 네가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고 물으면 아마 그는 대답하기 어려웠으리라.

 

그의 머리엔 지난 일, 닥칠 일이 연달고 잇대어 치밀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다가도 한번 깜박하면 앞 생각 뒤 생각이 무슨 연기나 안개 모양으로 한데 엉기고 서로 어우러져 뿌옇게 뒤범벅이 되는 까닭이다. 줄여 말하면 그의 머리엔 무심한 포장에 활동사진이 어른거리듯 갖은 영상이 제멋대로 나타났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나타났다.

 

그런데 한 영상이 지나가고 다른 영상이 새로 그어림에는 반드시 그 처녀의 모양이 한번 서언하게 그의 눈꺼풀 속으로 들어왔었다. 그러면 그의 심장이 찡하고 소리를 치자 고동이 그치는 듯하였다.

 

그는 오늘 그 처녀를 보았다.

 

아무 기대와 아무 예감없이 우연히 자연히 그는 그 처녀를 보았다. 본 그 찰나부터 그 여성은 솜씨있는 재인바치가 끌로 새긴 듯이 그의 가슴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그가 건넌방에서 영숙이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미닫이 밖에서

 

“영숙이”

 

하며 탄력있는 고운 목소리가 불렀다. 영숙은,

 

“누구야?”

 

하고 창경(窓鏡)으로 내다보더니 급히 청섭을 향하여,

 

“제 동무가 왔어요.”

 

하였다.

 

창섭은 얼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안방으로 건너가면서 그는 목소리 나던 곳에 슬쩍 일별을 던졌다. 거기 여학생 둘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보았다느니보다 알았다는 게 옳을는지 모르리라. 뒷사람은 앞사람에 가리었고 그의 안계에 들어오긴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것도 그야말로 전광의 일섬 같은 짧은 찰아니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다기는 억울하다. 다만 까만 머리와 보얀 타원형이 어른하고 그의 시선을 스쳤을 뿐이다. 하건만 그 순간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을 본 듯 싶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열 번 스무 번 보아알던 이 같기도 하였다.

 

창섭은 안방에 무료히 앉아 있다가 두 처녀가 영숙의 방에 들어가기를 기다려 자기가 거처하는 뜰아랫방으로 내려왔다. 그는 두 처녀의 옆을 거쳐서 제 방에도 못 내려올이만큼 여성적이었다.

 

여성적이라면 부끄럼 많은 것을 물론이려니와 그 희고도 섬세한 살결이라든지 갸름갸름한 손가락을 가진 조그마한 손이라든지 하릴없는 여성적이었다.

 

어쩐지 가슴이 야릇하게 수선수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의식한 가운데 날아가려는 새 모양으로 몸을 움츠린 채 쓸데없이 정신을 모으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말끔 귀로 몰렸다. 그의 온몸이 통으로 귀에 쏠렸다. 그귀엔 세 처녀의 담소(談笑)가 미묘한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수작은 간격도 멀고 말낱도 가늘건만 또렷또렷이 창섭의 이막(耳膜)을 울렸다.

 

눈에 아니 보이는 세 처녀의 심리와 거동을 따라 그의 얼굴도 흐리락 빛나락 하였다.

 

쾌활하고도 삼가로운 웃음이 건넌방의 미닫이 틈으로 새어나오자 청섭의 입술에도 웃음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아까 본 그 처녀를 또 한번 보았으면 하는 갈망, 그래 모시 목마른 이가 입술을 물에 대다 만듯한 갈망이 불같이 일어났다.

 

(아까 좀 자세히 보았으면 좋았을 걸갖다가……)

 

그는 후회하였다.

 

그러나 후회는 끝끝내 후회일 따름이다.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지나간 그때가 다시 올 것은 아니다. 시방은 시방으로 다시 볼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안으로 향한 미닫이를 가만히 열었다. 그리고 영숙의 방 창경에 눈살을 쏘았다. 하건만 검푸른 창경이 져가는 햇빛에 번쩍번쩍 반사될 따름이고 그 안에 있는 이의 그림자도 얻어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그 방 곁에 가볼까 하였는지 모르리라. 얼마나 교묘한, 영숙이에게 물어볼 말을 생각해내었는지 모르리라. 하되 그것은 얼럴뚱땅에 좀된 그가 능히 할 바 아니었다.

 

그는 미닫이를 말끔히 열어둔 그대로 제자리에 와 앉았다. 아무리 시방 애를 쓴대도 속절없음을 깨달은 그는 차라리 그들이 돌아갈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쩌면 그동안이 이다지도 지루하랴! 이 얼마 안되는 시간이 창섭에게는 여러 달포와 비겨 떨어질 것이었다.

 

이야기는 그쳤다 이었다 하였다.

 

이야기가 그칠때마다 창섭은 인제 가는가보다 하고 헛되이 가슴을 두근거리었다.

 

마침내! 그들이 돌아갈때가 왔다. 그 처녀를 다시 볼 기회가 왔다.

 

그들의 옷 단속하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하였다. 영숙의 방문 여는 소리가 들리었다.

 

창섭은 열어놓은 문 틈으로 눈을 내놓았다.

 

뒤섰던 처녀는 마루에 걸터앉아 구두를 신고 있고, 앞섰던 처녀는 제 동무의 신 신기를 기다려 마루 끝에 서서 영숙이와 그래도 미진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침 불 같은 구름을 멍에하고 서(西)으로 서으로 기울어지는 석양이 광선의 빛발을 아낌없이 그 처녀의 온몸에 내렸다. 그는 한 팔을 이마에 얹어 빛을 가리며 눈을 내리감고 있다. 이같이 아름다운 그림이 어디 있으랴! 만일 있다고 하면 성모 마리아의 그것이리라. 검은 양사단으로 위아래를 감은 그 처녀는 참말 그림에 있는 성모 마리아를 상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명화라도 이 산 그림을 따르지 못할 것은 말하는 게 실수일 것이다. 더구나 광선의 바다에 멱감고 있는 그는 미(美)의 나체를 드러낸 듯하였다.

 

이마에 비스듬히 걸린 말씬말씬한 손목엔 살속 깊이 파묻힌 깁올이 같은 힘줄이 파름파름 떠 보인다.

 

처녀다운 혈색 좋은 뺨은 아늘아늘한데 손만 대면 터질 듯, 연붉은 입술은 방싯방싯 열릴 때마다 소리없이 기어드는 빛물과 마주쳐 하얀 이빨이 반짝반짝하였다.

 

두 처녀의 발자취는 벌써 대문 밖으로 사라졌건만 창섭의 눈엔 그 입상(立像)이 언제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공상의 바다에 허우적거리는 그이 가슴에도 이 꽃다운 모양이 선연이 떠돌았다.

 

(세상에 그런 여성도 있던가.)

 

창섭은 그 명징(明澄)하고 적막하면서도 웃음의 그림자가 떠도는 듯한 눈매와 애교의 그것 같은 입모습을 또 한번 가슴에 그리면서 혼자 소곤거렸다.

 

갑자기 그는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까맣게 놓은 가을하늘에 번쩍이는 별을 쳐다볼 때 모양으로 그는 속절없음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말똥말똥 해오며 언제나 잠이 들지 알 길이 없었다.

 

2

창섭은 새파란 인광같은 게 흐르는 가운데 여기저기 눈부시게 번쩍이는 흰나비가 춤추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는구나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니라, 시방 햇발이 내 눈꺼풀을 쏘아 이런 작용을 일으키고 있구나 하였다.

 

벌써 일어날 때가 지났다. 시방 곧 기동(起動)을 하여야 될텐데 하면서도 어젯밤의 잘 못잔 피로에 그의 몸은 백길 천길 되는 바다속으로 자꾸자꾸 가라앉는 듯하였다.

 

이럴 즈음에 그는 제 어깨가 가볍게 흔들림을 깨달았다. 누가 나를 깨우는구나 하고 눈을 뜨려 하였다.

 

풀로 조아붙는 듯한 눈을 간신히 벌린 그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어제 보던 그 보오얀 타원형이 여전히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내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구나. 그는 번개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찰나(一刹那)였다. 그 다음 찰나에 그는「오빠!」하며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자 제 사촌누이 영숙이가 자기를 깨우고 있는 줄 깨달았다. 그는 무슨 죄나 범한 듯 얼굴을 붉히었다.

 

“오빠, 오빠! 오늘은 웬일입니까? 어데 몸이 편찮으셔요?”

 

영숙은 오빠가 잠 깨는 기척을 보자 걱정스레 물었다.

 

영숙은 얼굴이 둥굴고 납작한 코끝이 오목한 처녀였다. 그 조금 짧은듯한 윗입술엔 언제든지 웃음의 그림자와 어린 맛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큼직한 눈은 항상 에그머니 하고 놀라는 빛이었다.

 

“아니, 아모데도 아프지 않아.”

 

창섭은 부신 듯이 눈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왜 일어나지 않으셔요?”

 

“어젯밤에 좀 늦게 자서……”

 

“또 밤새도록 책을 보셨구면.”

 

“아니……”

 

하고 창섭은 영숙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정말 아무데도 아프잖으십니까! 신색이 아주 좋지 못한데, 뭐.”

 

영숙은 또한번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여섯점이면 반드시 일어나는 제 오빠가 오늘은 아침밥때가 되어도 기척이 없어서 웬일일까 하고 내려와 보았다. 오빠는 이불을 뚤뚤 감은 채 요를 내어버리고 맨방바닥에 가로 누워 있었다. 그 식은 땀에 젖은 얼굴이 적지 않게 그를 놀라게 하였다. 그 좀 들어간 눈이 더욱 옴팍해 보이며 그 언저리에 검푸른 힘줄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정말 아무데도 아프지 않아.”

 

창섭은 귀찮은 듯이 한 마디를 던지고는 다시금 눈을 스스로 감으려 하였다. 그 모양은 마치 「내 아픈 데를 네게 알려주어도 쓸데가 없고 또 알려줄 필요도 없다. 당초에 나는 말하기가 귀찮으니 이대로 내버려다고」 하는 것 같았다.

 

“에그, 왜 저러시나.”

 

영숙은 생각하였다. 언제든지 자기에게 다정하고 싹싹한 오빠가 오늘은 어찌 대꾸하기두 싫어하는가 하고 스스로 의아히 여겼다.

 

“오빠! 왜 또 눈을 감으셔요?”

 

영숙은 또 말을 이었다.

 

“아츰 아니 잡수렵니까?”

 

이 말에 아무 대답이 없기는새로 감은 눈도 뜨지 않았다. 영숙은 한동안 무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창섭은 눈을 슬며시 떴다.

 

“저어…….”

 

창섭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저어……. 어제 온 여학생이 누구야?”

 

“네? 제 동무예요.”

 

“이름이 무엇이야?”

 

“하나는 박화라 라는 애고, 하나는 이정애라는 애이야요.”

 

“저어…… 검은 옷 입은 이가 누구야?”

 

영숙은 놀란 듯이 창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언제 보셨어요?”

 

“아니…… 저어……”

 

창섭은 어물어물하며 또한번 하염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 애는 이정애야요.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창섭은 또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 눈이 이상하게 빛날 뿐이었다.

 

3

그 후부터 정애의 환영(幻影)은 이따금 창섭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흔히 펴놓은 책의 자가 아물아물해지며 황홀이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번 본 인상이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며칠 몇 달을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서녘의 붉은 놀이 해의 넘어갊을 따라 차츰차츰 걷히는 모양으로, 그의 정애에 대한 기억도 날이 감을 쫓아 엷어지기는 하였다.

 

그러나 멋있는 거문고 곡조가 머리올같이 가늘고 가늘어져 끊길 듯 끊길 듯 할 때에는 타는 이가 다시 줄을 튀기는 것같이, 정애의 환영이 사라지려 말려 할 즈음에 그의 소리가 영숙의 방에서 나기도 하고 그의 모양이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도 하였다.

 

그치려던 악기가 새로운 가락을 노래함과 같이 사라지려던 환영도 새로운 색채를 띠고 창섭의 머리에 살아왔었다.

 

하루날, 창섭은 영숙을 데리고 진고개를 가게 되었다.

 

영숙의 공책과 연필도 사야 되겠고 또 벌서부터 주문하였던 교과서가 일한서방(日韓書房)에 왔는지 안 왔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혼자 가기가 무얼하다고 제 오빠를 조르매 창섭이도 책 구경할 겸, 흔연히 그 청을 들어주었다.

 

형매(兄妹) 둘이 그 서사 문어귀에 들어서렬 때였다.

 

누가 뒤에서

 

“영숙이!”

 

하고 불렀다. 영숙은 불현 듯 고개를 돌렸다. 창섭이도 무심코 돌아보았다. 두어 칸 떨어진 곳에 화라와 정애가 걸어온다.

 

해후의 반김에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다소곳하고 재츰재츰 걸어오는 정애의 모양은 아름답고 살아왔다.

 

그들은 한데 다가들었다. 다 알면서도 서로 온 까닭을 묻고 책 사러 온 것을 치아에 말한 뒤 용하게 만남을 서로 기뻐하였다.

 

“그래 혼자 온담!”

 

화라는 그 독특한 나무라는 듯한, 굵어 잡아당기는 듯한 어조로 영숙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약간 붉은 기가 도는 실눈을 살짝 흘겼다. 그 숱 많은 눈썹은 새까맣다. 그 붉은 물이 똑똑 든는 듯한 입술은 마치 육회(肉膾)덩어리 같았다. 이것이 들어서 그의 얼굴에 너무 난(爛)한 기운이 떠돌게 하였으되 그 둥글게 살찐 어깨의 윤곽과 솔직한 허리가 매력에 넘쳐 있었다.

 

“왜 너희들은 둘이만 오니?”

 

영숙이도 지지 않고 대항하였다.

 

“우리는 둘이고 너는 혼자니까 말이지.”

 

하고 화라는 딱따글 웃었다. 그리고 제 웃음소리가 지나쳐 큰 것을 무안히 여기는 듯이 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시선은 창섭의 시선과 마주쳤다. 창섭은 처음엔 놀란 듯하던 그 실눈이 점점 자기를 향하여 대담스럽게 빛남을 보았다.

 

(一) 초! 이(二) 초! 둘의 시선은 마주 쏘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시선을 피하긴 창섭의 편이었다.

 

그는 몸을 돌이켜 처녀들과 반대방향으로 이편 책장에 꽂힌 책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책에 있지 않았다.

 

정애가 제 가까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식이 그로 하여금 더할 수 없이 흥분케 하였다.

 

왜 화라는 나를 보지 않는가! 왜 정애도 나를 보지 않는가!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는 웬일인지 정애에게 제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다만 한번이라도 오직 일(一)찰나 동안이라도 정애가 자기를 보아주었으면 하였다.

 

그는 제 얼굴이 제 모양이 주마등같이라도 번개같이라도 정애 시선에 스치는 얼마나 바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방 정애가 자기를 보고 있을지 모르리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따.

 

(나와 그는 서로 등을 지고 있으니 설마 그가 나를 본다 한들……)

 

창섭은 제 뒤통수에 근실근실 기어다니는 정애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돌이켰다. 아아 이 어씬 공교한 일인가? 그는 제 얼굴에 흐르는 정애의 맑은 눈동자를 확실히 발견하였다. 그럴 사이도 없이 정애는 당황히 외면하고 말았다.

 

창섭은 온 몸의 피가 일시에 얼굴에 오름을 느꼈다.

 

왜 정애가 나를 보고 있었는가? 그는 금방 한 제 생각은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여기 무슨 큰 이유가 없지 못할 듯 싶었다. 무슨 깊은 의미가 없지 못할 듯 싶었다.

 

“오빠 아니 가서요?”

 

하는 소리가 찬물을 끼얹는 듯이 뒤숭숭한 창섭의 귀를 울렸다.

 

깜짝 놀란 창섭의 눈은 바로 제 곁에 서 있는 제 누이 동생을 보았다. 그럴 동시에 이 편을 보고 웃는 듯한 두 처녀를 보았다. (창섭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응, 가지.”

 

잠꼬대 같은 대답을 하고 그 책사(冊肆)를 나온 창섭의 발길은 허둥허둥하였다.

 

4

따스한 별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면서도 반투명체의 실안개 같은 것이 사라지려는 새벽꿈 모양으로 어슴푸레 하게 조으는 어느 공일이었다.

 

창섭이 홀로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정신없이 읽고 있노라니 “오빠!”하며 부르는 영숙의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것을 보아요, 이것을!”

 

“무엇을?”

 

창섭은 급히 밖을 내다보았다. 영숙은 장독간 뒤에 제가 가꾸는 개나리나무 앞에 서있는 듯하였다.

 

“어서 이리 나오서요, 꽃이 피었어요, 꽃이!”

 

“응, 꽃이!”

 

창섭은 놀란 듯이 몸을 소스라쳐 뛰어나왔다. 며칠 전부터 그 개나리가 노릇노릇이 봉오리를 맺기 시작할 제 오빠와 누이는 날마다 그 불어가는 누런 점을 헤아리면서 어린애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피어나오기를 기다림이 그들의 즐거운 바람의 하나였었다. 어제 저녁까지도 움츠리고 있던 그것이 어느새 피었단 말인가.

 

“이것 보서요, 예쁘게도 피었지요?”

 

오빠가 제 옆 가까이 들어섰을 제 누이인 살가와 못견디겠다는 듯이 꽃에 거의 닿은 입을 떼며 감탄하였다.

 

파르스름하게 봄 입김이 통한 회초리에 조그마한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나 노란 입술을 방싯 열고 있었다.

 

“참 예쁘게도 피었군!”

 

창섭이도 감탄을 마지 않으며 그 꽃낱을 손으로 건드리려 하였다.

 

“에그, 가만 두세요 떨어질라요.”

 

하고 영숙은 창섭의 손을 가볍게 밀쳤다.

 

남매는 그윽한 꽃향기를 받으며 이윽히 거기 서있었다.

 

그들의 가스에는「봄이다!」하는 느낌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오빠, …………. 저어…… 저어…….”

 

영숙은 무엇을 물으려는 듯이 입을 떼었다가 스스로 부끄러운 웃는다.

 

“왜 그래?”

 

하고 창섭이도 멋모르면서 빙그레 하였다.

 

“저어……. 저어…… 꽃이 어째서 피어요?”

 

영숙은 제 물음의 어처구니 없음을 엄벙하는 듯이 또 스스로 웃었다. 그 얼굴은 매우 진국이었다.

 

“봄이 되었으니 피지.”

 

창섭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봄이 되면 사람은 어때요, 사람에게도 피는 게 있어요?”

 

창섭은 놀란 듯이 영숙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붉게 빛나고 있다.

 

“그것은 왜 물어?”

 

“저어……. 봄이 되면 사람에게도 무슨 피는 게 있을 듯 싶어서요.”

 

“있고 말고, 그것은 젊은이의 가슴에 피는 사랑의 꽃이지.”

 

이런 말이 불쑥 입술에 떠올라왔으나 창섭은 덤덤히 입을 다물고 멀거니 봄하늘을 쳐다보았다. 영숙이도 제 오빠의 기색을 살피자 더 물으려 들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즈음에 문득

 

“영숙아,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니?”

 

하는 소리가 그들의 덜미를 짚었다.

 

남매는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화라와 정애가 어느 곁엔지 중문(中門) 앞에 들어서 있었다.

 

창섭은 정애를 보았다. 그 순간에 속에서 무엇이 탁 하고 터지는 듯하며 온몸이 핑그르르 돌아가는 듯하였다.

 

정애는 제 시선이 창섭과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남자와 불의(不意)에 시선의 마주침을 부끄러워함이다.

 

하건만 창섭은 제게 인사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는 굽실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영숙이가 「언제 왔던?」하고 뛰어가는 바람에 창섭의 이 어설픈 인사가 두 처녀에게 들키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세 처녀는 영숙의 방으로 사라지고 창섭은 홀로 제방에 돌아왔다.

 

말소리 웃음소리는 또 문틈으로 새어흘렀다. 또 창섭은 넋을 읽고 말았다.

 

「오빠!」하고 부르는 영숙의 소리는 듣기는 들었건만 창섭을 가슴만 울렁거리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뒤미처 그는 영숙의 두번째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제야 간신히 「왜 그래?」 하였다.

 

「이리 좀 오서요.」란 말에 일어는 서되 그의 발길이 비틀비틀할이만큼 창섭은 흥분되었다.

 

살엄음 위에나 걸어가는 것같이 간이 오그라붙는 듯하며 얼굴의 근육하나 자유로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끔 제 뜻을 어겨 손이 머리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앉음앉음이 제격에 맞지 않은 것 같기도 하여 그는 겸연쩍어 견딜 수 없었다.

 

제법 말을 건네고 수작을 붙이기는새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하였다. 그래! 제 숨소리가 유난히 쌕쌕거리는 듯해서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호흡조차 조용조용히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랐다.

 

이런 지경일진대, 한시바삐 그 자리를 떠났으면 좋으련마는, 모르면 모르되 누가 등채를 밀어낸다 하더라도 그는 정애가 있는 방에서 나오기 싫었으리라.

 

온실에나 들어온 듯이 꽃냄새 같은 것이 떠도는 그곳의 공기가 그에게 알 수 없는 쾌감을 주었다. 봄날의 볕 같은 따스하고 보다라운 그 무엇이 속으로 스며흐르는 듯하였다.

 

여간 용기와 노력이 들지 않았으되, 그 애닮은 모양을 슬쩍슬쩍 곁눈질이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곁눈질같이 사람의 애를 말리는 것은 없으리라.

 

어느 때는 앵두같이 하늘하늘 터질 듯 터질 듯한 앳된 뺨, 어느 때는 보얀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 듯한 목, 혹은 까만 치마 위에 질쩍하고 미끄러진 듯한 은어 같은 흰 손, 혹은 푸스스한 풍정(風情)있는 머리, 어찌하다간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모양으로 피할 곳을 몰라하는 눈자위, 어찌하다간 무안새김으로 웃음이 떠도는 귀염성 있는 입모습, 이 모든 미(美)의 편린(片鱗)을 늘어지게 오래오래 보기를 요구하였건만 슬쩍 던졌다가 황망히 피하는 그의 눈에서 얼른 하고 사라짐은 참말이지 감질날일이었다.

 

그만큼 이 모든 것이 실물(實物) 이상의 매력으로 그의 가슴을 궁성거리게 하고 그의 눈을 쉴 새 없이 잡아당기었다.

 

며칠 후에 화라와 정애는 정말 영어책을 가지고 왔다.

 

권수(卷數)로는 3권이라도 <내셔널> 이(二) 권 정도가 될 까말까한 여자용 영어독본이었다.

 

창섭이로 말하면 동경서 중학교도 마쳤으려니와, 더구나 영어에 취미를 붙여서 배워야겠다는 결심이 억지로 위미를 나게 하였는지는 모르나 따로 영어 정칙야학교(英語正則夜學校)에서 영어를 공부한 까닭에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은 영어책을 줄줄 내려보는 터이니 이런 것을 읽고 새김에샤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련마는, 남을 가르쳐본 경험이 없느지라 속으로 환하게 알면서도 말을 발표하기가 곤란하였고, 또 각별히 유창한 음독(音讀)과 교묘한 번역을 해보려 애쓴 결과는 도리어 헛읽게도 되고 더듬거리게도 되었다.

 

이 뜻아니한 병신구실은 짜증도 내며 하염없이 얼굴을 붉히게도 하였다.

 

“선생님! 저희들을 그렇게 어려이 아실 거야 무엇 있어요. 그대로 죽죽 새겨주십시오 오그려”

 

화라는 창섭의 무밋무밋 하는 양이 딱하다는 듯이, 민망하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어가며 그런 말을 하였다.

 

창섭은 더욱 무안해하며 슬쩍 정애를 보고 웃었다. 정애도 그 속눈썹 긴 눈을 치떠 창섭을 바라보며 쌍긋 웃는다.

 

창섭은 제 얼굴이 타는 듯이 화끈거림을 어찌할 수 없었으되 정애의 웃는 얼굴로 말미암아 자릿자릿한 쾌감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러구러 날이 감을 따라 그들은 친숙해지고, 친숙해감을 따라 그런 어색함과 어려움이 한겹 두겹 벗겨져 갔었다.

 

넷이 한자리에 모여 재미난 담소에 때 가는 줄을 모르게도 되었다.

 

하루는 화라가 창섭에게 물었다.

 

“저어, 내일 저녁 청년회관에서 고학생(苦學生)들이 각복 「격야(隔夜)」를 한다는데, 그것이 어때요, 자미(滋味)있어요?”

 

“매우 자미있는 것입니다. 노서아 문호(文豪) 투르게네프가 지은 소설인데 각색은 아마 일본사람이 한 게지요.”

 

“그 책을 보셨어요?”

 

“네, 한번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골자를 이야기해주실 수 없을까요?”

 

“글쎄요, 벌써 거진 닞은걸요. 그리고 나는 입담이 없어서……”

 

“입담이 없다손 치더라도 말씀이야 못할 게 무엇이얘요. 누가 변사(辯士)의 설명을 듣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가 급히 말을 변하며

 

“대강만 이야기해 주세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러먼요.”

 

“퍽도 급하십니다그려.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시겠군.”

 

창섭은 처음으로 농담 한 마디를 하고 영숙이와 정애를 돌아보며 웃었다. 세 처녀도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한동안 긴장한 침묵이 거기 있었다. 세 처녀의 눈동자는 창섭의 입술로 몰렸다.

 

“오빠, 어서 해요!”

 

영숙은 참다 못하여 한번 졸랐다. 창섭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웃고만 있었다.

 

“선생님, 좀 이야기해 주세요, 네?”

 

정애도 마침내 한번 재촉하였다. 그 눈동자는 무엇을 알겠다는 열심에 맑게 빛나고 있었다. 창섭의 가슴은 다시금 방망이질하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정애를 바라보는 그 눈은

 

“당신의 청이면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야 하고 말고요, 하고 말고요.”

 

하는 듯하였다.

 

이윽고 창섭이는 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말하기가 매우 거북살스러운 듯이 따듬따듬 하다가 차츰차츰 신이 나서 스스로도 놀랄 만한 웅변으로, 엎어진 조국을 건지려고 이국수토(異國殊土)의 망명객이 되어 심혈을 뿌리는 발아리(勃牙利)1혁명당 수령 인사릅과 그에게 뜨거운 사랑을 바치는 노서아의 아름다운 처녀 에레나 사이에 얽히고 설킨 비장하고도 농염(濃艶)한 연애소설을 얘기했다. 그리고 에레나가 인사릅을 사모하는 대문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엔 더욱 힘이 있고 열이 있었다.

 

“에레나는 불 같은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었습니다. 고국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내일 같이 발아리의 흙을 밝게 되자 오늘 저녁 같이 인사릅은 폐병으로 말미암아 조국의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에레나의 애써 간호한 보람도 없이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섭은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부르짖는 소리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손가락 하나 꼼짝도 안하며 온몸을 귀로 삼아 듣고 있던 세 처녀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다.

 

창섭은 눈물이 어른어른하는 정애의 눈을 바라볼 제 웬일인지 그를 부여잡고 목을 놓아 실컷 울었으면 하는 충동을 느꼈다.

 

어슴푸레한 저문 빛이 어느 결엔지 방안의 긴장된 공기를 검게 물들였다.

 

5

“벌써 늦었네.”

 

이윽고 화라는 혼잣말같이 한마디 하고 몸을 일으킨다.

 

그때껏 이야기에 나온 인물과 정경의 환영(幻影)을 제 눈앞에 그리면서 모두들 멍하게 앉아 있었다.

 

화라의 일어남을 보자 세 사람도 잠을 깬 듯이 따라 일어선다.

 

“선생님, 참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듣겨주셔셔.”

 

화라는 이런 인사를 잊지 않았다.

 

“천만에요.”

 

창섭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면 또 뵈옵겠습니다.”

 

하고 화라는 허리를 굽힌다. 정애도 말없이 상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 보얀 목덜미가 야릇하게 창섭의 시선을 찔렀다. 두 처녀는 문간을 향하고 걸어간다.

 

창섭은 마루 끝에 서서 정애의 치마 뒷자락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것이 스르르 중문지방을 스쳐 넘어가버리자 창섭은 갑자기 제 가슴이 한그믐 밤같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정애는 가버렸다. 정애는 가버렸다!」

 

하는 의식이 뼈끝까지 사무치는 듯하였다.

 

“오빠! 거기 왜 그러고 서 계서요?”

 

동무들을 문간까지 보내고 돌아온 영숙이가 괴이쩍다는 듯이 물을 때까지 창섭은 돌로 만든 부처나 무엇같이 섰던 그 자리에서 넋을 읽고 있었다.

 

그날 저녁밥은 웬일인지 달지 않았다. 두어 술을 끄적끄적하고는 갈증든 사람 모양으로 숭늉만 두 대접을 켜고 아랫방에 내려온 그는 쓰러지듯이 책상을 의지하고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에는 「격야」의 일판이 얼씬덜씬 지나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노서아 소설에 있는 일이 아니고 마치 자기가 친히 겪은 것 같았다.

 

(그렇다! 인사릅은 꼭 저였다. 에레나는 누구가 될꼬?)

 

창섭은 스스로 눈을 감았다. 고국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애인을 따라나서는 에레나의 돌올한 모양, 너울치는 물결, 비틀거리는 배안, 깜박거리는 등불 밑에, 제 남편의 병구완하기에 골몰하는 에레나의 가련한 모양이 역력히 나타난다.

 

그러다가 문득 인사릅과 에레나가 서로 쓸어안고 키스하는 광경이 보인다. 처음엔 인사릅은 얼굴빛이 거무튀튀하고 어깨판이 떡 벌어졌으며, 키가 후리후리한 훤한 장부이고 에레나는 머리올이 금실 같고 코끝이 뾰족한 서양여자이더니, 어느 곁엔지 인사릅은 얼굴이 핼쓱하고 몸피도 별로 굵지 않은 사내로 변하고 에레나 또한 머리가 검으며 코도 그리 높지 않은 여자로 변하였다.

 

언뜻 깨달으니 시방 키스를 하고 있는 남녀는 다른 사람 아닌 창섭과 정애였다! 이 환상으로 그린 키스로 말미암아 그의 입술이 보드라운 촉감에 가늘게 떠는 하였다.

 

그는 이 환영을 쫓으려고 한번 머리를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아찔하고 눈앞에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며 책을 짚고 있는 보얀 손이 나타나기도 하고 중문지방을 스쳐 넘어가는 까만 치마 뒷자락이 보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그 눈물에 젖어 윤 흐르는 눈자위가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는 듯하였다.

 

창섭의 애는 빠직빠직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만 못견딜만큼 정애가 보고 싶었다. 덮어놓고 보고 싶었다. 지금 만일 정애를 볼 수 있다 하면 물에라도 뛰어들었으리라, 불에라도 뛰어들었으리라. 정애를 보는 값으로 하늘을 주어도 아깝다 않았으리라, 지구를 준대도 오히려 적음을 한하였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정애를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정애의 집을 찾으려 한길에 나서는 자기, 정애 집 문 앞에 빙빙 도는 자기, 용감스럽게 대문 앞에 쑥 들어섰으나 부를까 말까 망설이는 가운데 어찌어찌하여 정애가 쪼르르 나와 서로 반기는 모양을 현실인지 공상인지 분간을 못할이만큼 또렷또렷이 생각하면서도 속절없이 앉아 있는 것을 깨닫자, 그는 휘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애간장이 조비비는 듯하였다.

 

(아아,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구나!)

 

그는 참다 못하여 마침내 이렇게 부르짖었다.

 

6

(아아,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구나!)

 

창섭은 그렇게 부르짖었건만 그는 정애를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에게는 청정(淸淨)하고 신선한 처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 그는 기혼남자인 까닭이다.

 

그는 열세 살 되던 봄에 열아홉 살 먹은 색시에게로 장가를 들었다.

 

물론 제 의사로 든 것은 아니로되 남들이 어른이 된다고 떠드는 바람에 그도 멋모르고 좋기는 하였다. 그리고 색시도 처음엔 그리 밉지 않았었다.

 

부부가 무엇인지 아내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였으되 어머님 품에 자던 자기가 인제 그와 한 요 위에 잘 것과 사람한테는 응석을 부리더라도 그에게는 꼭 어른 노릇을 할 것과, 자기보다 나이는 많지마는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톡톡히 꾸짖어서 길을 들여야 될 것을 대강 짐작하였다.

 

또 그는 자기에게 고운 옷을 해 입히고 맛난 음식을 해주는 침모(針母)나 찬비(饌婢) 같은 것이니, 그에게는 옷 투정 반찬 투정을 막하여도 매도 아니 맞고 꾸중을 아니 모시는 것을 그는 신기하게도 생각하였다. 이런 편으로 보아 전에 없던 그런 사람 하나가 생긴 것이 어린 창섭의 생각에는 그리 해롭지 않았었다.

 

그때껏 한문을 읽고 있던 창섭은 새로운 공부를 하겠다고 장가들던 이듬해로 상경(上京)하였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야학(夜學)으로 일년 동안 일어와 산술을 배워가지고 껑충 뛰어 XX중학교(시방은 XX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중학교의 이(二) 년에 진급하렬 제 일본 명치(明治)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XX군 H은행 부(副)지배인으로 있는 맏형의 주장으로 동경 유학을 하게 되었다.

 

동경에서 정칙(正則)예비학교에 다니면서 밤낮으로 준비한 결과, 그는 C중학교 이(二) 년급의 보결시험에 입격(入格)되었었다.

 

들기는 들었으나 학과에 익숙치 못한 그는 하기(夏期)휴가를 공부에 이용하노라고 그 해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四) 학년에 진급되던 해의 여름에야 그는 오래간만에 정다운 고향의 흙을 밟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그럭저럭 열아홉이나 되었으니 차차 자기의 꿈같은 장래에 있을 아내의 윤곽을 상상도 해볼 적이 있다. 그 시(時) 창섭의 눈에 비친 제 아내의 꼴은 참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구정물이 뚝뚝 듣는 행주치마는 곁에 얼른만 하여도 불쾌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조금도 가다듬지 않은 우수수한 머리며, 벌써 두어 금 가는 주름이 잡힌 이마며, 그 앳된 빛 하나 없는 시들시들한 뺨을 볼 제 창섭은 저것이 내 아내인가 하였다.

 

맏누님 뻘이 훨씬 넘는 저 늙어빠진 여자가 내 아내인가 하였다.

 

이러 생각을 하니 창섭의 가슴은 마치 새침한 가을 밤모양으로 쓸쓸하고 어두웠다. 그리고 무슨 지겨운 짐승처럼 곁에만 와도 몸서리가 침을 어찌할 수 없었다.

 

몇해 만에 집에 돌아온 창섭이건만 밥숟가락만 뚝 떼면 훌쩍 뛰어나가 밤이 되어도 돌아올 줄 몰랐다. 그러다가 부친과 (그는 열두 살에 모친을 여의었다.) 친척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하고 고만 달아나다시피 동경으로 뛰어갔었다. 그 후부터는 하기방학이 되어도 귀성(歸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흥 이런 사람들은 이런데!)

 

무슨 대학 졸업생을 신랑으로 어떤 여학교 출신을 신부로 꽃다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눈에 띌 적마다 창섭은 화증 나는 듯이 휙 집어 동댕이치며 한숨을 쉬기도 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행복일다.)

 

우리 유학생들 가운데도 미혼한 남학생과 미혼한 여학생끼리 꿀 같은 사랑의 단꿈을 꾼다는 소문을 들으면 이렇게 부러워도 하였다.

 

그래도 그의 낙(樂)은 공부하는 데 있었다. 남이야 구경을 가든지 운동을 하든지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거기에 희망이 있고 광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고 싶은 공부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집의 한 사오백 하던 살림이 남의 빚봉수로 말미암아 거덜이 나고 말았음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의 준비에 골몰하던 그는 그만 고국으로 아니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돌아는 왔으나 답답도 하거니와, 더구나 보기 싫은 아내가 있기 때문에 직업을 구한다고 핑계하고 서울로 뛰어올라 왔었다. 서울 온 뒤에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서양선교사를 찾아다니며 영어를 배우기도 하고 또 일상 좋아하는 문학서(文學書)()에 잠착도 하는 형편이다.

 

7

(나는 정애를 사랑한다, 불같이 사랑한다! 그러하건만 나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다. 사랑하여서는 아니된다!) 이렇게 생각하매 창섭은 그야말로 흉격이 막히는 듯하였다.

 

(나는 기혼남자다! 나는 뚜렷한 아내 있는 사람이다. 나의 몸은 이미 더러워졌으니 어찌 바닷속 깊이 잠긴 진주보다 더 맑고 깨끗한 처녀의 사랑을 바랄 수 있으랴! 얻을 수 있으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린다. 얼마나 쓰리든지 얼마나 아프든지 나는 그 채찍을 달게 받아야 할 사람이다.)

 

창섭은 또한번 곱삶아 보았다. 그리고 정애의 사랑을 아주 단념하리라 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를 악물고 그는 책에 재미를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전자(前者)엔 뜻맞는 벗이나 정다운 애인에나 질배 없던 책이 인제는 보려고 하면 할수록 펴들기조차 염증이 난다. 한 대문을 가지고 몇 번 읽어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책을 저 갈 대로 집어동댕이친 그는 흔히 끝 모를 공상의 바다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일어났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일어나는 큰물꽃 잔물꽃 가운데 정애의 환영이 가끔 물결에 어른대는 달그림자 모양으로 번쩍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정애가 오는 날이면 그의 번민은 더욱 심하였다. 사랑하는 이의 발자취소리를 남먼저 듣건마는 짐짓 방문을 굳이 닫고 있는 그의 마음이야 어떠하였으랴!

 

한두 번 그느 책상에 머리를 쓰러뜨리고 쓰리고 따가운 눈물을 짜내지 않았다.

 

어느날 오후였다.

 

화라와 정애가 영숙을 찾아오더니, 얼마 후에 화라 혼자만 남아 있고 정애와 영숙은 어디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화라가 창섭의 방으로 내려온다.

 

시방껏, 정애가 제 앞에나 있어 눈만 뜨면 보일까 두려워하는 듯이 잔뜩 눈을 감고 누웠던 창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화라는 웬일인지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말없이 창섭을 바라본다. 창섭이도 놀란 듯이 마주보고 있었다.

 

“왜 혼자 꼭 들어앉어 계서요?”

 

이윽고 화라는 이런 말을 하며 격에 맞지 않은 웃음을 웃는다. 그 얼굴은 일시에 불이 확 붙는 듯이 붉어진다. 그러다가 창섭의 덤덤히 대답 없음을 보고 조금 무밋무밋하더니 얼굴빛을 바루려고 애를 쓰며 갑자기 놀라는 표저을 한다.

 

“왜 신관이 저렇게 못되어습니까? 어데가 편찮으서요?”

 

라고 근심스럽게 묻는다.

 

“아니예요, 내 얼굴이 그렇게 못되었나요?”

 

그제야 창섭이도 지어웃으며 면경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관자놀이가 움쑥 들어가고 얼굴이 백짓장같이 핼쓱하다.

 

화라는 매우 걱정되는 듯이 창섭을 거들떠보며

 

“암만해도 무슨 병환이 있는 듯한데요?”

 

“병환은 무슨 병환입니까?”

 

하고 창섭은 하염없이 웃었다.

 

“그러면 무슨 걱정되시는 일이 있어요?”

 

“아모 걱정도 없는걸요.”

 

“그러시다면 만행이겠습니다. 어쩌면 신색이 저렇듯 그릇되실까요”

 

“낸들 알 수 있습니까. 아마 봄을 타느 게지요.”

 

“왜 그렇게 말씀을 데면데면하게 하서요? 다정히 하시지를 못하고……”

 

하며 화라는 원망스럽게 눈을 살짝 깔아메친다.

 

창섭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화라를 바라보았다.

 

“왜 남을 보시기만 하세요. 하하하……. 제가 실언(失言)을 하얏는가 봅니다. 철없는 생도(生徒)의 말이니 선생님, 행여 노(怒)혀 마세요.”

 

이 계집애가 나를 놀리는 셈인가 하고, 창섭은 불쾌한 생각이 와락와락 났으되 억지로 좋은 낯을 지으며 농담 비슷하게

 

“원 천만의 말씀도 다 하십니다. 실언이 무슨 실언예요. 화라씨도 딱하시지.”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런 실언을 용서해주신다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번엔 화라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벙어리 모양으로 눈이 빛나고 입술이 움직이면서도 정말 벙어리 같이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럴 사이에 영숙이와 정애의 돌아오는 기척이 나매 화라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

 

“선생님 계시니?”

 

아름다운 정애의 목소리가 묻는다.

 

창섭의 머리는 다시금 회오리바람에 내둘리는 듯하였다. 그러자 미닫이는 소리없이 열렸다. 열린 밑창 사이로 정애의 안타까운 모양이 나타난다.

 

“선생님 안녕하서요?”란 말과 함께 정애는 부끄러운 듯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나직이 숙인다.

 

창섭은 부신 것이나 본 듯이 눈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인사를 해야 되겠다고 느끼는 순간에 이미 때가 늦은 줄도 깨달았다. 답례를 그만두려 하면서도 제 뜻을 어겨 머리가 꾸벅하고 말았다. 창섭은 더할 수 없이 무안했다.

 

8

“에그, 오빠가 담배를 먹네.”

 

영숙이가 뜰아랫방에 내려왔다가 시커먼 연기를 후후 뿜고 있는 창섭은 핏기 하나 없는 핼쓱한 얼굴에 쓸쓸한 웃음을 띈다.

 

“안잡수던 것을 잡수시니 말이지요.”

 

“그야 안 먹던 것을 먹는 수도 있고 먹던 것을 안 먹을 수도 있겠지.”

 

창섭은 심술궂게 담배 연기를 영숙의 얼굴에다 보낸다.

 

“에그, 오빠도!”

 

영숙은 연기 들어간 눈을 비비며 원망하였다.

 

“왜 연기가 그렇게 싫어. 나는 담배 먹는 것밖에 낙이 없는데.”

 

“그게 무슨 약이예요?”

 

“그 약을 누이야 알 수 있나. 한 모금 두 모금 빨 적에 빠짓빠짓 타들어가는 것도 자미있고, 더구나 후 내뿜을 때는 내 가슴 안에 서린 연기조차 덩달아 나가는 듯 해서 속이 시원하단다.”

 

“왜 오빠 가슴에 불을 땝니까? 무슨 연기가 나와요.”

 

창섭은 제 말이 너무 지나친 것을 후회하는 듯이 입을 다문다.

 

영숙은 헤죽이 웃으며

 

“그런데 오빠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요.”

 

“응! 무슨 말이야?”

 

“저어……. 오빠가 정애를 피하세요?”

 

창섭은 가슴이 뜨끔하였으되

 

“내가 정애를 피할 리 있나.”

 

하고 딴청을 부렸다.

 

“그러면 왜 정애가 오면 꼭 방에 들어낮아 계시고 올라오시지 않아요?”

 

“그것은…….저어…….무슨 정애씨를 피하는 게 아니라 요사이 좀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위선 어제도 올라가지 않았던?”

 

“어제만 해도 화라가 그렇게 조르지 않았으면 아니 올라오셨을걸 뭐. 그뿐예요? 넷이서 트럼프의 조우커 잡기를 할 적에 우리들은 먼저 떨어지고 오빠하고 정애하고 둘이만 남았는데 정애의 손에 있는 조우커를 오빠가 빼앗아 갈 때에 정애가 웃지 않았어요? 그때 오빠의 얼굴빛이 어떠한 줄 아십니까? 화라 말 마따나 기막힌 고뇌가 떠돌았어요. 그리고 판도 마치기 전에 「내가 졌습니다.」하고 휙 뛰어나가시지 않았어요.”

 

“그것은……저………….그것은………….”

 

창섭은 떠듬거리었다. 그 움쑥 들어간 관자놀이에 거미줄같이 드러난 푸른 맥이 펄떡펄떡한다.

 

“화라가 그래요, 암만해도 오빠의 태도가 수상하다고…….”

 

이렇게 말끝을 맺고 영숙은 제 오빠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창섭은 덤덤히 대답히 없었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있은 후

 

“누이!”

 

문득 창섭은 소리를 떨었다.

 

“네, 왜 그러서요?”

 

영숙은 심상치 않은 부르짖음에 깜짝 놀랐다.

 

“누이…………누이……내 태도가 수상하다고?”

 

창섭의 목소리는 벌써 울음에 껄떡인다. 호동그랗게 뜬 영숙의 눈에 제 오빠의 뺨에 스치는 눈물이 비쳤다.

 

“오빠! 왜 우서요, 네?”

 

영숙이가 이런 말을 물을 겨를도 없이 창섭은 허전거리는 손으로 덥석 누이의 손을 잡았다. 영숙은 제 오빠의 손이 불같이 뜨거움을 느꼈다.

 

“누이! 누이! 누이는 내가 왜 우는지 모를 것이다. 누이는 이 눈물 맛을 모를 것이다. 이 쓰고 떫은 눈물 맛을 모를 것이다. 나의 뼈와 살을 깎고 저미는 이 슬픔을 누이는 모를 것이다……”

 

하면서 창섭은 흐느껴 운다. 영숙은 그 큼직한 눈을 더욱 더욱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9

세차게 흐르는 물결은 어설픈 방축(防築)으로 막을 배 아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열은 낡은 도덕관념에 눌릴 배 아니다. 눌리면 눌릴수록 안으로 붙고 속으로 타들어가다가 마침내 이런 헌누더기 도덕관념을 녹이고 마는 것이다.

 

도덕이 인조(人造)인 다음에야 사람의 생각을 따라 언제든지 가치를 전도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새로운 도덕을 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할래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 사랑하면서 사랑하여서는 안되는 고통, 이 고통으로 하여 살이 여의고 피가 마르던 창섭은 마침내 정애를 사랑해도 괜찮다는 이유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에게 아내가 없다는 증명이었다.

 

창섭을 그의 남편이라 하고 그를 창섭의 아내라고 남들이 부르는 여자 하낙 창섭의 시골집에 있기는 있다.

 

법률상으로 보든지 민적(民籍)상으로 보든지 창섭에게는 뚜렷한 아내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가 만일 창섭의 아내일진대 창섭의 의사로 정할 것이 아니냐. 그러하거늘 시방 남들이 부르는 창섭의 아내는 창섭의 의사로 정한 것이 아니다. 아무 철모르는 열세 살된 어린아이가 어른 시키는 대로 사모관대를 하고 어떤 집에 가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처녀와 절을 주고받았을 따름이요, 그렇게 하면 자기가 그의 남편이 되고 그가 자기의 아내가 되는 줄 몰랐으며, 또 피상적으로 남편이란 명칭과 아내란 명칭을 들어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함인 줄 알지 못하였다.

 

의지 있은 뒤의 행위라야 효력이 있는 것인즉 의지 없는 행위에 어찌 책임을 질 수 있으랴. 다만 그것은 허수아비의 장난에 불과한 일이다. 그렇다, 창섭은 허수아비로 그의 남편이 되었고 그도 허수아비로 창섭의 이내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창섭은 마음이 있고 살아 있는 사람이어든 어찌 허수아비의 아내 있는 것으로 아내가 있다 하랴! 그러므로 창섭은 아내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결론을 얻으매 창섭의 가슴은 갑자기 환해지는 듯하였다. 이 환해진 것은 사랑하는 이를 사랑할 수 있는 기쁨의 탓도 탓이려니와 지질렸던 정화(情火)가 거리낌없이 타오르는 까닭도 까닭이었다.

 

지질렸던 그때는 시꺼먼 연기에 숨이 탁탁 막히는 듯 하더니 활활 이는 이때는 새빨간 불길에 애가 절쩔 끓는 듯 하였다.

 

그때도 견딜 수 없었지만 이때도 견딜 수 없었다.

 

(이 사랑을 정애에게 고백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문제였다.

 

(정애가 오거든 꼭 붙들고 나의 마음을 저저히 말해버리리라.)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얻을 수가 없었다.

 

(에라, 편지로 해버릴까 보다.)

 

그는 밤중에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몇 장을 버리고 몇 장을 고쳐 썼다.

 

(이것을 보면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염려로 얼마를 망설이다가, 어느날 저녁 몹시 열이 띤 그는 이것저것 불계하고 그 편지를 우체통 속에 들이치고 말았다.

 

제 3 장

1

주사위는 던져지고 말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창섭은 번민하면서도 오뇌하면서도 밤이고 낮이고 정애애게로 날아가는 그 편지를 꿈꾸고 있었다.

 

그렇다, 그 편지는 날아가고 있었다. 날짐승이나 무엇 같이 그 편지는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누른 복장을 하고 검은 가방을 떨렁거리는 체부의 꼴이란 이상하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창섭의 눈에는 공중을 술렁거리고 떠나가는 흰종이조각이 보일 뿐이었다. 이제 그의 머리에 떠도는 것은 그 어여쁜 입모습도 아니었다.

 

언제든지 쫓을 수 없고 물리칠 수 없던 그 생글거리는 눈동자도 아니었다.

 

오직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떠나가는 편지를 꼭 붙잡는 보얀 손이 얼씬거릴 뿐이었다.

 

어젯밤부터 그는 자기에게 날아노는 편지를 눈뜨고 낮아서 꿈꾸기 시작하였다.

 

아니다, 가는 종이조각을 꿈꾸는 동시에 오는 종이조각도 꿈꾸었다. 함이 마땅할는지 모르리라.

 

쌍쌍이 나는 제비 모양으로 방향을 달리하여 다 같은 속력으로 내닫는 편지 두 장을 눈앞에 그리기도 하였다.

 

시방도 그는 자기에게로 날아오는 글발의 상상에 얼을 잃고 있었다. 편지를 띄운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으니 정애가 답장을 한다면 오늘쯤은 회신을 받기도 할 때다.

 

그는 오늘 온종일 방안에 꼭 들어앉아 있었다. 오직 한 일을 기다리기에 심신이 더할 수 없이 피로하였으되 그의 신경은 칼날같이 날카로왔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도 편지가 오는가 하며 쓸데없이 가슴을 두근거렸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 서향(西向)인 그 방 미닫이의 옷머리에 머물렀던 마지막 햇발조차 사라지려 하건마는 기다리는 편지는 감감하게 소식이 없다.

 

“창섭이!”

 

문득 문간에서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난다. 그의 머리에 (편지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에 번쩍였다. 체전부가 「창섭이!」하고 부를 리 만무하였으되, 기다림에 지친 그의 넋은 이런 터무니없는 환각조차 하게 되었다.

 

문간에는 다 해어진 고구라양복에 추물이 다 된 캡을 쓴 학생 하나와 옥양목 두루마기에 역시 캡을 쓴 학생인 듯한 청년 둘이 서 있다.

 

창섭은 꿈에도 생각지 않은 무슨 기막힌 일이나 딱 당한 모양으로 놀란 듯 얼빠진 듯 눈을 멍하게 뜨고 있다.

 

창섭의 이 얼빠진 모양에는 조금도 상관치 않은 듯이 그 고구라양복 입은 청년이 뚜벅뚜벅 창섭이 가까이 들어서더니 부서지라고 손을 쥐어 흔든다.

 

떡 벌어진 어깨판, 거무튀튀한 얼굴빛, 얼른 보기에는 매우 위엄스럽게도 건강스럽게도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알맞은 코 높이로 동그스름한 턱이 이쁘장도 한 생김새로되 진한 먹으로 「일(一)」자를 쭉 그은 듯한 시커먼 눈썹이 얼굴에 늠름한 기운을 돌게 하여 또 그 눈썹과 어울리지 않게 조그마한 눈은 「그까짓 것」하는 세상을 넘보는 듯하다.

 

그리고 또 건강은 해 보이지만 기실 검누른 살이 시들시들 한 것과 벌써 이마에 그려진 두어 줄 주름을 보면 얼마나 신고간난(辛苦艱難)에 부대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이 났으니 그의 성격마저 대두리만 따두자.

 

그는 윤치국(尹致國)이란 청년인데 남에게 달려 지내고 매여 지내기를 딱 싫어한다. 얼른 말하면 그는 구석을 싫어한다. 제 행복보다는 제 목숨보다도 자유를 사랑한다. 그는 고통과 곤핍(困乏)의 비싼 값으로도 자유를 사지 않고 견디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제 자유를 압박하고 구석하는 모든 것과 싸왔다, 또 싸우리라. 그리고 옳든 그르든 제가 한번 주장한 일이면 뻑뻑하게 세운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고집이 하늘을 찌른다고 탱천(撐天)이라는 별명조차 들었다.

 

창섭과 치국은 고향이 같아서 사귄 지도 오래지만 그 비례로 우의도 두터웠다. 누구누구하여도 창섭이와 가장 친한 사람은 치국이었고 치국의 가장 좋아하는 벗은 창섭이었다.

 

어디까지나 굳세고 우락부락한 치국이와 어디까지나 보드랍고 얌전한 창섭이는 그 대차적 성격에 있어 서로 합한 것이리라.

 

창섭의 손을 흔들고 있던 치국은 다짜고짜 없이,

 

“나는 내일 떠나겠네.”

 

쉰 듯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치국은 집안이 구차한 탓으로 겨우 제 고장 고등보통학교 이(二)년급밖에 치르지 못하였다.

 

향학열이 불같이 타오른 그는 주머니에 쇠천샐립없이 서울로 뛰어올라와 갖은 곤란을 무릅쓰고 강습소에 다니어 가까스로 중급 정도의 지식을 얻었다.

 

서울 있으나 동경에 가나 돈 없기에 매한가지고 곤란하기도 매한가지라 하여 그는 일본에 건너가기로 작정하였다.

 

내일 떠나겠단 말이 곧 이 뜻이다.

 

“응? 내일 떠나?”

 

창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안새김으로 과장스러운 표정을 하였다.

 

“잠깐 들어가세 그려.”

 

하다가 조선옷 입은 키 좀 큰 청년을 보더니

 

“어이구 박공(公) 오섰습니까?”

 

하며 인사를 했다.

 

“김공 뵈온 지 퍽 오래이었습니다.”

 

하고 키 좀 작은 청년이 창섭과 박(朴)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창섭에게 말을 건넨다.

 

“강공, 참 오래간만입니다. 왜 한번도 놀러 오시지 않았어요, 한번 가뵈옵자, 뵈옵자 하면서도…….”

 

“김공, 어서 두루막을 입고 나오시지요.”

 

성미가 괄괄한 듯한 박은 김과 강의 인사를 가로막으며 조급한 듯이 재촉을 한다.

 

“참 치국이가 떠나는데 하도 섭섭해서 오늘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 하였습니다. 옷을 입고 나오시지요.”

 

차근차근한 강은 이렇게 설명한다.

 

창섭은 아니 나갈 수 없었다.

 

네 청년은 어느 조그마한 청요리집으로 왔다.

 

“우리 오늘 저녁에 흠뻑 먹읍시다.”

 

박이 미리 선언을 한다.

 

“얼마든지 먹지.”

 

치국이가 쾌할하게 찬성한다.

 

“그런데 우리, 술은 무엇으로 할꼬?”

 

나중에 제일 주머니가 넉넉해서 치국의 일본가는 여비도 보태주고 또 오늘 저녁 쓰임도 네가 도맡아내려는 강세창(姜世昌)이 이런 제의를 한다.

 

“우리 오늘 배갈을 먹세, 먹고 좀 취해야지.”

 

오늘 저녁에는 꼭 먹고 취해야 될 일이 있는 것처럼 박이 서슴지 않고 대답을 한다.

 

창섭은 놀란 듯이 박을 쳐다보았다.

 

박이 넷 중에서 술이 가장 세었다. 그의 이름은 사천(思天)이니 공업전문학교를 한 일년 다니다가 공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학교를 집어치우고 요사이는 일정한 공부도 하지 않으며 다만 이따금 연설회와 토론회에 나가는 것을 학과 겸 놀이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무엇이든지 좋지.”

 

치국은 그 조그마한 눈을 번쩍이며 부르짖었다.

 

“정종으로 합시다.”

 

세창이가 이의(異議)를 한다.

 

정종과 배갈에 대하여 사천과 세창 사이에 한참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사천이가 꿋꿋이 세움으로 하는 수 없이 배갈로 정하게 되었다.

 

어깨가 앞으로 굽고 선잠을 깬 듯한, 퉁명스러운 얼굴을 가진 중국인 보이가 치렁치렁하게 딸면 네 그릇과 요리 몇 접시와 배갈 반 근을 들여왔다.

 

첫 잔은 세상 없어도 최후의 일적(一適)까지 단숨에 말리는 법이라 하여 모두들 배갈 한 잔씩 마셨다.

 

여기저기서 카아 카아 하는 소리가 난다. 창섭은 목구멍이 쇠-함을 느끼자, 뱃속에서 난데없는 불이 활활 일어나는 듯하였다. 제 얼굴이 붉은가 급려(急慮)하며 그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세창의 얼굴은 주홍을 부은 것 같고 치국의 얼굴은 다갈색으로 번쩍인다. 오직 사천만 늠름하게 눈 가장자리가 잠깐 발그레할 뿐.

 

술은 또한번 돌았다. 술이 세 번째 돌자 사천은 넘을 듯 넘을 듯한 술잔을 들고 일어선다.

 

“말씀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하고 카악 기침을 하더니,

 

“여러분! 누가 낙을 싫어하며 고(苦)를 좋아하겠습니까?”

 

라고 연설조로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 있은 뒤에 낙이올시다. 고 없이 얻은 낙은 값없는 낙이올시다. 많은 가격, 많은 희생으로 얻은 낙이면 그 낙도 무상한 낙이겠지요. 장갑(裝甲)자동차와 같은 의지와 폭발탄 같은 감정을 가진 윤군이………….”

 

듣는 이의 입술에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하는 이도 제 말씨에 스스로 만족한 듯이 빙긋 웃었다.

 

“여보게, 앗게 앗어! 자네는 무슨 연설회에나 나온 줄 아나, 장갑자동차란 어데서 주워들은 문자인가?”

 

세창은 웃음을 참지 못하여 이렇게 제지하였다.

 

사천은 엄연(奄然)하게 얼굴빛을 바루며

 

“그게 무슨 버릇없는 소리야. 남의 말이 끝도 나기 전에……. 그 윤군이 모든 가난을 무릅쓰고 멀리멀리 동경에 부급(負笈)하랴 합니다. 그는 맨주먹으로 이역수토에 고학하러 가는 길이올시다. 우리는 그의 튼튼한 몸과 꿋꿋한 뜻이 반드시 크게 이름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의 광명이 찬란할 장래를 미리 축복하며 또는 그의 건강을 비는 뜻으로 다같이 이 잔을 마십시다.”

 

“히여! 히여!”

 

모두들 일종의 감격으로 그 잔을 말렸다. 그런 뒤에 비틀비틀 하며 치국이가 일어선다. 그는 말도 하기 전에 팔부터 내두르며,

 

“박군의 말씀은 감사하게 들었습니다. 과연 나의 주머니는 텅 비었읍니다마는………….”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한층 소리를 높여

 

“이 주먹과 팔이 있으니 어데를 가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한 신고(辛苦)와 여하한 곤란이 있더라도 박군의 말과 같이 장갑자동차와 같은 의지로 같아 없애겠습니다.”

 

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앞뒤로 굽혔다 폈다 하면서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한동안 지껄인다. 그의 눈에는 희망에 타는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지는 듯하였다.

 

이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창섭의 가슴은 취중에도 말할 수 없이 쓸쓸해짐을 느꼈다. 남은 맨주먹으로 동경 유학을 기운차게 해보려 하거늘 학비가 떨어졌다고 울며 불며 그만 집으로 돌아온 저 자신이 내뱉고 싶었다.

 

남은 동경(憧憬)에 뛰고 희망에 타거늘 저는 방구석에 의기소침하게 처박혀 풋사랑에 속을 썩이는가 하매, 부끄러워 얼굴도 들 수 없었다.

 

(그런데 편지는 왔는가, 안왔는가?)

 

문득 창섭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2

그날 밤 거기서 취흥에 겨워 곡조도 안된 창가를 함부로 외치기도 하고, 되지도 않은 춤을 추었다기보다 뛰기도 하며 요리 담은 접시를 장구삼아 두들기다가 셋이나 깨어도 놓고 열두점이나 되어 그들은 각각 제 숙소로 헤어졌다.

 

난생 처음으로 술이 잠뿍 취한 창섭은 평일의 얌전한 걸음걸이와는 딴판으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길을 휩쓸며 삼촌의 집으로 돌아왔다.

 

제 방에 왔을 제 (편지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또 번개같이 번쩍였다. 그는 핑핑 돌리는 시선을 책상위에 던졌다. 그의 눈은 열병환자와 같이 빛난다.

 

그는 그 위에 얹힌 소쇄한 분홍봉투를 본 까닭이다.

 

「市內 安國洞 一七番地 金昌燮 先生앞」이라 쓴 철필글씨가 그의 핏발이 선 눈에 아름답게 비치었다.

 

그는 허전허전하는 손으로 봉투 웃머리를 찢었다. 편지와 함께 봉해 넣은 듯한 향수 냄새가 소르르 창섭의 단내나는 콧구멍을 엄습하였다. 취한 술이 일시에 깨는 듯하였다.

 

주신 편지는 반갑게 뵈았습니다. 저를 그렇게도 사랑하신 단 말씀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알 길이 없사외다. 저도 선생님에게 숨은 사랑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 일곱 점에 남산공원으로 갈까 하오니 여기서 뵈옵게 되오면 저의 가슴에 맺히고 맺힌 회포를 저저히 아뢰올까 하옵내다.

 

사연은 단지 이뿐이었다. 이 간단명료한 글발의 의미를 창섭은 한번 보고는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고쳐 보고는 또 보는 가운데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 남산공원에서 만나자는 말이 낙인(烙印)과 같이 그의 머리에 박혔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손에 편지를 편 채로 들고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도로 방에 들어와서 그 편지를 차근차근 접어 제 봉투에 넣었다. 넣은 것을 또 집어들고 처치할 곳을 모르는 듯 또 한동안 망설이다가 책상 빼닫이를 열고 그 속에 떨어뜨렸다.

 

그제야 적이 망므을 놓은 듯이 문지방에 걸터앉아 구두를 신고 나더니 구두 신은 채로 또 방에 뛰어들었다.

 

책상 빼닫이로부터 그 편지를 꺼내어 이번에는 황급히 제 주머니에 넣는다.

 

마치 누가 곁에서 그것을 빼앗기나 할 것 같다. 그리고도 미심한 듯이 편지 넣은 주머니를 만져보고 만져보고 하면서 살그머니 대문을 열고 나왔다.

 

사람 없는 한길을 그는 풍우(風雨)같이 달음질하였다. 숨도 가쁘고 다리도 아파 잠깐 평보(平步)로 걸어 그때마다 축축한 밤바람이 그의 끓는 머리와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혼란하던 머리가 냉정해짐을 따라 약속한 시간은 벌써 지낸 일, 밤이 이렇듯 깊었으니 정애가 지금껏 자기를 기다릴리 만무한 일, 시방 시근벌떡거리고 뛰어가는 것이 헛일이고 우스운 일인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숨만 조금 돌리면 연해 달음박질을 마지 않았다. 시간이야 늦었든지 말든지 애인이야 여기 있든지 말든지 자기는 가보아야 될 의무가 있는 듯싶었다. 더구나 지금 그의 전신에 넘치는 행복의 느낌은 이러지 않고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새로 세시가 가깝도록 그는 헛되이 남산공원, 한양공원을 해매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제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편지지를 펼혀 놓았다. 그는 번개같이 편지 한 장을 서 가지고 다시금 집을 뛰어나왔다.

 

정애의 집 애문에 다다르자 그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두근거렸건만 여의(如意)하게 그 편지를 닫혀 있는 문틈으로 멀어넣을 수 있었다.

 

밀어넣자 그느 무슨 맹수에나 쫓기는 사람 모양으로 달음박질하였다.

 

실실이 훌린 몸을 요 위에 누일 때는 하늘 한 가에 비스듬히 걸린 지새는 달이 꿈꾸는 듯 조는 듯 광채 없는 오리알 빛으로 사라지려 할 적이었다.

 

3

몸은 무슨 무거운 돌에나 지질린 듯이 착 깔아졌건만 암만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윽고 지걱거리는 물지게소리가 들같이 잠잠하던 정적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싸늘싸늘한 새벽 공기가 들어오는 줄 모르게 방안에 스며 흘렀으되 그는 열병에나 걸린 사람같이 온몸에 열이 불일 듯하였다.

 

그는 참다 못하여 안으로 향한 미닫이를 열었다. 신선한 실바람이 냉수처럼 그의 불덩이 같은 이마를 핥는다. 그느 상쾌하다 하였다.

 

이윽고 동녘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스르르 헤어졌다. 그러자 구름자락이 눈빛으로, 그렇다 밝고 깨끗한 눈빛으로 피어날 겨를도 없이 해님의 앞길을 밝히는 홍초롱모양으로 붉은 놀로 변하였다. 그 뒤를 이어 싱그러운 해님이 그 광명에 번쩍이는 윤곽을 쑥 나타내었다.

 

창섭은 눈물이 날 듯한 행복을 느꼈다.

 

이 밤이 샘을 따라 그의 검은 운명의 밤도 새어가는 듯 싶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세계가 열려가는 듯 싶었다. 환희와 행복과 시(時)와 미(美)가 있는 여태껏 꿈에도 모르던 아름다운 세계가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 아픔다움 세계의 여왕 모양으로 정애의 환영이 다시금 그의 눈앞에 떠돌았다. 그의 철색진 뺨에 해죽 웃음이 흘렀다.

 

조금 있노라니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는 상연(爽然)한 기분으로 자리를 떠났다.

 

온 밤을 잠 한 숨도 못잔 피로도 그에겐 없었다.

 

그는 제손으로 대야에 물을 떠다 세수를 하였다. 차디찬 물에 얼굴을 씻음이 얼마나 상쾌한 일인가 절실히 느꼈다. 어째 새로운 생활의 제일보를 내디딘 듯 싶었다. 그는 행복이었다.

 

아침을 마치자 달착지근한 고달픔이 그 상쾌한 기분을 호리고 Em 흐리더니 그만 코를 꾸벅꾸벅 꿈의 나라로 끌어가버렸다.

 

얼마를 잤는지 저도 몰랐다. 그가 꿈과 현실 사이에 방황하고 있을 때 무슨 힘이 가볍게 제 어깨를 흔듦을 어슴푸레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쉴 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향내를 느꼈다. 그 향기가 노곤한 몸에 사르르 녹는 듯한 쾌감을 주었다.

 

달착지근한 잠이 다시금 그 철기 같은 날개로 그의 의식을 감기 시작하였다.

 

그럴 즈음에 아까보다 좀더 강한 동요(動搖)를 억세게 받았다.

 

잠오는 눈을 비빈 그는 제 앞에 앉아 있는 화라를 보았다. 그 보얀 얼굴이 꿈꾸는 창섭의 눈에 아름답게 보였다.

 

원원이 그가 화라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었다. 도리어 그 자유자재한 쾌활한 담소를 좋아도 하였었다. 그 가무러지는 듯한 실눈과 새빨간 입술을 미상불 어여쁘게 보았었다. 그러나 정애에게 심신이 쏠린 그이라 화라의 그런 미점(美點)이 그에게 매력을 부릴 어느 겨를이 없었을 따름이다.

 

창섭은 놀라 몸을 소스라쳤다.

 

(정애가 같이 오지나 않았는가?)

 

“단잠을 깨시게 해서 매우 미안합니다.”

 

하고 싱글벙글 웃는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내가 여북해서 웃겠니, 하는 빛이 있었다.

 

창섭은 무안해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낮잠을 그렇게 주무세요? 아무리 봄말이 고단하다기로서니.”

 

화라는 의미있게 또한번 웃었다. 그속에는 분명히 빈정되는 가락이 있었건만 창섭은 그의 기색을 살피지도 않았고 하는 말에 주의도 하지 않았다. (정애가 같이 왔는가, 오늘 저녁 남산공원에서 만나자고 하였으니 시방부터 올 리가 없는데……)

 

창섭은 제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애씨하고 같이 오셨습니까?”

 

창섭은 부지불각(不知不覺)에 불쑥 이런 말을 물었다. 묻고 나서 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에 더욱 변한 것은 화라의 얼굴빛이었다. 그 얼굴에는 마치 남에게 더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분노와 살기가 서렸다.

 

“정애가 오고 아니 온 것을 내가 어찌……”

 

급히 말을 변한다. 그러나 날카로운 어조로

 

“정애는 오지 않았어요. 저 혼자만 왔습니다…… 그런데 정애를 왜 찾으서요?”

 

하는 그 입술은 경련적으로 떨리었다.

 

화라의 얼굴에 이런 변화가 생긴 줄도 모르고 창섭은 제 부끄러운 생각만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변명하였다.

 

“아니 늘 같이 다니셨으니 혹 같이 오셨나 하고.”

 

“네에, 그러시겠지요.”

 

하고 입을 삐죽인다. 삽시간에 화라의 얼굴빛은 또 달라졌다. 아까의 살기와 분노가 사라진 대신에 쓸쓸한 비웃음이 다시 자리를 잡고 말았다.

 

(어데 시방 시작된 일이기에 내가 이렇게 화증을 낸단 말이냐. 참 우스운 일도 있다.)

 

그 얼굴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째 정애만 사랑하십니까, 저도 좀 사랑해 주십시오.”

 

화라는 눈을 치고 웃는다.

 

창섭은 가슴이 뜨끔하였으되 일부러 쾌할한체 고개를 번쩍 들며

 

“원 별말씀도 다 하십니다그려. 무슨 정애씨만 사랑할 리가 있습니까?”

 

하고 웃음으로 엄벙하였다.

 

“그러면 저도 정애와 같이 사랑하신단 말씀이오?”

 

“그야 물론이지요.”

 

창섭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으되, 내심(內心)엔 거짓말한 것이 불쾌하였다.

 

“참말일까요?”

 

하고 재차 묻는 화라의 안색은 다시금 변하였다. 이제 온얼굴이 불이 붙는 듯, 번쩍 빛나는 듯 하였다. 그리고 열기 있게 창섭을 바라보는 눈은 핏발이 선 듯하였다.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 줄 이 계집애가 아는구나.) 창섭은 생각했다. (그래 시방 나를 놀리는 모양이군. 그런데 인제 몇점이나 됐을까? 거진거진 저녁때가 되었나?)

 

저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제 문득 터지는 듯한 상대자의 너털웃음을 듣고 깜짝놀랐다.

 

“내가 미쳤나. 왜 사랑타령을 하고 앉았어. 창섭씨가 무슨 내 애인도 아닌데……”

 

화라는 스스로 빈정대는 듯이 이런 말을 하며 웃는다.

 

저편의 기색이 어떻게 변화하는 것을 도무지 상환치 않는 창섭은 그 웃는 것만 기뻤다. 그의 입은 마칠 사이 없이 벙글벙글 행복된 웃음이 넘칠 뿐이었다.

 

창섭의 벙글거리는 양을 바라본 화라는 새무룩하게 입을 닫는다. 그 표정은 저편을 해치려다 도리어 이익을 준 사람 모양으로 애닯음과 뉘우침을 나타내고 있었다.

 

“저어 선생님, 어젯밤 아모 데도 나가시지 않았었습니까?”

 

조금 있다가 화라가 또 침묵을 깨뜨렸다. 창섭의 얼굴에 박은 날카로운 시선을 옮기지 않으며.

 

“어젯밤 말입니까? 마침 동경 가는 친구의 송별회가 있어서 거기 갔다가 늦게야 돌아왔습니다.”

 

창섭은 무슨 변명이나 하듯이 바른 대로 외어버렸다.

 

“네 그렇습니까?”

 

하고 인제야 알겠구나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제물에 어깨를 으쓱으쓱한다.

 

제 속에서 치받쳐 오르는 무슨 발작을 참느라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서며 많은 실례를 하였다는 말을 한체만체 얼른 미닫이를 열고 나간다.

 

막 대문을 돌아설 화라는 북받치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건만 창섭은 미닫이를 열고

 

“아직도 오정(午正)밖에 되지 않았네.”

 

4

정오밖에 아니되었던 시간이 어느덧 오후 아홉점에 가까워간다.

 

(어째 이때껏 오지를 않나? 약속한 시간이 지난 지가 오랜데……) 창섭은 남산공원의 음악당 -음악당이라고는 하지마는 여기서 음악을 하는 것은 한번 보도 듣도 못하였다- 곁으로 이리저리 거닐며 초조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마디고 마딘 시간을 보내다 못하여 다섯점이 채 못되어서 집을 뛰어 나왔었다. 만일 길가는 사람들이 주의해 보았던들 그의 걸음걸이는 하릴없이 춤추는 것 같았으리라. 그에게는 남산에 가는 것이 곧 행복의 모뿌리에 오르는 일이었다.

 

게을한 때의 나래가 나느니보다 기어감을 따라 시가를 점치는 전등도 웃음을 건네는 듯하였다. 우수수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도 풍류를 아뢰는 듯하였다.

 

그러나 애마르던 정각이 지나고 이제나 오나 이제나 오나 하는 사이에 시간이 얼른 얼른 날아감을 따라 갖은 염려가 그의 머리에 물끓듯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하인이 대문간을 쓸 적에 그 편지를 무슨 헌 휴지쪽만 여겨서 쓰레기통에 쓸어넣지나 않았나? 이 티미한 하인이 그것을 불쑥 정애의 모친에게나 부친에게 전하지나 않았나? 과년(瓜年)의 딸을 둔 부모의 마음은 염려가 많을지니 그것을 떼어보지나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매 창섭의 등에 찬소름이 끼치는 듯하였다.

 

무서운 친권(親權)을 부릴 대로 부리며 탄식도 하고 책망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울고 쓰러진 정애의 애처로운 모양이 보였다.

 

(그래도 혈마 그럴 리야 있을라구.)

 

창섭은 스스로 제 상상을 부정하였다. 그 상상을 믿음에는 그는 너무도 행복의 기대에 발버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도 제 상상의 그릇됨을 증명하려 하였다.

 

(아모리 부모란들 남의 편지를 함부로 떼어 볼라구.)

 

그러나 이것만의 이유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또 그 겉봉에 발신인으론 영숙의 이름을 썼으니 누가 보더라도 정애와 같은 동성의 편지인 줄 알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으리라.)

 

이렇게 주워대고 보니 적이 마음은 놓이건만 그러면 아니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끄럼 많고 망설임 많은 처녀의 마음이 그의 발길을 멈춤인가? 차섭은 홀로 싱긋 웃었다. 아니 그런 까닭도 아닐 것 같다.

 

편지를 하기는 이 편에서 먼저 하였다 할지라도 대담스럽게 남산공원에서 만나자고 먼저 창하긴 저편이었다. 남자 아닌 여자로 처녀로 그런 대담한 청을 할 지경이면 그 연애도 여간 뜨거운 게 아니리라. 백열된 연애의 불꽃에야 수기(羞氣)가 아니 탈 수 없을 듯 싶었다.

 

창섭은 정애가 자기에게 가는 최초의 편지 -이후로는 여러 백, 천번 올것이다-를 쓸 때의 고동하던 가슴과 또 그날 저녁 자기를 기다리던 마음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날 발을 헛되이 애를 쓰고 밤바람을 쐰 까닭에 병이 난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올 마음은 간절하건마는 오지를 못하는가?

 

설령 정애야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려고 애를 쓰건마는 딸의 몸을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이 아끼는 부모가 들어서 어디 무엇하러 가느냐고 미주알고주알 캐면서 달래고 말림인가 하였다.

 

그러나 꼭 정애를 만나리라 불덩이같은 믿음이 이 모든 불길한 이유를 사르고 녹여버렸다. 그의 눈은 또다시 사람의 올라오는 길목을 바라보았건만 그인 듯한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반 남아 서(西)로 기울어진 달은 창섭의 외로운 그림자를 땅바닥에 길게 누이며 밤은 자꾸자꾸 깊어간다.

 

5

그날 밤을 거기서 거의 밝히었건만 끝끝내 정애는 오지 않았다.

 

그 이튿날 해도 저물래 행여 집으로 찾아올까 하는 그윽한 희망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루 지나 이틀 지나 사흘, 나흘, 닷새를 지냈으되 실약(失約)에 대한 이렇단 저렇단 연유를 들을 수 없었다.

 

영숙이가 학교 돌아오면 무슨 소식을 전해줄까보아 기색을 살피기도 하고 또는 그런 말을 옮길 적당한 기회를 일부러 만들어도 봤건만 영숙은 딴청만 부렸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을 썩이다 못한 창섭은 제 편에서 영숙에게 정애의 학교 다니고 아니 다님을 살짜기 물렀건만 정애가 여일령하게 등교한다는 간단한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창섭은 남산공원에서 하던 의심을 다시 한번 되풀이해보았다.

 

학교에 다닌 것을 보면 병이 났다손 치더라도 이미 쾌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처녀의 조심과 부그럼 탓이라 할까. 아무리 정애를 어리고 깨끗하게 생각하더라도 동이 닿지 않는 수작이니, 사랑을 허(許)하고 밀회소(密會所)까지 지정한 여자에게 그렇듯이 지나치게 부끄럼과 조심이 있을 수 있으랴.

 

그는 자기한테 온 편지가 정애가 한 것이 아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애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튼튼히 믿는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 줄 믿는다.

 

남성에게 공통인 자존심과 자만심이 그에게도 없지 않았다. 외모로든지 재화(才華)로든지 남에게 우월감을 가진 그는 그런 마음이 도리어 많고 장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리라.

 

정애의 편지를 받을 때에도 (그러면 그렇지!)하는 마음이 그의 속 어디엔지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남은 것은 부모에게 들키지나 않았나 하는 염려이로되 이 또한 박약한 이유이니 만일 부모의 엄중한 감시 밑에 대문밖 출입을 못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우편으로든지 또는 영숙을 통하든지 제 소식을 알려줄 기회가 방편은 얼마라도 있을 듯 싶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창섭이 자신도 그 후 한달을 지나고 두 달을 지났건만 우편을 통하거나 또는 영숙을 통하거나 그의 근황(近況)을 묻지도 않고 저의 정열을 하소연하지도 않았다.

 

이 이상한 수수께끼를 푸느라고 정신도 잃었거니와 한번 꺾인 용기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음이며 또 남성된 사람으로도 용서치 못할 일이었다.

 

날이 감을 따라 회박은 해졌으되 그는 의연히 정애로부터 소식이 이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따스한 바람에 더운 김이 섞이기 시작한 어느날 밤이었다.

 

창섭은 며칠 밤의 못잔 잠의 보충을 하느라고 저녁먹던 맡에 이불을 쓰고 누웠는데 한껏 고단한 몸이 흐릿하게 까라지다가도 다시금 정신이 쇄락해지고 맑아지고 해서 깊은 잠이 들지를 않았다. 몸을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는 사이에 밤은 아마 열점 가까이 되었으리라.

 

이때 저 있는 방에서 대문으로 통한 조그마한 중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가만가만히 제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창섭이 저의 착각이 아닌가 하고 더욱 귀를 기울일 사이에 벌써 그 방 뒷문을 두들기며 “김선생님 계세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

 

창섭은 놀란 듯이 이불을 걷어치고 일어앉을 때 문밖에서 “김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소리가 또 난다.

 

이 순간에 정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종의 전율이 되어 그의 몸에 끼쳤다. 그는 조심조심 쌍바라지를 열었다. 문밖에는 웬 나이가 열너덧 되는 아이가 서 있었다.

 

“김선생님이십니까? 저어 김창섭씨라는…………”

 

창섭의 기색을 살피며 그 아이는 미심한 듯이 또 한번 따진다.

 

“왜 그래?”

 

“김선생님이십니까?”

 

“그렇다.”

 

그 아이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허리를 굽혀 무엇을 집어든다. 그것은 조그마한 사기화분에 불그스름한 꽃방울이 조롱조롱 맺힌 월계화 한 포기를 심은 것이었다.

 

창섭은 어리둥절 그애의 하는 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애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들어 말없이 창섭을 준다.

 

“이것은 누구한테 오는 것이냐?”

 

창섭은 화분에 손을 내밀며 물었다.

 

그 애는 그 말엔 아무 대답도 않고 손을 늘여 뒤꽁무니에서 편지 한 장을 내준다. 그러자 마자 「이것을 누가 보내더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그 애는 쏜살같이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아이의 달아나던 뒤꼴을 보던 의아해 찬 시선이 제 손에 든 편지에 돌아왔을 제 온몸을 뒤흔드는 기쁨이 거기 있었다.

 

앞에는 간단히 「김선생님 앞」이라 쓰고 뒤에는 부친이의 이름이 없었으되 한번 그 연분홍 봉투를 다시 볼제 묻지 않아도 정애의 정찰(情札)인 줄 깨달았다. 너무도 돈담무심하다 하여 정애를 얼마큼 미흡하게 생각하던 감정은 멀고먼 옛날 꿈속에서 생각한 것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정애가 가만 있을리 있나? 과연 그는 나를 사라하였군. 수줍게 뜨겝게 사랑하였군! 밤을 타서 나의 애졸이는 마음을 위로하려고 이 꽃을 보낸 것 이로다! 불가피의 사정으로 못 오는 저를 대신하여 이 꽃을 보낸 것이로다!)

 

그는 눈물이 핑 돌이만큼 감격하였다. 그렇다. 서양 소설에나 있을 법한 고요한 밤에 남몰래 꽃을 보내는 이 시적(詩的) 행위에 그는 한껏 감격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편지도 보기 전에 그 화분을 안는 시늉을 하며 꽃에다 입술을 대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 눈물이 걸씬거리는 눈엔 웃음이 떠돌았다. 애인이 보낸 꽃에 키스한제 싯적 행위가 더할 수 없이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그는 올래야 올 수 없는 무슨 싯적 사정을 상상하면서 그 겉봉을 뜯었다. 그러나 그 편지의 사연은 그야말로 천만의외(千萬意外)였다.

 

선생님의 존안(尊顔)을 못 뵈온 지 어느덧 두 달이 가까웠읍니다. 그 사이 선생님 기체후일향만강(氣滯候一向萬康) 하셨는지요. 저는 그동안 졸업시험인지 무엇인지 치르느라 죽을 애를 썼습니다. 그 후에는 여러 가지 뒤숭숭한 사정이 있사와 오뇌(懊惱)와 번민으로 그날그날을 보내느라고 선생님을 가 뵈올 틈도 없었습니다그려. 그런데 저는 내일 식전꼭두로 어데를 좀 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 일주일 걸릴 것도 같사오나 어쩌면 여달포가 될는지도 모를일이 외다. 오늘 저녁으로 꼭 선생님을 한번 뵈옵고 싶은 마음은 불같습니다마는 벌써 아홉점이 지났으니 안에서 주무시기도 쉬울 것이고 처녀의 몸으로 밤 늦게 선생만 찾아뵈옵는 것도 어째 무얼한 듯 싶어서 그만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선생님! 한동안 가르침을 듣자올 수 없게 되지 않아요? 이것이 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섭섭하였습니다. 마치 무엇을 잃은 것 같애요. 제 마음 탓인지는 모르나 선생님께서도 혹 어째 아니 오나 하고 기다리며 궁금해 하실 듯 하와 생각다 못한 저는 외로운 객창(客窓)에 조그마한 위로나 될까 하고 이 꽃을 보내나이다. 저는 빛깔이 아름답고 송이가 틈스러운 이 꽃을 사랑합니다. 선생님도 행여나 사랑해 주실는지요? 총총히 두어 자로 줄이오니 못 뵈옵는 동안 내내 안녕하세요! 네!

 

화라는 올림

 

편지 보기를 마친 창섭은 얼 없이 바람벽을 바라보며 (화라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정애하고 남산공원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날의 낮에 다녀간 후로는 화라도 발을 끊고 오지 않았었다.

 

제 4 장

1

영숙의 집에서는 조석(朝夕)때면 전가족이 모두 안방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항례(恒例)였다. -전가족이라 하여도 행랑 사람 겸 드나하인 겸으로 있는 할멈의 내외를 빼고 보면 영숙의 양친과 영숙이와 창섭이 네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이 네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상(床)은 단 둘뿐이니, 창섭은 삼촌과 겸상이었고 영숙은 어머니와 겸상이었다.

 

이렇듯이 단촐하고 따뜻한 가족이건만 평상시엔 피차에 별로 교섭이 없었다.

 

부친은 어디인지 노상 출입을 하고, 모친은 안방에서 바느질을 하든지 담배를 태우든지 한숨을 쉬든지 하고, 영숙은 학교에 가든지 건넌방에서 공부를 하든지 하고, 창섭은 아랫방에서 누우락앉으락 책을 보든지 몽상을 하든지 하였다.

 

제각기 저대로 흩어졌던 그들이 밥때에야 한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 얼굴도 보고 담소도 하는 법이었다.

 

관립(官立) 일어학교의 최초의 출신으로 일본 공사관서기도 지내고 어전역관(御殿譯官)도 지낸 영숙의 부친은 이미 예순이 다된 노인이었다.

 

마흔이 넘어서 아내를 잃은 그는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연하(年下)인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었다.

 

전실(前室)에는 소생(所生)이 없고 영숙은 후처의 몸에서 난 외동딸이었다.

 

그도 한창 서슬이 푸를 때엔 첩을 셋씩 넷씩 두고 굉장하게 거들거렸었다. 그 허연멀끔한 얼굴빛과 노인답지 않게 시꺼먼 눈썹에 시방도 오히려 젊던 날의 풍도(風度)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일어(日語)로 입신(立身)을 하였으되 어쩐지 일본 사람을 싫하였다. 그 탓으로 세상이 변하자 제 수하에 돌던 사람들은 도장관(屠場官)이다, 참여관(參與官)이다, 무엇이다 떵떵하였건만 그 홀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묵은 정치가의 기풍으로 금전을 대수롭게 알지 않은 그는 재산이 -뿌리는 깊지 않아도 끌어만 모았으면 꽤 많았을 재산이 온곳 간 곳 모르게 되었다.

 

형편이 글러감을 눈치빠르게 알아본 첩들은 정분이 좋을 제 지나치게 정해놓은 제 몫을 떼어가지고 선선히 갈라섰다.

 

먹고 입는 것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그가 쌀이 없다 옷이 없다 하는 후처(後妻)의 바가지조차 듣게 되었다.

 

줄행랑집을 팔아 단행랑집을 사고 단행랑집을 또 팔게 되자 더 작은 집엔 들 수 없다 하여 차라리 한 달에 백원돈이나 내가며 큼직한 셋집을 얻기로 하였다.

 

시방 들어 있는 집은 백원짜리 셋집이 또 줄어서 사십원짜리 사글세 집이었다.

 

이렇게 궁해 들어가면서도, 몇 달만 지나면 동양척식회사(拓殖會社)에게 억울하게 빼앗긴 동대문 밖 땅을 되찾는다는 둥 일본서 기계를 들여와 밀양 근처의 개포에 논을 풀면 여러 수천석(石) 추수를 할 수 있다는 둥 어디 큰 금광을 경영한다는 둥 왕청뛰게 큰소리만 하면서 밤잦으로 바쁜 듯이 돌아다녔다.

 

기실 가끔 가다가 큰돈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돈은 며칠 안되어 또 간곳 없이 사라졌었다. 그 돈의 간곳을 영숙의 모친은 어느 계집년의 집이어니 한다. 모친의 말을 빌면 제버릇을 개 못주어 백발을 흩날리면서도 제 손녀뻘이나 되는 계집한테 미쳐 날뛴다는 것이었다.

 

이런 비난을 받아도 그는 조금도 괘념(掛念)치 않는 것 같았다.

 

희끗희끗 센, 자[尺]가 넘는 수염을 쓰다음으며 껄걸 웃고만 있었다. 그 모양은 마치 대장부의 배포를 아녀자가 어찌 알까보냐 하는 것 같았다.

 

과연 그 돈이 간 곳은 계집의 집이 아니었다.

 

큰일을 하는데 사이에 든 사람, 부리는 사람의 여비, 생활비 및 그 외의 이루헤일 수 없는 잔잔한 부비로 말미암아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흐르듯 덩이돈이 흘러내리고 만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 그는 영숙을 미국인이 세운 XX여학교에 넣었다. 그리고 옛날 녹의홍상(綠衣紅裳)의 마음을 쏠리게 하던 그 눈매는 이제 자애가 넘쳐흘렀으되 자녀-자녀라 해야 영숙이 하나뿐이지만- 에게는 절대로 방임주의였다.

 

낡은 개화당의 일인인 그는 시대사조의 변천을 남먼저 알아야 될 줄 안다. 자녀를 제 자유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새로운 사상인 줄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제 몸이 분주도 하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것이 딱 귀찮았음이었다.

 

그럼으로써 썩 긴급한 일이 아니면 일부러 부르는 법이 없다.

 

할 말이 있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하고, 밥상이 막 들어오기 전이나 또 막 끝난 뒤에 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아들이 없는 그는 창섭을 매우 사랑하였다. 성질이 온공(溫恭)하고 영리한 창섭이라 물론 그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지만.

 

「이애, 이것 너두고 써라」하면서 이따금 돈을 이(二)(園)씩, 많을 때는 일(一)O원씩 창섭을 주기도 하였다.

 

창섭이가 막 저녁을 다 먹은 때였다. 삼촌은 숭늉으로 양치를 한두번 하고 나더니 창섭을 보며

 

“너 요사이 무엇을 하니?”

 

하고 다짜고짜로 묻는다.

 

“뭐, 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고 창섭은 고개를 숙여 장판을 내려다보며 대답하였다. 이것은 창섭의 어른을 뫼시고 이야기할 때의 버릇이었다.

 

“그래 놀기가 심심치 않으냐?”

 

“네…….”

 

창섭은 모호하게 어물어물하며 겸연쩍게 해줄 웃었다.

 

“그래 노는 맛이 어떻단 말이야. 설탕맛이냐 소태맛이냐, 응?”

 

하고 삼촌은 껄걸 웃는다.

 

그는 제 자질을 데리고도 이런 우스개를 잘 부쳤었다.

 

창섭은 무어라고 말해야 옳을지 몰라 묵묵히 있었다.

 

“왜 아모 말이 없느냐, 응? 놀기가 설탕맛도 아니고 소태맛도 아니고 심심하게 물맛이냐.”

 

하고 늙인이는 또 한번 크게 웃었다. 그리고 또 머뭇머뭇해하는 것을 보고

 

“너 신문기자 노릇 좀 해볼 터이냐?”

 

라고 인제야 생각난 듯이 정작 제 물을 말을 물었다.

 

“신문기자요?”

 

창섭은 놀란 듯이 재우쳤다.

 

2

신문기자! 창섭이가 속으로 은근히 의망하던 직업이었다.

 

붓 한 자루를 휘둘러 능히 사회를 심판하여 죄 있는 놈을 베고 애매한 이를 두호하며, 세계의 정세를 추축하여 능히 선전(宣戰)도 하고 능히 강화(講和)도 하는 무관제왕(無冠帝王)이라는 존호(尊號)를 가진 신문기자!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 직업이었다.

 

더구나 청섭으로 말하면 동경유학을 반둥건둥하고 서울에 있는 동안 문학서 유를 탐독하였다. 볼수록 그의 문학에 대한 취미는 깊어갔었다. 따라서 그는 시인으로나 문사(文士)로 몸을 세워보려고 하였다.

 

문사와 기자가 그 성질에 있어 아주 다른 것이건만 창섭의 생각에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 같았다.

 

문사는 그만두더라도 훌륭한 기자가 되었으면 그뿐이란 생각도 그에게 없지 않았다.

 

만만장야(漫漫長夜)에 단코를 고는 우리 겨레를 깨움에도 신문의 힘이라야 되리라.

 

황무(荒蕪)한 폐허에 새로운 집을 세움에도 신문의 힘이라야 되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거기 붓을 드는 이들은 모두 인격이 고결(高潔)도 하려니와 의분의 피가 끓는 지사(志士)들이어니 한다. 자기가 그들과 같이 있게 되면, 그들의 하나가 되면 이에 더한 영화(榮華) 어디 있으랴!

 

삼촌은 말을 이었다.

 

“응, 신문기자 말이다. 오늘 예전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 있던 유택근(柳澤根)이를 만났는데 그의 말이, 반도일보(半島日報)가 일년동안이나 발행정지를 당하였다가 이번에 해금(解禁)이 되었는데 자기가 거기 편집국장이라더라. 내일 모레로 신문은 시작해야 되겠고 적당한 기자들은 들어서지 않고 해서 걱정이라기에 내가 네 말을 했다. 그래 너 거기 다녀볼 마음이 있니?”

 

“네 될 수 있는 대로 다녀보았으면 좋겠읍니다마는 제가 신문기자 노릇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창섭은 눈을 번쩍이며 이런 말을 하였다.

 

“반편이 같으니, 할 자격이 뭐냐? 사내로 생겨나서 이 세상에 못할 일이 다 뭐람. 내가 석 달 일어 공부를 해 가지고 어전역관 노릇도 하였는데.”

 

하고 지난날을 추억하는 듯이 한번 수염을 쓰다듬고,

 

“세상 일이란 생각할 때는 어려워도 다 닥쳐보면 쉬우니라. 다녀볼 생각이 있거든 내일 그 사람들을 한번 찾아보아라.”

 

창섭은 이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분의 댁이 어데인가요?”

 

“응, 그 집이 어데든가 잘 생각이 안 난다마는 그는 낮에는 노상 신문사에 있다더라.”

 

“그 신문사가 어데인가요?”

 

“왜 저 장교(長嬌) 근처에 있는 그 신문사를 네가 모르니? 그러면 광충교(廣沖嬌)는 아나? 알아? 광충교에서 왼손편 개천으로 들어서 남쪽 천변(川邊)으로 얼마가지 않아 「반도일보사」란 큰 간판이 붙었느니라.”

 

“네 그렇습니까.”

 

“그러면 내가 내일 명함을 줄 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찾아가서 한번 수작을 해보아라.”

 

“네”

 

삼촌 앞을 떠나오는 창섭은 기쁜 기대에 가슴이 뛰었다.

 

3

그 이튿날 열한점즘 되어 삼촌의 명함을 받아가지고 나선 창섭은 어렵지 않게 그 신문사를 찾아내었다.

 

과연 삼촌의 말마따나 한 간이 넘을 듯한 큼직한 간판에 문짝 같은 굳은 글자로 「반도일보사(半島日報社)」라고 씌어 있다. 이 엄청난 간판에 창섭은 일종의 위협을 느꼈으되 여기저기 칠먹이가 떨어진 허술한 목제(木製)이층은 굉장한 건축물을 상상한 그에게 조금 실망도 주었다.

 

문앞에 딱 다다르매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선뜻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앞에 어물어물하고 서 있는 사이에 사람이 몇이나 그 문으로 드나들고 하였다.

 

사람이 올 적마다 저 섰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흠칫하고 몸을 피하였다.

 

이 모양으로 얼마를 망설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는 섰다. 문을 연즉 거기가 곧 방이었다. 장판방은 아니라도 사방으로 판벽(板璧)이 둘러 있고 여기저기 테이블이 서너 개 놓이고 사람이 육(六), 칠(七)인이나 웅긋둥긋이 서고 앉고 하였으니 방이 아니고 무엇이랴.

 

창섭은 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느 사람을 붙잡고 말을 물어야 옳을지 알 수 없었다.

 

또 한동안 어줍게 서 있노라니 그 중에 큼짛난 검은 네모테 안경을 쓰고 배가 터질 듯이 뚱뚱한 사람 하나가 힐끗 창섭을 바라보더니 건방지게 반말로,

 

“누구를 찾아?”

 

라고 묻는다.

 

옥양목 두루마기에 캡을 쓴 창섭의 모양이 초라도 했고 겸연쩍게 기웃기웃하는 양이 서툴기도 하였음이리라.

 

창섭은 자존심에 조금 상채기를 입으며,

 

“저어 편집국장 되시는 이를 좀 뵈러 왔습니다.”

 

“댁은 누구요?”

 

하고 이게 다 편집국장을 찾는다 하는 듯이 (창섭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위아래로 훑어본다.

 

“나는 김창섭이란 사람이올시다.”

 

창섭은 불쾌한 생각이 와락 일어나 조금 성낸 소리로 대답하였다.

 

“무슨 일로 왔소?”

 

그 사람은 창섭을 노리다시키 보며 으르듯이 묻는다.

 

창섭은 이 분이 편집국장인가 하였다. 그래서 나는 성을 꿀꺽꿀꺽 참으며,

 

“저어………… 편집국장 되십니까?”

 

이 말에 그는 분명히 당황해하는 빛을 나타내었다. 그래도 여일하게 위엄있는 소리로

 

“그래, 무슨 일로 오셨단 말이요?”

 

창섭은 그 사람이 제가 찾는 이가 아님을 깨닫고 숨을 내쉬며 이것 봐라 하는 듯이 삼촌의 명함을 내주었다.

 

그 뒤에는 창섭의 간단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은 그 뒷곁을 보더니 창섭에게 대한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시방껏 저는 앉고 창섭은 서서 말을 주고받고 하였는데 갑자기 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리 앉으시지요.”

 

라고 은근히 자리를 권한 후 친절한 목소리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하고 제 뒤에 있는 조그만 문을 열고 나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신문 발송이었다.

 

한 이(二), 삼(三)분 기다린 뒤이리라.

 

그 사람이 도로 나와 그 조그마한 문으로 대가리를 내밀며 창섭을 보고

 

“이리 들어오시지요.”

 

한다.

 

그 말대로 그 문을 나서니 왼편으로 그을음이 뒤룽뒤룽한 목제(木製) 공장집이 있고 그 맞은 편에 십여 간이나 될 듯한 조선집 한 채가 있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큰 마루가 있는데 문들은 모두 열려 있었다.

 

창섭은 그 안에 너저분하게 책상과 교의가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곳은 휑뎅그렇게 비었고 한편 구석 이전 안방구석이었던 곳에 커다란 책상을 해놓고 사람 하나가 앉아 있다.

 

저이가 내가 찾는 편집국장인가 하매 창섭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흔들렸다.

 

인도하는 이를 따라 그의 앞에 들어서니 그이는 아까 그 사람과는 아주 반대로 매우 정답게 눈웃음까지 띠며 자리를 권한 후

 

“노형이 김창섭씨 되십니까?”

 

한다. 그이는 한 사십 되어보이는데 바싹 마른 가냘픈 몸집이고 불이 빠르고 입이 합죽한 사람이었다.

 

창섭은 이 친절로 말미암아 아까 받은 불쾌가 일시에 풀리는 듯하였다.

 

“XX씨의 함씨 되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참,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할 말을 저 편에서 먼저 해버림에 창섭은 또 어찌할 줄을 몰라 무밋무밋하며 얼굴을 붉히었다. 이 창섭의 도련님같은 태도가 더욱 그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는 사교에 익은 미소를 눈에 입에 연해연방 띠며 동경유학을 하였느냐, 무슨 학교를 마쳤느냐, 한문을 많이 읽었다지, 문필을 좋아한다지…….여러가지로 물었다. 그리고 맨끝으로

 

“신문에 취미가 계십니까?”

 

하였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좀 얼떨떨하였으되 창섭은

 

“네.”

 

하고 고개를 숙이며 빙그레 하였다.

 

책상 물림의 수줍어함과 어려워함이 만만한 제 사람을 얻으려는 이에게 만족을 주었음이리라.

 

(柳)씨는 흉금을 풀어헤치고 탁 신임하는 어조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신문은 일년 정간(停刊)을 하였다가 다시 발간이 되는 것입니다. 말하지면 계속을 하는 것이로되 모든 것이 초창(草創)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곤란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나가기만 하면 얼마 아니되어 잘도리 줄로 믿습니다. 노형과 같이 순실하신 이와 일을 같이 하게- 만일 허락하신다면- 됨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일로 생각 마시고 내 일같이 힘을 써주십시오. 내월 초하루부터 신문을 발간하겠으니 그믐날부터 출석은 해주셔야겠습니다.”

 

하다가 어조를 사무적으로 고치며

 

“그런데 한 달에 생활비는 -신문사가 극히 가난하니까 최소한의 생활비밖의 지불을 못할 형편입니다.- 얼마나 하면 되겠습니까?”

 

생활비! 삼촌 집에서 밥을 거저 얻어먹는 터이니 내 생활비는 십 원만 있으면 족하리라 하였다. 할 수만 있으면 한푼도 아니 받고라고 이린 위대한 사업에 헌신적 노력을 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유씨는 벌써 그 눈치를 알아채었던지 말을 이어

 

“얼맛동안만 견디면 물론 보수도 상당해지겠지만…….”

 

다른 사람이 들을까 두려워하는 듯 텅빈 그 곳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워,

 

“위선은 극소한도로 한 육(六)O원만 갖다 쓰게 하시오.”

 

(六)O원이나! 창섭은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한동안 입을 벌릴 수도 없었다.

 

창섭의 좋아하는 꼴을 번연히 알아보았건만 유씨는 더욱 보수가 적음을 괴탄(愧歎)하는 듯이

 

“신문사가 여간 가난해야지요. 어떻습니까, 그것이면 최소한도의 생활비나 되겠습니까?”

 

하고 아까의 말을 되풀이한다. 창섭은 더할 수 없이 감격하였다. 그래 떨리는 소리로

 

“그것은 너무 많습니다.”

 

유씨도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러면 오실 때 이력서 한 장을 가져오십시오. 형식이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고 그믐날 하루는 호의로 그저 보아주십시오.”

 

일은 벌써 다 되었다. 만일 처음 보는 이 앞에 아니련들 창섭은 득의(得意)와 환희 춤이라도 추었으리라.

 

4

창섭은 반도일보사에 다니게 되었다. 자기가 일찍이 도경하던 직업을 얻게 된 그는 하는 일에 감격적 열심을 가지기 때문에 실연(?)으로 하여 입은 상처조차 아물어 갔었다.

 

그의 하는 일은 대개 번역이었다. 아침 열점에 가면 오후 네시나 다섯시까지 한자리에 꼭 붙어앉아 일본신문의 키리누키와 각 전보통신을 우리말로 옮기기에 눈코뜰 사이가 없었다.

 

그가 번역한 가운데 비교적 긴 것은 일(一)면에, 짧은 것은 이(二)면에 실렸다. 그래도 그는 주로 이(二)면 내근이었다.

 

편집을 맡지 않은 다음에야 향용 외근을 하는 법이언만 그 신문사는 외근보다는 내근에 힘을 썼다. 우선 지면을 채우기에 골몰하였다. 그것은 아직 사람이 째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은 째이지 않았다.

 

(二)면을 맡아보는 사람은 윤창운(尹昌雲)이라고 위아래가 괴인 얼굴이 둥그스름한 사십 남짓한 사람이었다. 그도 황성신문 시대부터 오늘까지 십유여 년을 조고계(操觚界)에 종사한 분이었다. 바닷물에 갈리고 갈린 조각돌이 동글동글한 바둑돌이 되는 것 모양으로 티끌세상에 앓고도 닳은 그는 제 얼굴과 같이 인격도 둥그스름하였다.

 

창섭의 재능을 제일 먼저 인정한 이는 그이였다.

 

아무 경험도 없고 이력도 없는 창섭이가 처음 들어와서 어느 면에 가야 마땅할지 모를 때에 그이가 한두번 번역을 시켜보고 그만 이(二)면으로 끌어갔었다.

 

“창섭인 번역을 매우 잘합니다. 그리고 한문도 유여한가 봅니다. 창섭씨는 이(二)면에 있게 하지요.”

 

창섭이가 일주일쯤 되어 편집회의가 열렸을 제 그이는 이렇게 제의하였다. 창섭은 일변으로 기쁘고 일변으로 고마웠다.

 

그이는 일본신문의 키리누키할 것과 각 통신의 쓸 만 한 것을 골라서 자기가 하기도 하고 창섭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줄 때면 그이는 반드시 빙그레 웃으며

 

“이것 좀 해주시려요?”

 

하였다. 창섭은 거의 감지덕지로 그것을 바다 일시반시 놀지 않고 해내뜨려 한 장이라도 제가 더하려고 애를 썼다.

 

그이는 창섭이가 번역한 것을 받아서 읽어보다가 고칠 데를 고치면서 창섭에게 그 번역을 가르쳐주었다. 그럴 적에도 제 의견 비슷하게

 

“이런 것은 이러는 편이 좋아요.”

 

하였다. 그러므로 창섭은 조금도 감정이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속으로 모르는 자기를 가르쳐주는 그의 호의에 감사했다.

 

그러나 기자 생활이 그에게 만족을 장구히 주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가고 두 달이 지나감에 따라 제 하는 일에 대한 열이 점점 식어짐을 느꼈다.

 

매우 어려우리라 생각하였던 번역이 하고 보니 늘 그 문자가 그 문자이고 그 소리가 그 소리였다. 쓰는 문투가 거의 일정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를 번역하려면 한번 읽어 대의를 짐작하고 두 번 읽어 구절을 해석하고야 세 번째 읽으면서 겨우 우리말로 옮겼다. 그러던 것을 인제는 한번도 안 읽어보고 그냥 첫머리부터 쭉 내리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별로 틀림이 없게 되었다. 나중에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무엇을 쓰는지 모르게 써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조금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철필을 놀릴 뿐이었다. 종이에 잉크칠을 할 뿐이었다. 그는 일종의 기계가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지닌 감격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멋갈도 맛갈도 느끼려야 느낄 수 없었다.

 

아무 취미 없이 날이 맟도록 한 자리에 붙어앉아 일을 하니 싫증이 아니 날 수 없었다. 고통이 아니 될 수 없었다.

 

5

제가 하는 일에 대하여 흥미를 잃기 시작하였을 때, 창섭은 또 같이 있는 이에게 환멸을 느끼기 비롯하였다.

 

제가 일찍이 상상하던 고결한 인격과 해박한 지식과 위대한 사상을 구경도 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평범하고 용렬(庸劣)하였다.

 

거기는 조선 어느 사회나, 아니 인간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추종과 이기와 아세(阿世)와 궤휼(詭譎)과 엉터리와 태깔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괴상한 일은 시대에 앞서야 할 그들이 -앞섰다고 자처하는 그들이- 시대에 뒤져가지고 저먼저 달아나는 시대를 저주하고 비방하고 조소하고 시기하도 개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탓도 탓이리라.

 

그 신문사에서 내로라고 고개짓을 하는 사람은 대개 사십과 오십의 중간의 낫세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일(一)면 논설을 맡아 쓰는 이는 방어(魴魚)토막 같은 굵직한 몸집과 늘 막걸리 기운이 도는 듯한 시뻘건 얼굴을 가진 위인(爲人)인데, 그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고 땅을 다지기나 하려는 듯이 느리고도 힘있게 뚜벅뚜벅 걷는 모양은 청룡도와 적토마(赤兔馬)가 없었기 망정이지 하릴없는 옛날 지나(支那) 삼국시절의 관운장을 생각하게 하였다.

 

기실 그는 관운장이란 별명이 있었다. 젊은 기자들 가운데서 그의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양을 보기만 하면 「이커, 관운장이 출진(出陣)하시는구마」하고 옆에 있는 동료와 눈을 맞추며 웃는 법이었다. 그러면, 그는 정말 관운장 격으로 호탕스럽게 웃으며 「나더러 관운장이라구, 허허」하다가 그 말을 한 이가 무색해할까 봐 「참 웬일인지 모두들 나를 관운장이라고 그래. 제국(帝國)신문사에 있을 적에도 그런 별명을 들었더니만, 허허」하고는 또 한번 쾌할하게 웃는 법이었다. 그리고 관운장이란 별명에 대하여 자기도 마족하다는 뜻을 말하고 삼국시절에 못난 일, 외양(外樣)만 갖고 그런 웅재대략(雄才大略)이 없어 그야말로 양질호피(羊質虎皮)인 일, 만일 자기가 그때의 관운장이런들 결코 호녀견자(胡女見者)란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손권(孫權)의 청혼을 물리치지 않았을 것이고, 물리치지만 않았더면 후고(後顧)의 우(憂)가 없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중원(中原)을 권석(捲席)하였을 걸 갖다가…… 하면서 수다를 늘어놓는 법이었다.

 

그는 한문의 대방가(大方家)로 자임(自任)할뿐더러 신지식에 들어서도 그리 남에게 떨어지지 않거니 생각한다고, 그 이유는 자기가 논설을 맡아 쓰는 까닭이며 몇 해 전에 벌써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독한 까닭이다.

 

세계의 대세를 통찰하기는커녕 열국의 이름도 잘몰랐으되 걸핏하면 「태서제국(泰西諸國)이……」하면서 팔목을 부르걷고 천하사(天下事)를 논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의 쓰는 논설은 조금 국제관계라든가 실사회(實社會)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훈도적(訓導的) 청년 수양론이 아니면 묵고 썩은 센티멘털한 우국개세(憂國慨世)의 문자들이었다. 몇 십년 전의 지사(志士)들이 붓이 닳도록 쓰고 또 쓴 그나마 양계초(梁啓超)를 본뜬 「소년조선론」이라든지 「時勢造英雄耶아 英雄造時勢耶」란 곰팡내 나는 제목을 끄적거리고 어깨바람을 내었다. 그리고 글이란 순 한문으로 써야 웅경(雄勁)도 하고 운치도 있는데

 

「요사이는 언문을 섞으니 어데 힘이 있어야……」하고 한탄하였다.

 

사회부장 -곧 삼(三)면을 편집하는 이는 또한 그 연갑세의 사람이니 주독으로 해서 여기저기 불긋불긋한 점이 있는 얼굴, 툭 불거진 핏발이 선 흐리멍덩한 눈자위, 어홍한 가슴, 엉거주춤한 허리, 얼른 보면 중병을 치른 사람 같았다. 그는 성근(誠勤)하기 짝이 없었다. 사(社)에만 들어오면 제 책상에 머리를 틀어박고 조선에서 나오는 일자(日字)신문을 키리누키하는 데 정신을 잃었다. 그는 일본 말을 도무지 몰랐다. 아주 쉬운 회화조차 못했다. 혹 전화를 받다가 저편에서 일본말을 하면 질겁을 하고 물러서며 다른 기자들에게 받아달랄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번역의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다만 이 능란한 번역이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오역(誤譯)일 때가 가끔 있었다. 「과감이가 일생을 비탄하얏다.」라고, 우리글로 옮겨 큰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그는 「과감」을 인명(人名)으로 알고 깎듯이 한문글자까지 단 것이다. 그의 일어에 대한 지식은 「?」는 「는」, 「?」는 「가」, 「?」는 「에가」,「?」는 「다」……. 등의 토(吐)를 외울 뿐이었다. 다행한 일은 이 토만 알고 보면 대개 한문글자를 보고 뜻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자를 부드러운 우리말로 고질 줄을 조금도 몰랐다. 쓰이기는 언문으로 씌었으되 한문 모르는 이는 알아보는 재주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한문에 대한 온축(蘊蓄)이 깊은 것도 아니니, 그 무식에 가까운 제목 붙임이 넉넉히 그것을 증명하였다.

 

그도 「일(一)O유여 년 전부터」 황성신문사에 종사한 「조고계(操觚界)의 노장」이다. 술잔이나 취하면 꼬지꼬지 마른 노란 팔뚝을 내두르며

 

“십 유여 년을 이 노릇으로 입에 풀칠을 하얐습니다. 그때는 단 셋이 신문 한 장을 해내었지요…….”

 

하고 일쑤 제 역사를 꺼내었다.

 

그리고 가장 안된 일은 외근을 안중(眼中)에 두지 않는 일이리라. 세상없이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자기가 출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외근기자의 얻어오는 기사조차 홀대하였다. 자기의 키리누키한 것이 차고 남아야만 마지못해서 넣어주었다. 그 신문사엔 삼(三)면에 딸린 외근이 단지 둘뿐이고 그들의 활동과 필력(筆力)이 그리 남에게 뛰어나지도 않아 도저히 삼(三)면 일(一)(二)단을 채우는 수가 없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때의 반도일보를 조금 주의해 보는 이면 삼(三)면 기사의 거의 전부가, 삼(三), 사(四)일 전 또는 오(五), 육(六)일 전에 벌써 다른 신문에 났던 구문(舊聞)임을 알 수 있으리라. 또 조금 깊이 신문에 주의하는 이면, 삼(三), 사(四)일은 새려 한 달 전, 두 달 전에 일본의 동경과 대판 등지에서 발행하는 일자신문에 났던 것이 비위좋게 반도일보에 실린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그것은 남의 신문에 난 것을 되풀이한다고 비난을 들은 삼(三)면 주임이 조금 전 것보다 오래 전 것이 도리어 새로운, 거의 특별기사(特別記事)같이 보인다는 놀랄 만한 발견을 한 까닭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 재주와 구속 없이 그 신문의 채를 잡았다.

 

말이 편집국장이지 유씨는 편집엔 아무 관계 없었다.

 

그 신문은 어떤 단체에서 기관지로 인가를 맡아내어 온 것이나 금력(金力)이 없어 해갈 수 없게 되자 기사를 함부로 과격하게 써서 압수에 압수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발행정지를 당한 것이었다. 이번에 해금(解禁)이 되자 조고계에 성망이 놓은 유씨를 끌어들여 편집상 경영상 전책을 맡기었다.

 

바꿔 말하면, 유씨가 무슨 노릇을 하든지 돈을 끌어대어 해갈대로 해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씨는 아침 저녁으로 어느 귀족 어느 부호(富豪)를 찾아다니며 신문을 사라고 조르기도 하고 하다못하면 사(社)의 명의로 돈을 꾸어달라고 비대발괄하는 판이라 편집을 돌볼 어느 겨를이 없었다.

 

6

젊은 기자 중의 몇몇은 거의 부랑자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대개 서울서 중학교를 치르고 일본에 건너가서 이 학교 덥쩍, 저 학교 덥쩍 하다가 졸업은 한 군데도 못하고 돌아왔든지, 또는 구경차로 한 이(二), 삼(三)주일 동경 일판을 헤매고 왔을뿐이로되 수삼 년을 유학이나 하고 온 척하는 작자들로 일(一)년 혹은 이(二)년 신문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기자임을 막대한 영광인 줄 생각한다.

 

제 스스로는 자기가 사회의 목탁(木鐸), 무관(無冠)의 제왕과는 얼토당토 않은 인물이며 또 그리 되려고 조금도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남들은 으레 자기네들을 그렇게 우러러보는 줄 믿는다. 더구나 여자, 그 중에도 기생이 그렇게 아는 줄 믿는다. 그렇게 알아야만 자기네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그렇게 믿으려 한다. 상식이 없어 그것을 모르면 행위로 설명으로 알도록 하는 것이 자기네들의 책임이고 의무라고 까지 생각한다.

 

그래 그들은 첫째로 극장에 대한 기자의 특권을 이용한다. 잘 가지 않으련면 억지로라도 몰고 가서 자기의 표 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인다. 또한 기생의 온습회(溫習會)나 연극회 같은 것이 있으면 청(請)치도 않는데 분장실까지 뛰어들어가서 잘잘못을 비평도 하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기도 한다. 그러고 그런 회(會) 있는 것을 신원고를 쓰기도 한다. 심하면 제 좋아하는 기생의 미워하는 사내와 동무의 흠절을 「친리복(千里服)」이란 허섭쓰레기 난에 캐기도 하고 또는 정면으로 그 기생을 추기도 하였다.

 

「……XX골 XX는 인물로 절묘하거니와 가무도 능란하며 또 손님 대접을 매우 친절히 한다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어느 기사보다도 소중하고 긴요하였다.

 

이 짓을 일쑤 잘하는 놈광이는 홍군수(洪君秀)와 한세환(韓世煥)이란 두 사람이었다.

 

군수는 키가 설멍하게 큰데다가 얼굴이 허여멀겋고 떡 벌어진 어깨판, 길고 곧은 다리의 임자이니 세비로나 입고 금테안경이나 버티고 단장이나 두르고 나서면 그 풍채의 훌륭하기가 바로 무슨 회사의 사장이나 취체역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훌륭한 체격의 어디엔지 꼭 맺히지 못하고 픽서글 헤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는 싱겁다 할 만큼 호인물(好人物)이었다. 결코 남을 비꼬든지 해치지 않았다. 혹 남이 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여도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려들었다. 그는 일하나 말을 하나 얼렁뚱땅이었다. 그는 총독부 출입기자인데 아침에 들어오면 모자를 쓴 채로 단장을 휘휘 내두르며 편집실을 왔다갔다 하다가 물체 물탄 듯한 웃음을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르게 씽긋 웃으며 「인제 또 가보아야지」하며 휙 나가버린다.

 

두어 시간 쯤 해서 들어와서는 한두 가지 발포(發布)한 것을 이(二)면주임 윤창운(尹昌雲)을 주며 「어데 자료가 있어야지요, 빌어먹을 놈들, 겨우 이게 발포랍니다.」하고 머리를 긁적긁적하고는 제 책상에 돌아앉는다.

 

그의 책상은 바로 전화통 밑에 있었는데 그는 전화 받기와 원고 쓰기에 주체를 못하는 듯이 바빠해 한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썼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의 쓴 기사는 좀처럼 신문에 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연해연방 오는 전화를 받았으되 그것은 사(社)의 일이 아니고 저의 일이었다. 그래도 사의 일이나 되는 듯이 분주히 서두르며 또 저의 총망한 것을 전화 가운데에서 여러번 탄식하였다.

 

이따금 매우 피로한 듯이 만년필을 동냉이치고 휙 나간다. 한번 나가면 예사로 삼십분이나 한 시간이나 되어 들어온다. 그럴 때 그를 주의하는 이면 그 쾌활한 목소리를 영업부에서 들을 수 있고 또 뒤뜰을 서성서성하는 그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럭저럭 편집이 끝나면 기사를 쓰려다가 잘못된 것을 하증이나 내는 듯이 그때까지 열심히 끄적이던 원고를 박박 찢어버리고 휙 뛰어나가 세수를 하고 와서 시방 곧 나갈 듯이 모자를 쓰고 단장을 팔에 걸고 교의에 걸터앉아서 이야기를 철철댄다. 그중에는 기생 이야기가 그 태반을 점령하였다. 군순히 오입하는 설명도 하였다. 누구 누구 웃음파는 이의 역사도 늘어놓았다. 그리고 제 염복(艶福)과 식복(食福)을 자랑하였다. 요리점에 갔던 일, 등선각(登仙閣)에 오른 일…….

 

그의 주위에는 여러 동료들이 모여 부러워하면서도 경멸해하는 눈으로 그의 입술을 바라보는 법이었다.

 

그는 사(社)에 들어선 이런 화류장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화류장에 들면 사(社)에 대한 불평 불만, 자기의 개혁 안과 포부를 거의 비분(悲憤)한 어조로 떠들었다.

 

세환(世煥)은 군수(郡秀)와 정반대로 키도 짤달막하고 몸피도 가냘펐다. 얼굴빛까지 가무잡잡하되 새까만 눈썹과 오뚝한 코며 얼굴의 짜임짜임이 제 체격과 어울리게 매우 조직적이었다. 대가리를 까불까불 하며 궁둥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다니는 모양은 일본사람으로 속게 되었다.

 

그는 경찰서를 돌아다니는 기자인데 군수와 달라 자료를 다부지게 수집도 하고 기사도 곧잘 만들었으되, 제 쓴 것이 실리지 않는다든지 귀에 거슬린 말을 듣는다든지 하면, 온종일 입을 꼭 다물고 쌔근쌔근 하다가 기사 한 줄 안쓰고 휙 뛰어나간다.

 

그도 신이 나면 화류장 이야기를 잘 하였으되 군수와 같이 철철대지 않고, 남을 비웃고 저를 비웃는 어조로 깐죽깐죽하게 말을 하였다.

 

그와 군수는 부부와 질배 없는 단짝이었다. 사(社)만 파하면 어디를 가도 꼭 같이 다녔다. 세환이가 군수의 어깨에 찰랑찰랑 하며 같이 가는 모양은 마치 미국 희국 활동사진에 잘 나오는 「함」과 「지내」와 같은 골계미(滑稽味)가 있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돌려세워 놓고 흉을 보고, 맞대해서도 「싱거운 자식」「패리한 자식」하고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둘의 사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 두사람 외에 일(一)면주임 노릇을 하는 강찬명(姜讚明)이란 이가 있었는데 그도 그런 방면에 들어서는 남의 뒤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호리호리한 몸피, 갸름하고 해사한 얼굴의 임자로, 얼른 보면 나이가 퍽 어려 보였지만 그 주름이 여러줄 잡힌 이마와 앙상한 뒤꼴이 나이박이 태(態)가 없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서른 여섯이었다. 그는 법관양성소 출신으로 일찍이 변호호사 노릇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그는 한번 잘놀았었다. 제 말이 어느 밤 요리점에 아니 가본 일이 없고 기생첩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한다.

 

그러는 즈음에 무슨 불미한 일이 있었던지 변호사가 떨어지고 오늘날 기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군수가 늘어놓는 말을 들으면 아랫입술을 턱으로 잡아당기며 웃었다. 그 모양은 「흥, 미친 몸, 저 혼자만 놀아본 줄 아나봐 」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화류계에 대한 그 신문사의 권위는 따로 있었다. 그는 기자가 아니고 창섭이가 처음 유씨를 찾아갔던 날에 만난 신문 발송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주운해(朱雲海)이니 일찍이 백만장자의 외동아들이었다.

 

전하는 말을 들으면, 그는 열세 살부터 오입길에 들어서 수십 명의 홈팽이를 거느리고 그야말로 굉장 뻑적지근하게 놀았었다.

 

어느 미인을 꼭 하룻밤 상관하고 돈 십만 냥을 주었다는 일화까지 있다. 그 덕택으로 많은 재산이 알알이 없어지고 집 한 간 남지 않았다. 그는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었다. 거의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어째 이 신문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몇 만금으로 얻은 것으로 노래 마디나 하고 춤깨나 추는 것이었다. 또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뼈골에 사무치게 느꼇음이리라.

 

제 웃머리에 있는 이에게도 무조건으로 허리를 굽실거리며 첨도 잘하고 보비위도 잘하였다. 다만 무신한 탓으로 그 방법이 너무 척칙하고 노골적이었따.

 

웃사람이 담배를 먹을 줒치를 보이면 그는 얼른 제 담배를 빼어 바치고 성냥까지 그어댔다. 여송연 갑과 혹은 비단필을 유씨에게 바치는 것을 기자들에게 한 두 번 들키지 않았다. 이럴 때 세력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사정없이 거절도 하며 선물 주는 것을 구경한 사람에게 대하여 그를 비웃고 흠점을 캐며 모욕이나 당한 듯이 노기 등등 하였건만, 당장 내쫓을 듯이 그의 무자격한 것을 타매(唾罵)하였건만 그는 언제든지 제 지위를 보전 할 수 있었다. 더욱 이상한 일은 광고에 대한 아무 경험도 지식도 없는 그가, 창섭이 들어간지 넉 달 만에 먼저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광고부장이 된 일이었다. 그도 때때로 편집국에 올라와 서 군수 패와 어울려 기생타령을 하였다.

 

7

이 썩은 내, 더러운 내, 곰팡 내, 음탕한 내가 떠도는 분위기를 처음으로 마실 제 창섭은 구역이 날 것 같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의 집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돼지우리에나 빠진 것 같이 놀랐다.

 

(이럴 리가 있나, 이럴 리가 있나) 하며 눈을 닦으면 닦을수록 질퍽거리는 벌레를 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돼지우리야말로 사람의 집인 줄 깨달을 제 그의 놀람은 몇 곱절이었다. 기막히는 환멸이었다. 차라리 돼지우리에 잘못 들어왔던 들 뛰어라도 나가련만 이것도 사람의 집인 줄이야! 이 오예(汚穢), 이 추악, 이 암흑! 이것도 사람의 집인 줄이야! 그러나 사람의 집임에 어찌하랴!

 

그렇다, 그것도 틀림없는 사람의 집은 집이었다. 제아무리 처음에는 구역이 나고 머리가 둘리더라도 사람이라면 얼마 동안 살려면 살 수도 있는 집이었다. 그 악취가 코를 찌르고 오예가 눈에 띄는 처음이 곧 냄새에 젖고 더러움에 물드는 버릇이었다.

 

시방껏 알지 못하던 세계가 어두운 밤의 인광(燐光)모양으로 번쩍인다.

 

제 스스로 나아가 애걸복걸하며 그 국해를 몸에 바르려고도 하는 것이다. 백문(白紋) 같은 마음에 엉겨붙은 구더기, 씹어드는 벌레.

 

창섭이도 오(五), 육(六)개월을 지내는 사이에 같이 있는 이에게 동화를 하고 말았다. 늙은이축보다 젊은이축에게 동화를 하고 말았다.

 

배실배실 돌아서 일을 한 가지라도 적게 하러 들었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마치 글방에 다니는 아이 모양으로 수도 없이 소변 보러 들고 나고 하였다. 마지못해 하는 번역이나마 그리해서는 아니될 줄 뻔히 알면서도 애써 고치기가 싫었다. 남먼저 하던 입사(入社)를 남 나중 하려 하고 할 일이 끝나도 끈적끈적 늦추잡던 퇴사도 될 수만 있으면 일찍 하려고 들었다.

 

그것은 그리한다 하더라도 그로 환멸의 비애가 삭여질리는 없었다.

 

정애에게 걸었던 사랑이 저문 하늘의 놀처럼 흐지부지스러지자 망상에 가까운 희망을 신문사 생활에 매었더니 그 또한 수포에 돌아가고 만 그는 제 마음을 어디에 지접(支接)해야 옳을지 알 길이 없었다.

 

바람은 분다, 물결은 흔들린다. 노를 잃은 조그마한 배는 비틀거린다. 불리어 가거라, 밀리어 가거라! 어디로든지.

 

창섭이가 군수 일파의 화젯거리가 되는 기생에게 동경하기는 이때부터였다.

 

이전엔 남자의 몸을 망치는 사갈(蛇蝎)이나 악마로 미워하던 그들이 인제는 이상야릇한 광채로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남국의 포도주처럼 방렬(芳烈)한 자극성, 요염한 신비성을 가진 듯 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 가까이만 오면 세상없는 근심도 풀리게 하고 슬픔을 잊게 하진 듯 싶었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하나에 매달리듯 절망적 노력으로 이 기생이란 알 수 없는 물건에 매달리려 하였다.

 

제 5 장

1

어느 겨울날 저녁이었다.

 

생선 눈깔 모양으로 퀭하게 흐려진 하늘만 보아도 사람은 음산한 기운에 몸을 떨었다. 게다가 살점을 오려내는 듯한 매운 바람이 맹수와 같이 호통을 치며 두꺼운 옷자락을 할퀴고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려는 듯하였다.

 

창섭은 이 불어닥치는 차디찬 맹수를 쫓는 부적이나 외우는 것처럼「엣 추워, 엣 추워」하면서 새빨간 코끝을 실룩거리며 탑동공원의 담을 끼고 돌아 교동(校洞)을 향하여 달음질한다.

 

그의 가는 곳은 명원관이었다. 그는 그날 새로이 취임한 광고부장 유만풍(劉萬豊)의 초대를 받은 까닭이다.

 

그런데 이 유만풍이란 자가 광고부장이 된 것은 무슨 학력과 경험이 있음이 아니었다. 그는 광고에 대한 경험은커녕 광고란 문자까지 해석지 못하였을이만큼 무식꾼이었다. 그는 아무 가격없는 휴지와 다름이 없는 반도일보 주(株)를 천 원어치 사고 이 광고부장을 얻어 한 것이다. 그것은 옛날 벼슬사던 본새이었다. 그를 끌어들인 이는 주운해이니 운해는 「사(社)를 위하여 제 지위를 희생」하고 서무주임이란 이름으로 십원 증봉(增俸)의 되었었다.

 

창섭은 거의 발이 땅에 닿지 않을이만큼 종종 걸음을 쳤다. 그것은 온전히 추운 까닭일까? 그러면 그의 가슴이 울렁거림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거기서 기생을 만날 수 있다. 천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한 서너 번 요리점에 갔건만 갈 적마다 무슨 애인을 밀회나 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가서는 번번이 기생에게 말 한번 건네보지 못하고 고작해야 옆눈질이나 하다가 헛되이 돌아왔었다.

 

(오늘은, 오늘은 꼭 기생 하나를 친하리라.)

 

그는 여러번 하던 결심을 또 한번 되풀이하며, 가슴이 또 다시 두근두근 하였다.

 

그가 막 명월관 문턱에 다다른 때였다. 저와 반대방면으로부터 들이닥친 인력거 한 채가 슬쩍 제 옆을 지나쳤다. 그때에 그는 맵시있는 발을 담은 듯항 어여쁜 운헤신 코끝을 얼른 보았다. 그 신코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도 저도 모르면서 걸음을 재게 걸어 그 신코의 임자가 수레에서 내리기 전에 앞질러서 요리점 마루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그 인력거 닿는 데에 시선을 던졌다.

 

그 어여쁜 신코의 임자는 방장 수레를 내리고 있었다. 그이는 살짝 몸을 굽히고 한 발을 막 땅 위에 놓는 인물이었다. 그 서슬에 외씨 같은 발의 버선목까지 재빛 망토와 속옷이 치켜지며 종아리의 보얀 살이 살짝 내다보였다. 가냘픈 허리가 날씬하자 그이는 얼굴을 들었다.

 

그 얼굴을 보자 창섭은 「아!」하고 경악에 가까운 외마디 소리를 쳤다. 그는 기절이나 할 듯이 단박에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이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음일까? 아니다, 그이의 얼굴이 낯익음 까닭이다. 그이의 얼굴이 하릴없는 정애의 얼굴이었다.

 

창섭은 무에라 형용할 수 없이 가슴을 셀레며 이 경이(驚異)의 대상을 더욱 자세히 살피려 할 제, 그이는 누구를 보았는지 방긋 웃고는 창섭의 얼없는 모양엔 눈도 거들떠보지 않고 쪼르르 사무실로 그림자를 감추었다.

 

「어느 방으로 오셨어요?」하는, 거의 노기(怒氣)를 품은 듯한 보이의 억센 목소리에 창섭은 깜짝 정신을 차렸다. 아마도 이 보이가 아까부터 이 말을 물었건만 창섭이 미쳐 대답을 안했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리라.

 

창섭은 오히려 꿈자취를 찾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멀뚱거리며 네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딱 보이를 쳐다보았다. 보이는 또한번 물었다. 그제야 반도일보사에서 온 것을 말하고 그때까지 벗지 않았던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바꿔 신고 자기 놀 방을 찾아갔건만 자꾸자꾸 고개가 뒤로 돌려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 그 기생이 누구인고…………?)

 

2

반도일보사측의 노는 방은 바로 입구에 있는 희너른 제 일(一)번이었다. 모이자는 시간은 여섯점이었으되 일곱점이 지난 이때에도 사람들은 삼분지 일도 오지 않았다.

 

사회에 물든 그들이라 정한 시간에 으레 에누리가 있는 줄 알고, 남이 아니지키는 시간을 저 혼자 지키는 것은 반편이나 할 일이지 자기네같이 똑똑한 어른의 할 일이 아니었다.

 

딴 때와 다랄, 더군다나 요리점 같은 데 때맞추어 가는 것은 제 권위를 상할 염려가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이 많아서 이런데 참례할 수가 없었으되 XX(요리내는 이)의 낯을 보아 만부득이 왔지요」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 두어 시간은 늦춰 올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삼분지 일이라도 온 사람은 어떤 이들일까.

 

첫째로 이날 밤의 연회의 주인인 유만풍, 둘째로 이 많이 요리점의 정조(情調)에 몸을 담그고도 싶고 또 끽주생면(喫酒生面)으로 과히 체면에 관계치 않으면 저 천한 기생을 불러보려는 홍군수, 한세환이었다. 그리고 또 기생 셋이 와 있었다.

 

그 중 둘은 벌써 노기(老妓)란 이름을 들을 낫세인데 그 신문사의 놀음에 단골로 불려다니는 홍련이와 산호주(珊瑚珠)였다. 남도산(南道産)인 그들은 안색은 아주 호색이로되 소리에 이르러서는 거의 광대에 가까웠다.

 

홍련은 우뚝하게 큰 코, 얼마 아니되어 머리 뒤꼭지까지 밀어갈 듯한, 훨렁 벗겨진 이마, 일(一)자로 길게 찢어진 눈, 여기다가 눈썹이 길고 검어서 <수호지>에 나올 듯한 여걸의 풍도가 있었다.

 

산호주란 것도 그만 못하잖게 엉성긎게 생겼다. 살이 저대로 노는 축 처진 볼, 둘이나 되는 턱을 괸 나무둥지 같은 굵직한 목, 허리띠를 바싹 치켜서 맨 보람도 없이 도리어 그 탓으로 바람이 가득 찬 공이나 무엇같이 터질 듯이 불룩한 젖가슴, 육(肉)이 부글부글 끓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 방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목청은 바로 꾀꼬리소리처럼 맑고 가늘었다. 그리고 신이 나서 장고를 치고 우쭐거릴 떼엔 그 안반짝 같은 궁둥이가 바람개비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고 돌리고 하였다.

 

그 외에 또 한명은 명옥(明玉)이라 부르는데 기생으로는 한창낫세였다. 조금 좁은 듯한 이마, 있는 듯 마는 듯 한 눈썹이 그리 잘났다고는 못할망정 두 노기의 대조로 어린 맛과 또 도화분(桃花粉)의 힘인지는 모르겠으되 봉선화 물을 들인 듯한 뺨이 사람의 눈을 끄는 점이었다.

 

군수는 연해연방 싱그부리한 웃음을 띠우며 명옥이를 쓸어안고 무에라고 소곤거리고 있다. 명옥이도 그에게 몸을 반이나 실리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기도 하며 이따금 목을 놓아 눈물이 나도록 웃기도 하였다. 그 모양은 「나는 이렇게 손님에게 친절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웃음을 가졌습니다. 제발 노시는 족족 나를 불러 주십시오」하는 듯하였다.

 

이때에 창섭이가 들어왔다.

 

“이커, 미남자가 들어오시는군.”

 

군수는 창섭을 보며 부르짖었다.

 

“여보게 이리로 오게, 이리로 와!”

 

군수와 창섭은 벌써 「하게」를 할 만틈 친해졌었다. 마음 좋은 군수는 창섭의 미모와 재화(才華)를 사랑하였다. 창섭이도 그 걸걸한 성질을 밉지 않게 생각하였다.

 

창섭은 하염없이 웃으며 그의 곁에 가 앉았다. 그때껏 군수에게 몸을 실리고 있던 명옥은 슬며시 따로 안으며 물끄러미 창섭을 보았다.

 

군수는 명옥에게 창섭을 가리키며,

 

“자아, 어떠냐, 이 나으리를 보아라. 이만하면 너의 나지미 노릇을 하겠니?”

 

하자 명옥은 입을 삐죽하며 군수를 꼬집었다.

 

“좋으면 그냥 좋대지, 남을 꾀집니.”

 

하고 창섭을 보며

 

“여보게 이런 미인은 자네가 아마 처음 보리. 수심가 잘하고 춤 잘 추고 조선에 제일가는 기생일세.”

 

창섭은 인제 기생과 친할 절호한 기회를 만났건만 이소개해 주는 말도 들은체만체 잠잠히 말이 없었다. 아까 흐르는 별같이 선뜻 나타났더 선뜻 사라진 정애 같은 그 모양이 그의 온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이다.

 

그 방의 커다란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열린 사이로 보얀 얼굴과 회색치마가 나풀 하며 기생 하나가 한 팔을 짚고 나붓이 인사를 드렸다.

 

창섭의 눈엔 그 새로 온 이의 얼굴이 햇발같이 부시었다. 그것은 그가 곧 문간에서 본 그 얼굴이었다.

 

3

여러 사람의 시선은 이 새로 온 기생에게로 몰렸다.

 

그이는 미색 하부다이 저고리에 이 또한 하부다이의 일종인 듯한 띄엄띄엄 매화 비슷한 무늬가 있는 진주빛 윤이 지르르 흐르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 팔을 짚고 나서 살그머니 일어선 그이는 저를 초점으로 모이는 눈살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고개를 다소곳하고 어디에 가 앉을까요 하는 것처럼 잠깐 서성서성한다. 여기저기서 「이리 오라」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 군수의 목청이 가장 높았다. 그이는 저를 알은체해주는 손님에게 감사해하는 듯이 상그레 웃음을 건네고 발길에 밝힐 듯한 치마를 한 손으로 거두어올려 맵시있는 보얀 버선발을 재게 놀리어 군수의 곁으로 다가온다.

 

군수는 제가 무슨 승리나 한 듯이 벙글벙글 웃으며

 

“그러면 그렇지, 이리오게, 이리와.”

 

하고 또 두어 번 청을 하였건만 그이는 군수의 곁이 아니라 제 동무 명옥이 곁에 앉는다.

 

창섭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숨 한번 쉬지 않고 저에게로 가까이 오는 낮익은 듯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바람이 지나간 뒤의 바다 모양으로, 염통이 고동을 그쳤을이만큼 그는 정신을 모았건만 기실 그의 머리는 더할 수 없이 착란하였다.

 

반들하게 쪽찐 머리가 생대로 푸수수한 트레머리로도 보이고 치마 밑에서 남실거리는 보얀 버선발이 까만 구두로도 보였다.

 

“여보게, 자네는 무엇을 그리 골똘히 보고 있나. 설향(雪香)을 보고 넋을 잃은 모양일세 그려.”

 

하며 군수가 무릎을 툭 치는 바람에 창섭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자 무안해지므로 빙그레 웃었다. 그때에 명옥이와 무에라고 소곤거리고 있던 설향이가 잠깐 눈을 들어 창섭을 보았다.

 

조금 흐린 맛이 있었으되 영채(映彩)가 돌긴 하릴없는 정애의 눈이었다. 창섭은 이 눈을 보자 다시금 당황하였다.

 

이것저것을 모르는 군수는 아까 명옥을 소개할 때와 똑같은 어조로 설향의 수심가 잘함과 안색의 어여쁨이 서울에 으뜸임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창섭이가 저와 한 사(社)에 다니는 것, 사중의 미암자이고 재주꾼임을 설향에게 자랑하였다. 그이는 「네, 그렇게 훌륭한 분이야요?」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창섭은 새로이 설향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가 처음에 정애로 속은 것이 우스웠다. 딴은 그 귀염성 있는 입언저리와 기름하고도 둥근 상판이 정애의 그것과 비슷도 하였으되 조금 날카로운 듯한 콧대와 가는 눈썹은 아주 별다른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분바른 보람도 없이 푸른 빛이 도는 얼굴빛이 정애와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였다.

 

그러나 그것만드로도 기억의 못 깉에 간신히 가라앉았던 정애의 꿈을 불러일으킴에는 충분하였다. 그때껏 정애로부터는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영숙의 입에서도 도무지 정애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영숙은 학교를 마친 후로 어머님께 붙들려 바느질과 음식찌질을 배우노라고 좀처럼 대문 밖을 나가지 못하였고, 혹 나들이를 간대도 일가댁이나 갔지 동무들은 찾지 않는 모양이었다. 학교를 나오자 그들의 사이도 자연히 멀어졌으리라.

 

창섭은 어째 정애에게 놀림감이 된 듯 싶었다.

 

제가 만나자고까지 하여놓고 무슨 일로 하여 한번 약속을 어겼다고 하기로니 그렇게 끊고 벤 듯이 발그림자도 않을 까닭은 없을 듯 싶었다. 진정으로 저를 사랑한 게 아니라 장난삼아 그런 편지를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자기의 순실(純實)한 감정이 남에게 놀림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만큼 애닯은 일은 없으리라. 분한 일은 없으리라.

 

창섭은 정애를 괘씸한 계집애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늘 밤에 정애와 미슷한 설향을 만났다. 그는 정애에게 느꼈던 사랑이 그이에게로 살아남을 느꼈다. 그리고 또 정애에게 느낀 비슷한 미움도 그에게 느꼈다. 그는 정애에게서 채우지 못한 사랑의 욕심, 정애에게 속은 분풀이를 애꿎은 설향에게 하려는 생각이 마음 어디인지 움직이고 있었다.

 

창섭의 설향을 바라보는 눈은 거의 적의(敵意)를 품은 듯이 날카로왔건만 이를 모르는 설향은 (사내로 어쩌면 얼굴이 저렇게 흴까!)하고 속으로 찬미하면서 연해연방 호감 있는 시선을 창섭에게 던졌다. 그것은 병아리가 저를 덮치려는 솔개의 좋은 날개를 쳐다보며 부러워하는 격이었다.

 

4

여덟점 반이나 되어 손들이 거의 다 모이고, 아홉점이나 해서 요리상이 들어왔다.

 

손들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요리상을 에두르고 다시 자리를 잡는다.

 

창섭이도 요리상 곁에 가려다가 문득 설향이가 제 곁에 앉아야 될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눈으로 그를 찾아보았다. 눈치 빠른 세 기생은 어느 곁엔지 상머리에 하나씩 또 상 한편의 복판쯤 해서 술병을 들고 갈라서있건마는 창섭의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찌 할 줄 모르는 듯이 서성서성학는 판에 군수가 활발하게 기생 곁에 앉으라 하였다. 남들이 다 앉는데 저 혼자 서있기가 열없던 창섭은 그의 말대로 하였건만 무엇을 잃은 듯이 서운한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러는 즈음에 소피를 보러 나갔던 듯한 설향이가 들어온다. 그는 창섭의 심중(心中)을 살폈음인지 또는 직업적 민감(敏感)으로 제 위치를 알았던지 바로 창섭의 등 뒤에 술병을 들고 선다. 창섭의 등은 벌에게나 쏘인 듯이 욱신욱신하였다.

 

이내 기생들은 제 가까이 있는 손님들의 청을 따라 내려안제 되었다. 설향이도 군수의 앉으란 말에 치마에 바람을 풍기며 사뿐 내려앉는다. 제 마음 탓인지 모르겠으되 군수에게보다 창섭에게 몸을 실렸다. 그 보들보들한 치맛자락이 슬쩍 창섭의 무릎을 스칠 때, 핫두르막과 핫바지를 격(隔)했건만 제 무릎이 근실근실해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술잔은 돌아간다. 창섭은 무슨 술을 먹어야만 될일이 있는 것 같이 설향의 따라주는 술을 조금도 사양치 않고 주저치 않고 자꾸자꾸 들이켰다.

 

설향은 놀란 듯이 창섭을 바라보았다. 창섭이도 맞질러서 그 눈 속을 들여다 보았다. 둘은 한동안 눈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무슨 술을 그렇게 잡수셔요?)

 

(설향이가 부어주는 술을 아니 먹을 수 있나.)

 

(그럼 내가 부어드리는 대로 잡숫겠단 말씀이야요?)

 

(암, 얼마든지 먹고 말고.)

 

(그러다가 취하시면 어떻게 하세요?)

 

(취하면 더욱 좋지……)

 

이 눈으로 주고 받는 말이 매우 재미스러운 듯이 설향은 땍때글 웃었다. 살짝 입술이 양편으로 열려 볼록하게 입가의 살을 모으자 보조개를 지으며 여러 가닥 실금을 그리고 눈이 가무러지는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오히려 웃음의 여파(餘波)를 눈초리에 띠고

 

“또 부어드려요?”

 

하고 인제는 법대로 입으로 말을 하였다. 그리고 기울어지는 제 몸을 버티듯이 한 팔로 창섭의 무릎을 짚으며 또 술을 붓는다.

 

창섭은 이 뜻 아니면 웃음에 놀라기나 한 듯 웃는 이의 얼굴을 뚫을 듯이 바라보다가 저도 싱그레 웃었다. 그리고 부어준 술은 자랑스럽게 비우고는 잔을 탁 놓았다. 설향은 또 웃으며 잔을 채웠다. 창섭은 또 웃으며 잔을 말렸다. 둘은 또 마주보고 웃었다. 또 붓고 도 말리고…….

 

창섭의 기얼어지는 몸은 설향의 어깨로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까 눈으로 한 말이 이제 입으로 되풀이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잡수셔요?”

 

“설향이가 부어주는 술을 아니 먹을까.”

 

“그럼 내가 부어드리는 대로 잡숫겠단 말씀이야요?”

 

“암, 얼마든지 먹고 말고.”

 

“그러시다가 취하시면 어떻게 하세요?”

 

“취하면 더욱 좋지.”

 

연회는 한창이었다. 얼근하게 술이 돈 여러 사람들은 제각기 떠들고 있었다.

 

논설 쓰는 한학대가(漢學大家)는 주홍이 흐르는 듯한 얼굴을 번쩍거리며 수양제(隋楊帝)의 풍류성사를 이야기 하고, 三면주임은 침을 버글거리며 제국신문 만들던 추억담을 지껄이고, 술 잘 먹는 창운은 술잔을 입에 댄 체로 신문 편집 방법을 늘어놓는데 그와 마주 앉은 군수는 편육을 쩝쩝 씹으며 제일류의 신문 경영 방침을 논란하고 있다. 운해는 저와 같은 뚱뚱보 산호주를 한 팔로 엇비슷이 껴안고 무슨 실없는 소리를 소곤거리며, 조그마한 세환은 간 크게도 저보다 갑절이나 큰 듯한 홍련을 불들고 깐죽깐죽하게 놀리고, 찬명은 소사스럽게 생글생글 웃어가며 명옥을 제 무릎에 올려 앉혔다 내려 앉혔다 하고 있다.

 

택근은 「이 사람들은 내가 모두를 부리고 있구나. 이 사람들이 이렇게 잘 노는 것은 온전히 나의 막대한 덕택이로구나」하는 듯이 웃사람 아랫사람의 잘못을 용사할 때 띠는 미소를 띠고 여러 부하를 내려보고 있다.

 

이윽고 춤과 노래가 벌어지게 되었다. 기생들은 한자리로 모이게 되었다. 그때껏 창섭이와 붙어 앉았던 설향이도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창섭은 차마 못 놓겠다는 듯이 손을 꼭 쥐었다. 설향이도 떼치기 어려운 듯이 옷 고치는 모양을 하고 치마고름도 만적만적하다가 마침내 제 동무들 있는 데로 가버렸다.

 

먹음먹이의 냄새가 떠도는 그 방의 공기를 장고소리가 흔들기 시작하였다.

 

나이 어린 탓으로 명옥이와 설향이가 먼저 수심가하게 되었다. 그 노래에는 한숨의 바람이 일고 눈물강이 흘렀다. 불붙는 마음, 애 졸이는 마음, 원수엣 임, 그리운 임, 야속한 임, 못믿을 임, 두견이 우는 황릉(黃陵)의 무덤, 기러기 나는 동정(洞庭)의 호수, 하늘을 걷는 발 없는 달, 나무를 흔드는 손 없는 바람, 강물만 푸르러도 임 없는 설움, 비는 오건만 임 아니오는 한탄……. 청승맞게 구르는 목청은 어두운 밤에 혼자 훌쩍이는 과부의 울음처럼 껄떡이고 죽어가는 나비의 나래 모양으로 그윽히 떨리었다.

 

5

뒤숭숭하게 이리저리 위치를 바꾼 접시에는 거의 다비어가는 요리의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뒤흔들어졌으며 되는 대로 집어던진 나무재가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어수선하게 떨어져 있다. 보얗던 송보는 흘려진 국물과 장물과 통조림의 홍합조각으로 하여 누른 반점, 검은 반점이 그려져 있다. 졸아붙는 구자가 최후의 비명을 아뢰고 있다.

 

반넘어 가고 남은 손들도 더러는 술상을 떠나 불 같은 숨을 헐떡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더러는 비틀비틀하며 춤을 추고…… 춤을 춘다느니보다 활개를 펄럭거리며 다리를 지척거리고 있다.

 

이 춤꾼의 앞에는 홍련이가 장고를 메고 「얼사 좋다, 으흥」하면서 멋들어지게 그 타구 같은 악기를 두드린다. 그라 앞으로 나아갔다 뒷걸음을 쳤다 함을 따라 춤꾼들은 들어섰다 물러섰다 한다. 그 장고머리에는 산호주가 미륵 같은 몸을 흔들거리는데 그 길쭉한 팔이 구렁이나 무엇같이 구불렁거리자 온 얼굴과 목을 뒤흔들어서 「에라 만수」를 찾고 있다.

 

그런데 술꾸느이 한패는 그래도 요리상 한 모서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취하면 취할수록 수을 들이라 들이라 하는 그 축은 연해연방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곤드레만드레하게 벌써 굴신(屈伸)의 자유를 읽은 고개를 설향의 어깨에 누인 듯이 기대고 창섭이도 그 축에 끼어 있었다. 그는 물론 주객이 아니로되 거기 앉은 어느 뉘보다도 술의 마력을 절실하게 느낀 사람은 그일 것이다.

 

정애의 추억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슬픔, 샛말갛게 높은 가을 하늘의 별을 쳐다볼 때처럼 가슴에 스며흐르는 쓸쓸스럽고 하염없는 비애, 그 별의 그림자가 야트칵한 시냇물에 떨어진 것을 움켜쥐려는 듯한 느낌을 설향에게서 맛보는 얇은 적막, 마른 잎같이 물얼굴에 뜬 그 그림자를 움켜쥠에도 물이 손에 묻을까하는 염려, 옆에서 보는 이가 비웃고 흉볼까 하는 공겁(恐怯)이 모든 감정을 흐리게 하고 살라버리는데, 술의 힘이 필요할 듯 하였다.

 

술이란 기쁜이에게도 동무일는지 모르겠으되 보다 더 슬픈 이의 친구이었다. 그러나 술을 먹는다고 슬픔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기쁨을 돋우는 것과 마찬기지로 슬픔도 돋우었다. 싸늘한 슬픔을 따뜻하게 녹여서 윤기를 내고 기름을 흐르게 하는 법이다.

 

배배 마른 염통에 물이 오라자 꽃 아니 핀 한숨을 걷잡을 길이 없었다.

 

손에 물이 묻은 들 어떠하리, 남이 비웃고 흉본 들 어떠하리. 부여잡자, 붙안자, 어여쁘고 안타까운 별의 그림자를……

 

창섭은 한 팔은 설향의 허리로 돌리었다. 단내 나는 코 안으로 기어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머리향기, 깁 옷의 보드라운 촉감, 후끈거리는 내 손바닥에 옮아오는 저 손바각의 미묘한 온미(溫味)……

 

창섭은 취한 중에도 일부로 더 취한 듯이 감고 있던 눈을 반만 떠서,

 

“설향이…….”

 

“네?”

 

“………………”

 

설향은 고개를 갸웃이 하여 창섭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을 기다렸건만 창섭은 눈을 다시 감으며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설향이?”

 

“네?”

 

“…………”

 

“왜 부르셨어요?”

 

“설향이?”

 

“네?”

 

“우리 같이 갈까.”

 

“어데를요?”

 

“설향의 집에.”

 

“……”

 

설향은 방그레 웃을 뿐이었다.

 

“싫어”

 

“무엇이요.”

 

“같이 가기가…….”

 

“…………”

 

이윽고 설향의 편에서 물었다.

 

“참말이야요?”

 

“그럼!”

 

“정말?”

 

“그럼!”

 

설향은 또 고개를 갸웃이 하며 창섭을 들여다 보았다. 창섭은 두 손으로 움키는 듯이 설향의 볼을 잡아당기어 그 입을 제 입에 대었다.

 

6

창섭은 목에 불어 붙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눈을 번쩍떳다.

 

「물! 물!」하고 외치려다가 그는 의아한 듯이 사면을 둘러보았다.

 

두 같 반이나 될 듯한 방 윗목에는 화려한 세간이 가득히 놓여 있다. 쌍을 채운 화류 삼층장, 번쩍번쩍하는 유리문 달린 의걸이, 그 안에서 누르게 푸르게 또는 분홍으로 초록으로 이불과 요가 내려다보인다. 자개로 수놓은 문갑 위엔 양 가에 자개물린 큼직한 체경 하나가 얹혔는데, 그것은 마치 햇발이 비친 가을물 모양 전등을 받아 은(銀)으로 번쩍이고 그 옆에 놓인 사기 화분엔 발그스름한 매화 두 송이가 때아닌 웃음을 웃고 있다.

 

창섭은 여기가 어디인가 하는 듯이 고개를 반쯤 일으켰다.

 

누가 두루마기와 외투르 벗겼는지 동저고리 바람이고 제가 누운 자리는 모본단 보료 위였다. 그리고 누가 덮어주었는지 묵직하고도 포근포근한 모본단이불이 자기의 하반부에 앉혀 있다. 그리자 저와 머지 않게 잠든 설향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번개같이 어젯밤의 지낸 일을 생각하였다.

 

연회는 끝장날 때가 되었다. 몇 아니 남은 손들도 허전거니는 손으로 모자를 쓰고 외투를 잆었다. 기생들도 어느 곁엔지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사람은 군수와 창섭이와 설향이 단지 세 사람이었다.

 

“인제 고만 가세요.”

 

설향은 저를 다시 놓지 않으려듯이 붙들고 있는 창섭을 보며 민망한 듯이 이런 말을 하였다.

 

“싫어, 나 가기 싫어.”

 

창섭은 어린애 모양으로 응석을 부렸다.

 

“딴 손님 모두 가셨는데 안가시고 어째요. 우리 같이 가서요.”

 

설향은 달래었다.

 

“거짓말”

 

“왜 거짓말을 할 리가 있어요, 우리 셋이 같이 가서요.”

 

하고 군수를 보며

 

“나의, 이 나으리하고 같이 가셔요, 네?”

 

놀기에 연연(戀戀)한 군수는 물론 쾌락하였다.

 

문간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설향이가 사무실에서 망토를 입고 나왔다. 그가 인력거를 타자 둘도 인력거를 탔다.

 

앞서 가는 수레를 따라 뒤로 두 수레가 쫓았다. 살을 오려내는 듯한 매운 바람이었건만 취한 이에게는 화창한 봄바람 모양으로 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예까지는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 뒤의 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불같이 타는 몸을 가볍게 흔들리며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면서 잠에 떨어졌음이다. 수레가 그 문에 닿은 때야 잠깐 잠을 깨고 이 방에 들어올 수가 있었으되 또 그만 쓰러졌음이리라……

 

설향은 불을 등져서 창섭의 편을 향하고 누워 있다. 슬쩍 그의 귀밑을 스친 광선은 그의 얼굴을 밝은 그늘로 감추었다. 희미한 곡선으로 그려진 그 윤곽엔 몽환에 가까운 아름다움이 떠돌았다. 더운 듯이 한 팔로 가슴에 얹힌 이불을 걷어치웠는데 하붓이 풀린 저고리 자락속으로 보야스름한 젖가슴이 무리에운 달처럼 내다보였다.

 

깨는 이의 얼굴은 자는 이의 얼굴에 가까워갔다.

 

창섭은 다시금 정애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그림자를 부여잡는 듯이 설향을 부퉁켜안았다.

 

자는 이는 괴로운 듯 고개를 돌리고 기지개를 켜더니 반 눈을 떠서 사내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언제 깨셨어요?”

 

“시방 깨었어.”

 

사내는 슬며시 계집을 놓고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시방 몇 시나 되었어요?”

 

계집은 정신을 차리는 듯이 몇 번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몰라”

 

“몇 시나 됐을까, 아직 날이 새지 않았지요?”

 

계집은 이런 말을 하며 미닫이를 바라보고 몸을 일으켜 제 팔목시계를 본다.

 

“아직 세시밖에 아니 되었구면, 그런데 시장치 않으셔요?”

 

“시장치는 않아도 물이 먹고 싶어.”

 

계집은 장 밑에 있는 자리끼를 내어주었다. 사내는 살았다는 듯이 무을 켜고 있었다. 그 동안에 계집은 보료를 걷고 다시 요와 이불을 내려 깔았다.

 

“무슨 술을 그렇게 잡수셔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피차에 한시바삐 눕기만 바라면서도 물끄러미 마주보고 있었다. 달착지근한 침묵이었다. 웬일인지 양편 가슴에서는 맞추기나 한 듯이 거의 한 때에 휘하고 한 숨이 나왔다.

 

“왜 한숨을 쉬셔요?”

 

“설향은?”

 

둘은 웃었다. 전등불은 검둥치마로 가리워졌다.

 

X X

삶아서 껍질을 벗겨놓은 계란같이 매끈한 갈결의 보들보들한 솜의 느낌, 말씬말씬한 고무의 탄력, 손안에 가볍게 흔들리는 자릿자릿한 젖통의 무게…… 맞서리는 두 숨결, 붉어가는 두 입술, 서로 빨아당기는 두 몸의 사라지는 듯한 접촉……, 전존재를 뒤흔드는 아찔한 도취, 둘이 하나로 녹은 황홀, 이 홍로(紅爐)……

 

밤이다, 어두운 밤이다, 공단 같은 밤이다. 길이길이 새지 말과저, 길이길이 깨지 말과저……. 눈감고 속살거리는 달콤한 말씨, 서로 자랑하는 사랑의 깊이, 언제든지 새로운 감격을 자아내는 맹세. 계집의 눈물 묻은 팔자타령, 사내의 한숨겨운 위로. 못 믿겠다고 앵돌아지는 교태. 잔 싸움을 푸는 헤일 수 없는 키스. 일(一)분을 못 넘는 애틋한 졸음. 한결같이 걸어가는 우단의 꿈길, 깜박 졸다가 깜빡 깨어서 서로 찾아다니는 따스한 팔뚝.

 

전등불은 꺼졌다. 밤은 새어나간다. 무슨 단단한 결심이나 한 듯 사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기 시작하였다.

 

“왜 벌써 가시려고 하서요?”

 

다 늦게야 오는 잠에 조아붙는 눈을 비비며 계집은 물었다.

 

“그럼 가야지.”

 

사내는 향락의 뒤에 오는 적막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벌써 가신단 말이야요?”

 

하고 계집은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얼음으로 흰꽃을 수놓은 창경(窓鏡)을 가리키며 밖의 날이 저렇게 추우니 해가 오르거든 가라 하였다.

 

처음에는 몇 번 고개를 흔들다가 사내는 다시금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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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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