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탄실과 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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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탄실과 그 아들

  • 공개되어 있는 내용이 없어 2011.8.26~2011.9.04일 직접 입력해서 올립니다.
  • 입력본은 학원출판공사의 학원한국문학전집 4권입니다.

지은이

전영택

출전

?, <1955>

본문

1

백두산 천지에서 흐르는 물은 두 줄기로 갈라져, 하나는 동으로 내려가다가 두만강으로 흘러들고 하나는 서편으로 흘러들어 압록강 줄기로 들어간다. 사람의 운명도 같은 처지에 나서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마는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서 십 년 이십 년 지나는 동안에 서로 거리가 엄청나게 멀어져서, 아주 딴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리는 수가 있다. 두 사람이 이웃에서 나고, 혹 형제로 태어나고, 한학교에서 한책상 한걸상에서 같은 선생에게 공부하고 자랐으나, 몇십 년이 지나간 다음에 한 사람은 학업을 성취하고 출세도 잘해서 일국과 일세에 이름을 날리고, 한 사람은 비참한 자리에 빠져서 언제 두 사람이 같은 처지에서 자랐던가를 의심하게 되는 일이 있다.

한국은 동란을 만나서 무서운 파괴를 당하고 처참한 고생을 하고 있는 동안, 패전 일본의 수도 도오꾜오는 파괴되고 불타서 시커먼 벌판 같던 자리에 차차 새집이 생기고 큰 빌딩이 늘어서게 되었다. 학교 많고 책사 많은 〈간다〉에도 다 깨끗한 새집이 쭉 들어서서 훌륭한 시가지가 되었는데, 그 한모퉁이에 다행히 폭격과 화재는 면했으나, 수리도 못하고 별 신통한 사업도 못하고 옛모습만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삼층 집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컴컴하고 침침한 벽돌집이, 새로 지은 아담한 문화주택이며 훌륭한 호텔과 번듯한 음식점과 상점 새에 있어서 더 무색할 뿐인 데, 간판만 눈에 띄어서 오고가는 사람이 발을 멈추고 쳐다보게 되는 것이 곧 도오꾜오의 우리 청년회관이었다.

쓸쓸하던 청년회관에는 새 간판이 또 하나 붙고 사무실이 하나 새로 생겨서 약간 활기를 띠었는데, 그것은 일본에 재류하는 교포를 지도하고 교화할 목적으로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한글 주간 신문이 하나 생겨서 그 사무소를 이 회관에 정하고 간판을 붙이게 되었고 그 신문 주간으로 예전에 본국에서 소설도 쓰고 신문도 해본 문사요 종교가를 겸한 새 인물이 최근에 초청을 받아 본국에서 와서 회관의 새 식구가 되자, 이 회관 사람들은 물론이요 재류동포들과 특히 신자들과 청년들이 적지 않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삼십여 년 만에 처음 온 Y라는 이 신문 주간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Y가 이층 자기 방에서 좀 느지막하게 내려와서 아래층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즈음에, 마침 현관 한편 담에 걸린 거울에 어떤 여성의 얼굴이 비치고 그리고 무슨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싱긋싱긋 웃으면서 머리를 어루만지고 두 팔을 벌리고 앞뒤로 옷 모양을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된다. 아무리 보아도 보통 성한 여자는 아니다.

Y는 깜짝 놀라서 물끄러미 들여다보았으나, 줄곧 보고 있을 수도 없어서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암만해도 그 얼굴 모습이 낯익은 모습이다.

「그런데,저 현관에 있는 부인이 누구요? 일본 여자요, 한국 사람이오?」

마침 사무실에 놀러 들어온 K라는 학생에게 물었다.

「선생님, 모르십니까? 그가 유명한 김영순 씨랍니다. 참, 선생님 아시겠군요.」

Y는 K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뭐? 김영순이라니!.」

「그런데 선생님,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K는 이상스러운 듯이 Y의 얼굴과 거동을 살펴 본다.

「놀라시는 게 이상하시군요. 선생님도 그 이와 무슨 연고가 있는 모양이군요. 잘 아 십니까?」

「연고는 무슨 연고요. 그런 말 마시오. 그럼 저이가 예전에 시도 쓰고 하던 평양 여자 김영순이란 말이오?」

「그렇답니다. 그런데 선생님, 왜 그렇게 놀라셔요? 암만해도 수상한데요.」

「그런 장난의 말은 말고, 도대체 이야길 좀 하시오.」

「절더러 이야기를 하라구요?」

K라는 청년은 와세다 대학 문과를 금년에 막 마치고 대학원에서 연구하고 있는 열성 시인으로, 이 회관에서도 유명한 사람이다. 고향이 함북 국경에 있기 때문에 가족과는 소식이 끊어져서 늘 우울한 생활을 하고 있다가, 같은 문학인인 Y를 만나서 연배는 다르지1마는 좋은 친구가 되어 지내는 형편이었다.

「그래, 이야길 좀 하시오.」

「날더러 이야길 하라구 하시지 말구 선생님이 이야길 하셔요. 그에게 대해서는 나보다도 선생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그럼 내가 아는 대로 이야길 할 테니, K군 아는 것을 우선 이야기하시오. 그동안 일본서 지낸 일, 현재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오. 도대체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저렇게 되었소?」

「공연히 아시면서 그러시지……간단히 말하면 소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실연 비관한 끝에 정신이상이 생기고 어찌어찌해서 이 회관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결국 이 회관과 이 근방에서 명물이 되었답니다. 저 뒤뜰에 있는 문화주택이 그분이 사는 집이랍니다.」

K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래? 문화주택이라니, 저 뒤에 있는 그게 닭의 우린가 했더니 그것 말이오?」

Y는 점점 호기심의 도가 높아져 이렇게 묻는다. 과연 회관 뒤뜰에 닭의 우리 같은 이상스러운 건물이랄까가 있는 것을 무심히 본 생각이 났다.

「아 참, 잊었옵니다. 그 집에는 그분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드님, 스무 살 먹은 아드님이 같이 있답니다. 저 제본소에서 일하지요.」

K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아드님이라니, 웬 아들이 있던가?」

「모르지요. 웬 아들인지……좌우간 아들이라니 아들인 줄 알지요.」

K는 볼일이 있다고 나갔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우선 이만큼으로 끝났다.

일본 여사무원은 부지런히 신문 독자의 주소 성명을 쓰고 있고 사무실은 조용하였다.

Y는 테이블을 의지하고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서 무슨 생각에 잠겨 있다.

2

지금으로부터 삼십 오 년 전, 아득한 옛날이라고도 할 수 있는, Y도 청춘 시절이었다. Y는 몇 친구들과 같이 《문예》 라는 잡지를 시작한 일이 있었다. 이때는 아직 우리 사회에는 문예에 대한 이해가 씩 부족한 때이었다. 소설, 그 중에서도 연애 소설을 쓰면 타락한 사람이 오입하는 일로 알던 때였다.

사상가, 이때에 사상가라는 것은 민족주의자, 애국자를 이르는 것이었다. 교육가, 종교가, 문학가 —— 그것은 비분 강개한 문구를 늘어놓아서 민족의 운명을 통탄하고 자유와 독립을 은어(隱語)와 비사(譬詞)로 노래를 짓는 사람을 문학가로 쳤는데, 이러한 몇 가지 전문가를 청년의 이상으로 희망하고 나아가며 사회에서도 일러 주는 부류의 사람이요, 그 외에 화가라든지 배우라든지 소설가 따위는 뜻 있고 생각 있는 사람은 못할 것으로 치고 배척을 받는 형편이었다. 사람의 지성을 찾고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노래하고 그리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도리어 죄로 인정되었다. 그것은 금욕적인 사상을 다분히 가진 초대 교회의 영향도 다분히 있기도 하고,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독립과 자유를 찾는 영웅적인 기풍에서 나온 것이었다.

교회의 추천을 받아서 스칼러십을 받아 가지고 일본 유학생이 되어서, 장차 교회와 교육계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고 또 그러기를 기대받는 Y로서, 소설과 시를 전문적으로 하는 순문예 잡지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오입이요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잡지는 남자만 사오 인 모인 동인제(同人制)로 한 것이었다. 그 동인들은 Y 한 사람을 빼놓고는 다 그 뒤에 당대에 쟁쟁한 소설가, 시인으로 한국 신문학계의 선구자, 창시자(創始者)의 명예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었다. 얼마 뒤의 일 이었다.

「우리 남자만 동인으로 하는 것보다 여자도 한 사람 넣으면 어떤가?」

이것은 동인 중의 H라는 사람의 제안이었다.

「여자? 여자 중에 어디 동인될 사람이 있을라구?」

이것은 T라는 동인의 반대의 의견이었다.

「아니야, 있어. 어디 처음부터 다 된 사람이 있어? 착실히 소질이 있고 희망이 있으면 되지 않는가?」

이것은 Y 자신의 말이었다.

「저 사람의 말이 옳은걸. 저 사람도 가끔 바른말을 할 줄 아는걸.」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가 그럴 만한 사람이 있단 말인가?j

「있네. 유망한 사람이 있네. 무엇보다 문학을 지망하려고 나아가는 그 용기가 훌륭해!」

제안자 H는 자신과 열있는 어조로 말한다.

「누구? 그러면 넣기로 하지.」

T는 마침내 찬의를 표한다.

이리하여 후보자로 오르고 택함 입은 사람이 김영순이었다. 바로 지금 이 회관과 동네의 명물이라는 미스 김이었다. 이때에는 여자로 글 쓰는 사람이라곤 새벽 하늘에 별처럼 드물었다. 또 하나 김이라는 사람이 글을 쓰고 잡지도 하노라고 하지마는, 그는 창작의 소질은 없는 사람이요, 오직 영순이 한 사람이 택함을 입을 만하였다. 아직 미성품인 김영순을 서둘러서 동인으로 넣은 것은, 이 때에 본국에서 《문예》에 뒤이어 나온 《신조(新潮)》라는 잡지에 끌려가지나 아니할까 하는 기우에서 나온 원인도 있지만, 노의 누이 동생의 소학 동창으로 그의 자라 온 환경도 알지마는 문학을 하게 된 동기와 내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Y는 지나간 청춘 시절의 일을 더듬어 생각하고, 영순의 기구한 운명의 현실을 바라보고 자못 감개함을 금치 못했다.

3

영순은 역사의 도시요 명승지로 제일 강산이요 색향인 평양, 기독교로 꼽히는 명문가 김박천의 집에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박천 군수를 지낸 대지주로 관변으로나 상계로나 쩡쩡 울리는 집의 규수로 곱게곱게 귀엽게 자랐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천생 인물로 곱고 태도가 귀엽기 때문에 이름을 탄실이라고 부르고 색동저고리에 긴치마를 입혀서 인형처럼 단장을 시켜 가지고 이 방 저 방으로 사랑으로 외가집으로 끌려다니면서 무척 귀염을 받았다. 예수 믿는 외할머니는 탄실이를 데리고 정진학교라는 교회학교에 가서 입학시켰다.

물론 학교에서도 선생들의 귀염을 받았다. 탄실이는 온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귀염을 독차지하고 인기의 중심이 되었다. 탄실이는 곱고도 재주가 있고, 그 동무 명숙이는 복스럽게 생긴데다가 활발하고 말을 잘하기 때문에 학예회나 크리스마스 때에는 늘 뽑혔다. 두 아이는 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다고,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이 다음에 이화여전까지 시켜서 한국의 유명하고 훌륭한 여자가 되기를 바랐다.

세월은 흘렀다. 탄실이는 영순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관립 여자고보에 입학한 지 삼 년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김박천은 전부터 첩을 얻어 가지고 살면서 금광을 하다가 파산을 당하고는 서울로 만주로 다니며, 오빠들은 서울로 일본으로 나가고, 영순이는 무척 고독하고 우울하게 지냈다. 학교에는 결석하는 날이 많고 집에 들어앉아서 미술하는 큰오빠가 보던 일문 소설책만 읽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이것을 걱정하여 교회에 데려 가려고 하고, 목사가 찾아와서 권하고(교회 학교) 정의학교에 다니는 명숙이가 끌어도 시간 낭비라고 다 거절하고 여전히 소설책만 읽었다. 아버지는 연애소설만 읽는다는 것을 알고 꾸중을 하면서 교회 가기를 권했으나, 영순은 교회에는 염증을 내고 질색을 하였다.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다.

영순이가 졸업할 무렵에는 연애한다는 소문이 높아졌다. 할머니는 이것을 알고 몹시 걱정하고, 아버지는 부랴부랴 약혼을 시켰다. 공부를 더 하겠다고 아무리 졸랐으나, 아버지는 들은 체도 않고 졸업도 하기 전에 시집을 보내려고 서둘렀다. 여학교 교장이 중재를 해서 졸업이나 하고 결혼을 하라고 권했으나, 영순은 졸업하던 날 일본으로 달아났다. 문학을 지망하여 도오꾜오로 간다던 숙원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영순은 자기의 눈이 뜬 사람이다. 지혜의 열매를 맛보고 미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고 하는 것은 그때 일본인 영어 교사의 평이다.

4

Y는 별로 일도 없이 현관 쪽으로 나가 보았다. 김영순이라는 그 여자가 흑 그냥 있는가 하고. 있으면 그 꼴을 좀 자세히 보려고 나가 보았으나, 어디로 나갔는지 자기 처소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아니한다. 잠깐 서슴서슴하고 섰는데, 어디서 계집애 목소리로 찢어지는 소리가 돌린다.

「쌍! 어떤 놈이 우리 애기를 때려서…… 쌍!」

저게 누군가? 하면서 Y는 그 소리나는 방향을 따라서 강당 쪽으로 가 보았다. 강당 뒤 회관 뒤뜰 한가운데 한 다리를 뻗치고 비스듬히 앉아서 병아리 한 놈을 만지고 들여다 보면서, 혼자서 계집애 목소리로 떠드는 것은 아까 현관에서 보던 영순이다. 머리는 굉장히 구실러지고,찢어진 스커어트 틈으로 거의 엉덩이까지 드러낸 그 모양을 자세히 오래 보기가 거북해서 Y는 얼굴을 돌렸다.

(저이가 과연 영순일까?)

Y는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나이는 늙었으나 목소리는 늙지 아니했는지 분명히 옛날에 듣던 그 목청이 분명하다.

「김가, 네가 우리 아가를 때려서 다리를 절게 했지? 응, 이 쌍 김가야.」

고개를 들어서 어딘지 위를 쳐다보고 그는 소리를 지른다. 애기라는 것은 병아리를 말하는 것이다. 김가라는 것은 Y가 사귀어 지내는 젊은 친구 K를 말하는 것 같다. K는 삼층에 있었다.

「미쓰 김! 그저 오햅니다. 내가 미쓰 김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미쓰 김네 병아리를 다쳐서 상하게 해요?」

「호호호호, 우리 김씨는 나를 사랑하지. 우리 애인이지, 호호호호.」

과연 미치기는 미쳤구나 하고 Y는 속으로 썩 가없게 생각하였다.

몇 날 지난 밤이었다. 달이 유난히 밝은 초가을 밤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Y는 갑갑하고〈호움식〉2도 나고 해서, K를 찾아서 같이 책방 구경을 하고 다방에도 들러서 들어오는 길에,

「우리 어디 저 미쓰 김한테나 가서 이야기나 붙여 볼까요?」

하는 K의 말대로 회관 뒤로 갔다. K는 창을 노크하였다.

「미쓰 김 계세요?」

「그거 누구가?」

자려고 벗었던지 아래만 입고 위는 벗다시피 한 주인은 창으로 내다본다.

「미안합니다, 실례합니다.j

「왜덜 밤에 밀려다녀, 젊은 사람들이.」

「달이 좋아서 산보갔다 왔답니다. 달이 좋지요, 미쓰 김?」

「달이 좋으면 무얼 해. 돈이 있어야지. 다 쓸데없어!」

「달구경도 돈 있어야 하나. 좀 나와보아요, 저 달을.」

「싫어, 싫어!」

「그럼 미쓰 김, 노래나 하나 해요.」

「제나 하지, 날더러 왜 하라나?」

「그러지 말구 하나 해요.」

「싫어! 싫어! 저 손님은 누구야? 모르는 손님 있는데 싫어!」

한편에 서서 두 사람의 회화를 듣고 있던 Y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미쓰 김은 말한다.

「참, 실례했읍니다. 소개합니다. 이분이 Y선생님, 이분이 미쓰 김, 김영순씨, 아시지요? 피차에……」

K는 이렇게 제법 인사를 시켰다.

「몰라, 몰라! 나는 저런 사람은 몰라.」

「왜 몰라요. 유명한 Y선생을 몰라요? 옛날에 같이 잡지에 글을 쓰시고 미쓰 김 젊었을 때에……」

「몰라, 몰라. 김씨, 오늘 저녁 오고루(한 턱)해.」

미쓰 김은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Y의 얼굴을 쳐다본다.

「명숙이란 계집애는 밤낮 미국 간다더니, 미국 가문 돈이 많이 생기나? 미국 사람 하구 사나봐.」

「이분도 바로 그 명숙이라는 이를 잘 아신 답니다.」

K는 Y를 가리키면서 미쓰 김을 들여다보고 옛날 기억을 끌어내 보려고 하였다.

「그분이 누군데? 그런 말 하지 말구 어서 한턱해. 김씨 코하며 눈썹하며 미남잔데. 저 사람이 김씨 고이비3도 빼앗은 사람이지?」

미쓰 김의 말은 점점 험하게 나온다. Y는 K를 재촉해서 들어가 버렸다. 들어가서도 달은 밝은데 잠은 아니 오고, 옛날 일이 하나씩 둘씩 생각한다.

《문예》잡지 할 때에 H랑 같이 찾아서 원고를 청할 때에 그 시대의 첨단을 걷던 영순이, 좋은 집에서 축음기며 기타아며 갖은 악기를 놓고 명화를 걸고 커피를 내고 맥주를 내서 권하고 자기도 마시고 명랑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일, 그런 지 몇 해 후에 해외로 다녀온 동안 M이라는 자기보다 어린 사람과 한동안 동거하다가 헤어진 뒤에 지내 던 일, 그 뒤에 떨어진 몸이 되어 카페로 다방으로 낙화생과 담배를 팔러 다니는 것을 보던 일, 그리고 옛날 동생 명숙이와 같이 다니면서 놀던 귀여운 탄실이 시절 일을 생각 하고,

(저는 일찌기 남보다 먼저 개성의 눈이 떠서 용감하게도 금제의 열매를 따먹기는 했으나, 험악한 사회의 거센 물결을 이길 길이 없어서 파선의 역경을 당한 결과 백발이 되었구나!)

하고 깊은 탄식을 하였다.

Y는 그 뒤에 구태여 영순에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도록 하려고도 하지 않고, 모른 체하고 지냈다. 한 번은 밥과 찬을 보내 봤으나, 웬일인지 받지 아니한다고 도로 가지고 온 일이 있었다.

5

Y는 한 반년 만에 본국에 갔다가 여름을 지내고 와서, 밀렸던 사무를 처리하고 급한 원고를 쓰기에 바빴다. 그래서 회관 뒤뜰 미스 김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하루는 오후에 사무실에 앉아서 오래간만에 미국 있는 동생 명숙에게서 온 편지를 받아 읽고 있는데, K가 나오라고 찾는다.

Y는 무심코 나가 보았다. K는 Y를 강당 쪽으로 끌고 가서 뒤뜰을 가리킨다. 자동차가 한 대 오고, 수선수선한다. 동네에서 구청에 말해서 미스 김을 시립 뇌병원에 데려간다는 것이다.

「아이구, 왜, 왜? 내가 어쨌다고…… 나를 어디로 가자는 거야?」

미스 김은 자동차를 두 손으로 떼밀고 안 타려고 버둥거린다.

「오바상(아주머니) ! 이런 집에서 늘 사시 겠어요? 아들이 좋은 집 얻어 놓고 모셔 간다는데 어서 가세요,그러지 말고……」

제본하는 집 일본 마누라가 이렇게 달랜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거짓말. 나를 미치광이라고 병원에 데려가는 거지 머야. 망한 것들…… 내가 왜 미쳐…… 미치긴 저회들이 미쳤지. 성한 사람을 미쳤대, 호호 호호.」

「어머니, 어서 가세요. 그런 게 아니구 무슨 병이구 다 고치는 큰 병원이랍니다. 어머니, 늘 가슴아파서 그러지요? 그리구 또 심장병이 있지 않아요? 심장병도 고치구, 자, 어서 타세요.」

아들 정일의 말이다. 일본말로 쇼오이찌4, 흑 쇼오짱이라고 부르는 아들이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차에 올라타기를 권한다.

「그럼 그렇지. 그래두 우리 아들이 바른대루 말한다. 병원이지, 병원이야. 이사는 무슨 이사. 집이 집이구 이사라면 짐도 안 싣고 그냥 가? 정일아! 그래도 웬 돈 있니? 돈 내라면 어쩔 테야?」

제법 병원에 입원하면 입원비 낼 걱정을 하는 것이다.

Y는 전화가 오고 바빠서 사무실에 들어와 있다가, 한참만에야 다시 나가 보았다. 수선 거리던 뒤뜰은 조용해졌다. K의 말에 의하면 영순은 결국 아들과 같이 차를 타고 아오야마(靑山)에 있는 시립 뇌병원으로 갔는데, 가면서 닭을 잘 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 기 집이나 닭의 우리를 몇 번 돌아보면서 차를 타고 갔다고 한다.

미스 김이라고 부르는 김영순이 떠난 다음 날, 그가 몇 해 동안 아들 정일이와 살던 집이랄까, 우리랄까 하는 것은 정일이의 손으로 헐어 버리고, 그가 가면서 간곡히 부탁한 닭들도 처분하고……아들의 손으로 회관에 신세졌다고 몇 마리 내서 학생들이 먹고, 더러 팔아먹고,청년회에서 깨끗이 소제를 시킨 뒷자리에는 혼적도 없이 말갛게 치워지고 낙엽진 은행나무잎만 딩굴고 있다.

6

영순의 아들 정일이는 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이자 닭의 우리를 제 손으로 헐고 뜯어서 이웃집.고물상에게 넘겨주고 닭 몇 마리는 팔아먹고 몇 마리는 회관에서 자취하는 사람 들에게 그동안 신세졌다고 인사 겸 선사를 하였다.

「어디 갈 데가 있소? 불쌍하니 방 하나 줍시다. 제 칠호실을 주지요.」

청년회 C총무는 이사장 대리인 Y선생보고 이렇게 의논한 결과, 삼층에 한 방을 주어 들도록 하였다. 그 대신 뒤뜰에 있는 모양 흉한 움집은 헐어 치우기로 한 것이었다.

「Y선생과 여러분이 너를 동정해서 방을 하나 주기로 했으니, 앞으로는 방세도 내고 그리구 회관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 그리구말이야, 너도 차차 나이두 먹어 가니 저렇게 병이 있는 너의 어머니도 생각하고, 네가 독립해서 살면서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도 모아야 한다. 그래가지고 장가도 가서 남과 같이 살아야 하지 않느냐. 너만 진실하게 일을 하면 딸들을 주려고 할게 아니냐.」

마음좋은 C총무는 그날 밤에 정일이를 불러 놓고 이렇게 일렀다.

「하이하이(네네).」

키가 크고 얼굴이 허여멀쑥한 정일이는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일본말로 대답을 하고 돌아서 나갔다.

정일이 어떻게 영순의 아들이 되느냐?

그것은 이 회관에서도 자세한 일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영순이 친히 낳은 것은 아니다. 영순은 한번도 제대로 생산을 해서. 길러본 일은 없었다. 늘 혼자 있기가 허전하기도 하고 외로와서, 어떤 동무의 권으로 겨우 돌이 지난 사내아기를 맡아 길렀다. 누구가 난 아긴지, 아이의 아비는 누군지, 그것도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그 비밀을 지키기로 하고 맡았다. 영순은 대강 짐작은 했지만, 구태여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또 아무에게도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어머니,아부지는 왜 없어요?」

정일이 가끔 이렇게 물어 오면,

「너의 아부지는 공부를 너무 열심으로 하다가 그만 병이 나서, 오래 않다가 죽었단다. 너는 그다지 애써서 공부하느라고 그러지 마라. 공부하다가 몸 약해지고 죽으면 쓸데 있니!」

영순은 이렇게 어름어름 대답을 해 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자기 자신이 공부를 하다가 아무 보람도 없이 고생만 하는 것이 원통하고, 제 몸이 약해서 남과 같이 씩씩하게 겨루어 나가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럭저럭 전쟁이 나서 한 몸도 살기 어려운데 어린것을 등에 업고 다니면서 고생은 많이 하였으나, 언제 안정한 생활을 못하고 더구나 남자에게 속고 버림을 받고 하는 동안 쓰라린 경험을 하기 때문에 정일이를 공부를 시키거나 따뜻한 품에서 돌보고 가르쳐 본 일은 없었다.

「그애는 목숨이 살아 온 것만 다행이야.」

이런 것이 영순이를 알고 정일이를 아는 사람이 가끔 하는 말이었다.

정일이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어머니를 그 병원으로 찾아가 보았다. 병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치료비 지불하라는 청구서가 오면 돈이 있으면 곧 가거나, 그렇지 아니하여 며칠 지체하게 되면 독촉하는 엽서가 오기 때문에, 두 번째 청구서를 받으면 일하는 제본 공장 주인에게 선불을 해 달래 가지고라도 기어이 가지고 갔다.

「닭들이 잘 있니? 잊지 말고 모이를 잘 주어라.」

정일이 가면 무엇보다도 닭의 문안부터 먼저 하는 것이었다. 정일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안되었지만, 잘 있다고 대답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서 먹으라고 백 원짜리 돈을 한 장이고 주면 웃고 좋아하면서 받고는,병원에서 고맙게 잘해 주니까 제 걱정은 말라고 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돌아서 나오곤 하였다.

오는 길에는 청년회 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근처 술집에서 술을 몇 잔 사먹고 얼근하게 취해서 허둥지둥 거리로 다니다가, 늦게야 처소에 돌아와서 쓰러져 자는 것이 비릇이었다.

7

지루한 장마가 한 달이나 끌어 가는 유월 그믐이었다. Y선생은 원고를 쓰다가 머리를 쉴겸 슬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총무 사무실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서서 수군수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보아서, 무슨 심상치 아니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Y선생의 젊은 친구 K도 서 있다.

「당초에 알 수가 없구만요. 무슨 일로 그랬는지. 우리 집에서는 그럴 일이 없는데요.」

정일이 일하는 제본 공장 마누라의 말이다.

「회관에서도 그럴 일이 있을 리가 없는 데요, 내가 모르긴 하지만.」

회관에서 소제하고 일하는 일본 노파가 걱정스러운 모양으로 하는 말이다.

「C총무두 저더러는 방을 내라지도 않았을 텐데. 글쎄 여자 관계는 아닐까?」

K가 웃으면서 던지는 말이다.

「아니, 그런 것 같지도 않은걸요. 나는 여자가 찾아다닌 것을 못 보았으니깐요.」

제본 공장 마누라의 말이다. 알고 본즉 정일이 어디서 쥐 잡는 약을 먹고 죽는다고 야단법석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생명에는 관계없으나 처치 곤란이니, 치료비를 물고 데려가라는 통지가 보호자에게 온 것이라는 것이다. 보호자는 C총무를 대고 주소는 제본 공장으로 했기 때문에 자기네게로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C총무는 지방에 출장 가고 없기 때문에 제본 공장에서 정일이를 동정하기도 하고 일이 바쁘기 때문에 사람이 아쉬워서, 주인마누라가 친히 가서(월급에서 제할 셈치고) 병원 돈을 물고 데려왔다는 말을 Y선생은 나중에 듣고, 정일이가 자살하려고 하던 까닭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정일이 자신은 일체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알 수는 없으나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제본 공장 마누라의 말에 의하면 정일은 가끔 술을 먹는다고 한다. 같이 다니는 동무도 없는 모양인데, 가끔 저보다 나이도 많고 깡패 같은 녀석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어서 돈을 쓰는 모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는 자꾸 옹색하다고 하면서 선불을 해 달라구 찾아 갔기 때문에 이달에는 별로 받을 것도 없답니다. 밥은 집에서 먹으니깐 좀 절약하면 매달 어머니한테 좀씩 갖다 드리구 돈두 모일 텐데……」

제본공장 마누라의 이런 말도 들었다. 그러니깐 돈 때문에 주인에게 언짢은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돈 때문에 그랬을까? 사나이 자식이 설마 그만 돈 때문에 죽으려고 했을까?」

Y선생은 어느 날 C총무와 같이 앉아서 이런 이야기가 나서 C총무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글쎄 나도 모르겠어요. 그놈 참 시끄러워서……」

정일이의 자살 소동은 별로 대수롭지 아니 한일인 것처럼 C총무는 말하고, 딴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Y선생의 생각에는 돈보다도 그의 고독감, 혹은 열등감이 그런 일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8

장마도 개고 더위도 지나고, 아침 저녁은 선선한 어느 날 밤이었다. Y선생은 앙드레 지이드의 《전원 교향악》을 읽다가 놓고 막 자려고 누웠다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를 듣고 귀찮은 듯이 일어나 나가 본즉, 뜻밖에도 정일이가 말도 없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면서 들어선다.

Y선생은 몇 날 전에 C총무에게 정일의 일을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반기어 악수를 해주고, 침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그러나 정일은 미안한 듯이 앉지도 아니하고 말도 아니하고 우두커니 서 있다.

「선생님, 저 신분증명 좀 해 주셔요.」

아무리 앉으라고 해도 앉지 않고 서 있다가 일본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왜? 신분증명은 무엇에 쓰게?」

Y도 일본말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아무쪼록 부탁합니다.」

묻는 말 대답은 아니하고, 이렇게 말하는 정일을 Y선생은 이윽고 바라보았다.

「C총무님더러 해 달라지, 왜 날더러 해 달라는 거야?」

「C총무님에게는 미안해서요.」

정일의 이 말을 기다릴 것 없이 Y선생은 그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C총무의 방에서 돈 몇 만원과 여러 가지 귀중한 서류가 든 손 가방을 훔쳐 갔다가, C총무가 곧 짐작을 하고 정일을 조용히 불러서 간곡히 타이르고 책망도 하고 위로도 하면서 이야기한 결과 돈은 오천 원이나 거의 소비하고 남은 것을 가져온 일이 있는데, 정일은 눈물을 홀리면서,

「돈이 급해서 그랬어요. 이제 제가 아뭏게도 벌어서 물겠어요. 어디 다른 데 취직 좀 시켜주세요. 그 집에는 월급이 적어서 그만두겠어요.」

Y선생은 이미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곧 짐작이 되었다.

「신분증명이 꼭 필요하다면야 총무님이 해 주시든지 내가 해 주든지 염려 없지만, 글쎄……」

Y선생은 다시 정일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태도를 살펴보았다.

「선생님, 저는 부끄러워요.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게 살아 무얼 하겠어요.」

정일은 Y선생의 태도를 짐작했는지 땅바닥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니야. 자네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그런 거지. 이제라두 진실하게 살아 가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Y선생은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였다.

「Y선생님, 저는 정말 믿을 데가 없어요. 저는 지금까지 사랑을 모르고 자라났어요. 어머니도 아마 저 같아서 그런 병이 생겼나봐요. 정말 어머니는 저렇구 저는 믿을 데가 없어요.」

정일의 양쪽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 진다.

「믿을 데가 없긴 무어 믿을 데가 없어! 자 네 몇 살이지? 스물 한 살? 사내가 나이 스물이 넘고 몸이 그만큼 튼튼해 가지구 믿긴 무얼 믿어. 제가 제 힘으로 살지. 허긴 자네 말이 옳아. 세상에는 믿을 데가 없는 거야. 하나님을 믿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튼튼한 몸을 주셨으니깐, 손과 발을 주시고. 그러니까 내 손과 내 발을 가지고 독립으로 살아갈 생각을 해. 무슨 고생이나 참구 마음만 바루 가지고 살면 그만이지. 세상은 아무 놈도 믿을 놈이 없어. 하나님을 믿고 저를 믿고 살면 되는 거야……」

Y선생은 처음으로 정일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벌써 그를 찾아보고 위로해 주고 지도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간절히 일러 주었다.

「선생님, 저 이제부터는 마음을 고쳐먹고 잘하겠어요. 잘 지도해 주셔요.」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씻어서 젖어 있는 정일의 커다란 손을 선생은 곽 붙잡고,

「그래 마음을 고쳐먹고 마음을 든든히 먹고 씩씩하게 살아가……자네 어머니 모르는 모양이지마는 나는 자네 어머니를 젊어서부터 잘 알아. 한고향 사람이구…… 자네가 매달 어머니한테 병원 치료비를 갖다 준다는 말을 듣고 참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했어……」

정일은 아무말도 아니하고 눈물만 홀리고 있다가 자랑인 듯 말한다.

「몇 날 전에도 가보았어요. 깨끗하게 하고 계신 걸 보니깐 제 마음도 좋던걸요. 닭이 잘 있느냐 그새 더 불었느냐고 닭 염려를 퍽 하시던걸요.」

9

크리스마스가 몇 날 남지 아니한 십이월 중순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조용하던 회관은 본국에서 영국으로, 미국으로, 석 달 동안 교육 시찰단으로 다녀온 각 대학 총장, 교수 몇 사람을 환영하는 파아티로 수선수선하였다. 파아티가 끝난 다음에 다른 손님들은 바쁘다고 먼저 가고, 그 중에 서울 S여자대학 학장 오박사는 남아서 회관 안을 한번 구경한 뒤에, C총무와 Y선생과 같이 앉아서 일본에 있는 한인 사회와 특별히 한인 학생의 형편을 물어 보고 자기가 전에 젊어서 동경에서 공부할 때에 지내던 이야기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김탄실이가 아직도 일본에 있다는데 어떻게 되었어요?」

오박사는 문득 옛친구가 생각이 난 듯이 C총무와 Y선생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묻는다. 오박사는 바로 탄실의 소학 동창 명숙이다.

「김탄실이요?」

C총무는 김탄실이가 누군지 몰라서 반문을 한다.

「참 탄실이는 애명이지. 영순이지, 김영순이라구 왜 한동안 여류 문사로 시도 쓰구 하던 사람 있지 않아요?」

「네, 압니다. 있지요.」

Y선생이 먼저 대답하고, C총무더러 눈짓을 하고 뒷마당을 가리키면서 귀에다 대고 수군수군해서 알게 하였다.

「네, 네,선생님께서 그를 아십니까?」

C총무는 회한한 듯이 묻는다.

「옳아, 옳아. 닥터 오께서 잘 아실 걸요.」

Y선생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웃는다. 오박사도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는데, 총무는 그동안 실성을 해서 뒷마당에 움집을 짓고 살던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은 정신병원에 가 있다고 하고 나서, 손님을 끌고 가서 그 자리 나마 구경을 시켰다. 오박사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어서 묻는다.

「그러면 아무도 없이 혼자 살았어요?」

C총무와 Y선생 두 사람은 번갈아 정일의 이야기를 하였다. C총무는 정일이 때문에 트러블을 많이 당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두 사람이 다 불쌍해요.」

Y선생은 지난 가을에 정일이 자기 방에 와서 울면서 이야기하던 일을 생각하고 말하였다.

「불쌍하군요. 내가 시간이 있으면 두 사람을 좀 다 찾아보고 갔으면 좋겠는데……」

「만나 보셔야 모를 겁니다. 나도 몰라보던 데요.」

Y선생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데,전화 신호가 따르르 운다. C총무는 얼른 일어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네, 네, 제가 총무올시다. 왜 그러십니까. 정일이요? 네, 네, 여기 있는 사람입니다. 왜요? 그렇습니다. 다른 관계는 없지만 내가 여기 총무인 관계로 보호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읍니다. 내가 가야 돼요? 왜요? 무슨 일이 있어요? 네? 자살이오? (C 총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뒤를 돌아본다) 언제 그랬읍니까? 어젯밤에요? 생명에는 관계없읍니까? 네, 네, 알았읍니다. 곧 가겠읍니다.」

전화를 끝내자 세 사람은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섰다가 누가 그랬는지

「어서 가 보십쇼」

하는 말이 들리고, C총무는 모자와 손가방을 들고 먼저 나가고 Y선생은 손님과 같이 뒤따라 나가서 택시를 타고 어디로인지 달려갔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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